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로 본 이규성의 소통과 혼융의 철학 2부 |
원저 : 이규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 |
실린 곳 : philonatu.com, philonatu.com |
1부에서 연결되었습니다. 쇼펜하우어로 본 이규성의 소통과 혼융의 철학 2부 서평/해설: 이규성 씀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동녘, 2016)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서평자는 이 책의 목차나 각 장의 구성과 무관하게 주제별로 서평문을 재구성했다. 서평이라기보다 "해설"의 글쓰기이다.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재구성한 해설서 차례는 아래와 같다. (각 주제별 차례를 클릭하면 일일이 페이지 넘기지 않고 해당 주제 위치로 직접 이동합니다) (분량 관계로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립니다.) <1부> 1. 이규성의 세계철학사 투영 2. 이규성이 해석한 쇼펜하우어 기초방법론 3. 쇼펜하우어의 지식론 비판과 반성 4.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차이와 소통 5. 사례: 색채론 논쟁 6. 자유와 창조에 대하여 7. 쇼펜하우어 의지 형이상학과 이규성의 확장 8. 쇼펜하우어 공생진화론을 읽는 이규성 9. 쇼펜하우어가 본 아시아 철학 10. 이규성이 바라보는 신비주의 11. 인간, 양극성과 숭고성 <2부> 12. 예술, 음악에 대하여 13. 쇼펜하우어의 비역사성 14. 이규성이 해석한 니체와 러셀 15. 이규성이 희망한 생명 16. 이규성이 말하는 소통과 혼융의 철학 원저자 이규성(1952-2021), 2018년 중국 여행에서 진보성 교수(방송대) 촬영 12. 예술, 음악에 대하여 예술은 이데아에 대한 관조라고 하며 이데아는 의지의 직접 발현이다. 다시 말해서 쇼펜하우어의 예술적 인식은 지성의 순수화이며 순수화를 통해 사물의 형상Idee을 정관하는 것이라고 한다(1077) “정신은 볼 수 없는 자연이며, 자연은 볼 수 있는 정신이다”(935)라는 쉘링의 표현은 자연이 정신적 의지의 산물로서 자연의 능산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936) 인간과 자연은 그 내적 본성에서 같다고 하는 쉘리에서 인간활동의 최고봉은 창조적 예술이며 예술은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보는 것이라고 쇼펜하우어 철학자 브라이언 매기의 표현을 이규성은 적극 호응한다.(936) 예술은 예지계인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는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은 예술에서 대중성을 용납하지 않았다.(829) 그는 어리석은 대중들이 예지계를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 듯하다. 쇼펜하우어의 이런 인간본성론에 대한 이규성의 비판은 이 책 전체롤 통해 날카롭게 비판되고 있다. 한편 예술의 목적은 이념의 파악과 전달에 있다는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에 대하여 이규성은 긍정적으로 파악한다.(832) 예술은 그 자체로 개념을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문자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지식은 개념에 빠질 수 있지만 자연조율의 보편언어를 사용하는 음악 등의 예술은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삶과 우주의 이념을 전달하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같은 문자라도 사변 지식과 소설은 다르다. 지식으로서 형이상학은 개념에 매몰되어 삶의 구체적 의미를 놓칠 수 있지만 예술로서 소설은 삶의 내적 의미를 향한 정신적 성장을 추구할 수 있다고 이규성은 말한다.(833) 예를 들어 음악은 현상계 속의 어떤 것을 재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지계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834) 즉 음악은 예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언어로서 하나의 ‘보편언어’이다. 물론 음악도 다른 장르처럼 세계를 모사하지만 ‘더 강하고 더 확실하다’(834) “음악은 세계 그 자체이며 다양하게 현상하여 개체의 세계로 되는 이념과 같다”는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이규성은 선명하게 설명해준다.(834) 나아가 사변적인 형이상학의 글쓰기와 다르게 음악을 작곡한다는 것은 추상화된 철학이나 형이상학을 새롭게 구체적으로 실재화하는 작업에 해당한다고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구절을 이규성은 더 강조한다.(834; Die Welt. S.353-360) 이규성은 쇼펜하우어에서 벗어나 플라톤의 음악론을 끼어 설명한다. 플라톤에서 음악은 “영혼이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우라고 한다. 그것을 모방하여 만들어낸 선율의 운동이 음악이다”. (Platon, Laws 8, 812c) 여기서 선율은 인간이 조작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에 내재된 아름다움의 실재를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 선율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찾아지는 것이다. 이규성은 이에 대한 반론을 의식했는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을 덧붙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듬과 선율로 된 소리에 불과한 음악이 어찌하여 마음의 상태와 비슷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Aristoteles, Ploblemata, C.19) 음악의 선율과 리듬을 우리 개인 개인이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아름다움의 이념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이념을 드러내는 것이 음악인데, 그만큼 음악은 사물의 심장을 제공한다. 음악은 현상을 묘사하는 것을 벗어나서 모든 것이 의존하는 가장 진지한 것Allerernsteste을 찾아간다. 그래서 음악은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함Innige을 담고 있다. 그윽함이란 논리적으로 혹은 지성적으로 사변을 의도한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으며, 현상 이면의 실재를 호흡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날 뿐이다. 음악은 “자기가 철학하는 것을 모르는 정신의 숨은 형이상학 연습이다”라는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이규성이 대신 쓴다.(836) 1854년 바그너는 자신의 <니벨룽겐의 반지> 사본을 쇼펜하우어에게 선물했으나 응답이 없었던 사실을 이규성은 재조명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쇼펜하우어가 바그너의 작품에서 보인 의지의 실현을 시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이규성은 쓰고 있다.(842)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을 여러 번 읽었다고 하는데 바그너의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도 쇼펜하우어의 이념을 각색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바그너는 쇼펜하우어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가 바그너에 대해 냉담했던 이유는 바그너 스스로 자신의 음악 작업에 사변적인 명분을 너무 크게 갖다 붙였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어쨌든 나중에는 바그너가 쇼펜하우어보다 더 유명해지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도 따라서 유행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점도 사실인 것 같다.(843) 쇼펜하우어에서 음악은 존재의 궁극적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규성은 말한다.(936) 음악을 통해서 소우주로서 인간은 대우주를 통찰하는 신비주의적 직관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신비주의적 직관은 쇼펜하우어에게 세계의 의미를 통찰하는 지혜라고 한다.(936) 개체에서 대자연으로 혹은 소우주에서 대우주로 가는 통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음악도 숭고함을 얻는 도구로 될 수 있다고 본다. 이규성은 후기 낭만파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를 언급하는 폭넓은 견해를 제시했다. 말러는 중국의 시(이백, 왕유, 도연명, 맹호연)에 의거해서 교향악을 작곡했는데, 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적 통로와 비슷한 경로를 보인다고 이규성은 말한다.(855)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악 <대지의 노래>는 중국의 안빈낙도의 시풍을 담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 아마 사변과 논리가 아닌 삶의 자족적 안정성이 생명윤리의 기초라는 이규성의 혜안이 말러와 중국 시풍 그리고 붓다와 쇼펜하우어를 연결시킨 듯하다. 베르그송에서도 생명의 질서를 음악에 비유하는데 청각적 비유로 그 질서의 흐름을 설명한다. 영원한 생명과 시간의 결합은 조화의 음악에 비유된다고 이규성은 쓰고 있다. 쇼펜하우어 음악 이론에는 조화론만이 아니라 부조화도 있다. 음악은 형이상학적 의지의 직접 표현하기도 하지만 오류의 원천인 현상계의 의지를 이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현상계의 의지를 나쁜 오류로 보는 관점을 제거함으로써 음악의 부조화를 조화로 바꾸도록 하자는 것이 이규성의 생각이다.(939) 그래서 이규성은 말러를 끌여들인 듯하다. 말러는 쇼펜하우어의 화성 음악론에 만족하지 않고 사회적 고통의 의미를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내면의 의미에 외면의 의미를 보태야만 완성된 음악이 탄생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조화에 부조화와 無調의 음악이 말러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점을 이규성은 매우 높게 평가한다. 이규성이 쓰기를, “이것은 고통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감수성을 통해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을 극복한 한 사례”라고 했는데,(1078) 이는 이규성의 천재적 투사력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한다. 처음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13. 쇼펜하우어의 비역사성 독일의 사회철학자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1895-1973)는 자신의 저서 <쇼펜하우어와 사회>(1955)에서 역사의 진보라는 이름으로나 혹은 민족이나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사회악을 신성시하거나 영광화glorification하는 위험을 경고한 쇼펜하우어의 탈권력적 세계상을 적극 옹호했다.(880-2) 쇼펜하우어의 탈권력적 성향은 이런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다른 한편 사회권력의 부정성에 대하여도 눈을 감아버리는 부정적 의미를 같이 갖고 있다. 이규성은 쇼펜하우어의 철학 일반을 높이 사면서도 쇼펜하우어의 비사회성, 비역사성에 대하여 강한 비판을 한다. 칸트는 뉴턴 물리학을 우연이 개입될 수 없는 확실성의 지식이라고 보았다. 과학적 지식은 귀납의 결과가 아니라 선험성의 결과라고 쇼펜하우어는 보았다. 선험적 조건의 틀로서 오성의 범주가 과학지식이다. 과학은 절대적 선험적 지식으로서 시간에 무관한 비역사성으로 간주한 것이 칸트의 과학론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과학론을 계승하는데, 이점이 쇼펜하우어 지식론의 단점이기도 하다. 물리과학에서 대칭적 가역성이란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 인과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자연의 구조를 말하는데, 이런 생각은 칸트에서 선험적 과학지식이 대칭적 가역성이라고 했으며 쇼펜하우어도 칸트의 이런 생각을 따랐다는 뜻이다. 이런 선험주의 지식론의 시간가역성과 가치중립성을 쇼펜하우어는 충실히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경험에 앞선 선험의 범주 틀에 의해 인간과 세계의 지적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쇼펜하우어의 지식론을 이규성은 옳은 것으로 판단하지만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믿음 안에 꼭 갇혀있었다고 비판한다.(925-6) 쇼펜하우어는 생계유지 수단으로 철학 교수를 하는 사람들의 철학을 강단철학이라고 하여 비난했다. 쇼펜하우어 자신은 부유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덕분으로 한 평생 공부만 한 철학자로서 바로 그런 철학만이 비판철학으로 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규성은 금리 생활자로 여유있게 생활하며 현실의 고난을 받는 이들의 아픔을 모른 채 생활했던 쇼펜하우어의 금수저 인생을 비판한다.(387)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에서 결핍된 비판적 사회의식, 사회-역사적 경험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냉담을 이규성은 비판한다. 한편 쇼펜하우어가 구분했던 강단철학Katheder Philosophie과 비판철학 유형 중에서 비판철학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관심은(390) 아시아 철학의 관심과 맞아떨어졌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가 붓다의 중도, 바그바드기타의 의지의 측면을 간파했으나, 이규성은 쇼펜하우어가 그 안에 담겨진 사회적 투쟁성이나 역사적 다양성을 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22-23) 여기서 역사적 다양성이란 정과 동, 내적 평정과 활동성의 결합체를 말한다. 정치사회적 제도의 변천을 보지 못했고 개개의 소유관계인 개인주의 이데올로기를 초역사성의 원리로 설정한 이론과 계약에 의한 국가형성 이론, 이 두 가지 이론은 비역사적 사고의 전형이라고 이규성은 강하게 비판한다. 현실의 소유관과 초인의 무소유 즉 시민과 성인의 이원적 구조에서 쇼펜하우어는 시민적 역사성을 놓치고 있다고 이규성은 파악한다(927) 자칫 예술을 이념 안으로 구속하는 억압적 태도 혹은 평화의 의미를 신비화하여 행동이 아닌 개념으로 축소하는 것도 쇼펜하우어의 비역사성에 기여했다고 이규성은 설명한다. 예를 들어 조화로운 화성和聲에 집착한 나머지 사회적 고통을 간과했다고 이규성은 쇼펜하우어의 비역사성을 비판한다. 처음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14. 이규성이 해석한 니체와 러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는 <쇼펜하우어에 대하여>(1865)와 <반시대적 고찰>(1876)에서 쇼펜하우어의 자잘한 오류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를 근대문화의 진정한 교육자이자 영웅이며 천재라고 높이 평가했다(931) 니체는 귀족 강자를 선호하는 귀족주의자로서 민주주의와 노동조합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니체에서 동정sympathy의 의미를 찾을 수 없으며 오로지 정복의 윤리만이 니체 철학의 중심이었으며 서구 근대사의 중심사라고 이규성은 말한다. 이런 정복의 윤리는 보편적 사랑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강자라고 하는 그들조차도 중상모략하고 겁쟁이임을 보여준 것이 현실이라고 이규성은 말한다. 정복의 윤리가 아닌 동정의 윤리 혹은 공감의 윤리가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준다고 이규성은 말한다.(973) 우리는 보통 니체를 생의 철학자로 알고 있고 버틀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을 대표적인 과학실증주의자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규성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러셀을 재해석한다. 러셀은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지만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지속적으로 갖고 있었다. 당시 서구사회가 안고 있는 무수한 문명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러셀은 중국을 대안적 통로로서 바라보았다. 이규성은 러셀의 이런 아시안적 대안을 호평한다. 러셀은 수학과 과학의 확실성을 신뢰한 철학자였지만 이규성은 러셀을 단순한 과학주의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러셀이 말하는 과학은 반성이 있는 과학이었으며 구름잡는 형이상학에 대한 대안으로서 경험주의 과학이었기 때문이다.(974) 물론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는 러셀의 경험주의 태도를 “행간에 숨겨진 지적 기만”이라고 표현했다.(975; Schilpp 편, <러셀의 철학> 중에서) 그러나 러셀 자신은 서구문명의 타락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한 시도였다. 당대 서양근대문명의 문제점들을 서양 안에서 해결할 수 없고 동양의 노장자 철학에서 혹은 붓다의 철학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러셀의 1922년 작품 <중국의 문제>The Problem of China에서 보듯, 러셀의 지식론은 단지 과학적 지식 안에 갇혀있지 않으며 삶의 의미를 갈구하는 생의 노력에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규성은 이런 러셀의 숨겨진 의미를 파악했다.(979)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버틀런드 러셀의 아시안적 대안을 쇼펜하우어 철학의 비역사성에 대한 대안으로 연결될 수 있다고 한다. 특히 철학은 과학과의 상보적 연관을 거부할 수 없다고 이규성은 말한다. 과학조차도 인간의 삶을 반성하는 모럴리스트가 희망하는 가치의 절박성을 수용해야 한다고 이규성은 힘주어 말한다.(987) 이 부분에서 우리는 형이상학과 과학 사이를 건너지르는 이규성의 해박한 지식과 절실한 통찰력을 진정으로 우러러보게 되었다. 처음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15. 이규성이 희망한 생명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생명원리는 예술가의 유희처럼 삼라만상으로 자신을 발현한다. 생명은 우주 안에서 간격 없는 연속적 소통으로 작용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간격 없다’는 뜻은 서로가 서로에게 접속되어 있다는 것으로 우주를 채우는 허공 혹은 진공마저도 생명으로 가득 차있다는 시적 표현이다. 겉으로는 간격이 떨어져 무관해보이므로 서로 충돌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떨어진 간격이 없어서 서로에게 충돌이 없으며 갈등도 없다는 뜻이다. 상자 안에 유리병들을 상상해보자. 유리병들이 서로 떨어진 상태로 상자를 운송하면 아마 유리병들은 서로 부딪혀 깨지고 말 것이다. 유리병들 사이를 솜이나 종이로 꽉채우거나 유리병들이 서로 꽉 맞닿아있다면 충돌 없이 깨지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모든 형태는 ‘간격 있는’ 현상으로는 갈등하지만 ‘간격 없는’ 본질에서는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이규성의 강한 화법이다. 우연으로 보이는 창조적 새로움도 이런 간격 없는 하나의 우주 안에서 잉태될 수 있다고 이규성은 말한다.(989) 이점에서 “형이상학은 우주적 생명성에 일치하려는 방편이라고 이규성은 표현한다.(989) 소통과 연대 없는 세계는 불구라는 쇼펜하우어의 생명론을 이규성 방식대로 표현한 것이다.(990) 소통과 연대 없는 불구의 하나로서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권력욕망과 부의 욕망을 들고 있다. 그런 인간의 욕망은 곤충이나 동물의 위계성과 비슷하여 결국 생물학적 퇴행으로 혹은 생명의 후진과 같다고 했다.(1045) 간격 없는 우주는 조선 실학자 박지원과 홍대용의 무한우주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이규성은 말한다. 중심과 변두리 혹은 중심과 주변이 따로 있지 않은 우주가 곧 박지원이 말하는 우주이며, 모든 주변이 중심인 평등한 우주임을 설명해준다. 천문을 통해 평등성의 세상을 엿보았던 홍대용도 마찬가지다. 홍대용은 격물치지론이라는 이름으로 서구과학을 수용하지만 초월적 서구신학을 경계했다. 장자의 우주무한론과 묵자의 평등론(제물론)을 포용하면서도 동시에 사공학파의 경세론과 후생학에 눈을 뜬 것도 매우 독특하다고 한다. 이규성이 홍대용과 박지원을 거론하는 이유는 쇼펜하우어에 결핍된 역사성의 대안의 하나로서 그들 조선실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박지원과 홍대용 등의 조선 실학에 영향을 준 명나라 후기 서광계(1562-1633)를 자세히 소개한다. 서광계는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와 지식의 깊은 인연을 맺었다. 리치로부터 습득한 서구과학 중에서 이규성은 철학이 있는 과학의 범례로서 서광계의 격물궁리학 즉 기하학을 설명한다. 서광계는 동시대 철학자 이탁오(1527-1602)를 리치에 소개도 한다. 이탁오는 양명학의 기운을 갖고 있는 철학자로서 良知를 본성에서 기인한 창발적 生機로 구조화시켰다. 이탁오의 유명한 童心論에서 말하는 동심은 절거순진한 마음으로 거짓 없는 진실성이라고 이규성은 풀이한다. 동심은 赤子之心이라고 태어날 때부터 가진 마음인데, 언어가 아닌 원초의 본래심으로 길가 지나가는 누구나 갖고 있지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 이규성은 이런 동심의 양지가 사람마다의 마음에 이미 구비되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우주에 편재하는 생명의 마음이라고 표현한다.(1050) 이 표현은 단순한 어구 표현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라는 동일성은 우주라는 동일성에 포섭되거나 아니면 동등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의미이다. 이규성은 이탁오와 쇼펜하우어의 유사성을 찾았으며, 그 유사성이란 개방적 세계관에 있다.(1073) 이와 관련하여 이규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류와 생명체 모두의 운명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포괄적 관심과 타문화를 포용하는 전지구적 시계가 갖는 쇼펜하우어의 寬仁 정신을 존중해 동서가 공유하는 주제의 의미를 적극 개진하여 철학의 전망으로 제시했다”.(1077) 이규성의 독특성은 둘 사이의 유사성만 본 것이 아니라 쇼펜하우어의 비역사성을 대신하는 생명철학을 아시아의 이탁오에서 되물려 찾고 싶어 했다는 데 있다. 처음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16. 이규성이 말하는 소통과 혼융의 철학 이규성이 본 쇼펜하우어 철학을 명제 형식으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① 과학과 철학 자체의 반성을 통한 진정한 철학의 방향 모색이다. ② 이 책은 철학사 책이다. 논리학과 존재론을 혼동하여 서로를 잘못 일치시키는 사변철학을 거부하는 것이 쇼펜하우어 철학의 시동선이다. ③ 우주에는 중심이 없고 생명진화의 우연성을 말함으로써 기존 위계질서기반의 수직적 형이상학을 거부하며 목적 없는 무한 우주론을 전개한다. ④ 쇼펜하우어 철학의 중심개념인 자유는 실체의 속성이나 상태가 아니라, 관계적 활동의 원리이다.(1091) ⑤ 자유는 자아실체가 점으로 수축하여 우주에 발산하여 관계를 만들어가는 힘이다.(1091) ⑥ 절대적 자아나 주관성을 만들지 않는다. ⑦ 세계 안쪽에서 주관을 이해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깨닫는 접근법이 의지 형이상학이다 ⑧ 서양 중심 철학사를 자각적으로 비판하며 동양사상과의 혼융이 필요하다. ⑨ 우주적 연대성을 기반으로 생태주의 생명진화론을 전개한다. ⑩ 도덕적 형식주의 대신에 모든 과학과 철학에 도덕주의가 내재되어 있음을 말한다. ⑪ 계몽주의 중심의 지나친 과학주의를 경계한다. 철학에서 삶의 의미 문제를 중심에 둔다. 형이상학과 과학은 논리적으로 무의미이다. 반면 영원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초인의 태도는 명제로 표현할 수 없는 궁극의 의미이다. 이규성은 이런 무의미와 의미를 둘 다 버리지 않으며 오히려 그 둘 사이의 대립을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진정성이라고 말한다.(943) 이를 위한 철학적 태도는 근거없는 낙관론을 경계하며 우주의 무한성과 인류 사이의 관계를 정립하는 존재-인식의 태도를 유지하는 데 있다고 이규성은 말한다.(946) 낙관주의는 거짓과 탐욕을 숨기는 전략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73) 철학의 과제는 권력지식에 저항하며 사변신학을 논파하며 논리에 갇힌 과학주의를 거부하며 국가지향윤리를 비판하는 데 있다고 이규성은 강조한다. 이를 메타철학의 반철학이라고 한다. 메타철학이란 논리적인과 실재적인 것을 구분하여 과학과 형이상학의 대화를 추구하며 궁극으로 생의 의미 문제를 다루면서 내적 경험의 철학적 이해와 해석을 하는 데 있다. 철학이란 지식의 주관과 객관 사이를 오고가는 시계추이며 독단주의에서 회의주의로 그리고 비판주의에서 선험철학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이규성은 말한다. 언어로 표현되어야 할 철학은 언어로 표현되기 어려운 신비주의 안으로 들어가기 어렵다. 철학은 곁눈질로 비밀의 나침판을 보는 것과 같다고 이규성은 표현한다.(947-8) 그만큼 철학의 과제는 힘들다는 뜻이다. 이규성이 본 진정한 철학자는 자신의 주/객관적 경험을 성찰적으로 반성하며, 언어적 제약을 과감히 탈출하여 비언어적 존재와 인간의 삶을 근거하여 세계를 표현하며, 자기생존과 이익에 관심을 줄여서 주체적 삶을 지향하여 자기를 통해서 타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는 사람이라고 한다.(76) 철학자는 과학에 대하여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어서만은 안 된다고 이규성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철학은 과학의 선험적 구성주의를 파악할 수 있어서 과학의 우상화를 방지해준다. 철학은 과학이 전체가 아니라 삶의 한 방식임을 알게 해준다. 철학은 과학에서 벗어나 혹은 넘어서서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세계로 이행한다”.(793) 인식의 폭을 예술과 우주를 포괄하는 인식으로 확장했다는 것은 쇼펜하우어 지식론의 큰 성과라고 이규성은 판단한다. 그리고 아시아 철학에서 “무”의 원리는 쇼펜하우어가 가장 높이 평가했던 자유의 원리 그 자체라고 이규성은 생각한다. 니체는 무를 악마적 파괴의 원리로 보았는데, 이는 무에 대한 두려움의 반증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이규성은 해석한다.(934) 니체가 그러했듯이 서구인들은 무Nichts에 대하여 부정적이었고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에서 촉발된 무의 이해는 전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제공했다. 이규성은 더 나아가 폐쇄적 윤리의 배타성을 용해시키는 창조적 생산력이 바로 무라고 무를 확장하여 해석했다. 배제와 차별의 적대적 부정성을 넘어서 경계 없는 평등의 원천이 무라고 했다.(1078) 무는 오히려 배타적인 것들을 하나로 담아내는 혼융의 그릇이라는 점을 이규성은 강조한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예술, 물리와 생물, 언어와 반언어, 이기주의와 숭고감, 그리고 색채론 논쟁에서 보았듯이 입자와 파동을 하나로 담아낼 수 있는 혼융의 철학이다. 쇼펜하우어 당대 입장에서 그 철학의 가장 특이한 점은 신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모든 것의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는 데 있다. 쇼펜하우어에서 세계는 ‘하나이자 모든 것‘이지만 모든 것이 신God은 아니라고 이규성은 역설한다(1092) 이규성의 혼융 개념은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혼융되지 못한 이질성들은 진리를 숨긴다. 혼융된 소통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끈다. 이규성은 자기 자신을 말하듯 쇼펜하우어의 유고(1804-1811, Initial Sheets 1-8)에서 의지의 자기부정성을 따르는 철학의 길을 아래처럼 묘사했다. “날카로운 돌들과 가시덤불로 덮힌 가파른 길을 통해서만이 도달되는 높은 산길”에 비유된다. “외지고 황폐하기조차 하지만 보다 더 높이 올라간다. 그는 이따금 절벽에 이르러 아래를 현기증과 함께 내려다보지만, 바위에 힘껏 의존하고서 보면 메마른 황무지들은 사라지고, 늪과 울퉁불퉁한 곳들은 평평하며 거슬리는 소음들은 들리지 않는다”.(1096) 이규성은 이 글을 인용하면서 이 묘사가 자신의 철학의 길이었음을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다. 세계의 원융함을 깨달은 철학자는 대부분 그런 가시덤불과 절벽과 황무지를 거쳤기 때문이다. 평정의 깨달음으로 이규성은 자유를 예지했다. <끝> 처음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이규성의 다른 책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2012)에 대한 서평자의 서평문도도 올려 졌으니 이를 같이 읽어도 좋습니다.(여기 클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