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
원저 : 정부희, 곤충의 유토피아
실린 곳 : 곤충의 유토피아, 곤충의 유토피아
정부희 지음 <곤충의 유토피아>(상상의 숲) 추천사

어깨에 날개를 다니 나비가 보이고


 
 
《파브르 곤충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파브르 곤충기》가 역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게 된 것은 곤충의 환경과 생활사를 정적인 박물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체로 생생하게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파브르의 손에서 100여 년 전 프랑스의 곤충들이 새 생명을 얻었다면, 한반도에 살고 있는 곤충들은 정부희 선생의 손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정부희 곤충기’ 첫 번째 권 《곤충의 밥상》에 이어 두 번째 권 《곤충의 유토피아》에는 자연을 오감으로 감싸 안으려는 저자의 간절한 열망과 이 책의 주인공인 곤충을 보는 시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우리로 하여금 자연에게 말을 걸도록 만듭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지금 곤충과 직접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곤충의 유토피아》를 한번 쭉 읽어 보세요. 곤충 생태의 지식을 모아 나열한 책이 아니란 것을 금방 알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손에 잡힐 듯 선명합니다. 오색 물감이 스펀지에 스미듯 어린 두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단숨에 빨아들입니다. 시골에서 논도랑이며, 웅덩이며, 연못이며, 시냇물에서 놀던 그대로의 경험과 빛 고운 정서가 곤충을 관찰하는 저자의 시선에 오롯이 묻어 있습니다. 크기가 센티미터도 안 되는 곤충이지만, 저자의 눈을 통하면 몸짓, 발짓 모두가 우리 눈에 밝게 보입니다. 이 책은 곤충의 속삼임을 사람들이 알아듣게 통역한 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다 곤충학 박사의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니 사진도 곤충의 자화상이요, 설명도 곤충 이야기요, 책 자체가 그대로 연못이고, 모래고, 풀숲이 됩니다.
저자가 본 뭉게구름, 파란 하늘은 곤충들의 구름이고 곤충들의 하늘입니다. 봄날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이며 기분 좋은 바람이며 살랑거리는 연못 또한 곤충들의 햇볕이고 바람이고 연못입니다. 바로 이것, 우리가 놓치고 있는 이 풍경, 저자가 어린 시절 시골 개울가 풀잎 끝에서 보았던 감성은 저자의 시선과 곤충의 시선을 넘나듭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오랜 시간 두텁게 쌓아 온 저자의 경험과 지식이 아주 잘 어우러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곤충은 절지동물 중의 하나라지요. 절지라는 한자어는 말 그대로 몸이 마디마디로 나눠져 있다는 것인데, 곤충의 경우는 몸이 머리, 가슴, 배로 나눠져 있습니다. 절지동물 중에는 게 같은 갑각류도 있고, 다리가 굉장히 많은 노래기 같은 다지류도 있습니다. 또 거미나 전갈처럼 언뜻 보면 곤충과 비슷해 보이지만 탈바꿈하지 않는 절지동물도 있습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이 다 중요하겠지만, 수적으로 보면 곤충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동물계 전체에서 80퍼센트가 절지동물이라고 하고, 절지동물 대부분이 곤충이라고 하니, 지구 생태계에서 가장 중요한 동물을 곤충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곤충이 지구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과연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아마 일 년도 못 가서 땅 위의 모든 나무와 풀이 죽게 되고, 지구는 황폐한 쓰레기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곤충이 없는 지구란 정말이지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상황이지요. 그동안 우리는 눈뜬장님과 같았습니다. 곤충을 눈앞에 보고도 그들의 가치를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으니까요. 그저 귀찮고 하등한 벌레쯤으로 여기고 그들이 죽고 사는 데 너무 무심했습니다. 곤충이 살고 있는 곳이어야 인간도 살 수 있습니다. 왜냐구요? 곤충의 생태는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기본적인 생태환경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곤충의 유토피아》는 번데기를 거치는 곤충과 번데기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어른벌레가 되는 곤충을 골고루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는 번데기를 거치는 곤충의 탈바꿈 과정을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파충류, 조류, 포유류의 어린 개체와 성체는 크기 등에서 차이가 있을 뿐, 겉모양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절지동물은 겉모양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곤충들 중에서 번데기를 거치는 종류는 애벌레와 어른벌레의 생김새가 극적으로 다릅니다.
왜 곤충들은 탈바꿈이라는 진화방식을 택한 것일까요? 곤충들도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먹이를 두고 다투고, 후손을 낳기 위해 경쟁을 합니다. 그런데 동물의 여러 무리 중에서 특히 곤충은 먹이 공간과 번식 공간을 적절히 잘 나눠 갖는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애벌레 시절과 번데기 시절 그리고 어른벌레 시절이 따로 있어 먹고 살 일과 후손을 생산하는 일을 서로 나누어 조화롭게 잘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곤충이 탈바꿈하는 것과 공간을 나눠 갖는 것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비를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나비 어른벌레는 주로 꿀을 먹고 살지요. 어른벌레는 꿀을 얻기 위해 꽃을 찾아가야 하고, 꽃들은 나비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꽃잎을 펼치고 있습니다, 다행히 나비 어른벌레는 날개를 퍼덕이며 날 수 있기 때문에 허공을 생활공간으로 삼게 됩니다.
반면에 나비 애벌레는 주로 잎을 갉아 먹고 자랍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날개가 없으니 날 수가 없습니다. 나비는 애벌레에서 어른벌레로 성장하면서 생활공간을 바꾸게 되는 것이지요. 즉 어른벌레와 애벌레의 생활공간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알에서부터 어른벌레에 이르는 나비 생태 전체의 생활공간이 그만큼 넓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양한 곳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은 생존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곤충의 탈바꿈 과정은 생활공간의 다양화를 통해 종의 보존과 번식을 성공적으로 이뤄 내는 전략인 것이지요.
또 곤충의 두드러진 특징은 먹이를 구하는 서식 공간이 다른 동물문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넓다는 점입니다. 못 먹는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곤충의 모든 종이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곤충마다 먹을 대상이 골고루 나눠져 있어 다른 어떤 동물보다 먹이 대상과 공간이 다양합니다. 곤충 세계에서는 나비의 경우처럼 같은 종인데도 먹이 종류를 나누기도 하고 다른 종들과도 먹이를 나눠 갖는 생태적 특성이 두드러집니다.
자기만 가지려고 하고 나누기 싫어하는 인간과 비교하면 인간은 곤충에게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고 생각합니다. 곤충을 이제 새롭게 봐야겠죠. 저는 《곤충의 유토피아》에서 나눔을 통해 삶이 좀 더 안정되고 평화롭게 되는, 그런 소박한 삶의 방식을 깨닫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곤충의 유토피아》는 곤충의 한살이 과정을 아주 실감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번데기 과정을 거치든 그렇지 않든 대부분의 곤충은 한살이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곤충은 알에서 어른벌레가 되기까지 여러 차례 허물을 벗는데, 어떤 곤충은 애벌레 때 10 번 이상 허물을 벗기도 합니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번 허물을 벗으려면 그만큼 성장 속도가 빨라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곤충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활발한 세포 분열입니다. 세포가 분열해 성장하려면 산소가 필요합니다. 포유류는 공기를 코로 들이마시고, 들이마신 공기는 폐로 들어가고, 폐가 산소를 흡수하면 산소는 혈관을 통해 몸속의 모든 세포에 도달합니다. 반면에 곤충은 몸속에 들어온 산소가 모든 세포에 직접 전달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산소가 빠르게 세포에 전달되니 세포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를 빨리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세포 성장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고, 허물을 짧은 시간에 자주 벗을 수 있는 것입니다.
 
《곤충의 유토피아》는 곤충들의 다양한 감각기관과 다양한 기관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곤충들은 눈 모양도 다르고, 더듬이 모양도, 다리 모양도, 꼬리 모양도, 날개 모양도 정말 다릅니다. 종의 수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곤충의 생김새는 정말 다양합니다. 이런 곤충을 보다 보면 곤충의 여러 모습에서 힌트를 얻어 탄생한 공상과학영화 속의 괴기스런 외계 생물들이 절로 떠오르고, 동시에 곤충이야말로 공상과학영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을 보면서 과연 사람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뻗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괴물도 하나하나 자세히 뜯어보면 팔과 다리, 머리와 눈 등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기존의 생명체가 지닌 다양한 기관들을 재조립하여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지구에 살지 않았던 생명체의 모양은 우리 생각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인간의 상상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얘기겠지요. 제 개인적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종류의 생명이 생김새와 생활방식이 지금과 같은 것은 다 그렇게 진화할 만하니까 진화한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생명은 평등한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한 응답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고, 또 어떤 하나의 모양이나 기능이 효과적이라고 해서 모든 생명이 일제히 그런 하나의 모양이나 기능을 갖는 쪽으로 진화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생명을 이해하는 데 다양성은 아주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구에서 살다가 멸종한 모든 생명들, 그리고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들은 단계적으로 발전하여 최종적으로 인간까지 진화했다고 말합니다. 인간 종이 진화의 마지막 목표요, 최종점이라고 보는 것이죠. 이런 생각의 이면에는 인간이 생명계에서 최고의 지위를 갖는다는 억지가 담겨 있어 인간을 오만에 빠뜨립니다. 이런 생각은 진화론과 무관할뿐더러 생명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재 살아남은 모든 생명은 최선의 형태로 자연에 적응한 진화의 소산물입니다. 인간은 인간대로, 원숭이는 원숭이대로, 곤충은 곤충대로, 박테리아는 박테리아대로 모두 똑같이 장구한 진화의 결과물인 것이죠. 그래서 모든 종은 동등하고 평등한 생명의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 종의 권리가 평등하다는 것이 바로 생명 진화의 교훈입니다.
그래서 무수한 생명이 조상 대대로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생태계를 마음대로 뒤엎고, 파헤치고, 부수고 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곤충도, 원숭이도, 박테리아도, 어류도, 플랑크톤도 생명권을 스스로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만이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인간과 동등한 생존권을 가진 자연의 뭇 생명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이런 마음가짐을 가끔 추상적인 철학으로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추상적인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부희 선생의 《곤충의 유토피아》는 아주 쉬우면서도 편안하게 또한 감동적으로 생명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곤충의 생태를 통해서 말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번데기에서 탈바꿈을 해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곤충들을 보면서 인생의 큰 배움을 얻었습니다. 곤충의 날개돋이를 동경하여 땅을 박차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옛 시인이 있습니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 그의 유명한 시 〈적벽부〉에는 ‘우화등선’이라 하여 사람이 나비처럼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곤충의 유토피아》에서 저자 정부희 선생은 곤충 이야기에 앞서 시를 불러내 한 수 읊조리고 곤충의 세계로 넘어가더군요. 그 시를 보며 독자는 한 걸음 쉬면서 저자가 보려 주려는 곤충의 세계를 더 가깝게 느낄 것 같습니다. 저도 정부희 선생의 음률을 따라 날개돋이와 관련된 소동파의 시 한 수를 옮기면서 추천사를 마치려고 합니다.
 
친구와 더불어 배를 띄워 적벽 아래 노니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물결도 잔잔하거늘
술 한 잔 권하며 밝은 달을 시로 읊조리고 그윽한 노래 한마디 하는데
이윽고 동쪽에서 달이 뜨더니만 북두성에서 견우성으로 가더이다
물안개는 강 건너로 걸쳐 있고 물에 비친 달빛은 하늘에 닿았구나
이 쪽배 가는 대로 가다 보니 아득히 넓디넓은 그곳까지 이르렀네
바람을 타고 허공을 가로지르니 그 어디 머무를 바를 누군들 알리오만
세상을 잊고 홀로 서니 날개가 돋아 하늘 따라 신선되어 오르는구나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擧酒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 소동파, <적벽부> 중에서
 
《곤충의 유토피아》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 나비의 날개돋이라는 작은 이야기 안에 자연 생태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친구와 같이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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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빈 교수의 추천사)
마음이 겸손한 유토피아
   
김교빈 호서대학교 교수/민족의학연구원 원장
〈동양철학에세이〉 공저자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신촌입니다. 당시 신촌은 중심부를 조금만 벗어나면 노고산도 있고 논밭도 있고, 무엇보다 넓은 교정을 가진 대학들이 부근에 있어 정말 마음 놓고 놀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신촌이야 시끌벅적한 번화가가 된 지 오래고, 뛰어놀던 대학들에 가 봐도 더 이상 짓기 어려울 정도로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답답함을 넘어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년대에는 건물도 듬성듬성 서 있고, 풀밭과 숲이 참 많았습니다. 서강대학교 뒷산은 높이나 길이가 풀 썰매 타기 딱 좋은 곳이었고, 연대 입구의 원형 경기장과 이대 중앙의 운동장, 그리고 뒷산들은 모두 꼬맹이들이 자주 가던 놀이터였습니다.
그 무렵 신촌 로터리에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수색 쪽으로 꽃상여가 지나갔습니다. 아마도 수색에 공동묘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꽃상여가 지나갈 때마다 울긋불긋 꾸민 상여의 화려함이나 상여 끄는 사람들의 소란스런 모습을 보기 위해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 나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것은 친구들과 어울려 산으로, 들로 쏘다니는 일이었지요. 초등학교 학년 여름, 친구들과 당인리 발전소 아래 한강에 수영하러 갔습니다. 돌아오던 길에 서강나루 쪽으로 산을 몇 개 넘고, 산길에서 무덤을 만나면 누구 무덤인지도 모르면서 절도 하고, 풀숲에서 메뚜기도 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스름 해 질 녘에야 집에 도착하게 되었고, 집에 말씀도 안 드리고 멱감으러 갔다고 아버지께 매를 맞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벌레나 곤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곤충은 무섭기도 했습니다. 메뚜기를 잡으면 가느다란 다리가 부러질까 봐 겁이 먼저 났고, 잠자리채로 용하게 잠자리를 잡아 놓고는 꺼내려고 날개를 잡을 때마다 날개가 떨어져 나갈까 봐 손이 떨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대부분 지금은 오십이 넘은 우리 집 막내의 몫이었습니다. 우리 막내를 비롯해서 용감한 친구들은 송충이를 팔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개미 꽁무니를 혀로 핥아 신맛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은 꼬맹이들의 놀이터였고, 뒹굴고 놀면서 저절로 알게 된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굳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공부를 시켜 줬던 것이지요.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산과 들은 점차 멀어졌고, 나이가 들어서도 철이 덜 나서 그런지 꽃이며, 나무며, 곤충이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오래전부터 동양의 기氣 개념에 대한 학문적 관심에서 전통의학 서적을 보아 왔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족의학연구원장을 맡으면서 늦게라도 약재를 통해 식물, 동물, 물고기, 곤충들에 대해 조금씩 시야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민족의학연구원이 약재 도감을 세밀화로 그리고 있기 때문에 잎이며, 꽃이며, 꽃술과 열매 등을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어 제겐 매우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렇게 봄여름가을겨울, 식물의 변화과정을 접해 온 터라 《곤충의 유토피아》에 고스란히 담긴 저자의 일이, 그것도 야외에서 직접 곤충과 함께해 온 일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자그마한 곤충을 만나기 위해 발이 저릴 때까지 앉아서 잎사귀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곤충들이 놀라지 않도록 앉은 채로 백여 미터를 발만 꼼지락대면서 움직여 가고, 시간 분에 걸친 참매미의 날개돋이 장면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불빛 하나 없는 깜깜한 숲길을 반딧불이를 만나기 위해 홀로 걸어갑니다. 깜깜한 숲길 대목에 이르러서는 제 몸이 오싹해지면 눈앞에 그려지는 저자의 모습에서 어린 시절 겁 없던 친구들이 떠올려지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어쩌면 평생 알 수도, 볼 수도 없을 다양한 곤충과 그들의 사생활을 《곤충의 유토피아》를 통해 전해 주고 있습니다. 마치 저 멀리 보이는 산, 저 멀리 보이는 강, 풀 몇 포기뿐인 조각 땅, 손바닥만 한 물웅덩이에서 곤충들이 그곳에 자기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달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어릴 적 그때도 분명 산과 들, 강에서 곤충들이 제게 말을 건넸을 텐데, 그때는 제가 알아듣지 못했던 이야기들, 물과 땅, 모래에 사는 곤충들 이야기 말입니다.
 
《곤충의 유토피아》, 책의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저자는 “자연은 생명이 살 수 있는 열린 광장이요, 곤충들에겐 생명을 감싸 안아 주는 눈물 나게 고마운 낙원, 유토피아입니다.”라고 합니다. 자연이 곧 곤충의 유토피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자연을 끊임없이 부수고 파헤치는 인간이 있는 한 자연이 뭇 생명에게 얼마 동안이나, 어느 만큼이나 유토피아로 남아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유토피아는 ‘아무 데도 없음’을 뜻하는 ou와 ‘곳’을 뜻하는 topos의 합성어입니다. ‘아무 데도 없는 곳’이란 뜻이지요. 유토피아를 장자의 표현으로 바꾸면 무하유지향입니다. ‘무하유지향’의 뜻 또한 ‘아무 데도 있지 않은 곳’이니, 서양의 유토피아와 장자의 무하유지향은 닮은 꼴입니다.
《곤충의 유토피아》를 보면서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우화가 떠올랐습니다. 혜시가 장자를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집에 커다란 가죽나무가 있는데, 몸통은 울퉁불퉁하고 잔가지는 비비 꼬여서 목수도 쳐다보지 않을 정도로 쓸데가 없다고 말이지요. 그러자 장자는 그 나무를 쓸모없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무하유지향’의 넓은 들에 심어 놓고 그 곁을 거닐기도 하고, 그 아래 드러눕기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나무가 도끼에 베이지 않을 것이고, 아무한테도 해를 입을 염려가 없을 테니 쓰일 데 없음을 왜 걱정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장자의 ‘무하유지향’은 어떤 곳일까요? 쓸데없어 보이는 가죽나무도 제 명대로 살 수 있는 세상, 더구나 사람이 그 곁을 거닐기도 하고, 그 그늘 아래 눕기도 하면서 같이 어우러질 수 있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장자가 꿈꾼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우리는 곤충이나 벌레를 하찮은 미물이라고 여깁니다. 위 우화에 나오는 혜시의 가죽나무처럼 말이지요. 하지만 장자는 혜시와 달리 나무와 함께 사는 지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곤충의 유토피아》의 저자 또한 곤충과 함께 사는 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곤충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지만 궁극에는 우리 인간이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곤충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인간 스스로 욕심을 버려야 하고, 욕심에서 나오는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저자는 “그들을 만나려면 저 자신이 겸손해져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존귀한 생명들이 행복하게 사는 곳이 유토피아라면, 저자가 말한 겸손이 유토피아에 이르는 방법입니다. 누군가에게 귀 기울이려면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누군가가 사람이 되었든 곤충이 되었든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자가 연구실에 박제된 표본으로서의 곤충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의 곤충을 보여 주고 있는 것도 곤충을 만나기 위해 앉은뱅이도, 깜깜한 어둠도 마다하지 않는 ‘겸손’의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책에는 참매미가 저자의 손목에 앉아서 나무인줄 알고 뾰족한 주둥이를 내밀어 구멍을 내려 한 대목이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고서 《장자》의 <달생> 편에 나오는 매미 잡는 노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몸은 나무 그루터기처럼 웅크리고 팔뚝은 시든 나뭇가지처럼 해서 손으로 줍듯이 매미를 잡는 노인. 이 우화는 만물과 하나가 된 경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자에게 날아온 참매미도 저자를 자신의 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자의 손목에 날아와 앉았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저자가 이미 매미와 하나가 된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닌지.
저자의 열정과 자연을 보는 관점이 곤충과 만나는 즐거움뿐 아니라 곤충과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 유토피아의 길을 내보이고 있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추천사를 쓰기 위해 원고를 읽는 동안 어린 시절이 생각났고, 그 위로 순수한 마음을 다 잊은 채 자연을 도구로만 여기는 현재 우리 인간의 팍팍한 삶이 떠오릅니다. 곤충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게 해 준 저자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 땅에서 나고 자라 다시 우리 땅의 거름이 되는 것을 탐구하고 기록하는 일은 자연을 아끼고 보호하는 일이며, 지금 우리와 미래의 후손 모두에게 매우 뜻깊은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문화유산이 많이 있습니다. 의학의 경우 중국에 《본초강목》과 《황제내경》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향약집성방》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른 《동의보감》이 있고, 우리 바닷물고기를 기록한 《자산어보》도 있습니다. 저자의 노력이 쌓여서 프랑스에 프랑스의 곤충을 기록한 《파브르 곤충기》가 있듯이, 한국에 한국의 곤충을 기록한 ‘정부희 곤충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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