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비판하는 과학
과학으로 반성하는 철학

발표/출간/등재/강의/발행된
자료 모음

logo letter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
Select Language
서평책1: 무페 2018/ 2019,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이승원 옮김, 문학세계사)
책2: 라클라우 2005 / 2026, 『포퓰리즘 이성』 (이승원 옮김, 빨간소금)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최종덕 씀)미국 트럼프 이후 포퓰리즘 정치가 세계를 흔들고 있다. 프랑스의 Marine Le Pen과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은 ‘평범한 프랑스 국민’을 정치적·경제적 연대를 지향하는 EU 관료체제나 이민 문제 등과 대립시키는 주장들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이탈리아의 Giorgia Meloni와 이탈리아 형제당도 자기 국민의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경제에 불만이 많은 시민들을 포퓰리즘의 끈으로 묶어왔다. 이들 우파 포퓰리즘의 기치는 “기성 정치엘리트와 세계화가 당신을 버렸으며 국가는 자국민을 먼저 보호해야 한다.”는데 있다. 이렇듯 포퓰리즘 하면 우익 정치의 대안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후 포퓰리즘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즐비했는데, 이런 포퓰리즘을 좌익의 시각에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제시한 정치이론가들이 요즘 눈에 띄고 있다. 대표적인 지식인인 샹탈 무페와 라클라우이다. 이 두 사람의 공동저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적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1985년작,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2)는 민중people 개념에 대한 고정되고 본질론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 두 사람은 우선 전통 마르크스주의의 민중 계층론을 비판하는데, 예를 들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대립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대립이며, 따라서 노동계급이 필연적으로 혁명의 중심주체가 된다." 라는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한다. 라클라우와 무페에게는 어떤 집단도 처음부터 역사의 중심적 정치주체로 정해져 있지 않다. 노동자, 여성, 소수자, 환경운동가, 청년, 지역운동 등 다양한 집단의 요구가 있고, 그것들이 정치적으로 접합(articulation)될 때 비로소 하나의 집합적 주체인 민중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라클라우는 이런 민중 형성을 민중의 정치적 구성(popular construction)이라고 했다. 특히 라클라우는 최근 한국어판으로도 출간된 『포퓰리즘 이성』 (이승원 옮김, 빨간소금 2026)에서 포퓰리즘을 나쁜 우익 정치의 별종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민중이라는 정치적 주체가 만들어지는 하나의 정치 논리’로 재정의했다. 쉽게 말해서 우파 포퓰리즘을 지지하는 민중을 무지하거나 반동적이라고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민중의 불만이 무엇이고 욕망이 무엇인지를 귀담아듣고 그들을 새로운 하나의 ‘민중(the people)’으로 구성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라클라우는 이런 민중 형성을 민중의 정치적 구성(popular construction)이라고 했다. 라클라우의 유명한 말이 있다. “민중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구성된다.” 라클라우에게 포퓰리즘은 그 자체로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민중 대 권력블록’이라는 정치적 경계를 구성하는 논리다. 그래서 좌파 포퓰리즘도 가능하고 우파 포퓰리즘도 가능하다 무페도 이를 수용하지만 『For a Left Populism』에서는 더 나아가 그렇다면 우파 포퓰리즘이 ‘민중’을 구성하고 있는 시대에 좌파는 어떤 ‘민중’을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무페의 대답은 노동계급 하나가 아니라 노동·페미니즘·반인종주의·생태·사회적 평등·민주주의의 요구들을 등가사슬로 연결하여 새로운 ‘우리’를 만들자는 것이다. 여기서 라클라우와 무페가 중시하는 “등가사슬” chain of equivalence이라는 어려운 용어가 나오는데, 민중the people의 요구는 다 다르지만 각자의 문제가 기득권 중심의 정치 경제 체제 때문에 막히게 됨을 경험하면서 그런 경험들이 그들을 서로 묶여주는 힘으로 된다. 예를 들어 청년실업 문제, 노동권 문제, 주거권 문제, 성평등 문제, 소수자 권리문제, 환경 단체 등 서로 다른 방향을 갖는 집합들이지만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런 연결을 라클라우와 무페가 등가사슬chain of equivalence이라고 부른다. ‘등가(equivalence)’라는 말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갖고 있어서, 모두 기존 권력질서에 의해 좌절되고 있다고 이해되는 순간, “당신의 문제와 나의 문제는 서로 다르지만, 우리의 싸움은 연결되어 있다.” 라는 정치적 관계에 있음을 인식하는 뜻이다.라클라우와 무페에게 민중은 정치의 출발점이라기보다 정치적 접합(articulation)의 결과다. 민중 개념에서 출발한 두 사람은 소위 좌파 포퓰리즘의 실제와 이론을 보여주었다. 무페는 라클라우에서 한발 더 나아가 포풀리즘을 민주주의와 결합시키려는 이론을 시도했다. 즉 라클라우의 핵심질문은 "민중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지만, 무페의 핵심질문은 "정치적 갈등을 어떻게 민주화할 것인가?"에 있다는 점이다.라클라우도 그러했지만 무페의 민주적 민중의 문제의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세계를 독점하고 있는 현실정치에 대한 대안찾기에서 나왔다. 신자유주의의 후속타는 오히려 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를 가져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무페는 말한다. 포퓰리즘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좌파 포퓰리즘의 실현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무페 이론의 요지이다. 우파 포퓰리즘 담론에서 "people"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묘사되는 경우가 많으며, 배타적이고 외국인 혐오적인 집단의식을 노출했다. 이에 대응하는 좌파 포퓰리즘은 민족이나 문화적 경계가 아닌 공유된 경제적, 사회적 불만을 기반으로 보다 포괄적인 "people" 개념을 구축해야 한다고 한다.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이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심화된 불평등, 고용 불안정, 공공 서비스 약화에서 비롯된 광범위한 불만을 해소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전통적인 좌파 정치가 주로 계급 투쟁과 기존 제도 안에서 경제적 재분배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좌파 포퓰리즘은 정치적 영역을 확장하여 다양한 사회 투쟁과 새로운 민중의식을 인식하고, 현재의 정치 지형이 기존 마르크스 방식의 계급 환원주의만으로는 충분히 해결할 수 없는 광범위한 불만들로 특징지어진다는 점을 기반으로 대안을 형성한다. 그 대안이란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인해 심화된 불평등, 고용 불안정, 공공 서비스 약화에서 비롯된 광범위한 불만을 해소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좌파 포퓰리즘은 이러한 다양한 투쟁들을 하나의 통일된 운동으로 재구성하여, 신자유주의 엘리트에 반대하는 대다수 사람들을 대표하는 “우리” 대 “그들”이라는 생동감 넘치고 포괄적인 서사를 구성한다. 그런데 서평자가 보기에 이런 “우리” 대 “그들”이라는 전략은 정치가 단순히 이성적인 담론뿐 아니라 개인 간의 정서적 유대감에 의지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무페는 이를 인정하고 전략적 측면에서 우리가 필요하고 그 우리는 자기애적이고 배타적인 우리가 아니라 다양한 집단을 공통분모로 묶어내어 민주적으로 확장된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무페에게 포퓰리즘은 선동이나 대중영합을 뜻하지 않고, 정치공동체를 ‘우리, 민중’의 정치공동체를 구성하여 ‘그들, 지배 엘리트’ 라는 기득권에 저항하는 정치적 경계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페가 말하는 구성적 정치 전략이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스승-제자 관계도 아니고 수직적 계승 관계도 아니지만, 공동의 이론으로 수렴한 학문적 동료이다. 라클라우Ernesto Laclau(1935–2014)는 청년 시절 아르헨티나 좌파정치와 페론주의를 직접 경험하고 영국으로 옮겨 정치이론가로 연구해 왔다. 마르크스주의, 그람시, 페론주의와 라틴아메리카 대중정치가 그의 중요한 지적 배경이었다. 무페Chantal Mouffe(1943– )는 벨기에 출신으로 정치철학과 정치이론 연구자로서 특히 민주주의, 다원주의, 정치적 갈등의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앞서 언급한 책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급진적 민주주의 정치를 향하여』 (1985)은 두 사람의 공동작업으로 계급 환원주의와 역사적 필연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특히 노동문제만 아니라 여성운동, 인종 문제, 환경운동, 성적 소수자 운동, 지역운동, 민주주의 운동 등 환원될 수 없는 복수의 정치적 투쟁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후일 무페는 자신의 책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이를 경합적 다원주의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무페는 좌파가 포퓰리즘적 정서를 부추긴 정당한 불만을 인정하고, 이러한 에너지를 활용하여 보다 포용적이고 평등한 정치 전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응이 없다면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욱 심화되어 우익 포퓰리즘의 세력 확장에 빌미를 제공할 뿐이라고 항변한다. 이런 점에서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을 “사회를 두 진영으로 나누는 정치적 경계를 구축하고 '약자'를 '권력자'에 맞서 동원하도록 ​​촉구하는 담론적 전략"이라고 정의한다.두 진영 형성에서 무페에게 중요한 개념, 적대(antagonism)와 경합(agonism) 은 앞서 말한 우리(we)와 그들(they) 이라는 구별에서 생긴다고 보는데 무페는 그런 구별을 전략적으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적대적 정치는 “저들은 제거해야 한다.”는 논리이지만, 민주적 경합은 “나는 당신의 정치적 입장에 강하게 반대하지만, 당신이 그 입장을 주장할 민주적 권리는 인정한다.”라는 상대방을 인정한다. 무페가 이를 agonistic pluralism, 경합적 다원주의라고 표현했다.포퓰리즘 좌파는 이민자, 불안정 노동자, LGBT+ 커뮤니티를 포함한 노동자 계층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한다. 이러한 포괄적인 피플 개념은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재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좌파 포퓰리즘으로 알려진 미국 민주당 버니 샌더스는 신자유주의 엘리트 중도파 정치인에게 경선 패배를 당했다. 좌파 포퓰리즘 역시 감성적 유대감을 강조해야 하는데, 이 점에서 아직 미숙한 정치적 상황이다. 이 책에서 좌파 포퓰리즘의 사례로서 다룬 스페인의 2011년 Podemos(포데모스) “우리” 정당이나 2009년 국제통화기금의 긴축재정 압박에 대처한 그리스의 시리자Syriza 정당 모두 그 수명을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이 책들을 한국 정치 상황에 맞는 부분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굳이 찾아 읽었다. 그 결과는 나의 기대에 딱 들어맞지 않았다. 우리에게 는 오히려 두 진영의 구별이 강직될 정도 지나치게 구획되어 있어서 좌파 포퓰리즘의 긍정적 효과보다 파괴적인 분리주의의 혼돈에 더 빠지게 되는 위험도를 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의 긍정적 의미도 많다. 적대적 antagonism 대치가 아니라 경합(Agonism)의 다원성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타인을 박멸해야 할 '적(Enemy)'이 아니라, 정당한 논쟁 상대인 '대응자(Adversary)'로 대우하자는 감응적 정치력은 우리에게 가장 결핍된 태도이며 그래서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정치적 지평선에서 “우리”와 “그들” 사이의 전략적 구별보다 파괴적 분리주의의 치명도가 훨씬 높은 것 같다. “우리”가 전도되어 거꾸로 우파 포퓰리즘이 기득권을 보좌하는 영합-구조, 좌우할 것 없는 권력지향의 배제-구조에서 서평자는 지금 허우적거리고 있다. 책을 읽어도 내 생각과 행동의 기준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무페와 라클라우 책 이면에는 스피노자에서 들뢰즈로 이어지는 감응affect(정동)에 호소하는 감성적 철학이 스며있음을 느낀다. 그런 감응은 질적으로 차이는 있겠지만 좌우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다. 이런 감성의 보편성을 현실의 정치에 적용하는 문제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서평자도 인정한다. 좌파 포퓰리즘은 우파 포퓰리즘의 전세계적 득세에 대항력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희망은 있다. 그런데, 교회 포퓰리즘populism과 검찰 엘리트주의가 기묘하게 결합된 한국의 popul-elitism(populism + elitism) 앞에서 무페와 라클라우가 희망했던 좌파 포퓰리즘의 자리는 여전히 묘연하다.
philonat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