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과학 공식의 이야기 E=mc2
원저 : 데이비드 보더니스, E=mc2
실린 곳 : 이머지 새천년, 이머지 새천년
2001 서평 : 데이비드 보더니스, E=mc2 (생각의 나무, 2001년), 이머지 새천년 2001년9월호(9월1일)

E = mc2 (생각의 나무, 2001년) 서평 최종덕(독립학자)

어느 과학 공식의 이야기

1. 물질 탐구의 역사

자연이란 무엇인가? 물질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성적인 사유가 아직 천착되지 못한 신석기 시대에는 자연과 그 자연을 채우고 있는 물질에 대한 질문들이 그들의 생존과 직접 연관된 방식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자연의 물리적인 변화는 그들의 삶의 조건이 되었고 나아가 그들 삶의 양식을 결정하기도 했으며, 그에 따라 자연의 축복과 재앙에 대한 주문과 기도가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자연과 삶의 양식이 분리될 수 없었던 시대를 우리는 신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신화의 시대에서 우리는 정형화된 문자 대신에 자연을 복사하는 그림 상징이 그들의 표현방식이었고, 그런 표현방식은 자연과 물질세계를 모방하는 것이 큰 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상징은 세계를 압축시켜 표현해야 했으며, 그런 상징의 압축성은 자연과 물질을 종합적으로 본 느낌을 전달하는데 목적을 두어야만 했다. 그래서 신화적 상징은 물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드는, 일종의 물질과 정신의 일체화된 도구였다.

이후 문자가 생기고 문자는 사유를 정형화하기 시작했다. 신화상징은 자유로운 느낌을 숨김없이 말할 수 있으며 사유에 구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가 생기면서 오히려 사유가 문자에 구속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자연과 물질에 대한 상상력은 왜소해지기 했으며, 대신 자연을 자르고 나누고 이름을 달기 시작했다. 이런 문자적 사유를 우리는 이성理性이라고 불렀다.

이성은 자연과 물질을 종합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분석적으로 보았다. 자연이 물이나 불, 지수화풍으로 혹은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느니 등등의 말들이 철학이나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였으며 이때부터 서양과 동양의 세계이해 방식의 차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철학 책에서 서구의 과학과 철학의 시조라고 하는 탈레스는 이렇게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전이되는 문턱에 걸친 사람이었다. 이때부터 서구에서는 물질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속에 세계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고 믿었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하면서 세계의 진리는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물질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운동 가운데 있다고 보았다.

물질은 어디로 어떻게 왜 운동하는 것인가의 질문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년 동안 서구 과학자들은 물질 그 자체의 문제와 함께 물질들 사이의 운동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자연탐구를 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는 2000년 이후 뉴턴과 같은 근대 과학혁명의 씨앗을 발화시켰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뉴턴으로 이어져 완성된 근대 과학혁명은 물질 그 자체에 대한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물질들의 운동에 대한 탐구에 이어 물질들 중에서 가장 크다고 여겨지는 행성들의 운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큰 물질이라도 미세의 작은 물질로 구성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 큰 운동을 탐구하기 위하여 미세 물질의 작은 운동을 알아야만 했다. 미세 물질의 작은 운동은 물질을 구성하는 최소 입자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최대 물질이라면 앞서 말했듯이 행성을 들 수 있지만, 최소 물질은 어디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할까라는 의문이 일어났다.

이러한 의문은 빛이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연결되었고 빛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있다면 많은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근대 과학자들은 생각했다. 왜냐하면 빛이 에너지를 갖는 것이 분명했고, 그 에너지란 사실 물질들끼리 부딪칠 때 생기는 물리적 충격량과 비슷하다는 실험결과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이제 빛이 무엇으로 되었나를 밝히는 것이 관건이었다. 과학혁명기 당시에 뉴턴은 당연히 입자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는데, 괴테는 파동적인 어떤 무엇이라고 보았다. 입자적인 물질은 쉽게 대상화시킬 수 있는 반면에 파동적인 물질은 쉽게 손에 잡힐 수 없지만 그렇다고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그런 무엇이었다.

과학은 대상을 계량화시킬 수 있어야 하고 나눌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당연히 계량화할 수 없고 분리할 수 없는 파동적인 성질로 물질을 보았던 괴테는 과학자라는 칭호보다는 시인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고, 반면에 뉴턴은 근대 최고의 과학자로 불려지게 되었다.

뉴턴 이후 19세기 들어서 입자론과 파동론은 엎치락 뒷치락 그 우세를 교환하더니 20세기 들어와 인류사 최고의 과학자라고 하는 아인슈타인이 등장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에게서 물질은 입자적인 요소와 파동적인 요소가 함께 있어야만 그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흑체실험을 통하여 이런 확신을 증명하였고 나중에 그는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이 아니라 흑체실험 결과를 통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기도 하였다.

그의 물질관은 계속 이어져 딱딱한 입자적 물질이 부드러운 파동적 물질로 전환가능하며 그 역도 가능하다는, 세계를 바꿔 놓을 정도의 놀랄만한 과학적 성과를 내놓았다. 그것은 E = mc2 이라는 한 천재의 우주적 펼침이었다. 누구 말에 의하면 신神도 놀랄 일이었다.

2. E = mc2 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이제야 이 글의 본론인 책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과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도 E = mc2 이라는 공식 정도는 그 공식이 하도 유명하여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러나 말만 많이 들었지 실제로 그 내용에 대해서는 무지한 경우가 많았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도 어떤 책을 보아야 할지 잘 모르겠고, 겨우 책을 구하거나 강의실에서 접한 교과서 같은 책을 보더라도 너무 복잡해서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불만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작은 책자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은 간단히 말하면 고형의 물질과 무형의 에너지가 그 계량적인 측면에서 같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공식의 발견은 어마어마한 과학적 성과이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고래로부터 있어왔다. 성경의 첫 구절인 태초의 말씀의 존재가 그것이었고, 그 보다 앞선 신화의 시대에서 이 세계가 모두 정기精氣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런 정기가 어떻게 조합되느냐에 따라서 구체적인 자연물질이 형성된다는 생각 등이다. 그리고 인도나 중국을 포함한 고대 동양적 사유의 핵심은 바로 물질과 에너지의 전환가능성에 있었다.

이를 신화적 사유가 아닌 이성적 사유의 구도에서 그것도 수학적 계량화의 구조로 표현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사유의 발전 단계 혹은 인식의 이해 확장이라는 수준을 너머서 있는 매우 획기적인 인류사의 전환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전환은 아인슈타인이 아무리 천재라도 그 개인 자신에게만 공을 돌릴 수 없다.

이 공식이 등장하기까지 많은 역사적 배경이 되는 과학적 탐구과정이 있어 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나오게 되는 역사적 추이를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 총량의 합이 일정해야만 아마도 아인슈타인의 E = mc2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잘 생각해보면 과학이기보다는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 우선 그 보존이 되는 범위가 전우주적이어서 구체적이지 못하고 가설에 가깝거나 철학적 성찰에 가깝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 보존법칙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에너지가 없어지거나 새로이 생성되는 것이 없이, 그 전체 총량이 일정하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물질 체계에서 물질이 없어졌다는 것은 실제로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물질 체계로 옮겨진 것일 뿐이며, 새로이 생겼다는 것은 다른 체계에서 전이해 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전이과정에서 물질이 전이되어지는 그러한 물질 형태는 가시적이고 부피를 지닌 질량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 형태를 띄게 된다. 이를 에너지 보존법칙이라고 말한다.

에너지 총량이 보존되는 체계는 국지적인 체계가 아니라 우주 총합적인 전체계를 말한다. 우리는 앞서 말했듯이 우주 총합의 전체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작은 지구 체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말하고 있지만 전체 우주계의 차원에서 본다면 생성되는 것도 없고 소멸되는 것도 없다.

19세기 과학자들은 이런 모호한 범위를 파이롯트 실험이 가능하도록 작게 만들어서, 실험의 결과들을 정리하여 과학법칙으로 환원을 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지난 세기 과학적 성과의 배경을 업고서, 보존의 범위와 관계없이 적용가능한 에너지와 물질의 관계를 확립하였다.

이 관계식을 만들기 위하여 보존의 범위와 더불어 빛의 속도를 먼저 알아야만 했다. 19세기 말 영의 실험을 통해서 그동안 논란이 너무 많았던 빛의 속도를 너무 쉽게 알아 차렸다. 영은 기본적으로 빛이 입자보다는 파동적인 성질이라는 데서 출발한 과학자였고, 맥스웰이나 볼츠만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파동론을 우세한 이론으로 만들게 한 결정적인 사람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입자적인 취향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동론의 기본을 수용하고 이 둘을 종합하였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과학적 성과가 E = mc2 으로 나타났다.

3. 과학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이중주

공식 E = mc2 의 사회적 여파가 너무 심각했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독자들도 알고 있다. 그 여파란 바로 이 공식이 인류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의 가공할 만한 무기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객관적이고 사회적 가치관에 중립적이라는 통상적인 과학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이차 세계대전 중에 비록 전쟁을 종식시키는 했지만, 가치중립적이라는 한 과학법칙이 인류의 전체 가치를 뒤흔들어 놓고 말았다. 원자폭탄이 그것이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역은 일본이었지만, 떨어지기까지의 제조 과정에서 생겼던 인간의 갈등과 권력의 편견들이 이 책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여느 다른 책에서 볼 수 없었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나는 사실 개인적으로 하이젠베르크를 좋아했었다. 왜냐하면 양자론을 포함한 그의 과학적 성과들이 철저하게 철학적 기반 위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어릴 적에 이미 라틴어로 그리스 고전 문헌을 독파하였고, 이런 철학적 배경이 그의 과학적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나타난 그의 인간성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독일의 핵무기 개발을 미국보다 뒤쳐지지 않게끔 끈질긴 노력을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독일과 미국 사이의 원자폭탄 제조 경쟁에서 그 대표 주자가 당시 입자물리 최고의 과학자 그룹이었던 하이젠베르크와 오펜하이머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과연 과학자로서의 한 인간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한 인간 사이에 그렇게 괴리를 보일 수 있었을까 하는 낙담이 들기도 했다.

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아인슈타인의 E = mc2 이라는 자연법칙의 공식은 예를 들어서 활자로 찍혀 있는 마침표 점 하나에만 은하계에 있는 별들보다 더 많은 수의 양성자가 들어 있음을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 미세의 소립자인 양성자 하나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질량이 200 MeV 에너지에 해당한다. 이론적으로는 이머지 새천년 잡지 세 장 정도의 질량이 전 세계 인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낼 수 있다는 계산이 어림잡아 나오게 된다.

그것이 잘못 쓰이면 거꾸로 전 지구를 파멸시킬 수 있는 에너지와 같다는 끔찍한 말도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다. 고도로 불안정한 상태의 우라늄이나 플로토니움 같이 원자량이 큰 몇몇 원자만이 아인슈타인 공식을 현실에서 응용하는데 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도 단지 현재 과학기술의 한계 때문이다.

자연과학 역시 한 인간일 뿐인 과학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책이 어려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재미나게 읽혀질 수 있는 이유는 과학탐구만의 내적 이야기가 아니라 과학이 사회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하는 과학자 개인의 갈등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아인슈타인이 대학도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인정을 못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의 천재성은 주어진 학교 공부에 제한됨 없이 창의적인 우주인식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와 집안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할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게 도움을 주었다. 결국 과학이 단지 기술적 탐구가 아니라 자연을 이해하는 세계관의 문제임을 인식함으로써 실험 기술의 특이한 재주나 수학적 문제풀이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을 이어주는 창의적 통로임을 인지하는 일 그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의 천재성은 타고 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과 대화하며 만들어 가는 천재성이었다.

이 책은 단순히 아인슈타인의 자서전이 아니다. 오히려 E = mc2 라는 공식의 탄생배경과 그와 연관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개인 자서전보다 더 많은 자료가 있어야만 이 책을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더욱이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이 매우 인간적인 시선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말 번역도 말끔하다. 문장을 짧게 처리하는 문장력이 돋보였다. 이런 번역자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책 표지에 대한 불만이 있다. 대체로 책 속지 안에 원저자와 번역자가 나란히 소개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책에서는 원저자와 난데없는 감수자가 나란히 앞면에 소개되어 있고 번역자는 맨 뒤 한구석에 작게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내 짐작으로는 번역자의 지명도가 약해서 교수직인 감수자를 앞에 내세우고 이름 없는 번역자는 맨 뒤로 밀려난 것 같다.

괜찮은 번역은 창작과 같다. 이 책이 비록 학술서는 아니지만 오히려 일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도록 잘 만든 책이기 때문에 학자나 저명한 사람이 아닌 번역자의 능력이 더 빛나야 한다. 우리는 아직 전문 번역가보다는 지명도 있는 교수를 책의 내용과 관계없이 더 인정하는 풍토라서 그런가 보다. 진짜 고쳐야 할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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