버틀러의 중요한몸-중요개념들
버틀러의 『중요한 몸(Bodies That Matter)』 서장 다시 읽는데, 이 책 전체에서 중요한 개념들
최종덕 씀
(한철연 신유물론 분과에서 함께 읽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몸의 물질성이란?
버틀러에게 몸의 물질성은 담론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고정된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몸의 경계와 성적 차이가 언어와 사회의 규범(?)과 권력의 반복(마치 데리다의 반복 개념과 비슷함) 속에서 안정되어(좋은 것인지는 모르지만) 살고있는 물질화(materialization)의 결과다. 그렇다고 몸이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라는 뜻도 아닌데, 다음 1장에서 몸은 담론과 얽혀 있지만 담론으로 소진되지 않다는 것을 자세히 말할 것이다.
규제적 규범(regulatory norm)이란?
버틀러에서 규범은 행동 규칙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남자는 이래야 하고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규범은 이미 존재하는 남녀를 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어떤 몸을 ‘남자 혹은 여자’로 알아보게 만드는 데도 작용한다. 규범은 규제적이지만 동시에 생산적이다.
반복과 인용의 실천이란?
“남자아이”, “여자아이”, “정상적인 여성”, “정상적인 남성” 같은 규범적 구분은 규범이라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계속 반복되기 때문에 마치 자연스러운 사실처럼 굳어진진 것일 뿐이라고 버틀러는 비판한다. 그렇게 존재하던 규범을 다시 끄집어내어 사용하고 반복 사용한다. 이것이 버틀러가 강조하는 인용(citation) 개념이다. 규범은 반복적 인용되고 누적되어서 마치 자연스러운 몸처럼 보일 뿐, 실제 몸은 자연적이지 않다는 논증을 하는 버틀러의 방법론이다.
수행성(performativity)이란?
수행성은 개인이 마음먹고 어떤 젠더를 ‘연기(performance)’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썼듯이 규범을 반복하고 인용하는 행위가 반복되는 가운데, 그것이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정체성과 몸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내는 힘이다. 따라서 “나는 오늘 여성성을 선택해서 연기한다”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성 규범을 수없이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여성’, ‘남성’이라는 주체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수행(performance)은 ‘나’의 행동이며, 수행성(performativity)은 그런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반복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확신못함, 가장 흔한 용어인데,,,”
비체(abject)와 주체(subject)는 어떤 관계인가? -구성적 외부
1장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구성적 외부”에 해당. 사회가 ‘정상적인 주체’를 만들면서 다른 무엇인가를 비정상적이고 인정할 수 없는 것으로 밖으로 밀쳐낸다. 그렇게 밀려난 존재가 비체(abject)다. 비체를 배제하려는 행위들은 결국 자기들 정상적 주체의 경계를 형성하는 일이다.
비체는 단순히 주체와 무관한 외부가 아니라 주체가 주체로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구성적 외부”다. 그래서 버틀러는 어떤 몸이 ‘중요한 몸(bodies that matter)’이 되려면 어떤 몸들이 중요하지 않은 몸, 제대로 된 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몸으로 밀려났는지를 질문한다. 이 점이 버틀러의 매력이다.(내가 버틀러를 좋아하게 된 이유다.)
버틀러에게 성(sex)은 환상인가, 실재인가?
우리들이 자칫 구성주의자로만 알고 있는 버틀러도 “성은 환상일 뿐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담론 이전에 완성된 순수한 생물학적 성을 부정하는 것은 버틀러 철학에서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생물학적 성’이라고 인식하고 분류하는 것 자체가 이미 역사적, 의학적, 법적, 사회적 규범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은 실재하지만, 규범과 무관하게 미리 완성되어 있는 순수한 자연적 사실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은 규범적 실천 속에서 물질화되는 실재이다. 그래서 버틀러에게 “환상인가 실재인가?”라는 양자택일의 질문은 오해만 일으킨다.
구축주의(constructionism)는 무엇이고 버틀러는 왜 비판하는가?
전형적인 구축주의는 흔히들 말하기를, 우리 문화가 자연적 성(sex)에 담론(언어)적 의미를 부여하여 사회적 젠더(gender)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즉 자연은 수동적인 바탕이고 사회가 그 위에 의미를 새긴 것이라고 한다. 버틀러는 이런 전통적 구축주의를 비판한다.
그 순수하다는 ‘자연적 성’이 원래 무엇이고 우리는 그런 성이 자연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라는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버틀러는 ‘성’에다가 ‘남성/여성의 생물학적 성’이라고 이름붙이고 구별하는 순간 이미 언어와 규범이 작동한 결과이지 원래 자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반대로 극단적 언어 구축주의처럼 “모든 것은 언어다”라고 해서도 안 된다고 버틀러는 강조한다. 그러면 몸의 물질성이 사라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단순한 ‘구축’construction이 아니라 물질화 materialization를 강조한다. 자연의 담론화가 아니라 규범과 담론 및 권력의 반복으로 몸의 물질화 과정에 버틀러는 초점을 둔다.
수행적 발화와 ‘코드화된 발화’란?
데리다의 인용성(iterability/citationality) 개념을 버틀러는 적극 활용한다.
수행적 발화(performatative utterance)는 단순히 사실을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말함으로써 어떤 일을 실제로 수행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군중이 모인 단상에 올라 “나는 최종덕이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내가 나의 이름을 소개하는 것 말고 내가 앞으로 이런 일을 할 터이니 주목해달라는 행위성 대중 효과를 노린 것이다.(적절한 비유같지는 않지만,, 대충 이해하시리라 믿는다)
그런데 최종덕이라는 사람이 볼품없고 듣보잡인데 그가 단상에 올라간들 어느 누구가 관심인들 갖겠나,, 그의 발화가 수행적 효과를 가지려면 이미 그는 어느 정도 유명했어야했고, 또한 발언하는 태도나 내용에서 이미 사회적으로 인정된 관습과 형식을 반복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발화의 반복이 ‘코드화된 발화(coded utterance)’이다. 이미 사회적으로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반복 가능한 관습적 발화 형식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본질주의 비판
버틀러는 이런 코드화된 발화 개념을 젠더에 적용하여, 남성성이나 여성성이란 것이 처음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성 규범을 인용하고 반복하면서 구성된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그런 반복이 계속되면서 마치 (자연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본래부터 남자인 몸’, ‘본래부터 여자인 몸’이 먼저 있었던 것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이 버틀러 성-철학의 기초이다.
정말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다른 페미니즘과 달리 버틀러는 이런 생각을 여성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노예, 아이, 동물, 인종화된 타자에도 적용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버틀러에 관심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