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의학의 철학과 역사적 조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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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린 곳 : 과학철학, 과학철학
2001 서평논문 : “중의학의 철학과 역사적 조건들”  서평논문, 과학철학 4권2호(2001년12월), 121-135쪽

중의학의 철학과 역사적 조건들



(이 원고는 시빈 교수의 허락을 받아 원저를 번역하고 있는 김시천, 구태완, 권상옥, 김성준, 김성우, 최종덕의 동의과학연구소 공동연구팀의 중간점검 형식으로 쓰여졌다. 그리고 현재 영국 니담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있는 이충렬 교수의 도움이 컸음을 밝힌다.)


1. 의학 편 발간 배경

서평형식의 이 원고가 다루는 원저는 시빈 교수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시리즈 중에서 가장 최근(2000년)에 발간된 6권 6호 <의학>편이다.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ume 6-6 : B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y, Part Medicine. (Joseph Needham and Lu Gwei-djen, edited by Nathan Sivi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261면, 이 책이 위치한 사상적 맥락을 알기 위하여 1954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과학과 문명』 프로젝트 이후 지금까지 발간된 21권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 시리즈 목차만이라도 소개해야 할 것 같다.

Volume 1 : Introductory Orientations (Needham,1956)
Volume 2 : History of Scientific Thought (Needham,1956)
Volume 3 : Mathematics and the Sciences of the Heavens and the Earth (Needham,1959)
Volume 4-1 : Physics and Physical Technology, part: Physics, (Needham,1962)
Volume 4-2 : Physics and Physical Technology, Part: Mechanical Engineering, (Needham,1965)
Volume 4-3 : Physics and Physical Technology, Part: Civil Engineering and Nautics, (Needham,1971)
Volume 5-1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Paper and Printing (Needham, 1985)
Volume 5-2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Spagyrical Discovery and Invention: Magisteries of Gold and Immortality (Needham, 1974)
Volume 5-3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Spagyrical Discovery and Invention: Historical Survey from Cinnabar Elixirs to Synthetic Insulin (Needham, 1976)
Volume: 5-4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Spagyrical Discovery and Invention: Apparatus, Theories and Gifts (Needham, 1980)
Volume 5-5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Spagyrical Discovery and Invention: Physiological Alchemy (Needham, 1983)
Volume: 5-6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Military Technology: Missiles and Sieges (Needham/Yates, 1995)
Volume 5-7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Military Technology: The Gunpowder Epic (Needham, 1987)
Volume 5-9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Textile Technology: Spinning and Reeling (Needham, 1988)
Volume 5-13 : 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Part: 13, Mining (Golas, 1999)
Volume 6-1 : B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y, Part: Botany (Needham, 1986)
Volume 6-2 : B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y, Part: Agriculture(Francesca Bray,1988)
Volume 6-3 : B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y, Part: Agroindustries and Forestry. (Christopher.A. Daniels and Nicholas .K. Menzies, 1996)
Volume 6-5 : B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y, Part : Fermentations and Food Science, (H.T. Huang, 2000)
Volume 6-6 : B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y, Part : Medicine. (Joseph Needham and Lu Gwei-djen, edited by Nathan Sivin, 2000)
Volume 7 : The Social Background, Part : Language and Logic in Traditional China ( Harbsmeier, 1998)

니담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프로젝트는 먼저 중국과학 사상사 부문, 수학과 우주기하학, 물리과학, 화학분야, 생물의학 부문 그리고 사회사상사 부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장 최근인 작년에 출간된 두 권의 책으로서 의학 부문과 음식문화 부문은 물론 니담이 죽은 후에 나온 것이지만, 이미 니담 생전에 많은 부분이 발표되고 계획된 원고였다. 군사 편과 식물 편 탈고 이후 1986년부터 니담은 의학 편 편집을 조금씩 준비해 왔지만, 실제로 원고 내용은 1962년 발표된 원고부터 편집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 도로시 여사의 죽음과 건강상의 문제로 보류해 온 것을 시빈에게 원고마감을 부탁했고 시빈은 1993년부터 본격적인 의학 부문 작업을 해왔었다.

(각주: Nathan Sivin 교수 : 펜실베니아 대학교 중국문화와 과학사 과정 교수이며 니담연구소에 관여하기 전부터 니담 교수와는 깊은 학문적 교류를 이어 왔다. 시리즈 중에서 1979년 연금술 편을 발간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저작은 Medicine, Philosophy and Religion in Ancient China (1995), Science and Medicine in Twentieth-Century China (1989), Traditional Medicine in Contemporary China (1987) 등이 있다.)


그 편집원고이면서 이 책의 내용이기도 한 목차를 나열해보자.

introduction(1996) : 시빈 교수의 소개글 ; 편집 배경과 책 전체에 대한 소개글이지만 매우 비판적인 편집자의 기준을 견지하고 있다. 이 내용은 1996년 8월 서울에서 열렸던 제8차 국제 동아시아 과학사대회에서 발제한 내용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a) 중국문화 속의 의학(1966) : 고대중국 봉건주의 사회에서 고유한 의학의 발생 배경, 중국의학의 철학적 사유구조와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의 연관성 등을 다루었다.
(b) 고대중국에서 보건위생 관리와 예방의학(1962) : 니담과 그의 평생 동료인 류의 공동작업으로서 초기 원고이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도가 전통에서 질병 대처에 대한 사유구조를 다루고 있으며, 공적 혹은 민간의 고대 의료기구와 조직의 배경을 다루었다. 그리고 고대희랍과 로마의 보건위생 사료와 비교한 것이 매우 훌륭한 내용으로 평가받고 있다.
(c) 의사고시 시험의 기원(1962) : 10세기 경부터 시작된 의료인 자격시험은 서구보다 월등 뛰어난 역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아랍지역의 자격시험의 기원을 같이 비교설명하였다.
(d) 중국에서 면역학의 기원(1980) : 백신의학이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다. 류 교수의 뛰어난 참고자료 인용이 매우 돋보인다. 서구 현대의학만이 과학적이라는 편견을 없앨 수 잇는 자료라고 본다.
(e) 고대중국 법의학(1988) : 사고사, 살인, 자살에서부터 독살, 傷害, 放火, 유산, 처녀성, 사망시점 추정 논쟁에 이르는 법의학적 판단의 문제를 다루었다.


원래 니담과 시빈은 중국과학을 보는 시각의 차이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다른 시리즈와 달리 편집자 시빈이 자신의 입장에서 니담과 류게이전이 발표했던 논문들 5편을 엮었고, 추가로 시빈 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나타낸 서문을 보탰다. 서문을 쓴 시빈은 본문에서 다뤄진 니담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다른 시리즈와 다른 독특한 편집이 되었다는 뜻이다. 니담과 시빈 모두 사료에 매우 충실한 실증적 연구태도를 견지한다. 그 중에서도 니담은 젊은 시절 마르크스의 영향을 깊게 받은 탓인지는 모르나 사회사적 연관성을 중시하는 반면, 시빈은 좀더 철학적인 시각이 많은 편이다. 특히 의학 부문에서는 시빈이 니담보다 더 많은 연구시간을 할애했다고 자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듯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니담의 철학적 사상은 크게 손상되는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시빈 교수는 비교사상사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 주안점은 문화비교에서 비교 상대는 서로가 서로에게 우월한 지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은 물론 니담의 비교연구 관점에서 연원한 것이다. 시빈은 더 구체적으로 기술의 진보가 어디까지 의학에 영향을 주었는지, 임상과 의학사상이 서로에게 갖는 영향력은 무엇인지, 정치시회적인 측면이 보건의학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의학부문에서는 철학적 배경 내지는 자연관의 이해방식이 중요한 근거임을 주장하고 있다. (원저 21-24쪽)


2. 과학적 기준과 治心의학으로서 중국의학

최근 한의학의 과학성 문제가 논쟁이 된 적이 있었다. 과학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사실 과학이라는 내적 기준에 판단되기보다는 과학 외적 기준 즉 문화사적 기준이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과학성 논쟁 이면에는 과학 이외의 숨겨진 외적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과학적인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가치 개념의 삽입이다. 둘째로는 과학적 기준말고는 다른 기준을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묵시적인 과학의 위세가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니담은 물론이거니와 시빈 역시 철저하게 그런 관행적 기준을 비판한다. 이런 비판적 자세가 없었다면 아마도 20권 넘는 분량의 이 시리즈 출간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의학편 역시 중국 전통의학의 과학성의 문제를 갖고 시작한다. 최근 논쟁 같지도 않은 논쟁으로 벌어진 한국 개고기 논란은 서구인의 문화적 시각으로 한국문화의 속성들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동양 침술 역시 서구과학의 시각으로 볼 경우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불법적 의료행위가 되어 버린다. 서구의학에도 압통점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압통점은 서구의학 중에서도 과학적으로 검증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서구의학계에서 용인되고 있는 경락의 개념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러한 서구의학의 압통점 개념으로 볼 경우에도 역시 물리적 공간개념을 초월해 있는 침자리나 뜸자리 개념은 불합리하고 비과학적으로 본다. 그러나 침자리를 통한 침술은 의학과 문화가 맞닿아 있는 의료행위의 일종이다. 그래서 동양의학은 과학적이냐 비과학이냐 하는 과학의 내적 기준만 평가할 수 없으며 과학외적 요인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중국의학의 특성을 ‘통문화성’(mutual understanding in the intercultual and intercivilisational confrontations)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동양의학의 최고 경전인 내경에서는 의사의 의료 행위가 갖는 의미가 단순히 인체에 대한 치료기술로 전락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내경은 그 안에 이미 형이상학적 존재론에서 구체저인 자연관 그리고 사회학적 인간론과 개인의 심리학적 측면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내경은 우주의 운행방식과 현실의 사회적 구동력, 그리고 한 인간의 신체적 조건들 마지막으로 심리적 자극과 반응들의 구조가 그 범주는 다를지언정, 거울 반사적 동일한 시스템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사는 사람의 신체구조만 알고서는 불가능하며 거시적인 측면에서 세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통찰력, 자연의 운행방식에 대한 이해, 그리고 미시적인 측면에서 심리적인 인간사이의 섭동관계 등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의사는 군자가 군자 될 수 있는 군자다움의 캐릭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시빈이 니담의 글을 편집한 내용 중에서 이러한 위의 생각들이 중국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고대희랍의 정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인용문을 《일리아드》Iliad (XI, 514)에서 따왔다.

A good physician skilled our woes to heal
It worth an army to the public weal. (40쪽)
훌륭한 의사는 우리의 고통을 능숙하게 치료하니
군대가 공공의 안녕을 지키는 것처럼 귀하도다.

진정한 의사와 군자를 유비시키는 일은 단순히 유가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면 안 된다. 고대 중국에서 군자의 캐릭터란 정치적 의미의 사회적 탁월성과 수양론적 의미의 인간적 탁월성이 분화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중국철학 특히 유가사상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 점은 고대 희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은 그보다 더 오래된 샤마니즘의 영향이 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원저작자들의 판단인 듯 하다. 이런 판단은 그 근거를 대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성이 개입되기 전과 개입된 이후의 세계관과 사유방식의 변화가 매우 크며 외형적으로 어느 정도의 사유의 단절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BC 5-6 세기 경 희랍이나 중국이나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여겨진다.

그 사유의 단절성을 만든 강을 사이에 둔 양 진영은 사마니즘과 이성언어 체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의 다리였다. 고대 제정일치 사회는 고대희랍에서 철인정치로 연계된다고 한다면, 고대중국에서는 수양론과 사회철학으로 연계되는 상황을 유도했다고 본다. 특히 의술 행위자에게 있어서 그 연계성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원작에서도 중국에서 의자醫者의 사회적 신분 변화는 일종의 기술자였던 巫者로부터 유가적 지식인인 士로 가는 이행과정이었다고 한다. (원저, 40쪽)
이런 이행과정을 통해서 의자는 단순히 의료행위 기술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혹은 자연학적 세계관의 통찰력과 사회적 관계의 통달력이 더 요구되었다. 이것이 바로 내경 사상의 기본을 이루기도 한 것이다.

그래도 중국의학은 유가보다는 도가의 강한 영향력 아래 발전되었다. 이는 공자의 《논어》에서 말하고 있듯이, “군자는 도구로서 행동하지는 않는다.”(2:12, 君子不器.)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인 전한 시대에는 方士라 불리우는 중간 부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방사는 단순히 주술사이기보다는 군자에 이르는 수양론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경험론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원저자들도 각주에서 어느 정도 시인하고 있다. 원저 40쪽 각주4
그래서 의자는 “秘方을 소유한 군자”(gentleman possessing magical recipes)이기도 한데, 이는 진정한 의자는 도가적 의미의 군자가 되어야 함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으로 본다.

상형문자 시기의 고대중국 역시 의자는 ‘呪術醫’(medicine-men)였다. 이들은 북아시아 부족의 샤만(the shamans)과 같은 원류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시대가 지남에 따라 이들은 각종의 전문적인 직업 종사자로 즉 의자는 물론 도교의 연단술사, 天際를 담당하는 초혼자(招魂者)와 예학자(禮學者), 방제학자, 수의사, 사제, 신비가 및 다른 많은 부류의 사람들로 분화되었다. 공자의 시대 즉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기까지는 의자들의 분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공자 자신이 “인내심이 없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치료자(巫醫, a good healer)가 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공자는 巫와 醫를 구분하지 않고 치료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원저자들은 여기서 아주 적절한 논어의 인용문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인내심이란 恒心을 의미하며, 항심은 수양이 어느 정도 완성된 사람들이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주: 《論語》13:22, 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不恒其德, 或承之羞.” 子曰: “不占而已矣.” 황희경은 이를 이렇게 옮기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쪽 지방의 말에 ‘사람이면서 항심(恒心)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사도 되지 못하리라.’고 하였으니 참 좋은 말이다.” [《周易》의 항괘 효사에] “꾸준한 마음이 없으면 부끄러운 일을 초래하게 되는 수가 있다.”고 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항심이 없는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 것이 좋다.”(231쪽) )


다시 말해서 중국의학은 그것이 샤마니즘의 영향을 받았건, 아니면 나중에 유가나 도가의 영향을 받았건 의자의 치료술과 의자 개인의 수양론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음이 매우 중요하다.

3. 사상적 배경

중국의학은 이미 알려진 대로 기氣의 결집과 분산 그리고 그 기가 어디에 배속되는가에 대한 기의 운동성의 통찰력으로부터 시작된다. 음양의 이분법이 서구 실체론의 경직된 구획과는 다르다는 것은 많이 논의되어 왔다. 고래로부터 중국의 음양론은 의학에서뿐만이 아니라 천문과 정치, 일상적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안내지표인 셈이다. 음양으로부터 존재의 모든 것이 규정되어 왔지만, 그 기로부터 구체적인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논의는 한 대에 와서 완성된 듯하다. 그것은 바로 오행사상이다. 고대중국의학에서 음양과 오행은 그 이론발생의 시대적 차이를 극복하고 매우 조화로운 방식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런데 의학영역에서 그 연결고리에는 반드시 6이라는 가이드라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체의 어떤 통로를 따라 흐르는 六經(the six circulation tracts)과 그것이 외부와 섭동하는 외적 요인인 6 가지 기상상태를 들 수 있다. 6경은 양에서 분리된 太陽, 陽明, 少陽이 있으며 음에서 분리된 太陰, 少陰, 厥陰이 있다. 그리고 외적인 6가지 요인은 風ㆍ暑ㆍ濕ㆍ寒ㆍ燥ㆍ火가 있다.

여기서 원저자들의 탁월한 해석을 우리는 읽을 수 있었다. 기의 6 가지 배속이나 6 가지 외적 요인들에 대한 분석은 많았지만 그것이 어떤 사상적 흐름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해석은 별로 없었다. 이 책에서는 고대 희랍사상, 인도의학과 비교하면서 2, 3, 4, 5, 6, 8, 11, 12 등과 같은 세계를 구획하는 숫자 혹은 세계를 인식하는 숫자의 의미를 서로 비교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 인도의학과의 차이, 바빌로니아의 영향일 수 있는 숫자 12의 의미 등, 독자들은 매우 신선한 해석을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중국의학과 관련해서 氣에 대한 이해는 전부라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氣는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노이마(pneuma)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이 시빈 교수의 생각이다. 여기서 희랍의 노이마가 먼저냐 아니면 중국의 기가 먼저인가라는 기원론 논의는 불필요하다. 이는 고대인이 공통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단지 서구는 이런 생각을 인식론이라는 철저한 분석주의로 이어간 반면 중국은 삶의 존재론으로 즉 수양론으로 이어간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했든 氣와 노이마는 서구 존재론의 입장에서 볼 때 모두 적절히 번역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일상적인 의미 분석으로는 “생명의 숨” “미묘한 영향력” “가스적인 발산” 및 이와 비슷한 것들이 포함된다.

그리스 의학의 노이마 역시 고대인도 의학의 프라야나(prana)와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고대 경험과학 장르에서 동서양을 불문하고 존재에 대한 아주 폭넓은 일치점(a widespread community)을 볼 수 있다. 그리스로부터 인도를 거쳐 중국을 포괄하는 “프네우마틱 의학”(pneumatic medicine)이 존재함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가장 경험론적으로 발전시킨 중국의학의 성과는 서구 현대과학의 잣대로만 잴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프네우마틱 의학 혹은 기철학의 의학이라는 관점에서 원저자들은 고대희랍의학이나 인도의학 그리고 중국의학의 원형적인 학파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발원한 바빌로니아 의학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주장은 매우 신선하게 느껴지지만, 그 주장에 대한 설득력은 약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시빈의 다른 책(1995)에서 이 논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고대의학의 원형론을 따지기 전에 고대중국의학이 갖는 고유성은 매우 독특하다. 예를 들어 중국 사상에서 두드러진 대우주와 소우주의 일원론적 사유가 그것이다. 그것은 국가가 백성에 대해, 그리고 백성들의 건강이 四時의 우주적 변화에 대해 절대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잇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五行은 “상징적 상관성 속에서” 다섯 집단으로 된 많은 다른 자연 현상들과 연결되었다. 이런 식의 이해가 인간의 살아 있는 몸의 구조와 기능에 대해 지극히 체계적인 방식으로 적용되었으며 그 지적 결과물이 내경이다. 관료제적 봉건제라는 독특한 형식을 발전시키고 있던 중국사회는 정치 영역과 백성들의 일상적 삶 모두에서 일어나는 모든 憂患에 대해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후後방법을 기다리기보다는 예방법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의학 사상의 분야에서도 예방이 치료보다 더 좋은 것으로 여겨졌다. 초창기부터 중국 의학에 영향을 주었을 듯한 외적 영향들에도 불구하고, 중국 의학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유지해 왔으며 여전히 명백하게 그러하다.

그러나 중국의학이 먼 고대에서 내경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체계화되었는가에 대한 논의는 매우 허약하다. 먼저 그 체계는 과학의 조건인 귀납법적인 사유에서 미흡하다는 지적을 한다. 그러나 내경은 매우 과학적이다. 먼저 내경은 그 이전의 신비주의 사유들을 불식시키는데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우선 철저하게 경험론적인 방법을 통해서 진단과 처방이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내경이 갖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사유규조와 그것을 임상에 구체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경험론적 방법론이 합리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 수만은 임상결과에 대한 귀납적 증상분류와 연역적 처방분류가 있어야 한다. 증상과 처방에 관한 분류는 후일 장개빈이 다시 적은 내경에서 자세히 다루어져 있지만, 중요한 점은 세간에 돌아다니는 신비주의 경향의 민간의료나 주술의료를 철저히 배격하려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원저자들은 아주 흥미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그것은 내경內徑의 “內”에 대한 해석이었다. 물론 알고 있기는 한 사실이지만 내경이 칼을 댈 수 없는 인체 속을 다루는 서구의학의 내과라는 개념의 “내”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이런 지적을 하기 위하여 원저자는 도교에서 내단과 외단의 차이, 장자의 내편과 외편의 차이, 그리고 朱肱이 후일 지은 침술에 관한 도해 책자인《內外二景圖》등을 예시하고 있다. 이런 지적은 단순히 문헌학적 자료분석에 그치는 일이 아니라, 신비주의를 불식시키려 했던 고대 중국의학의 특징을 부각시키려는 데 있는 것으로 나는 읽었다.

4. 사례 연구

생물학과 의학이 만나는 현대 의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부문은 의심의 여지없이 유전학과 면역학이다. 유전공학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유전학이야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이미 현대과학의 핵심 연구사업이 되었다. 그런데 유전학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면역학이다. 면역학은 전염성 질병에 대한 안티 작용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탄생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잇는 면역학은 기껏해야 19세기 중반 파스퇴르나 19세기 말 메치니코프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면역학은 이미 중국에서 11세기 <구급방편>에서 천연두 예방을 위해 사용된 기록이 있다. 요즘 말하는 주사 형태의 백신은 아니지만 코점막을 통해 소의 피부고름을 흡수시킴으로써 천연두 예방이 가능함을 중국인들은 알고 있었다.

중국의학에서는 이독공동以毒攻毒 의 개념이 바로 면역학을 창시하게 된 사유배경이다. 독은 독으로서 치료한다는 뜻으로 강한 독에 대한 예방 차원에서 미리 약한 독을 주입하여 강한 독에 대한 사전 면역효과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중국의학에서 이런 이독공독의 개념은 물론 면역학에 국한된 개념은 아니었다. 일반 처방에서도 일시적이고 갑작스러우며, 강한 약효를 기대하는 것을 중국의학에서는 금기시하고 있다. 그래서 본 처방을 하기 위해서는 처방을 받는 환자가 약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체적인 외적 조건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경 처방의 기본인 辨證論治 개념으로부터 이독공독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원문에 나오는 흥미로운 사례를 그대로 옮겨보자. 돈황 근처에 있는 천 분의 부처님을 모신 천불동 동굴 사원을 방문했을 때, 나는 사람들이 중앙의 여러 조각상 주위를 돌면서 노란 종이 조각을 붙이는 것을 지켜보았던 기억이 있다. 노승들이 그 중앙을 같이 돌면서 ‘관’ 關표시와 함께 여러 질병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여진 ‘관’자 주위를 돌고 경전을 독송하였다. 예를 들면 한가지 관에는 콜레라, 다른 관에는 수두, 다른 관에는 백일해 그리고 다른 관에는 천연두 등이 적혀 있었다. 생각해볼 수 있는 모든 병마다 반드시 통과해야 할 각각의 관문이 있었다. 그리고 도교 승려들이 역질에 걸릴 수 있는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을 각각의 질병이름이 붙은 깃발을 꽂은 항아리 관 앞에 세워 놓고 알맞은 기도문을 독송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아이들이 어차피 걸릴 전염병의 관문이라면 미리 병에 걸린 것으로 간주하여 이를 치료하는 일종의 종교의식이었다. 이러한 종교의식은 기본적으로 걸릴 병이라면 미리 약하게 걸려서 쉽게 치료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어차피 통과해야 할 관문을 미리 그리고 조금은 쉽게 통과하고 싶은 마음, 이것이 바로 중국 면역학 탄생의 사유가 되어 왔다. 이렇게 원저자들이 면역학을 다룬 이유는 중국의학의 한 부문을 설명하려 했다기보다는 관문의 사례처럼 중국인의 사유구조와 중국의학 내지는 민간의료의 연관성을 강조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이제는 법의학적 관료체제와 관련된 부문을 읽어보자. 서구 근대과학이 탄생하는 16세기 경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좀 더 구체적으로 요구되었다. 심장의 멈춤인가 아니면 팔다리나 목과 같은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간 것인가 혹은 숨을 쉬지 못하는 상태인가 등의 죽음의 기준은 정치사회적인 형법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되었다. 이런 기준 역시 중국에서 훨씬 빠른 기록을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 이런 기록은 비록 의사가 아니지만 법체제를 공부한 宋慈가 1247년에 쓴 󰡔洗冤集錄󰡕이다. 그런 기준이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윤리적이며 공리적이지는 않았지만, 매우 합리적인 기준이었다고 원저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화타, 편작의 입장은 역사기록으로 정확치는 않으나 사고사, 살인, 자살에서부터 독살, 傷害, 放火, 유산, 처녀성, 사망시점 추정 논쟁에 이르는 법의학적 판단에 대한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하고자 했다.

12세기 의사 자격고시 내용은 의료기술뿐만이 아니라 의사로서 판단해야 할 윤리적 문제와 법적인 판결요인들까지도 포함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주검과 관련하여 장의사와 의사 역할의 구분이 모호할 경우도 있었지만, 중국에서 의료지식과 법학 그리고 일반인들이 의사를 믿을 수 있는 관료적 권위 등이 하나의 법의학적 체계를 형성하였다.

5. 결론 : 비교연구의 의미와 과제

원저는 다른 시리즈 어느 것 이상으로 비교문화적 관점이 강하게 들어와 있다. 중국 종이나 인쇄술, 나침판, 화약 같은 과학기술에 대한 동서 비교는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게 다루어 질 수 있으나, 의학 부문은 서구적 관점이 이미 팽배한 현대사회 안에서 개념의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과연 중국의학이 과학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인지, 혹은 정말 과학기술의 장르로서 기술될 수 있을지 자체를 의심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원저자들은 비교연구가 우위를 점검하는 연구가 아님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으며, 나아가 반드시 과학만이 비교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강한 입장도 글 속에 내포되어 잇다.

이 책은 니담연구소 성과물 중 가장 최근의 작품이다. 동양의학이 서양의학보다 뛰어난 특징을 서양의학 개념으로 따진다면 예방의학이라는 점이 단연 두드러진다. 예방의학을 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임상보조 기능인 기술적 측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여기에는 철학적인 배경과 동서 자연관의 차이를 분명히 기술해야 한다. 이 책은 예방의학, 면역학, 법의학, 의료관료체제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는 있지만 철학적인 자연관의 논의가 상대적으로 미흡한 편이다. 아마도 이 과제는 역사가의 일이기보다는 철학자의 일일 수 있다. 기성학자의 연구성과로 볼 때, 니담 이후 중국의학의 중요한 연구자로 평가받고 있는 시빈 교수와 뮌헨의 운슐트 교수 사이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시빈 교수는 당연히 역사적 관점에 중점을 둔 반면, 운슐트 교수는 중국의학의 고유한 지연관과 임상방법론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점이 운슐트 교수에게서 중국의학의 사상적 배경을 더 많이 기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Paul U. Unschuld, Medicine in China : A Histoty of Ideas, Berkeley, Los Angeles: Univ. of California Press, 1985.


한국에서 동양 전통의학은 유일하게 살아 남은 전통과학의 한 장르이다. 그래서 의학사나 의학철학과 같은 인문의학 연구는 단지 임상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비교연구의 핵심이다. 시빈 교수의 말대로 인문의학 연구는 연구자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 중요하다. 사료해석과 철학적 자연관의 중요성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서양학자가 해 놓은 실증적 자료 분석이나 해석의 성과들을 보면 동양인인 우리가 창피할 정도이다. 이제 철학사상과 사료분석을 종합적으로 할 수 있는 국내 연구자 그룹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20세기 들어서 현대적인 스타일로 의학사상사를 다룬 작품으로서 중국에는 陳邦賢(1937)에서부터 최근에 나온 內徑多學科硏究 그룹과 馬伯英까지. 그리고 일본에는 조선의학사를 쓴 三木榮에서 야마다 게이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구자 형성이 탄탄하게 이루어졌지만 한국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미약하다. 시빈 교수는 한국 고유의 임상의학 장르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할 때 그 연구성과는 무시할 정도로 거의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기분은 상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시빈 교수의 말이 맞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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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gehisa Kuriyama, The Expressiveness of the Body and the Divergence of Greek and Chinese Medicine, New York: Zone Books,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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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다 게이지(박성환 역), 중국과학의 사상적 풍토(1982), 전파과학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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