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결정론의 환상 |
원저 : 그랜트 스틴,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 |
실린 곳 : 창작과 비평, 창작과 비평 |
2001 서평 : <게놈>(김영사),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전파과학사) 서평 - 창작과 비평 2001년 가을호 수록 매트 리들리(하영미 옮김), 게놈, 김영사, 2000 그랜트 스틴(한국유전학회 옮김),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 전파과학사, 2000 2권에 대한 서평 유전자 결정론의 환상<1> 1920년대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는 색인종과 빈민 유럽인들이 폭증하자, 미국 정부는 앵글로-색슨계가 희석될 것이라는 우려를 노골화하면서 우생학적 차별을 전제로 한 이민제한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11년에서 1931년까지 미국은 30개 주에서 정신박약인의 강제불임법이 법제화되어 있었다. 이런 악법은 60년대 들어와 대부분 폐기되었으나 버지니아 주에서는 70년대까지 강제 불임시술을 강행했다. 미국에서만 1910년대부터 25년간 10만 명 이상의 정신박약인들이 불임시술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노르웨이, 핀란드, 아이슬란드 등에서도 그러했고 스웨덴은 6만 명에 이르며, 악명 높았던 독일은 40만 명 이상을 불임시켰고 나중에 그 대부분을 학살한 사실을 기억한다.(유전자, 55쪽) 그 불행의 흔적은 일종의 생식유전의 강제적인 조절이 실현된 인류의 역사였다. 1997년 체세포 복제를 통한 돌리양의 탄생은 인간복제의 미래를 꿈꾸는 많은 과학 신봉자들에게 환상을 심어 주었다. 기존의 육종학자들이 해 왔던 생식세포 복제와 달리 체세포 복제란 손오공의 머리 한 올을 입김으로 불어서 수많은 동일한 손오공을 만든다는 이야기와 원리적으로는 같다. 이런 유전공학의 성과는 결국 과연 ‘내가 누구인가’라는 극단적인 자아 정체성의 철학적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그에 앞서 유전공학의 실용화 단계에서 사회적 책임의 혼란을 유발할 수 있는 생명윤리의 문제를 동반할 수 있다. 과거 우생학이 가져다준 사회 윤리의 혼란은 생식세포의 변형을 통한 과학의 무책임성에 있었지만, 이제 체세포의 인위적인 변형을 통한 유전공학은 그보다 훨씬 심각한 생명윤리의 괴멸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현대 유전공학의 흐름은 이런 사회적 문제와 관계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개인적인 생명복지의 문제를 유전공학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자들의 신념 때문이다. 이러한 신념은 많은 불치병 환자 가족들에게 유전자 치료법이 당장 나올 것이라는 과신과 책임질 수 없는 지나친 희망을 떠 넘겨주고 있다. 이러한 희망을 등에 엎은 유전공학의 내막은 올해 초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결과가 발표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고, 이에 따르는 사회적 논쟁 역시 가속화되었다. 그 논쟁의 범주는 다음과 같다. (1) 철학적 정체성의 논의 (2) 생명창조라는 신의 능력에 인간이 도전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문제 (3) 새로운 우생학의 발생을 우려하는 생명윤리 및 사회윤리의 문제 (4)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의료복지 차원에서 분자유전학과 같은 유전공학의 실용적 연구가 더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 (5) 과학의 탐구는 가치 중립적이어서 앞서 논의한 문제와 관계없이 생명과학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가치중립성의 논의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런 논지들은 기본적으로 생명체의 유전자가 세포 차원에서 혹은 생명개체 차원에서 생명체의 특질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의 틀을 내포한다. 유전자는 32억 개의 염기서열의 암호기호로 된 정보이며, 이 정보가 바로 특정 표현 형질을 발현시키는 유전자의 기능이다. 유전자의 의미는 특정 유전자가 각각 특정 부위의 형질 또는 생명현상과 일대일 대응된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이렇게 개별 유전자가 그에 해당하는 표현형질을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유전자 결정론이다. 결정론이라는 용어는 매우 철학적인 냄새를 풍기고 있지만 유전자 결정론을 방법론적 기반으로 하는 분자유전학에서 유전자 결정론이란 과학탐구의 방법론적 목표이기도 한 인과율을 대신하는 수사적 개념이다. 유전자 결정론에 근거한 유전자 복제는 유전자 자체가 각각의 고유한 형질 기능을 갖고 있으며 생명개체의 생명성은 유전자의 총합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사유가 가능해진다. 결국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것이 철학적이건 신학적이건 혹은 경제학적이건 관계없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지니는 유전자에 의해 모두 설명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생명체는 유전자의 기계적 조립품일 뿐이다. 이런 과학 탐구의 결과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된다. 결국 이런 문제 때문에 철학/신학적 문제와 사회윤리의 논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런 논쟁을 잘 들여다보면 내용과 관계없이 시비를 다투는 경우가 많다. 과학자 그룹 혹은 과학 신봉자들은 과학 탐구와 그 실용적 가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갈 길이 바쁜데 괜히 인문학적 시비를 걸어 귀찮을 정도로 사회적 논란거리를 만드는지 의아해 한다. 그들은 비판적 인문사회학자들이나 시민단체 사람들이 현재의 과학탐구의 수준이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이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른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인문사회학적인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과학자 그룹이 사회와 절연된 실험실 연구에 머물러 진정한 생명 가치를 모르는 맹목적의 위험수위로 다가가고 있다고 말하는 단순한 판단에 그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 과학의 기초자료들에 대한 포괄적인 수집을 못한 상태에서 풍문이나 대중적인 3차 자료만을 근거로 사회가치적 주장만이 있을 때, 현재 유전공학 연구성과가 갖는 진정한 의미를 놓칠 수 있다. 이런 양쪽의 문제들을 조율하는 일은 현대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논쟁은 많지만 상대의 이해를 구하거나 협조하는 일은 쉽지 않은 듯 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생명윤리기본법 시안을 놓고 문제가 되고 있는 윤리학자와 과학자 사이의 갈등이 그것이다. 대중적 여론과 유전공학 연구자들의 연구현실 사이에서 두 시야를 한 공간에 겹쳐 보는 정말 심도 있는 연결 논제는 매우 희박하다. 그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인문학자들 혹은 일반 대중들은 최근의 과학적 성과들을 풍문으로 들었거나 기껏해야 메스컴에서 인용된 아주 표피적인 내용만 알뿐이기 때문이며, 과학자들은 인문학의 사유나 사회적 연대의식이 부족하여 종합적 비판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읽을 수 있는 책 가운데에서도 의외로 과학탐구와 사회가치의 연결고리를 다루는 책들이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두 권의 번역서가 눈에 띄었는데, 하나는 <게놈>Genome이라는 제목의 책과 다른 하나는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DNA and Destiny 라는 책이다. <2> 이 두 권의 책은 대중 독자를 겨냥해서 쓰여진 책인데도 매우 깊이 있는 분자유전학과 행동유전학의 최근 성과들을 주의 깊게 다루고 있다. 과학탐구의 접근과 사회가치론적 접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이 두 관점을 같이 포용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책들이다. 과학 전문작가인 리들리의 <게놈>은 유전자가 안착되어 있는 23쌍의 염색체의 번호에 따라 각각의 염색체에 존재하는 천여 개 수준의 유전자가 발현될 수 있는 표현형질의 가능성들을 기술하고 있다. 반면에 과학 저널리스트이자 워싱턴 대학 행동유전학 교수인 그랜트 스틴의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은 형질로 드러난 인간의 특질에 해당하는 유전자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기술하고 있다. 두 저자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기술 방식의 방향은 서로 반대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한 사람은 어떤 병균을 발견하여 그 병균으로 인하여 발병 가능한 질병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은 어떤 환자의 질병이 있는데 그 원인이 되는 병균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과 비유될 수 있다. 어쨌든 두 저자 모두 유전자와 그 유전자로 인하여 발현되는 형질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문제는 유전자와 형질 사이의 관계가 (1)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단일한 인과율인가 (2) 혹은 아예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인지, (3) 아니면 인과적이기는 하지만 그 인과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이어서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 관계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 관계가 (1)과 같이 단순 인과관계라면 유전자 결정론이 된다. 이 경우 생명과학은 물리과학에 환원되거나 흡수된다. 쉽게 말해서 로봇 만드는 것처럼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날이 곧 온다는 뜻이다. 그러면 과학은 신을 능가하는 지구 역사상 최고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물질의 지평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관계가 (2)와 같다면 과학은 그 기술적 한계를 벗어나 원리적인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 생명의 고귀성이 유지되고 창조주의 권위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물질의 시대와 대비하여 “신화의 지평선”이라고 부르려 한다. 마지막으로 (3)과 같은 상황은 “암호의 지평선”으로 부르는데, 두 저자의 입장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물질의 지평선은 당연히 유전자 결정론을 강하게 암시한다. 예를 들어 <게놈>의 저자인 리들리에 의하면 5번 염색체 중의 특정 유전자가 천식을 유발하고, 어떤 특정 유전자는 눈의 색깔, 또 다른 유전자는 머리카락의 성질, 11번 염색체 중의 어떤 유전자는 혈액암 유발인자 등의 일대일 대응되는 방식으로 유전자와 형질 사이의 인과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기를 희망한다.(게놈, 6번) 앞서 말했듯이 이렇게 표현형질이나 유전병 등의 생물학적 요인이 고유한 특정 유전자에 있다는 생각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분자유전학과 같은 연구는 유전자 결정론의 생각을 배제하고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올 해 초 공개된 인간 유전체의 숫자인 3만 5천여 개의 유전자를 갖고 그렇게도 복잡한 인간 형질과 유전자 사이의 일대일 대응되는 결정론적 인과관계를 모두 밝히기에는 어림도 없는 작은 숫자였다. 그 반증이 벌써 나타났다. 1998년 중반에 천식 유발인자는 5번 염색체에는 무려 8개의 후보가 있고 6, 12번에도 천식 유전자의 후보가 2개 씩 그리고 11, 13, 14번 염색체에도 그 후보를 발견하였다.(게놈 91쪽) 결국 유전자 차원에서도 특정 유전자가 질병 등의 특정 생리학적 현상에 대한 충분 조건이 아니라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유전자 결정론을 따르던 과학자들도 유전자 공학의 과학탐구가 발전하면 할수록 오히려 형질과 유전자 사이의 결정론적 일대일 대응론이 정상과학의 위상을 차지할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약화되어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렇게 유전자 결정론은 최소한 현재의 수준으로는 단언될 수 없다. 그래도 여전히 매스컴에서는 간암을 유발하는 특정 변형유전자를 발견하면 간암이 완전히 극복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여 장밋빛 희망만 던져주고 있다. 어떤 유전자는 분명히 특정한 생명현상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연관방식이 단순히 일대일 대응되거나 직접적인 인과율에 의해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 잠재형질과 유전자와의 연관방식은 매우 복잡한 조합구조를 갖는 유전정보의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어서 현재의 과학수준으로는 일의一意적인 해명이 불가능하다. 어떤 특정 유전자의 정보는 형질을 발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모두가 아니다. 발현되는 형질은 유전자들 사이의 생태학적 관계의 발현이기도 하다.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의 저자인 그랜트 스틴 교수는 이 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유전자들 사이의 생태학적 관계란 결정론적인 유전자의 기능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 그리고 유전자의 진화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환경의 영향력들을 인정하는 유전자 환경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단일한 유전자가 단일한 형질을 발현시키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유전자 결정론의 사례에서조차도 단순한 경로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랜트 스틴이 제시한 단일 유전자의 단일 형질 발현의 한 가지 사례를 보자. 중앙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질병이 하나 있는데, 겸형 적혈구 빈혈증이라 불리는 일종의 유전병이다. 이 빈혈증은 어떤 유전자 혈액 단백질의 돌연변이로 생기는 것으로 헤모글로빈의 능력을 감소시킴으로써 세포 조직에 산소를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하게 되어 강한 빈혈 증세와 함께 치명적인 뇌졸중에 걸리고, 살아 남은 어른이라도 심장병이나 성장 저해 현상 등 인체 손상이 매우 큰 유전병이다.(유전자, 130쪽) 이 유전병의 원인은 특정하고 단일한 유전자의 변형 때문이다. 이렇게 한 특정 유전자가 특정 형질을 유발시키는 유전의 현상을 “단순 형질의 유전”이라고 부른다.(유전자, 20쪽) 그런데 겸형 적혈구 빈혈증조차도 사실은 그렇게 간단히 유전자 결정론의 한 사례로 보기 어렵다. 이 빈혈증이 분포된 중앙 아프리카는 원래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지역이다. 말라리아는 아직도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겸형 적혈구 유전체를 지닌 사람들은 말라리아 병원충에 대하여 강한 저항력은 나타내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유전체와 어머니의 유전체 반반씩 나눠 갖고 있는 온전한 유전체는 반쪽의 두 유전체가 모두가 겸형 적혈구 유전체일 경우에만 빈혈증상이 나타난다. 한 쪽만 겸형 적혈구인 경우는 빈혈증 발병이 없고 그 대신 말라리아 예방접종 없이도 그 무서운 말라리아에 걸리지 않게 된다. 참으로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아프리카의 거센 풍토병에도 다 살수 있을 만한 자연환경과의 자연스러운 조화는 결코 인간의 현대 생명공학의 신화인 유전자 결정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유전자는 그렇게 결정론적이고 단순히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속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염색체 마디를 부분 교체하여 변형 형질이나 새로운 생명기관을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부분적으로 옳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유전자가 아주 먼 과거로부터 밟아온 진화의 역사를 교체할 수 없기 때문에 유전자 결정론은 반드시 한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 한 생명의 개체에서 다음 개체로 이어주는 생명의 씨앗은 두 개체 사이에서 작동하는 유전의 매체로서만 기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체 생명체의 역사를 호흡하는 숨결 한 숨결 하나도 놓치지 않는 생명사의 주체이다. 그런 생명의 작은 씨앗들 사이에 작용하는 것이 바로 생태적 연관성이다. 이제 진화의 결과인 생태적 연결의 생명사를 놓치고 단절된 단위 유전자의 안경을 끼고 생명과 자연의 책을 읽는다면, 우리는 과학적 결정론이라는 옷을 입고 나타난 고립된 기계 부속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리들리의 한 문장을 인용해 본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는 잘못된 믿음을 기초로 한다. ‘사람의 게놈’이란 없다. 어느 한 순간에 포착된 모습을 변하자 않는 영구한 이미지로 믿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확실성과 안정성과 결정론의 오랜 세계가 무너졌다. 그 자리에 우리는 파동이 있고 변화하며, 예측할 수 없는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대에서 판독하는 게놈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문서 하나의 스냅 사진일 뿐이다. 결정판은 없다.”(게놈,175-6쪽) <3> 이 두 권의 책은 최근 2년여 전까지의 유전공학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쓰여진 교양 과학서이다. 비록 대중을 겨냥한 책이기는 하지만 생명의 전체 숲을 놓칠 수 있는 일선 과학자들의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 한국의 일선 생명공학 연구자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한편으로는 단편적인 일반 매스컴의 과학기사가 독자들로 하여금 디엔에이 메타퍼의 환상과 오해를 줄 수 있는 인간 게놈 연구의 의미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고 평가한다. 정밀한 과학자료 수집과 건전한 사회윤리적 가치관이 함께 조율된, 보기 드문 책들이다. <게놈>의 저자인 리들리는 매우 긴장감 있는 문장력을 구사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차갑고 건조한 과학의 내용들을 적절한 메타퍼와 적소의 강조점을 두어 과학에 대한 일반 독자들의 두려움을 나름대로 해소하고 있다. <게놈>의 원저를 전부 대조해보지 않았지만, 역자의 번역은 매우 충실하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너무 충실하다 보니 문장의 어순이 영어식으로 남겨진 데가 눈에 띠며, 행간에 담겨진 원저자의 수사적 뉴앙스가 침식되어진 곳이 발견되곤 한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매우 진지한 번역이다. <유전자와 인간의 운명>은 한 마디로 말해서 좋은 책이다. 더욱 좋았던 것은 이 책을 <한국유전학회>의 이름으로 번역했다는 점이다. 한국유전학회는 일선 생명공학 연구자들의 학회이면서도 최근 공학적인 연구방향에 대한 자기 비판적인 책을 공동으로 번역하고 있다. 무려 34인의 현직 연구자들이 모여 번역했는데 그 수에 놀랐지만 그보다 번역의 통일된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는데 더 놀라웠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용어 통일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생물학 용어는 통일되어 있지만, 지능/지성, 재능과 같은 쉬운 용어가 혼재된 것이 눈에 띄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 책이 좋은 책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말 뜻으로 쉽게 읽혀지지 않는 문장들이 더러 있으며, 일반 독자들에게 어려운 용어가 자주 등장된다. 전공으로 하는 역자들이 쉬운 역주를 달아주었으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 최종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