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비판하는 과학
과학으로 반성하는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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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공존의 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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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욱 지음 『이자벨 스탱게르스』서평문 중에서)현실적 갈등과 충돌을 봉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화합하는 현상은 과학을 오히려 붕괴시킨다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나는 한국정치를 다시 보는 계기를 만났다. 요즘 한국정치에서 합의와 타협이라는 단어들이 횡행하는데, 화합이나 타협은 지난 역사적 범죄들을 단죄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갈등을 속에서 봉합하려 들지 말고 겉으로 다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공존이 가능해진다. 단죄 없는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방욱의 이 책에서 배운 것이다.

그 중에서도 “타협은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 아니라 저항이 우선이다”라는 말귀는 정말 중요한 의미를 나에게 던져주었다. 이 책은 단순한 스탱게르스의 과학철학을 소개한 책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두꺼운 책도 아니니 안심하시고 전방욱의 이 책 『이자벨 스탱게르스』를 주욱 보시기를 강추한다. - 본문 전체 --서평: 전방욱 2026, 『이자벨 스탱게르스』 커뮤니케이션북스.공존의 생태학서평자 : 최종덕 (독립학자)1. 스탱게르스와 전방욱에 대하여과학은 주관과 독립된 객관적 인식체계이며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재현하는 지식체계이며 사회와 무관한 중립적 가치체계라는 말은 종교적 계시와도 같은 절대명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토마스 쿤의 과학철학에서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합리성 비판의 언어가 많이 나돌기는 했어도 과학의 객관주의 위력은 여전히 지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의 합리성과 객관성 모델은 과학기술과 산업자본이 대량 살상무기에 투여되었건, 지구위기를 조장했건, 지구적 차원의 해킹위협이 있건 말건 관계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혹시라도 과학비판의 목소리를 미미하게라도 내면 대뜸 현실도 모르는 낭만적 언사라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그런 비난의 화살을 가장 많이 받은 지식인이 있는데 그(여성)는 노벨상 수상자로 유명한 프리고진의 공동저자인 이자벨 스탱게르스(Isabelle Stengers, 1949~ )이다. 스탱게르스는 세계적 유명도에 비해 의외로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이번 전방욱 선생님의 책은 스탱게르스 철학을 소개하는 데 아주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전방욱 선생님은 이미 잘 알려진 책 『수상한 과학』(2004)과 『DNA 혁명: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2017)을 통해 생물학자의 이름을 되새겼는데, 더 나아가 최근에는 『캐런 바라드와의 대화: 행위적 실재론 실천』(2024), 『얽힌 생명의 역사』(2025)과 같은 과학철학자로서의 위상을 겸비하신 분이다.전방욱의 책 ‘수상한 과학’이라는 용어에서부터 우리는 그가 비판적 지식인일 것이라고 눈치 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스탱게르스의 철학적 태도에 기꺼이 동참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스탱게르스의 책 가운데 『느린 과학』(2013/2025)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는 것만 봐도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전방욱의 『이자벨 스탱게르스』는 짧고 가벼운 판형으로 기획된 책이지만, 스탱게르스 철학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10개의 은유적 개념을 오해 없이 풀어보여준 그의 글쓰기 실력은 정말 대단했다. 2. 관용에서 실천의 생태학으로 : 과학의 창의성과 신뢰를 같이 얻는 길전방욱의 책 전반에 걸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실천의 생태학”이다. 여기서 실천이란 특정 분야나 직업군의 작업방식을 말하는 명사가 아니라 기존 틀에 대한 문제점을 다시 보고 상대를 응대하는 활동양식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서로 다른 양식들이 하나만의 기준을 의심하고 거부하며, 지위나 지식의 서열화를 부정하는 사유의 배치라고 표현했다.(4)이런 점에서 과학은 자연을 지배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내는 가능성과 위험에 응답하며 ‘대화’를 여는 실천 행위임을 강조한다. 과학은 완성된 법칙을 찾는 학문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하는 문제의식의 학문이어야 한다는 스탱게르스의 입장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거대담론으로서 과학에 대한 논의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우리는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우리는 남과 비교하여 나와 다른 남을 아주 쉽게 욕하고 따돌리는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이나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남보다 많고 높아서 그 남들을 계몽하려만 들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일상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나라는 중심을 버리고 나와 너 모두 주변의 관계 포인트임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나를 중심으로 하면 결코 남과 공존할 수 없다. 둘째 남들을 무조건 포용하고 관용하면 일이 잘 풀릴까? 그렇지만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나와 남 사이의 갈등과 충돌 자체를 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자는 스탱게르스의 공존의 생태학을 설명함으로써 그런 문제들에 응대한다. 그 응대법은 이렇다. 공존이란 갈등을 무시한 채 상대를 끌어안는 것과 다르다. 공존은 오히려 나와 다른 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그렇게 수용하는 행위 속에서 변형되고, 변형하면서 새로운 무엇이 생성되는 그런 드라마틱한 실천과정이라고 한다. 수용과 변형과 생성의 실천과정에서 나라고 하는 절대적 ‘나’도 없고 너라고 하는 절대적 ‘너’도 없음을 알게 된다. 거꾸로 말해서 절대적 ‘나’와 ‘너’라는 틀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공존이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관용’은 공존의 생태학에 도움이 안 된다고 하는 스탱게르스의 명제를 저자 전방욱은 매우 강조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너를 관용한다는 것의 실체는 ‘나’라는 주체를 중심으로 놓고 ‘너’를 포용해줄 수 있다는 주체중심의 논리에 있다. 그래서 관용의 논리는 공존의 생태학에서 멀어질 뿐이라고 한다. 저자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관용은 타자를 억압하지 않는 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판단 종료 이후 타자를 허용하는 방식이다.”(6) 관용은 노정된 문제를 일시 봉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의 차이를 인정한 채 공존의 방법을 찾는 길이 진짜 중요하다고 한다. 즉 “관용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아니라 자기 확신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82) 서평자는 이 부분을 몇 차례 더 읽었다. 의미도 있지만 재미나기도 했다.다시 과학 이야기로 돌아오자. 과학에서 실천의 생태학이 중요하다는 것이 스탱게르스의 주요 과제로 볼 수 있다. 스탱게르스 실천생태학의 철학의 몸통 안에는 들뢰즈, 화이트헤드, 윌리엄 제임스,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배선되어 있는데, 일선의 과학실험실 현장철학은 라투르의 관점과 연동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설의 지위를 갖는 과학탐구의 예비적 도구로서 연상된 팩티시factish라는 라투르(2009)의 은유법은 사실fact과 숭배fetish의 결합의미가 바로 과학을 유지한다는 점을 잘 알려주었다. 과학을 은유하는 라투르의 팩티시는 고집스런 과학의 우월성을 꼬집는 것인데, 스탱게르스는 팩티시를 특이성singulality 개념으로 확장하여 과학의 아슬아슬한 관계내재성을 우회하여 표현한다. 쉽게 말해서 과학실험실에서 실험과정과 결과는 그 연구자가 속해있는 과학자 집단의 규칙과 약속에 의존되어 있어서 해당 실험이 연구자 개인의 엉뚱한 의견으로 도달하지 않게끔 하는 역할을 중시한다. 한편 과학실험의 행위와 과정은 결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으며 실험과정의 역사적 배경에 간섭된다는데, 오히려 이런 상황이 창조적 결과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탱게르스는 전자를 “의무”obligation로, 후자를 “요구”exigence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스탱게르스가 말하는 특이성의 내용이다. 이 내용이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특이성 실천의 두 가지 제약으로서 요구와 의무를 볼 때 “의무만 앞서면 실험은 경직되고 요구만 따르면 신뢰를 잃는다.”고 전방욱은 쉽게 설명해준다. 스탱게르스에게 과학은 이미 주어진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 팩티시factish를 만들고 안정된 특이성으로 발전시키되, 자연의 요구와 공동체의 의무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특이성 실천이라고 보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3. 사변 철학과 느린 과학스탱게르스의 사변적 사유는 경험을 출발로 하면서 경험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아직 결정되지 않은 가능성들을 성급하게 닫지 않고, 무엇이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를 탐색하는 사유라고 저자는 쓰고 있다. 여기서 사변speculation이란 경험과 지식을 배치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스탱게르스의 사변철학은 화이트헤드의 사변철학에 뿌리를 둔다고 전방욱은 말한다. 화이트헤드에게 사변철학은 경험의 모든 요소를 배제하지 않는 개념을 만들려는 시도이듯이, 스탱게르스의 사변적 사유란 배제되거나 무시된 존재들이 다시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이라고 한다. 이런 저자의 시선은 이 책 전반에 관통된다. 스탱게르스의 유명한 말, 느린 사유slow down reasoning가 결국 사변적 사유의 핵심이며, 이런 사변speculation을 통해서 경험과 사유는 분리된 두 개의 항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동시에 발생한다고 한다.(21) 경험과 사유를 구분한 근대 이후 자연의 이분화bifurcation of nature 사유를 화이트헤드는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라고 비판했는데, 스탕게르스도 전적으로 같은 길을 걷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변철학은 사변적으로 끝나지 않고 구체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사변적 과학은 당장의 문제(현안)에 몰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이유를 다시 질문함으로써 전적으로 새로운 결과물에 도달할 수 있다. 스탱게르스에서 철학은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고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게 해주는 길이다. 이런 길이 진짜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사변과학은 실험실에서조차 쓸데없는 문제에 매달려서 허송세월을 보내느니 일찌감치 진짜 문제를 찾아가는 길을 제공함으로써 구체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스탱게르스는 문제를 단순한 질문으로 축소하지 않고, 다양한 존재와 힘들이 서로 요구하고 응답하는 살아 있는 사건으로 만든다. 사변과학 역시 실험실 현장이라는 사건 속에서 발생하는 창조적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저자 전방욱은 오늘의 자본주의를 주술자본주의라고 말한 스탱게르스의 의미를 재조명한다. 첨단과 광폭의 현대 산업자본의 권력으로 점점 당연시되고 있는 자본의 주술에 마비되지 않도록 관심을 항상 일으키면서 강요된 침묵에 저항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스탱게르스를 통해서 강조한다. 전통적 이념이나 당연시되는(보편적이라고 주장하는) 당위적 구호를 내세워 타인을 계몽하거나 의식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 참여함으로써 타자와 미시적으로 공감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공감의 구체적 지표는 아래와 같다. 첫째 ‘현실은 어쩔 수 없다’라는 식으로 자본주의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수영해야 한다는 주입된 의식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는 문제원인을 구조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책임으로 돌리는데, 우리는 그런 자본권력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속도와 긴급성을 내세워 사람들로 하여금 판단과 결정을 그냥 반사적으로만 하게 몰아가는데, 이런 자본의 회오리 속도에 떠밀려가지 말고 느린 과학과 느린 생활철학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자본의 위력은 대안적 상상을 마비시키는 주술sorcellerie에 이르렀다는 뜻이며, 그 주문으로부터 벗어나는 실천을 통해 자본과 근대라는 주술을 무력화해야 한다는 스탱게르스의 태도는 “느린 과학”의 은유에서 잘 드러난다고 저자 전방욱은 이 책 『이자벨 스탱게르스』에서 말한다.느린 과학이란 사유와 질문의 시간을 복권하여 속도경쟁과 효율성의 강박에 저항하여 연구의 질과 사회적 적절성을 회복하는 과학이라고 스탱게르스는 말한다. 즉각적 성과만 평가되는 자본과학을 비판하며 사회정치적 맥락의 복잡한 질문을 성실히 응대하는 것이 느린 과학의 요체다. 그래서 느린 과학은 실천의 생태학과 연결된다. 느린 과학은 과학을 보호하기 위한 윤리적 태도이며 정치적 선택이다. 느리다는 형용사는 나의 성공을 위해서 너를 침묵시키왔던 그런 권력의 근대과학에 저항하는 과학이다. 느린 과학은 오래 책임지는 과학이며 자신의 요구가 혹시 지식폭력으로 되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끝까지 묻는 태도이다.(38-40)느린 과학은 전문가만의 과학이 아니라 대중 지성의 참여를 독려한다. “과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라는 지금까지의 대중과학 교육은 대중을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지식수용자로 간주해왔다. 한편 느린 과학에서 대중은 과학에 참여하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그런 대중을 "과학의 대중 지성"이라는 스탱게르스의 명제들을(41) 저자는 쉽게 풀어가면서 책 전반에 걸쳐 강조한다. 과학은 전문가를 재생산하는 머무르지 않고 감식가를 길러야 한다는 표현이 재미나다.(41) 쉽게 말해서 과학 주변의 활동가, 과학행정가, 실험실 주변보조자 등 비전문가이지만 참여하는 시민의 지식들과 전문가의 지식,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일방적이거나 우월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저자 전방욱은 강조한다.개발론과 성장론은 대중들이 과학에 참여와 주의를 기울일 필요 없게끔 만든다. 거꾸로 느린 과학은 대중 개인이 과학과 그 과학의 사회적 배경에 대하여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도록 독려한다. 능동적 관심과 주의 기울이기 자체가 정치적 실천이라고 하는 저자의 풀이는 탁월하다.4. 타협은 공존이 아니다 : 침묵하지 말고 저항하기대중의 관심과 주의 기울이는 태도는 불행히도 "비과학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비난받기 십상이다. 지식권력자는 과학의 객관성과 중립성 구호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적 관심과 사회적 주의기울임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접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런 비난들이 정치적 오류임을 자각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근대과학의 구호에 속지 말아야 한다. 그런 구호에 의해 진짜 과학은 침묵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49) 그의 글쓰기는 감동적이다. 그런 침묵을 깨고 저항해야 한다는 저자의 글쓰기는 주체 중심의 합의나 통합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공약불가능한 세계(의견, 장치, 과학이론)들이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는 태도가 바로 저항의 핵심임을 잘 설명한다.(49)이런 점에서 주의 기울이기는 책임의 문제와 연결된다. 여기서 책임은 도덕적 책임이 아니라 자신의 개념과 판단이 혹시나 타자의 개념과 판단을 무력화시키고 있지 않은지를 되돌아보는 반성의 책임을 말한다.(50) 자신의 개념이 정답이라고 강하게 표현하면 할수록 자신의 개념이 독재적인 개념으로 변성할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한다.(사변해야 한다) 현실적 갈등과 충돌을 봉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화합하는 현상은 과학을 오히려 붕괴시킨다고 강조한다. 이 점에서 나는 한국정치를 다시 보는 계기를 만났다. 요즘 한국정치에서 합의와 타협이라는 단어들이 횡행하는데, 화합이나 타협은 지난 역사적 범죄들을 단죄하는 데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갈등을 속에서 봉합하려 들지 말고 겉으로 다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공존이 가능해진다. 단죄 없는 공존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방욱의 이 책에서 배운 것이다.

그 중에서도 “타협은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 아니라 저항이 우선이다”라는 말귀는 정말 중요한 의미를 나에게 던져주었다. 이 책은 단순한 스탱게르스의 과학철학을 소개한 책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두꺼운 책도 아니니 안심하시고 전방욱의 이 책 『이자벨 스탱게르스』를 주욱 보시기를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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