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비판하는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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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의 중요한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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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의 『중요한 몸(Bodies That Matter)』 서론,1장,2장 다시 읽기
최종덕 씀
(한철연 신유물론 분과에서 함께 읽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1. 여성적인 것은 이항대립 안에서, 이항대립에 의해 배제된다.전통 철학에는 수많은 이항대립이 있다. 형상과 질료, 정신과 신체, 이성과 감각, 능동과 수동, 주체와 객체 등이다. 역사적으로 앞쪽 항은 남성적인 것과, 뒤쪽 항은 여성적인 것과 연결되어 왔다. 일부 페미니즘에서는 이항대립의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철학이 남성을 우월하게 하고 여성을 열등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리가레의 주장은 급진적인데, 여성적인 것은 애초에 이 대립의 두 번째 항으로도 제대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즉,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칭적인 이항대립 자체가 이미 잘못된 그림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여성’이라고 명명된 두 번째 항조차 사실은 남성적 철학이 만들어낸 여성의 표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리가레가 찾으려는 ‘여성적인 것’은 이 표상으로 포섭되지 않는 잔여이다. 전통철학의 언어에서 남근로고스중심주의적 규칙에 따라 여성적인 것을 정의하기 위해 “여성이란 X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렇게 정의하는 순간 여성적인 것을 다시 하나의 고정된 본질로 만들어버린다. 결국 비판하려던 형이상학을 답습하는 난제에 부딪힌다.그래서 이리가레는 기존 철학의 말을 모방하지만, 비틀고, 과장하고, 엉뚱하게 사용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게 비트는 방식 중에 하나가 본질론을 부정하는 이리가레와 버틀러의 반론이다.앞의 말은 여성에게 본질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이 무엇인가를 존재자로 인정하는 방식, 즉 동일성의 방식을 거부하고 비트는 것이다. 버틀러가 본 전통 형이상학에서는 흔히 형상(form)을 능동적이고 규정하는 것으로, 질료(matter)를 수동적이며 규정되는 것으로 되어 왔다. 이런 구도와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이 고착되어 왔다고 한다. 그러나이리가레가 보기에 서양 형이상학의 남성적 주체는 여성적인 것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자신을 보편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 만들어 왔다. 그래서 이리가레와 더불어 버틀러의 전략은 타자 배제를 통한 자기동일성을 주체화하는 이분법 체계를 부정하는 데 있다. 버틀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가 외부인가?”가 영원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기존 질서가 만들어지면서 배제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배제가 어떻게 그 질서를 자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는지 그 담론을 비판하는 데 있다. 버틀러는 이와 관련하여 데리다의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 개념을 이끌어 온다. 데리다의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란 어떤 것이 자기 자신으로 성립하기 위해 배제해야 하지만, 바로 그 배제된 것이 그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외부’를 말한다. 예를 들어 비이성과 광기를 배제하지만 역설적으로 비이성이라는 바깥이 없다면 이성이라는 경계 자체도 분명하게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이성은 단순히 이성이 완성된 뒤 그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이성으로 구성되는 과정에 이미 관여하는 외부가 된다. 데리다의 핵심은 내부/외부의 경계 자체가 순수하지 않다는 데 있다.버틀러에게 어떤 성적·젠더적 주체가 정상적이고 인정 가능한 주체로 구성될 때, 그 과정에서 어떤 몸·욕망·정체성이 ‘비정상’, ‘인정 불가능한 것’으로 배제되곤 하는데, 그렇게 배제된 것들이 정상 주체의 경계를 만들어주는 구성적 외부가 된다. 그래서 버틀러나 이리가레는 구성적 외부를 없애려기보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내부’가 사실은 자신이 배제한 외부에 의존하여 성립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본질’이라는 내부의 자기동일성의 허위를 고발하는 데 있다. 다시 정리해보자. 이리가레는 배제된 여성적인 것을 드러내어 남근로고스적 내부를 교란한다. 한편 버틀러는 여성적인 것을 처음부터 배제된 구성적 외부의 자리에 배치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여성뿐 아니라 인종화된 타자, 노예, 아이, 동물, 비규범적 성적 존재 등 서로 다른 배제의 방식도 추적해야 하며, 내부/외부의 경계 자체가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구성적 외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적 외부를 고정된 외부로 실체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버틀러의 입장이다. 이리가레와 버틀러는 구성적 외부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내부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외부를 생산하고 배제하는 과정을 드러내고, 그 배제된 외부를 통해 내부의 경계를 다시 교란하려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2. 코라버틀러는 『중요한 몸』 1장에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코라(chōra, χώρα)를 이리가레의 독법을 통해 다시 본다.
플라톤의 우주발생론부터 생성의 세 항이 아래처럼 정리된다.① 생성되는 것(becoming) — 생겨나고 변화하는 개별 사물
② 생성이 일어나는 곳(receptacle, chōra) — 생성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리
③ 생성되는 것이 닮는 원형(model/form) — 생성된 사물이 무엇을 닮아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형상즉 형상(원형) 코라로, 코라에서 감각적 사물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코라는 ‘수용자(receptacle)’, ‘자리’, ‘공간’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통 의미의 공간이나 물질과는 다르다. 『티마이오스』에서 코라는 생성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처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dechesthai(δέχεσθαι) ‘받아들이다, 수용하다, 맞아들이다’라는 뜻이 중요하다. 코라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기보다,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리 내주고, 담아주는 것이다. 코라는 특정한 ‘무엇’이 되어버리면 안 된다.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려면 자기 자신의 고정된 형상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아버지/형상은 적극적으로 형상을 제공하고, 어머니/코라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장소로 된다는 점을 이리가레는 비판한다. 코라가 모든 생성에 필수적이면서도 그 자체로는 제대로 된 존재나 형상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이 이리가레가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발견하는 여성적인 것의 배제 구조다. 이리가레의 질문은 “왜 생성에 없어서는 안 되는 코라는 자기 자신의 형상과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가?”이다. 바로 이 질문 때문에 버틀러가 『중요한 몸』 첫 장에서 『티마이오스』를 길게 다룬 것이다. 버틀러는 이리가레의 플라톤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리가레가 코라를 ‘여성적인 것’과 연결하는 순간, 오히려 여성=수용성/물질이라는 오래된 도식을 다시 반복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리가레가 보기에 플라톤은 여성/모성적인 물질에서 생산능력·생식능력을 제거하고 수용성만 남긴 것이어서, 역설적으로 우주에는 어머니가 필요하지만, 어머니의 고유한 생산력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래서 이리가레가 이런 귀결을 자기-구성적인 남근적 환상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더 나아가 철학이 ‘여성적인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면, 바로 그 말할 수 없음을 이용해서 철학을 흔들어보자는 것이 이리가레의 의도이다. ① 코라는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② 코라는 제대로 규정할 수 없다.
③ 그런데 플라톤은 그것을 ‘코라’라고 규정하고 계속 설명한다.
그래서 버틀러는 코라를 “지칭할 수 없는 것에 부여된 일관된 이름”으로 표현한다.보통의 페미니즘은 남성만 주체로 인정하면 안되고 여성도 똑같은 주체로 인정하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리가레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남성적 형이상학이 만들어놓은 ‘주체’라는 자리에 여성이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리가레는 남근적 경제 안에서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는 그 경제가 배제했던 자리에서 그 체계를 교란하려고 한다. 교란의 방법론은 “불복종의 인용”이다. 쉽게 말해서 기존 이항 주체를 모방mimesis하기는 하지만 단순 복사copy가 아니라 전위시키는 방식의 교란을 의미한다. 즉 원본을 인용하지만 그 권위에서 벗어나 그 안에서 모순을 찾아내는 교란방식이다. 남근 로고스의 언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언어로 다 흡수되지 않는 환유의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환유의 초과metonymic excess라고 표현했다. 그 초과된 무엇이 원래 개념과 경계를 붕괴시킨다는 것이 교란의 전략이다.3. 여성은 ‘인식불가능하다’기보다 기존 로고스로는 인식될 수 없다.남근로고스중심적 체계가 사용하는 ‘인식’의 방식으로는 여성적인 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서로에게 소통할 수 잇다. 소통의 방법은 상대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잘 몰라도 상대의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가능하다는 것이 이리가레의 주장이다. 이것이 이리가레의 ‘타자의 타자성’을 보존하자는 철학이다.버틀러는 이 점에서 타자 담론을 뛰어넘어 실제 몸, 실제 물질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버틀러의 주장은 물질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역사적 배제와 규범을 통해 물질로 이해되었는지를 조사하자는 것이다.사례로서 여성이 남성성으로 침투하고 남성이 여성성으로 침투하는 경우에서 버틀러는 ‘침투’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침투란 무엇이 무엇을 침투한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침투하는 ‘무엇’이라는 본질, 또 침투당하는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버틀러의 입장이다. 원본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이성애적 남성성은 본질주의적 기원origin이 아니라는 사례를 말한다. 남근은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이성애적 매트릭스(heterosexual matrix) 안에서 구성된 위치라는 뜻이다.4. 언어와 실재버틀러에서 세계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와 완전히 무관한 ‘순수 물질’에 직접 접근할 수도 없다. 언어는 세계를 포획하려 하지만 세계가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언어로 명명하고 분류하지만 역시 또 남는 것이 생기는 악순환이 이뤄진다. 언어와 실제 세계가 다르다면 언어를 걷어내면 순수한 물질 자체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맞지 않는다고 버틀러는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어 밖의 순수한 물질”
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언어를 사용하여 그것을 ‘언어 밖의 물질’이라고 정립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 물질을 언어적으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말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담론적 행위라고 버틀러는 생각한다. 버틀러는 ① 순진한 실재론이나 ② 극단적인 언어구성주의 양단을 모두 거부한다. 실제 세계가 언어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언어 안에서는 항상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버틀러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자연적 몸을 언어가 정확하게 이름 붙인 결과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언어가 몸의 물질화하는 과정에 참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마음대로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 몸은 언어의 분류를 항상 초과하기 때문이다. 버틀러에게 몸은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몸은 담론을 통해 의미화되지만 담론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언어와 세계는 서로를 조건 짓고 교차하면서도 그 차이를 계속 유지한다.이 점에서 객체지향존재론, 특히 Graham Harman의 핵심 주장과 비교될 수 있다. 하먼에서 객체는 그것이 맺는 관계나 그것에 대한 인식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하먼 용어로 객체가 관계로부터 철회(withdrawal)되어 있다고 표현된다. 실재와 실재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다르다는 점이다. 반면 버틀러에게는 관계와 의미화 과정 자체가 훨씬 더 구성적이다. 몸이 먼저 완성된 자연적 객체로 존재하고 그다음 사회적 관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규범, 언어, 권력,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어떤 몸이 특정한 몸으로 물질화된다. 버틀러와 하먼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하먼에게 객체는 인간이 알든 모르든, 언어로 표현하든 하지 않든 실재 객체로 존재하지만, 버틀러에게 ‘관계 바깥의 객체 자체’는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없다.버틀러의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어떤 것을 ‘물질’이라고 부르게 되는가, 어떤 몸이 인식 가능한 물질적 몸으로 나타나는가, 그 물질화 과정에서 어떤 규범과 배제가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즉 하먼은 객체 자체의 존재방식을 묻고, 버틀러는 물질적 몸이 인식 가능하게 되는 조건과 그 규범적 역사를 묻는다. 5. 추가 : 버틀러가 해석한 이리가레의 여성성과 도덕경의 도 사이의 유비노자의 『도덕경』에서 道는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 “道可道非常道”가 말하듯, 말해진 도는 이미 상도(常道)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자 역시 道를 전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도덕경』은 언어를 단순히 부정하거나 폐기하기보다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언어가 스스로 설정한 한계를 흔드는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있음과 없음, 큼과 작음, 앞과 뒤 같은 대립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대립을 고정시키지 않고 서로 전환시킴으로써 개념의 경계를 교란한다.이 점에서 노자의 언어 전략과 이리가레의 탈로고스적 전략은 일정한 구조적 유비를 갖는다. 이리가레 역시 로고스를 단순히 거부하고 그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이 아니다. 로고스의 언어를 이용하고,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철학적 텍스트를 반복하고 인용하면서 그 내부에서 언어의 질서를 교란한다. 이리가레에게 모방(mimesis)은 원본에 복종하는 복제가 아니다. 원본을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을 전위시킴으로써 원본이 감추고 배제했던 것을 드러내는 전략이다. 버틀러가 이리가레의 이러한 방식을 ‘불복종으로서의 인용’으로 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용하면서 복종하지 않고, 모방하면서 복제되지 않는 것이다.이러한 모방에는 환유적 초과(metonymic excess)가 발생한다. 남근로고스적 언어가 하나의 개념을 명확한 정의(definition) 안에 고정하려 하더라도, 그 개념은 수용, 접촉, 인접, 근접 등 주변의 의미들과 연결되면서 옆으로 번져나간다. 의미는 원래의 정의 안에 매끄럽게 갇히지 않고 환유적으로 이동하며, 그 과정에서 최초의 정의가 설정했던 경계가 흔들린다. 이리가레의 전략은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지나치게 충실하게 반복하고 확장함으로써 오히려 언어의 자기완결성과 권위를 내부에서 교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은유(metaphor) — 유사성
“그 사람은 여우다.”- 사람과 여우 사이의 영리함·교활함 같은 유사성에 의해 의미를 옮깁니다.
②환유(metonymy) — 인접성
“백악관이 결정했다.”- 백악관과 미국 행정부의 현실적 연관성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합니다.
③유비(analogy) — 관계의 유사성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관계는 펌프가 물을 순환시키는 관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리가레의 논의에는 한계도 있다. 남근로고스적 주체가 성립하기 위해 배제된 것은 여성적인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버틀러가 지적하듯 노예, 아이, 동물, 인종화된 타자 등도 정상적인 인간 주체와 인식 가능한 몸의 경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배제되어 왔다. ‘남성적 주체 대 배제된 여성적인 것’이라는 이리가레의 구도만으로는 구성적 외부의 다양한 형태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이들을 여성적인 것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며, 서로 다른 배제들이 어떻게 인접하고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바로 이 지점에서 노자의 道와 구성적 외부를 비교해볼 수 있다. 다만 道 자체를 곧바로 ‘구성적 외부’라고 규정해서는 안 된다. 구성적 외부는 어떤 체계가 자기 내부의 정체성과 경계를 확립하기 위해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의존해야 하는 것을 가리키는 반면, 노자의 道는 특정한 언어체계가 역사적으로 배제한 타자라기보다 만물의 생성과 변화가 가능해지는 이름 붙일 수 없는 근원적 과정에 가깝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중요한 구조적 유비가 있다. 道는 명명된 사물 가운데 하나가 아니면서 명명된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이리가레가 말하는 여성적인 것은 남근로고스적 재현 체계 안에서 하나의 안정된 항으로 완전히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그 체계가 성립하기 위해 필요했던 배제된 조건으로 나타난다. 道와 여성적인 것을 동일한 존재론적 범주로 볼 수는 없지만, ‘체계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으면서 그 체계의 성립 조건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한정된 의미에서는 서로 비교할 수 있다.이 비교를 동물이나 다른 배제된 존재들에게까지 확장할 때도 같은 주의가 필요하다. 여성, 노예, 아이, 동물, 인종화된 타자는 모두 道의 서로 다른 사례가 아니며, 하나의 동일한 구성적 외부도 아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역사적·정치적·존재론적 방식으로 인간 중심적 또는 남근로고스 중심적 질서의 경계 밖에 놓여 왔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하나의 동일한 타자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가 자기 자신을 구성하면서 어떤 존재들을 외부화했는지, 그리고 그 외부화된 존재들이 어떻게 다시 내부의 질서를 흔드는지를 추적하는 일이다.이런 의미에서 노자와 이리가레가 만나는 지점은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신비화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위해 기존의 말을 사용하면서, 그 말이 스스로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 없도록 만드는 언어적 실천’에 있다. 노자의 역설과 전도, 이리가레의 모방과 환유적 초과는 서로 다른 철학적 맥락에서 출발하지만, 언어를 버리지 않은 채 언어의 자기완결성을 내부에서 흔든다는 점에서 생산적인 비교가 가능하다.6. 반복 : 버틀러와 객체지향존재론의 차이객체지향존재론(OOO)에서 실재는 관계 속에 들어가지만 관계에 의해 소진되지는 않는다. 특히 하먼에게 객체는 다른 객체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도 어떤 관계나 인식으로도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 철회된(withdrawn) 실재를 지닌다. 이런 표현을 빌려 버틀러의 물질 개념을 설명한다면, 물질은 담론과 규범의 작용을 통해 물질화되지만 담론에 의해 소진되지는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물질은 담론 이전에 완성된 순수한 실체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담론이 자유롭게 만들어내는 언어적 산물도 아니다. 물질과 담론은 서로 얽혀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환원되지 않는다.버틀러가 고정된 ‘물질(matter)’보다 ‘물질화(materialization)’의 과정을 강조한다는 점은 신유물론과 일정한 친연성을 보여준다. 양쪽 모두 물질을 이미 완성된 수동적 실체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물질이 형성되고 현실화되는 과정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물질화의 이론적 초점에는 차이가 있다. 버틀러가 주로 성, 몸, 규범, 권력, 담론의 반복적 작용을 통해 어떤 몸이 인식 가능하고 물질적인 몸으로 성립하는지를 분석한다면, 버라드를 비롯한 신유물론은 인간과 비인간을 선험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물질적·담론적 실천 자체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와 행위성이 함께 발생한다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신유물론의 물질화는 보다 명시적으로 탈인간중심주의적인 존재론으로 확장된다.객체지향존재론OOO과 버틀러 사이에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OOO에서 실재 객체는 인간의 언어와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하며, 인간의 인식뿐 아니라 다른 객체와 맺는 어떠한 관계에도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다. 반면 버틀러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언어와 담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순수한 실재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은 언어, 담론, 규범과 얽힌 채 우리에게 의미화되고 물질화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의미화로 완전히 환원되지 않는다. 따라서 OOO의 핵심을 ‘관계로부터 철회하는 실재’라고 한다면, 버틀러의 핵심은 ‘담론과 얽혀 있으면서도 담론으로 소진되지 않는 물질성’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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