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로 본 이규성의 소통과 혼융의 철학 1부
원저 : 이규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
실린 곳 : philonatu.com, philonatu.com
책표지


해설/서평: 이규성 씀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2016)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1부

1. 이규성의 세계철학사 투영

이규성의 책,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동녘, 2016)은 1,100쪽이나 되는 대작인데, 그 큰 책을 읽느라 80여 일이 걸렸다.

1장 경험과 미래의 철학,
2장 단 하나의 사상과 발현의 세계,
3장 형이상학의 전복과 가능성 및 과학,
4장 색채론과 치유,
5장 비판철학과 예지적 생명원리,
6장 세계론과 시간론,
7장 아시아 철학과 선험적 구성론,
8장 시민성과 정치론,
9장 과학과 우주적 소통성, 이렇게 모두 9 개 장으로 구성되었으며 개별 장이 한 권의 책으로도 손색없을 정도이다.

서평자는 이 책의 목차나 각 장의 구성과 무관하게 주제별로 서평문을 재구성했다. 서평이라기보다 해설의 글쓰기가 맞다. 그렇게 주제에 따라 분류하고 재구성한 해설서 차례는 아래와 같다.

(각 주제별 차례를 클릭하면 일일이 페이지 넘기지 않고 해당 주제 위치로 직접 이동합니다)

1. 이규성의 세계철학사 투영
2. 이규성이 해석한 쇼펜하우어 기초방법론
3. 쇼펜하우어의 지식론 비판과 반성
4.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차이와 소통
5. 사례: 색채론 논쟁
6. 자유와 창조에 대하여
7. 쇼펜하우어 의지 형이상학과 이규성의 확장
8. 쇼펜하우어 공생진화론을 읽는 이규성
9. 쇼펜하우어가 본 아시아 철학
10. 이규성이 바라보는 신비주의
11. 인간, 양극성과 숭고성
12. 예술, 음악에 대하여
13. 쇼펜하우어의 비역사성
14. 이규성이 해석한 니체와 러셀
15. 이규성이 희망한 생명
16. 이규성이 말하는 소통과 혼융의 철학

이규성작가의 사진
2018년 중국 여행에서 저자 이규성(1952-2021), 진보성 교수(방송대) 촬영



책을 읽으면서 책의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이규성의 학문적 거대함과 철학적 고뇌의 압축성이 나를 압도했다.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1788-1860)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서로만 알았는데, 쇼펜하우어 전반에 걸친 학문사와 당시 근대과학과 전통 형이상학과 신학과의 인식론적 갈등 및 쇼펜하우어 철학과 동양 수양론 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포괄적으로 담아내어 이규성 자신의 목소리를 악보에 옮기듯 쓴 그만의 책이었다. 이규성(1952-2021)은 동양철학 전공자라는 지식인 딱지에 억눌리지 않고 동서고금은 물론이고 철학과 역사, 과학과 예술을 거쳐 윤리와 우주를 관통하는 혼융의 철학을 지었다.

이규성은 쇼펜하우어에서 채울 수 없는 의지에의 갈망을 동서고금의 철학적 논의들을 수렴하여 이규성의 고유한 방식으로 발산한다. 고대 플라톤에서 현대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붓다에서 뉴턴과학과 현대생물학에 이르기까지 언어를 사용한 모든 철학적 논변들을 이규성의 삶의 렌즈를 통해 투영시킨다. 그의 고뇌를 거쳐 간 철학적 사유들을 자신의 시선으로 얽어내고 자신의 심장으로 엮어낸 세계철학의 그물망이 이 책이다.

이 책에서 이규성은 쇼펜하우어를 통해서 서양과 동양, 형이상학과 근대과학, 사변신학과 그리스철학, 현대와 고전, 예술과 윤리라는 철학사의 그물망을 촘촘히 엮고 있다. 그런 그물망 위에 생의 본질과 불교, 라이프니츠와 주자학, 맹자와 스피노자, 비트겐슈타인과 언어철학, 진화론과 목적론, 뉴턴과 괴테 등 그 사이의 혼융된 노드nodes들을 도드라지게 맺고 있다. 그의 그물망은 언어의 형식과 논리에 빠진 허공으로 내쳐지지 않으며 삶의 의미와 의지를 포획하는 구체적인 향방으로 투기되었다.

2. 이규성이 해석한 쇼펜하우어 기초방법론

이 책은 기초는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1818/1844)에서 출발한다. 쇼펜하우어 책제목에서 보이듯 표상으로서 세계는 논리적으로 해석된 세계이며, 의지로서 세계는 생의 의미를 깨달아 도덕으로 해석된 세계이다.(20) 쇼펜하우어가 첫째로 문제 삼은 지점은 표상의 세계를 마치 의지의 세계인 양 오해한 기존의 형이상학과 과학에 있다. 그런 오해는 대체로 언어 제한 때문에 온 것이라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부터 서구 전통의 신학적 존재론과 신정론적 사고 및 근대 뉴튼과학 이후 형성된 과학주의를 비판하며 그런 비판의 논거로서 언어의 한계를 지적한다. 즉 유대-기독교의 낙관적 사변철학이나 뉴튼과학을 형식과 내용 혹은 논리와 실재를 혼동한 오류의 소산물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논증을 분석한다.(30)

쇼펜하우어사진

이규성이 쇼펜하우어에 공감하는 가장 기초적인 태도는 문명인이 갖는 언어의 한계와 오류를 제시하고 그런 언어한계를 넘어선 철학을 구하려는 방법론에 있다. 이규성의 이 책도 언어 한계를 안타까워하며, 언어오류의 두 사례를 보여주는 쇼펜하우어의 구조를 서술한다.(6) 첫째 쇼펜하우어가 비판한 뉴튼 과학의 문제들을 설명한다. 과학지식은 주관의 논리적 형식이 투영된 것이므로 실재의 객관적 구조를 반영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13) 둘째 쇼펜하우어의 신학 비판이다. 신학적 사변이성은 자신의 논리적 형식으로 실재의 신성한 구조를 인식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런 방법론에서 쇼펜하우어는 표상에서 의지로 넘어선 세계관을 어떻게 확보하는 지를 말하고 있다. 의지의 세계란 표상을 넘어서면서도 표상과 밀접한 예술과 윤리를 포괄하는 예지계의 소산물이다. 의지의 세계는 스스로는 간단하지만 형태의 차이를 생산하는 원리이다. 나아가 무형의 생명원리를 뿜어내는 원천이라고 설명해준다. 예지계는 우주적 소통의 방식이다. 이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철학을 아시아 철학에 연결시켰는데, 이규성은 이런 쇼펜하우어의 예지계를 객관적 세계와 주체적 윤리를 연결하는 단서로 재해석한다. 세계 안에 이미 윤리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 즉 윤리는 세계의 선험적 조건이므로 과학처럼 대상화할 수 없다는 쇼펜하우어의 문장들을 아주 쉽게 해명해주고 있다.(18)

전체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3. 쇼펜하우어의 지식론 비판과 반성

쇼펜하우어 자신의 논문 <충족이유율>에서 과학의 메타논리적 형식을 보여주는 것aufzuweisen을 지식론의 사명이라고 했는데, 거꾸로 말해서 과학의 논리적 형식을 드러냄이란 과학 지식의 한계를 보여준 것과 같다고 이규성은 분석했다.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 서문에서 19세기 독일의 과학론wissenschaftlehre이 언급된다. 동시대인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는 전통 인식론에 새로운 과학지식의 방법론과 인식론을 정규화시킨 과학론을 중요한 인식론적 변화로 생각했다. 이런 피히테의 확장된 지식론은 당시 인류지성에 독립성과 능동성이 부여된 것으로 사람들에게 여겨졌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새로운 과학지식을 통한 지성의 독립성과 능동성이라는 인간의 우월감은 철학자의 자만일 뿐이라고 꼬집는다. 철학자의 자만은 역설적이게도 철학을 통해서 치료될 수 있다. 철학은 지식론을 통하여 과학의 본성을 반성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6)

원저사진

이규성은 과학의 우월감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과학과 새로운 형이상학이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쇼펜하우어는 과학과 철학이 연속적이지는 않지만 서로에게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32) 즉 그는 계몽주의 뉴튼주의를 비판했지만 다른 낭만주의와 달리 과학과 철학의 병행가능성을 강조했다.(30) 예를 들어 프랑스 당시 생리심리학을 자신의 철학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과학지식으로 간주했다. 쇼펜하우어는 과학이 인간을 벗어나 경험주의 독단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이해하는 과학을 알기 위하여 쇼펜하우어의 박사학위논문- 충족이유율의 4겹의 뿌리에 대하여 (1813)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규성은 말한다. 이 논문은 과학의 유형과 과학적 발견의 논리를 다룬 것이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과학 안에 페쇄되지 않고 다른 차원의 가치와 만나는 경계선 경험을 중시한다.(43) 과학적 지성과 시적 지성의 조화를 요청했으며,(48) 신학이나 철학이나 과학에 관계없이 의지와 윤리의 관점이 상실되어서는 무의미하다고까지 보았다. 단지 과학의 성과를 존중하면서도 과학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표상으로서 세계가 의미의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5)

이와 관련하여 이규성은 쇼펜하우어의 지식론을 자아와 세계라는 관계의 관점에서 해석한 독일 관념론 철학자 재너웨이Christopher Janaway의 글들을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해준다. 첫째 쇼펜하우어에 의해 해석된 경험 세계는 환상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굳이 회의적일 필요 없으며, 시공간 실재계는 마음 의존적이어서 주관에 존재하는 표상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물론 세계는 표상으로 구성된 것 이상으로 넓으며 제약되지 않는다. 세계는 물자체인 의지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상 없이 의지가 존재할 수 있지만, 표상은 의지 없이 존재하지 못하며, 표상의 세계는 상식계이며 과학인식의 총체라는 점이다.(132-3)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지식론은 근대와 현대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 있다고 한다. 그 근거로서 영국경험론의 방법론을 쇼펜하우어는 수용했다고 이규성은 말한다.(202) 현상 세계는 자신의 ‘의미’에 대한 해독을 기다리는 암호라는 표현은 수긍이 된다.(204) 과학탐구의 대상도 ‘자연의 껍질’Schale der Natur이면 충분할 뿐이라고 본 것이 영국 경험론 철학자들의 기본적인 태도이기 때문이다.(204) 과학적 태도는 자연주의의 세속주의에 따라 외향적인 객관 태도를 유지하는 가운데사건들의 인과관계를 구성한다.(204)

쇼펜하우어의 기본입장은 주관 없는 객관이 없다는 데 있다. 즉 과학적 세계가 그 자체로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주관의 문을 거쳐나온 결과라는 데 있다. 이점은 당대 유물론적 태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물론의 객관주의는 인식능력의 이율배반에 빠져있다는 이규성의 지적은 분명하다.(208) 쇼펜하우어의 유물론 비판이 과학에 대한 무조건 비판임이 아니라는 점을 이규성은 재확인한다.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유물론 비판의 기저는 자신의 선험적 관념론인데, 자신의 선험적 관념론이 겉으로 드러난 철학을 그는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아시아의 인도철학과 불교에서 보았다. 결국 쇼펜하우어에서 선험적 관념론은 초월적 깨달음의 지혜에 진입하는 사다리인 셈이다. 그만큼 쇼펜하우어에서 세계보다 삶의 도덕이 중요하다고 이규성은 재차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에서 객관세계에 머물는 것은 결국 의미없는 세계에 안주하는 것과 같다. 과학의 객관적 세계에서 물자체의 의미를 찾는 일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과제라고 이규성은 해석한다. 맞다. 물자체는 물질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의지이다. 물질은 의지가 가시화된 것일 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놓치면 쇼펜하우어 철학을 이해하기에 더 깊은 수렁과 미궁에 빠질 수 있다.(208) 물질은 의지가 원천이고 그로부터 생성된 발현이라는 점을 이규성은 반복하여 설명한다.(213)

전체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4. 형이상학과 자연과학: 차이와 소통

쇼펜하우어에서 주관은 세계 안에 배치되며 따라서 우리는 주관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학적 인식은 현상계 인식에 한정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 인식론 기초이다. 쇼펜하우어에서 자연과학은 신학적 형이상학의 근본을 폐기하거나 수정하는데 요구할 수 있는 철학적 가치를 갖는다고 이규성은 쓰고 있다.(233) 유물론을 거부하지만 과학에 위배되는 신정론적 신념도 회의적이라는 뜻을 쉽게 설명해준다.(233)

이규성의 책에서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의 지성도 ‘자연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주변 목적 추구 안에서 개별적 의지에 봉사하도록 되어 있을 뿐이다’. 자연의 진정한 본질을 측량하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223; Schopenhuer, vol.4(1830-1852) Ed. by Arthur Hübscher. Trans. by Payne. 1990. p.36) 현상 너머의 자연을 보기 위하여 우리는 초월적 관심을 지향하는 정신의 문을 열어 놓아야 한다. 대리석은 겉으로 표면의 무늬만 보일 뿐이다. 그 내부는 초월적 관심 없이는 보이지 않는다.(247) 이런 수사법은 초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쇼펜하우어가 구분하는 자연과학으로서 형태학과 원인학이 있다. 박물학이나 자연사 관찰 등의 관찰과학이 형태학이며, 물리학이나 화학이나 생리학처럼 이론과학을 원인학이라고 한다. 원인학은 형태학보다 더 깊은 지성의 힘을 필요로 한다. 쇼펜하우어에서 물리세계의 관성법칙과 물질총량 불변의 법칙은 뉴턴물리학과 무관하게 원래 <선험적 공리>에 해당한다.(309) 그리고 자연에서 의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힘kraft이다. 힘을 가속도로 환원한 뉴턴물리학을 낮춰 평가한 쇼펜하우어 관점에서 볼 때 힘의 관성을 선험적 공리라고 규정한 쇼펜하우어의 인식은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원인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깊은 물리영역의 차이성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실토한 것쯤으로 이해될 수 있다.

동일성에서 차이성이 발현된다는 생각이 쇼펜하우어의 특징인데,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에 없는 차이성을 보이게 될 것이다. 차이성은 초월적 관심을 통해서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형이상학과 과학이 다른 것인데, 형이상학을 과학처럼 다룬 헤겔 형이상학이나 신학을 동일성의 형태로만 다룬 사변신학, 그리고 차이성을 놓치고 동일성에 안주한 자연과학은 반성적 통찰 없는 비본질의 세계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252)

이규성은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 훨씬 이상으로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의 차이와 그 상보관계를 강조한다. 그래서 차이와 상보성을 아래 표로 정리해 보았다.

형이상학 비교표

“방법상에서 유물론으로 귀결될 수 있는 자연과학도 형이상학을 필요로 하듯 형이상학은 적절한 세계해석을 위해 자연과학을 필요로 한다”.(216)는 이규성의 해석 부분을 위 표의 결론으로 봐도 될 듯하다. 비판적 유물론과 전통 형이상학은 이율배반이지만 쇼펜하우어는 선험주의를 응용하여 이 둘의 이율배반을 적대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병립가능하도록 한다는 점이 쇼펜하우어의 특징임을 이규성은 간파했다. (446)

전체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5. 사례: 색채론 논쟁

쇼펜하우어는 과학성과를 중시하고 괴테의 정신(괴테의 광학)을 존경했지만, 과학적 자연주의(뉴턴의 광학)의 오만한 태도를 조야한 유물론으로 배격했다.(33) 그래서 쇼펜하우어에 기반하여 기존 입자론과 파동론 사이를 논증하던 뉴튼과 괴테의 색채론을 비교 분석하는 데에 이규성은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다. <시각과 색채에 관하여> (1816/1854.1870 Uber das Sehen und die Farben) 에서 뉴턴과 괴테의 색채론 차이는 아래처럼 정리될 수 있다.

색채론 비교표

색채론 논쟁과 관련하여 하이젠베르크의 해석까지 부연한 이규성의 해설은 이규성의 관심분야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뉴턴과 괴테가 현실에 관해 완전히 상이한 측면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364) 쉽게 말해서 현대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 관점으로 볼 때 뉴턴의 색채론 저서인 <광학>은 당시 빛과 색에 관한 새로운 이론(1672)으로서, 광학 혹은 빛의 반사와 굴절 및 색채에 관한 정량적 결실(1704)을 제공한 것이며, 괴테의 색채론은 환원될 수 없는 빛의 영역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형이상학적 아이디어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뉴튼과 괴테의 색채론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범주오류로 될 수 있다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탁월한 제안이었다. 이 둘 사이의 비교는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 사이의 갈등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다.

마찬가지로 이규성은 쇼펜하우어의 색채론을 분석하면서 과학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이중적 태도를 간파한다. 쇼펜하우어가 1)확실성을 중시하고 칸트 계승자로서 뉴턴과학을 인정하면서도 2)수량화의 환원주의라는 뉴튼과학의 지적 기만을 맹비난한다는 점을 이규성은 말했지만, 그렇다고 뉴튼 색채론을 폐기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378)

쇼펜하우어가 과학을 비판하는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은 스스로 실재론(뉴튼의 색채론 및 괴테의 색채론까지 포함)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주관에 의해 구성된 현상론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이규성은 과학을 실재라고 말하는 것을 일종의 공상이며 허상이라고 표현했다.(401)

전체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6. 자유와 창조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작품 <윤리학의 두 가지 근본문제>(1841)와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1840), 이 두 권의 책을 중심으로 자유를 설명했다. 쇼펜하우어가 자유를 말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를 필요로 했던 이유를 이규성은 강조한다. 자유와 관련한 문제에서 이규성은 스피노자를 이렇게 설명한다. 스피노자의 <지성개선론>(1677)은 다음의 주제를 전개한다. i)모든 것이 속절없고 허망하다. ii)공포의 원인이나 대상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며 단지 마음animus의 동요로 인해 선과 악으로 된다. iii)유일한 관심과 감동인 유일한 선을 찾게 되면 비로소 지고한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62)

쇼펜하우어에서 지식의 핵심은 감각지각이고 그 발견적 진리는 지각의 열매라고 이규성은 해석한다.(71) 이미 잘 알려졌듯이 이런 해석은 스피노자의 유물론적 성격으로 재해석되는 사례에서 보여진다고 이규성은 직관하고 있다. 쇼펜하우어가 그렇듯이 말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자유로움을 긍정하지만 유물론적 급진성을 수용할 수 없었다.(64)

쇼펜하우어는 유물론적 급진성 대신에 선험주의적 급진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쇼펜하우어의 선험주의는 관념론과 다르게 지각경험의 단초를 중시한다는 점을 이규성은 재빠르게 눈치챘다. 쇼펜하우어에서 “철학은 경험과의 연관에서 개념을 창조하는 활동이다.” 쇼펜하우어는 창조적 개념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험의 의의를 강조한다.(75) 즉 경험이 지각에서 그치지 않고 창조된 개념으로 발전되는 것을 과학과 철학의 과제로 본다는 것이 이규성의 생각이다.(75) 앞의 인용은 이규성이 Payne 영역본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는데, 지각Anschauung;perception으로부터 개념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 시와 철학의 끝없는 노력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규성의 고유한 시선이 배어있는 구절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각은 표상 언저리에 맺힌 감각이 아니라 표상을 넘어 의지 안으로 꿰뚫는 태도를 말한다. 이런 태도는 자유의 힘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태도는 그 스스로 지각의 영역을 초월하며 일반의 상식을 넘어서 있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반시대적unzeitgemäß 스승으로 간주했다고 한다.(75)

즉 자유는 표상계에서 의지계로 추월하고 초월하는 원동력으로 보는 것이 이규성의 깊은 생각이다. 이런 이규성의 깊이에 전적으로 감동될 수밖에 없다.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자유의 이상을 찾는 스피노자 윤리학도 마찬가지로 표상된 윤리에서 의지의 도덕으로 건너가는 길로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의 보이지 않는 바탕이라고 이규성은 설명한다.(257)

쇼펜하우어는 자유는 의지의 산물이라고 했다. 결국 의지없이 이 세계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쇼펜하우어 이해의 지름길임을 이규성은 밝히고 있다.(아래 책 S.679; Arthur Schopenhauer, Anhang, Kritik der Kantischen Philosophie,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 Suhrkamp 1986) 이규성은 이를 반대방향으로 보면서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유는 표상에서 의지로 넘어가는 길이어서 동기 없는 중립적 자유란 없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기본적인 윤리학이라는 이규성의 표현은 적절하다.(451) 이렇게 자유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동력이며 근본 이념이다.(80)

이미 말했지만 자유는 충족이유율 세계와 정반대에 위치한다. 의지는 충족이유율이 지배하는 결정된 세계가 아닌 자유의 차원에 있다. 의지는 인과범주를 넘어서 있으며 마찬가지로 자유도 그렇다(80). 의지는 필연성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잉여의 힘으로서 자유다. 자유는 쇼펜하우어에서 가장 소중한 희망이기도 했다.

자유는 실체의 속성이나 상태가 아니라, 관계적 활동의 원리이다 이런 자유를 언어로 이해하는 것보다 예지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어쨌든 관계로서의 자유를 모르면 자유가 아니다. 자유는 자아실체가 점으로 수축하여 우주에 발산하여 관계를 만들어가는 힘이라는 것이다.(1091) 우주에 발산된 자유를 향한 태도만이 비로소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이규성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규성의 자유는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깨달음을 통한 자유를 진정한 자유로 본다는 점이다. 깨달음의 자유는 관념이나 사변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경험세계에 의존해서 가능하다고 하는데, 단지 이규성이 말하는 자유는 경험세계에 안주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규성이 인지하고 실천하려 했던 자유의 모습이다.

전체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7. 쇼펜하우어 의지 형이상학과 이규성의 확장

쇼펜하우어의 표상과 의지Die Welt II 는 책의 처음부터 천문학의 장대한 우주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무한한 공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천체들, 그 각각의 주위에는 일단의 작고 빛을 받는 천체들이 돌고 있으며 이 작은 천체들의 핵은 뜨겁고 겉이 딱딱하고 차가운 껍질로 덮여있다.”

이 인용은 쇼펜하우어가 자아만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관심에서 의지 형이상학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말하려는 데 있다. 자연을 지나치게 넘어서서 사변 형이상학으로 빠지는 것이 혹시 인간의 본성이 아닌지를 질문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동물로animal metaphysicum 규정했는데(117), 이 점 또한 인간이 사변 철학에 빠지기 쉬운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서술되었듯이 사변 철학은 형식을 실재로 착각하고 있는 지식체계이다.(121) 그런 사변 철학의 소산물로 전통 형이상학과 사변신학 그리고 유물론적 근대과학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자주 말한다. 쇼펜하우어 자신의 관념론은 선험적 관념론으로서 기존의 독일 관념론과 다르며, 기존 독일 관념론은 일종의 유심론으로 신학존재론의 기초인 영성주의spiritualism라고 보았다.(383)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신학존재론이란 그리스 존재론과 기독교 신학이 결합한 전통 형이상학을 말한다.(432) 그리고 쇼펜하우어는 기독교 중심의 이단 배척의 역사를 오류의 역사로 간주한다.(437)

칸트에서 형이상학은 세계 자체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는데 반면에 쇼펜하우어에서 형이상학은 내적 경험과 외적 경험을 적절하고 올바른 지점에서 연결하는 데에서부터 가능해진다고 이규성은 분석했다.(413)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의지 형이상학이 형성된다. 쇼펜하우어는 세계 안을 이해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접근하는 데 있다. 이런 접근법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의지 형이상학이다(413)

쇼펜하우어에서 칸트는 중요하지만, 칸트의 인식론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의 오성은 인과성을 지각하는 지각능력이며 이성은 개념과 추리의 능력을 말한다.(417) 오히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율배반을 지적한다. 감성형식이나 오성 범주를 무제약자에 적용하면 서로 입증할 수 없는 테제와 안티테제 두 주장에 봉착하게 된다. 즉 칸트의 인식론이 이율배반에 빠진다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한 듯하다.(444)

이율배반과 사변적 관념론에서 벗어나는 길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의도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이다. 쇼펜하우어에서 의지의 형이상학은 넓은 의미의 윤리학이라고 이규성은 해석한다. 삶의 윤리학이 바로 의지 형이상학의 중심이어서 물자체 역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인성에 대한 품성론이며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직관적 깨달음을 통한 回心sinneanderung (삶의 의미 전환)이라는 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데 있다.(471) 그리고 물자체는 의지이다. 자기의식의 출현으로 물자체를 이해하는 길이 열렸다고 본다. 그 길은 예지계로 열려 있다. 쇼펜하우어의 예지계는 자기구현의 통로라고 한다.

이규성이 설명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론은 다음과 같다. (533)
i. 의지는 물리적 근저에 놓인 형이상학적 실재이다.
ii. 의지는 심리적 생명원리로서 추상화된 주체성(신)이 아니라 무지성, 무의식의 힘이다.
iii. 의지는 의식이나 주체의 양태와 다르다.
iv. 인간 행동이 목적을 향하고 있어서 마치 의지가 목적의식으로 오해될 수 있다. 세계의 실체에는 목적이 없다는 점이다.

의지는 하나이며 충족이유율 밖에 있어서 더 이상의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다.Grundlogigkeit 이를 무목적성 의지로 볼 수 있으며 개인의 의지와는 다른 뜻이다. 그래서 의지는 이성에 의해 부정될 수도 없다고 한다. 이성은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83) 당연한 말이겠지만, 쇼펜하우어에세 의지는 의식과 다르다. 의지는 개인의 경험계에 속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지는 개인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관통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선험적 관념론과 자연사에 기반한 자연주의 태도를 같이 견지한다.

이런 태도는 쇼펜하우어를 설명하는 데 핵심이지만 쉽게 이해되기 어렵다. 쇼펜하우어 의지론이 삶의 윤리학이지만 개인의 윤리적 품행의 매뉴얼은 아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1836/1854에서 “나의 철학은 도래하는 시대의 철학”이라고 표현했다.(92) 철학도 자연과학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 이규성은 해석한다.(92)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인간은 경험적 성격과 예지적 성격을 같이 갖고 있다고 한다.(536)

경험계에서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쉬우나 예지계로 허무주의를 넘어 궁극의 의지를 만날 수 있다는 강한 의욕을 우리 모두 가졌다고 이규성의 진보된 의지론이다.(113) 그리고 이규성의 의지론은 쇼펜하우어에 없는 역사의식이 배어있다. 유럽 천년 역사(8-18세기)에서 일어난 전쟁의 천 년은 사변철학의 권력의 결과이며, 이를 형이상학적 사건(124)으로 지적한 이규성의 역사적 의지론은 철학이 왜 역사에서도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준다.

전통형이상학은 지식학이 형식화된 형이상학이라는 쇼펜하우어의 기본적인 태도는(101) 이규성에서 확장된다. 사변철학을 형식화된 형이상학을 벗어나기 위해 쇼펜하우어 이상의 의지 형이상학을 필요로 하다고 이규성은 말한다. 의지 형이상학은 니체 베르그송, 화이트헤드의 생명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표현했듯이(93) 이규성의 의지 형이상학은 생명론으로 이어지며서 완성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 철학은 철학의 본질이 논리학이나 인식론에 있지 않고 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윤리학에 있다는 점을 이규성은 강조하는데, 이규성은 강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의지 형이상학을 구상한다. 그리고 이런 구상이 이규성 책 전반의 큰 줄기이다.(113)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본 삶의 근본특징은 근심Sorge(번뇌)과 무상Zeitlicjkeit에 있다고 했는데,(413) 이규성은 이를 풀기 위하여 아시아 철학의 주요 특징인 생명철학에 기반한 수양론을 도입한다.

예지계에 닿기 위하여 설명한 것이 이규성의 단예端倪 개념이다. 우리의 심층내면이 표면적 감정선에 맞닿는 데가 바로 단예端倪라고 한다. 거꾸로 말해서 단예를 실마리 삼아 심층본성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심층본성은 우주의 궁극적 본성과 같아서 우주의 본질을 자각하는 일은 곧 단예를 다스리는 일에서 시작되며 이것이 바로 이규성이 말하는 수양론이다. 이규성이 말하려는 생명 기반의 수양론은 쇼펜하우어를 넘어서 이규성만의 의지론을 만들고 있다. 이 부분은 생물학적 측면과 생명을 이야기하는 절에서 다시 논의할 것이다.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8. 쇼펜하우어 공생진화론을 읽는 이규성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물리적 인과법칙은 “무생물에서 명확성을 획득하지만” 다른 유기체 영역에서는 그 무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유기체에서는 물리과학과 같은 인과법칙을 적용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규성은 되풀이해서 말한다. 무생물의 인과관계에 사로잡히면 물자체 형이상학에도 맹목이 된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물리학의 접근법이 아니라 생물학의 접근법을 통해서만이 쇼펜하우어 의지론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이규성의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이규성은 쇼펜하우어를 읽는 범위를 현대 진화론자 러브조이(A. O. Lovejoy, 1873-1962)에까지 확장한다. 러브조이는 자신의 저서 <진화론자로서 쇼펜하우어>에서 쇼펜하우어의 진화 의미를 설명하는데, 이규성은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아주 쉽게 해설해준다.(560-2)

쇼펜하우어 당시 자연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 정도는 유아기 수준이었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과학지식의 수준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아이디어 수준에서 몇몇 흥미로운 점들에 있다. 우선 이규성이 정리한대로 쇼펜하우어의 자연생물에 대한 이해수준은 다음과 같다. 미생물의 경우는 자연발생이 가능하며, 고등동물의 경우 급격한 단절적 변이를 통한 새로운 종 탄생이 가능하다.

지구 차원이 대격변 조건을 자연의 전체적 의지의 일부라고 보면서, 이러한 우연적 급변을 통해 이종 발생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종 다양성이 형성된다. 그러나 기존 동물종 자궁에서 전혀 다른 제3의 새로운 종이 탄생된다는 오류를 안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종의 기원은 열대지방이라는 점이다.

쇼펜하우어의 생애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 이전이었음을 감안할 때 쇼펜하우어가 자연생명체의 그 정도나마 이해한 것은 놀라운 편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은 (i)생물학적 유기체가 태동되는 기원에서 목적론을 부정한 사실과 (ii)종 사이의 공생관계를 거론했다는 사실, 그리고 (iii)발생학적 사유와 자유운동의 문제를 거론했다는 점에 있다. 하나씩 해명하기로 하자.

(i) 목적론에 대하여: 쇼펜하우어에서 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도덕이 인간의 궁극목적이다.(562) 그러나 그런 목적론은 세계를 이끄는 최고 정점으로서 목적점이 선재한다는 뜻과 다르다.(563) 생명 진화의 방향은 자유에 있다고 말한다.(563) 그리고 “스스로 지양”한다.selbstaufhebung “스스로 지양”한다는 것의 뜻은 타자의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스스로의 내부 방향대로 움직일 뿐임을 의미한다.

지양하는 힘을 전통 방식대로 형이상학적 목적에서 찾지 않는다. 스스로 지양한다는 뜻에서 볼 때, 1)초월적이고 객관적인 목적은 없다. 2)우주를 앞에서von vorne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 뒤에서 von hinten 미는 추진력을 굳이 목적이라면 목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규성이 해명해준 반목적론 설명은 오늘의 현대생물학이나 형이상학의 기존 명제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지 못한 이규성만의 독파력에 있다.(563)

물론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자연학이 아니라 우주론에 걸쳐있기 때문에 쇼펜하우어의 반목적론은 우주에 적용된다. 이렇게 쇼펜하우어 우주론에는 첫째 목적론적 초점이 없으며, 둘째 존재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궁극원인도 없으며, 셋째 목적보다 無가 우주의 기본원리라고 이규성은 섬세한 언어로 설명해준다.(40)

(ii) 공생관계론에 대하여: 공생은 자연의 기본적인 성질consensus naturae이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인 듯하다. 호혜적 지지관계로서 식물과 곤충 사이의 보다 심층에 놓여진 공감과 공존의 관계가 자연의 기본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공감과 공존으로부터 투쟁이 아닌 공생의 자연 관계가 형성되며, 나아가 예지계의 의지가 드러난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이규성은 재해석한다.(567)

자연의 개별화 고정은 투쟁의 과정이다.(590) 자연의 투쟁 사례로서 천체에서 별을 중심으로 한 행성 궤도는 일정한데, 그렇게 일정해진 이유는 별과 행성 사이의 구심력과 원심력의 부단한 긴장관계(투쟁관계)에서 이뤄진 결과라는 점이다. 그러나 자연사의 방향은 자유이다. 자유 속에서 나름대로의 운동의 항상성을 찾아 유지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iii) 생명체의 발달론적 변화: 절지류의 변태 혹은 굴파기 등과 같은 행동성향 등은 자연에 존재하는 내부 투쟁이 의지의 본질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의지의 진화적 전개라고 쇼펜하우어는 생각했다.(597-9)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절대불변의 관념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전개능력을 가진 개방적 실재이다. 쇼펜하우어에서 진리는 닫혀있지 않고 미래로 열려있다는 말이 바로 그런 개방적 실재로서의 의지의 원래 모습을 표현한다. 그래서 진리론은 진리의 발생론적 이론이며, 진리는 발생학적 흐름을 안에 내재한다.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진리다원주의이며 진리실용주의자 일 수 있다고 이규성은 해석한다.(79)

“진화론적 자연사는 작용인과 목적인을 탈각한 의지의 발현”으로 재해석된다.(226) 형이상학적 발현 혹은 생물학적 발생이라는 개념으로 쇼펜하우어는 본체와 발현을 구분한다고 이규성은 해석한다. 이 점에서 체(본체)와 용(發用)의 범주에 바탕한 아시아 철학에 친근할 수밖에 없다고 이규성은 평가한다. 경계와 시야를 넘는 포괄성 높은 쇼펜하우어의 시야를 직시한 이규성의 탁월한 혜안은 생물학의 과학을 이규성의 혼융적 형이상학으로 발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226) 다시 말해서 쇼펜하우어의 <발현> 개념을 현대생물학의 발생 개념과 연관시킴으로써 이규성 자신의 철학적 시야를 확대해가는 과정은 아주 흥미롭고 호기심과 질문을 유발하는 이규성의 독특한 글쓰기이다.(233)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9. 쇼펜하우어가 본 아시아 철학

쇼펜하우어는 아시아 철학에 편견을 가졌던 헤겔을 비판했는데, 그 비판의 기준은 자신이 사변신학이나 과학주위를 비판했던 기준과 동일했다. 그 기준이란 논리적인 것과 실재적인 구분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기준으로 쇼펜하우어는 헤겔을 똑같이 비판했다. 헤겔은 지식론으로 점철된 서양철학의 선입관으로 아시아 철학을 보았기 때문에 아시아 철학의 생의 의미론(경계론)을 볼 수 없었다고 이규성은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거꾸로 아시아 철학에서 그가 희망하던 삶의 의지 형이상학을 보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는 유가와 도가에서 말하는 우주의 생성원리와 함께 궁극의 윤리적 경지를 자신의 철학 안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물리적으로 서로에게 막혀있지만 영적으로는 조화와 소통을 이룬다고 했다. 후대 과학사가 죠셉 니덤(Joseph Needam, 1900-1995)은 라이프니츠 유기체 철학은 중국철학에서 말하는 태극을 무수한 리기의 전체적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 보는 주희의 세계상과 일치한다고 했다.(17)

쇼펜하우어가 보기엔 라이프니츠 모나드론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직접 아시아 철학을 간접적으로나마(번역서로) 독서한다. 쇼펜하우어는 인도철학, 중국철학, 이슬람 수피즘, 원시 부족신앙에 긍정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이규성은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중국에 자연숭배와 영웅숭배 외에 삼교 사상이 있음을 파악했다. 그런 삼교 사상이 쇼펜하우어 자신의 근본 사상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이규성이 잘 설명한다.(656)

쇼펜하우어는 주희 주자학의 정립을 이전의 모든 지혜를 연결시켜 놓은 체계화된 중국철학으로 간주한다. 주자학 정립 이면에 도교와 불학 그리고 선진유가의 철학을 강조하는데, 삼교를 보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이 책은 잘 서술하고 있다. 기존의 쇼펜하우어 연구물에서 이미 동양 전통의 철학과 쇼펜하우어를 비교하는 내용들이 많았는데, 이규성은 이런 비교연구에서 벗어나 삼교 하나하나마다의 쇼펜하우어와의 내재적 연관성을 분석하고 해석해내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삼교에 대한 관심은 궁극적으로 중국 삼교의 철학이 서구 형이상학과 같은 사변철학이 아닌 삶의 수양론이었기 때문이라고 이규성은 말한다. 그래서 도교를 과학지식이나 생활에 유용한 지식체계로 보는 관점에서 그치지 않고 궁극의 수양론으로 본다는 관점이 쇼펜하우어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이규성은 설명한다.

예를 들어 도교는 연단술사 위백양魏伯陽(후한시대)의 주역 참동계에서 그 체계가 갖춰졌고, 이후 송대 내단 도교와 주돈이의 태극도설로 완성된다. (657) 내단이나 태극도설 모두 궁극적으로 우주의 운동성과 나의 운동성 사이에 동형성isomorphism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 도교의 핵심으로 본 것이 쇼펜하우어의 이해방식이라는 것이다.

유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 송명 이학은 우주의 본성이 우리의 심층내면으로부터 표면적 감정으로 드러내는 끝(단예)를 실마리 삼아 심층의 본성이 우주의 본질임을 자각하는 수양론적 심성론이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에 너무 잘 맞는다고 설명한다. 물론 쇼펜하우어에서 논어는 장황하고 상투적이며 전반적으로 정치철학으로 여겨졌으며 그래서 그런지 그런 정치철학을 받쳐주는 형이상학의 정도가 미흡하다고 쇼펜하우어가 생각했을 것으로 이규성은 판단했다. 반면에 맹자에 대해서는 가치있는 평가를 한다고 이규성은 파악했다.

쇼펜하우어는 맹자를 줄리앙 Stanislas Julien(1797–1873, 프랑스 중국학자)의 라틴어 번역본으로 접했다. 맹자에 의하면 천하는 天子인 사람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인데, 하늘은 백성의 마음 民心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는 맹자 표현을 긍정적으로 수용했다고 이규성은 밝히고 있다.(664)

쇼펜하우어는 ‘하늘은 천하의 마음을 민심으로 삼는다“ 그리고 하늘을 논하는 자는 민심으로 하늘을 가늠한다는 구절을 인상깊게 받아들였다고 이규성은 밝힌다. 정치적 보수성을 지닌 쇼펜하우어는 이런 맹자 이해를 현실정치보다 형이상학적 관심으로 해석했다고 이규성은 비판적으로 지적했다. (665)

이규성의 해명에 따르면 쇼펜하우어가 관심을 가졌던 아시아 철학 중에서 불교를 많이 언급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가 구상했던 시공간 개념이 불교에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으로 이규성은 판단한다. 쇼펜하우어의 시공간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은 신학적 존재론처럼 시작이 있지 않고 무시무종하다. 즉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를 뿐이다. 둘째 공간은 무한공간과 무한세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이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불교의 시공간 개념과 일치된다고 보았다.(448)

불교와 쇼펜하우어 책

그러나 이런 형이상학적 해석을 넘어서 붓다의 종교가 “숭고하고 사랑으로 충만한 학설이며, 내적 탁월성과 진리로 가득하며 또한 압도적인 신자수로 인해 (1850년 당시 불교 신자수는 3억 6천 9백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불교를 옹호했다고 한다.(659) 쇼펜하우어는 붓다가 보여준 고뇌와 열정 그리고 초극의 인간상에서 자신의 초인을 발견한다고 이규성은 말한다.(266)

이규성이 정리한 쇼펜하우어와 불교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690)

1) 삶과 고통을 동일시한다. 즉 고통이 생의 본질이라는 점이다.
2) 고통의 근원이 욕망에 있다는 점이다. 고통의 원인이 채워지지 않는 의지에 있다.
3) 무아론에 따라 개별화의 원리가 부정된다.
4) 윤리는 계시적 초월에 의존되지 않는다.
5) 부정의 논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6) 인과와 사건을 연결하는 불교인데, 인과로 묶인 관계를 인식단위로 간주했다. 일종의 인식론적 원자론에 해당한다.(712)

한편 이규성은 쇼펜하우어의 불교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즉 쇼펜하우어는 무를 논하지만 결국 무의 형이상학 안에 머물고 말기 때문에 유의 세계인 현실을 대면하지 못했다는 약점을 이규성은 쓰고 있다.(700)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무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에서 무를 말함은 단지 방편에 지나지 않으나 쇼펜하우어는 무를 실상인 것처럼 말한다는 점을 이규성은 지적했다.(137)

쇼펜하우어는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1839)에서 타인과 생명체 고통에 공감하는 동정심Mitleid을 인류의 도덕행동의 근본 동인으로 본다.(665) 아시아 철학의 도덕성을 이해하는 기초는 동정심에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아시아 철학과 쇼펜하우어 철학의 공분모가 있다고 이규성은 말한다.(667) 한편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동양의 영향이라기보다 결과론적으로 동양의 사상과 일치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지적이 이규성의 탁월한 분석이다.(680)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10. 이규성이 바라보는 신비주의

쇼펜하우어에서 신비주의의 뜻은 감성적이거나 이론적인 사변 형이상학이 아니라 예지계를 비추는 직관적 깨달음을 통한 삶의 윤리적 의미를 찾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신비주의 철학이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이라고 이규성은 본다.(475) 신비주의에 닿는 통로가 예지계인데, 예지계에 뿌리를 둔 직관능력으로서 쇼펜하우어 윤리관은 루소나 맹자의 인성론과 소통된다고 이규성은 말한다.(500)

이규성이 말하는 신비주의는 다음처럼 정리된다.
i) 물질과학으로 포섭되지 않는 자연의 운동원리를 표현한다.
ii) 염세주의와 다르며 신학적 신비주의와 달라서 신 없는 신비주의를 말한다. 즉 신비주의를 말하기 위해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736) 자연과 우주를 연결하는 힘을 표현한다.
iii) 논리를 실재로 둔갑시키는 신학존재론이나 과학주의와 다르게 세계의 실재를 실재 그 자체로 해석한다.
iv)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표현한다.
v) 정지된 불변으로서 형이상의 실체 대신에 動靜의 변화를 담고 있는 실재를 파악하는 인식의 소통경로이다.
vi) 서양 실체론이 아니라 동적인 존재론의 소산물이다. 그래서 無를 인정한다.

경험세계는 관찰자가 구성한 표상의 세계이다. 현실은 무상하며 비실체의 가상이라며 예지계만이 궁극적 실재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인식론의 기초이다. 철학은 가상을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수레이자 사다리다. 쇼펜하우어에서 철학은 지식의 형식적 조건을 보여주고, 과학의 차원을 벗어나 신비의 세계로 진입하는 길을 보여주는 방편이다.(713) 이런 이규성의 설명은 나로 하여금 신비주의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씻겨냈다.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쇼펜하우어는 과학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과학의 논리적 구조를 반성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반성을 위해 과학을 초월해보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지적은 이규성의 혜안이기도 하다. 반성 없는 과학주의와 통찰 없는 전통 형이상학은 서로 무의미unsinn하다. 그래서 언어를 넘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쇼펜하우어는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대하여>에서 논리적 형식을 실재처럼 혼동하는 것을 ‘언어의 오용’이라고 표현했다.(756) 언어는 사유오류와 사변오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벗어나는 반성이 바로 철학적 통찰의 원천이다.(756)

이 점에서 쇼펜하우어와 비트겐슈타인을 연결시킨 이규성의 설명력은 탁월하다. 쇼펜하우어는 기존 형이상학을 언어비판론으로 비판하고 신비주의로 이행하여 말할 수 없는 것 즉 침묵을 요구하는 반철학antiphilosophy으로 달려갈 수 있다고 한다.(1087) 이런 반철학의 대표로서 이규성은 비트겐슈타인을 든다.

이규성은 말한다. “과학주의에 빠지지 않는 한, 그리고 과학적 인식이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면 윤리적 세계관과 과학의 소통가능성은 열려 있을 것이다”(760) 인과는 자연의 진정한 법칙이 아니라 법칙의 형식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근대인의 오류는 이른바 ‘자연법칙이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는 가상에 기초한다는 데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언명은(논리철학논고 6.371) 쇼펜하우어의 언어 반성과 맥을 같이 한다는 그 둘의 공통 철학을 이규성은 보여준다. ‘과학자는 사실들을 기술하는 설명체계를 언어를 통해 구성한다는 점이다.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을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난제를 토로한 비트겐슈타인은 이규성이 보기에 쇼펜하우어가 안고 있었던 문제에 똑같이 고민했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난제, 언어의 비언어성, 혹은 의미의 언어표현 불가능성이 쇼펜하우어의 신비주의와 등질적임을 이규성은 밝히고 있다.

전체 주제목록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11. 인간, 양극성과 숭고성

인간은 격하고 어두운 충동을 지니면서 동시에 순수인식의 영원하고 자유롭고 밝은 주관이라는 쇼펜하우어의 뜻은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표현이다.(Die Welt II. Suhrkamp 1986. S.289)

어두운 충동의 본성은 사리사욕으로 드러난다. 동물은 이기적이지만 사리사욕Eigennutz이 거의 없다는 언명은 단순하며 누구나 알아들 수 있는 말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들을 암시한다.(874) 사리사욕은 동물에 없는 인간만이 갖는 계획된 이기주의라는 자연의 사실이다. 쇼펜하우어가 본 이기주의란 i)동물적 자기본존욕과 ii)사리사욕의 두 측면을 보인다. 사리사욕은 사악Bosheit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875)

쇼펜하우어가 본 인간의 파괴본능은 “지구의 껍질이 다 파괴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살려는 의지는 객관적으로는 어리석음으로 보이며 주관적으로는 망상으로 보인다”.(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II. Suhrkamp 1986. S.462)

한편 쇼펜하우어는 홉스와는 달리 자연상태에서도 이기적이 아닐 가능성을 인정한다.(882) 자연상태에서 도덕적인 선험적 요소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한다.(894) 인간세상에는 가장 사악한 행위와 이기심 없는 연민 사이에 수많은 스펙트럼이 있다. 시민적 이기심을 자연권으로 가진 개인을 법의 근거로 본다(883)

이기주의는 개인의 자기생존을 위한 개체중심의 태도인 반면, 개체가 아닌 우주와 일체되어 사물을 바라보는 세계중심의 태도가 있는데, 이를 숭고정신이라고 한다. 숭고정신은 인간이 갖고 있는 순수인식의 결과로서 있어서 아름다움과 선함에 대한 직관적인 감정인데, 개별화 감정이기보다 개인을 세계에 대응시키는 인식이다.

쇼펜하우어는 숭고감을 태양의 빛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태양은 빛과 열을 낸다. 열은 의지의 원천으로서 열을 지니며 열이 지나치면 생명위협을 갖는다. 한편 빛은 열이 없지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최고의 인식방법의 조건이다. 열이 결여되어 있지만 의지 초월의 순수인식을 지향한다. 이런 지향이 숭고이다. 순순인식을 높이려면 결연히 의지의 사적 관심에서 더 높은 경지로 점프해야 한다고 말하다.(817) 자기의 인격과 의욕을 초월하면서 숭고감이 생긴다는 뜻이다.(815)

숭고함은 의지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어서 숭고함을 의지로 바꿀 수 없다. 숭고는 두 가지가 있다. 공간의 무한성에 대한 숭고로서 역학적 숭고이다, 다른 하나는 시간의 무한성에 대한 숭고로서 시간적 숭고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시공간 무한성의 세계와 개체 사이의 관계는 바다와 물 한 방울에 비교된다.(818)

세계와 내가 하나 됨을 인식하는 일이 숭고감이다. 즉 개체를 넘어서는 고양Erhebung이 숭고감이다. 아름다움의 미감은 우아감과 숭고감으로 드러나는데, 우아감이란 무아의 경계이며 숭고감이란 동적인 상태에서 정적인 상태로 안정화되는 경계인으로서 자아이다. 이런 숭고함을 순수인식하는 것이 바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숭고의 미학Das Gefuhl des Erhabenen이다.

숭고감은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감정이면서 우리 정신을 고양Erhebung시키는 가장 핵심적인 감정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816)



분량이 넘처서 11절로 마치고 12절부터 2부로 연결됩니다.





되돌아가기

목록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