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의 『중요한 몸(Bodies That Matter)』 서론,1장,2장 다시 읽기
최종덕 씀
(한철연 신유물론 분과에서 함께 읽고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플라톤의 우주발생론부터 생성의 세 항이 아래처럼 정리된다.① 생성되는 것(becoming) — 생겨나고 변화하는 개별 사물
② 생성이 일어나는 곳(receptacle, chōra) — 생성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리
③ 생성되는 것이 닮는 원형(model/form) — 생성된 사물이 무엇을 닮아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형상즉 형상(원형) 코라로, 코라에서 감각적 사물이 생성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에서 코라는 ‘수용자(receptacle)’, ‘자리’, ‘공간’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보통 의미의 공간이나 물질과는 다르다. 『티마이오스』에서 코라는 생성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처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dechesthai(δέχεσθαι) ‘받아들이다, 수용하다, 맞아들이다’라는 뜻이 중요하다. 코라는 무엇인가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만들어내기보다,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리 내주고, 담아주는 것이다. 코라는 특정한 ‘무엇’이 되어버리면 안 된다.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려면 자기 자신의 고정된 형상을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아버지/형상은 적극적으로 형상을 제공하고, 어머니/코라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장소로 된다는 점을 이리가레는 비판한다. 코라가 모든 생성에 필수적이면서도 그 자체로는 제대로 된 존재나 형상을 부여받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이 이리가레가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발견하는 여성적인 것의 배제 구조다. 이리가레의 질문은 “왜 생성에 없어서는 안 되는 코라는 자기 자신의 형상과 목소리를 가질 수 없는가?”이다. 바로 이 질문 때문에 버틀러가 『중요한 몸』 첫 장에서 『티마이오스』를 길게 다룬 것이다. 버틀러는 이리가레의 플라톤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리가레가 코라를 ‘여성적인 것’과 연결하는 순간, 오히려 여성=수용성/물질이라는 오래된 도식을 다시 반복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리가레가 보기에 플라톤은 여성/모성적인 물질에서 생산능력·생식능력을 제거하고 수용성만 남긴 것이어서, 역설적으로 우주에는 어머니가 필요하지만, 어머니의 고유한 생산력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그래서 이리가레가 이런 귀결을 자기-구성적인 남근적 환상이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더 나아가 철학이 ‘여성적인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면, 바로 그 말할 수 없음을 이용해서 철학을 흔들어보자는 것이 이리가레의 의도이다. ① 코라는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② 코라는 제대로 규정할 수 없다.
③ 그런데 플라톤은 그것을 ‘코라’라고 규정하고 계속 설명한다.
그래서 버틀러는 코라를 “지칭할 수 없는 것에 부여된 일관된 이름”으로 표현한다.보통의 페미니즘은 남성만 주체로 인정하면 안되고 여성도 똑같은 주체로 인정하라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이리가레가 보기에 이런 주장은 남성적 형이상학이 만들어놓은 ‘주체’라는 자리에 여성이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리가레는 남근적 경제 안에서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는 그 경제가 배제했던 자리에서 그 체계를 교란하려고 한다. 교란의 방법론은 “불복종의 인용”이다. 쉽게 말해서 기존 이항 주체를 모방mimesis하기는 하지만 단순 복사copy가 아니라 전위시키는 방식의 교란을 의미한다. 즉 원본을 인용하지만 그 권위에서 벗어나 그 안에서 모순을 찾아내는 교란방식이다. 남근 로고스의 언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언어로 다 흡수되지 않는 환유의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환유의 초과metonymic excess라고 표현했다. 그 초과된 무엇이 원래 개념과 경계를 붕괴시킨다는 것이 교란의 전략이다.3. 여성은 ‘인식불가능하다’기보다 기존 로고스로는 인식될 수 없다.남근로고스중심적 체계가 사용하는 ‘인식’의 방식으로는 여성적인 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서로에게 소통할 수 잇다. 소통의 방법은 상대를 다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잘 몰라도 상대의 차이를 인정하는데서 가능하다는 것이 이리가레의 주장이다. 이것이 이리가레의 ‘타자의 타자성’을 보존하자는 철학이다.버틀러는 이 점에서 타자 담론을 뛰어넘어 실제 몸, 실제 물질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버틀러의 주장은 물질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역사적 배제와 규범을 통해 물질로 이해되었는지를 조사하자는 것이다.사례로서 여성이 남성성으로 침투하고 남성이 여성성으로 침투하는 경우에서 버틀러는 ‘침투’라는 개념을 비판한다. 침투란 무엇이 무엇을 침투한다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침투하는 ‘무엇’이라는 본질, 또 침투당하는 ‘무엇’이라는 본질을 가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버틀러의 입장이다. 원본은 없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이성애적 남성성은 본질주의적 기원origin이 아니라는 사례를 말한다. 남근은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이성애적 매트릭스(heterosexual matrix) 안에서 구성된 위치라는 뜻이다.4. 언어와 실재버틀러에서 세계는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언어와 완전히 무관한 ‘순수 물질’에 직접 접근할 수도 없다. 언어는 세계를 포획하려 하지만 세계가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언어로 명명하고 분류하지만 역시 또 남는 것이 생기는 악순환이 이뤄진다. 언어와 실제 세계가 다르다면 언어를 걷어내면 순수한 물질 자체가 있으리라는 생각도 맞지 않는다고 버틀러는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언어 밖의 순수한 물질”
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언어를 사용하여 그것을 ‘언어 밖의 물질’이라고 정립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 물질을 언어적으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말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담론적 행위라고 버틀러는 생각한다. 버틀러는 ① 순진한 실재론이나 ② 극단적인 언어구성주의 양단을 모두 거부한다. 실제 세계가 언어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기 때문에, 언어 안에서는 항상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버틀러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자연적 몸을 언어가 정확하게 이름 붙인 결과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언어가 몸의 물질화하는 과정에 참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을 마음대로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 몸은 언어의 분류를 항상 초과하기 때문이다. 버틀러에게 몸은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몸은 담론을 통해 의미화되지만 담론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언어와 세계는 서로를 조건 짓고 교차하면서도 그 차이를 계속 유지한다.이 점에서 객체지향존재론, 특히 Graham Harman의 핵심 주장과 비교될 수 있다. 하먼에서 객체는 그것이 맺는 관계나 그것에 대한 인식으로 소진되지 않는다. 하먼 용어로 객체가 관계로부터 철회(withdrawal)되어 있다고 표현된다. 실재와 실재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다르다는 점이다. 반면 버틀러에게는 관계와 의미화 과정 자체가 훨씬 더 구성적이다. 몸이 먼저 완성된 자연적 객체로 존재하고 그다음 사회적 관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규범, 언어, 권력,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 어떤 몸이 특정한 몸으로 물질화된다. 버틀러와 하먼은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하먼에게 객체는 인간이 알든 모르든, 언어로 표현하든 하지 않든 실재 객체로 존재하지만, 버틀러에게 ‘관계 바깥의 객체 자체’는 존재론적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없다.버틀러의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어떤 것을 ‘물질’이라고 부르게 되는가, 어떤 몸이 인식 가능한 물질적 몸으로 나타나는가, 그 물질화 과정에서 어떤 규범과 배제가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있다. 즉 하먼은 객체 자체의 존재방식을 묻고, 버틀러는 물질적 몸이 인식 가능하게 되는 조건과 그 규범적 역사를 묻는다. 5. 추가 : 버틀러가 해석한 이리가레의 여성성과 도덕경의 도 사이의 유비노자의 『도덕경』에서 道는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다. “道可道非常道”가 말하듯, 말해진 도는 이미 상도(常道)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자 역시 道를 전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도덕경』은 언어를 단순히 부정하거나 폐기하기보다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언어가 스스로 설정한 한계를 흔드는 텍스트로 읽을 수 있다. 있음과 없음, 큼과 작음, 앞과 뒤 같은 대립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대립을 고정시키지 않고 서로 전환시킴으로써 개념의 경계를 교란한다.이 점에서 노자의 언어 전략과 이리가레의 탈로고스적 전략은 일정한 구조적 유비를 갖는다. 이리가레 역시 로고스를 단순히 거부하고 그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이 아니다. 로고스의 언어를 이용하고,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철학적 텍스트를 반복하고 인용하면서 그 내부에서 언어의 질서를 교란한다. 이리가레에게 모방(mimesis)은 원본에 복종하는 복제가 아니다. 원본을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을 전위시킴으로써 원본이 감추고 배제했던 것을 드러내는 전략이다. 버틀러가 이리가레의 이러한 방식을 ‘불복종으로서의 인용’으로 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용하면서 복종하지 않고, 모방하면서 복제되지 않는 것이다.이러한 모방에는 환유적 초과(metonymic excess)가 발생한다. 남근로고스적 언어가 하나의 개념을 명확한 정의(definition) 안에 고정하려 하더라도, 그 개념은 수용, 접촉, 인접, 근접 등 주변의 의미들과 연결되면서 옆으로 번져나간다. 의미는 원래의 정의 안에 매끄럽게 갇히지 않고 환유적으로 이동하며, 그 과정에서 최초의 정의가 설정했던 경계가 흔들린다. 이리가레의 전략은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지나치게 충실하게 반복하고 확장함으로써 오히려 언어의 자기완결성과 권위를 내부에서 교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은유(metaphor) — 유사성
“그 사람은 여우다.”- 사람과 여우 사이의 영리함·교활함 같은 유사성에 의해 의미를 옮깁니다.
②환유(metonymy) — 인접성
“백악관이 결정했다.”- 백악관과 미국 행정부의 현실적 연관성 때문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합니다.
③유비(analogy) — 관계의 유사성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관계는 펌프가 물을 순환시키는 관계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