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메타포에 대한 철학적 이해
동국대학교 제1회 에코포럼 <시스템과 상호의존성>
2004년 11월 20일 - 동국대문화관
발표

시스템 메타포에 대한 철학적 이해



1. 미시세계에서 객관적 대상의 의미

1935년 아인슈타인과 그의 두 동료인 포돌스키와 로젠은 Physical Review 라는 물리학회지에 획기적인 논문 한 편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을 그들 이름의 약자를 따서 EPR 논증이라고 한다. (Einstein-Podolsky-Rosen) 그 내용은 운동상태에 대한 양자역학의 기술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당시 발표한 실험내용은 실제로 이루어진 실험이 아니라 가상적인 일종의 사고실험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양자와 같은 소립자들은 전하를 띠고 있는데, -½ e와 +½ e의 짝을 이루는 에너지보존 상태인 e1, e2의 두 입자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쏜다고 하자. 이 경우 한쪽 방향으로 날아가는 입자 e1에 대하여 전자석을 걸어주면 그 입자는 전기를 띠고 있으므로 당연히 자석의 힘에 의해 휘게 된다. 그런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는 입자 e2에 대하여 전자석을 걸어주지 않았는데도, e1이 자력에 의해 휠 때 자석을 걸어주지 않은 e2도 따라서 제가 알아서 동시에 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양자세계의 운동상태는 전통물리학의 세계관을 뒤흔들어놓는 일이었다. 물리학은 인과율을 기반으로 하는데 e1의 입자는 분명히 인과적인 물리현상이기는 하지만, e2의 동시적 휨의 현상은 전혀 인과적이지 않은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쌍둥이 중 한 명이 돌에 맞아 머리에 혹이 난 순간, 같은 시간에 돌에 맞지도 않은 쌍둥이의 다른 한쪽이 동시에 머리에 혹이 나는 해괴한 사건과 같다.

아인슈타인은 이러한 비인과적 사태가 텔레파시에서나 가능한 것이라 하였고, 그런데 텔레파시는 당연히 물리학의 연구영역이 아니므로 물리학의 인과율에 거스르는 e2의 사태를 기술한 양자역학의 기술방식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바로 이 논문의 요지였다.

그러나 넉 달 후 닐스 보어라는 물리학자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반박하는 논문을 내어놓았다. 양자역학자로서 보어의 기본 입장은, 아인슈타인이 두 개의 개체라고 보았던 e1과 e2는 실제로 독립된 두 개체가 아니라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물리상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의 동역학과 보어의 동역학이 보여주는 세계관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인슈타인에게 미시세계의 개체는 그 외형적 조건처럼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분리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분리된 두 개가 서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보어에게 미시입자의 개체들은 외형적으로는 셀 수 있는 분리된 개체처럼 여겨질 수 있으나 실제로는 모두 연결된 하나의 비분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논쟁 이후 50년 넘게 후대의 수많은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물리현상을 인과성의 범위 안에 국한해야 하는지 아니면 전통적 인과율에 맞지 않은 비분리의 물리상태를 인정해야 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다가 1970년대 들어와서 아인슈타인 진영과 보어 진영의 논쟁은 사고실험이 아닌 실제적인 실험결과에 의해서 보어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양자상태의 입자들의 통일성, 비분리성을 기존의 인과적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런 양자상태의 입자운동은 고전역학에 길들여진 이성(理性)적 사유에서 벗어나는 다른 물리적 지평에 있는 것이어서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양자 차원의 입자운동의 상태가 바로 내재적인 상호관계망의 구조에 비유될 수 있다. 한쪽 소립자와 다른 쪽 소립자는 분명히 분리된 서로 다른 입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의 내적인 상호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계망의 존재가 언어의 경계 안에서 설명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닐즈 보어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는데, 비록 미시세계의 대상일지라도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거시세계의 언어를 사용해야 되지만 거시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런 역설이 그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EPR 실험은 70년대 중반 들어 현실적인 실험으로 증명이 되었지만 여전히 일상적인 거시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남는다.

우리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고전적 의미의 인과율은 다음의 조건을 포함한다.

첫째, 원인은 결과보다 시간적으로 앞서 있다.

둘째, 원인 유발과 결과발생은 동일한 대상 혹은 동일한 사태에 대하여 적용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대상 a에 힘을 가할 경우 대상 a가 움직이는 결과가 발생할 뿐, 힘을 가하지 않은 다른 대상 b에는 별다른 결과를 유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셋째, 원인과 결과는 선형적이라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인과적인 물리 방정식이 있을 때 그 함수에 변수로서 원인 값을 대입할 경우 결과 값이 일의적으로 산출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바로 EPR 실험은 이러한 고전적 의미의 인과율의 적용범위를 붕괴시킨 결과를 낳았다.

첫째와 둘째 조건은 너무나 당연한 말인 듯 하지만 양자현상에서 이 두 조건에 합치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EPR 실험은 상당한 논쟁점을 불러 일으켰다.

아인슈타인은 첫째 조건의 불일치는 타임머신과 같은 사례이기 때문에 기존의 물리법칙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여긴다. 둘째 조건의 불일치 역시 대상의 정체성이 붕괴되는 사례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았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고전적 의미의 인과율에 대한 충실한 계승자로서 양자론의 방정식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양자현상에서 이 같은 사태는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에 어떻게든 설명해야만 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숨겨진 변수 이론”을 제시했다.

숨겨진 변수 이론이란 겉으로 보기에 고전적 의미의 인과율이 붕괴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인과성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한 변수들을 아직 찾지를 못해서 비인과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점을 주장했다. 결국 EPR 현상과 같은 양자현상에서 나타난 인과율의 괴리는 아직 현상 이면에 숨겨진 변수들을 찾지 못한 인간이성에 책임을 돌렸다. 결국 인과율을 고전적 의미로 국한할 것인가 아니면 인과율의 범주를 확대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로서 아인슈타인의 해결방식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닐즈 보어의 해결방식을 따를 것인가의 갈림길에 있다.

양자현상은 관계성(Relationalität)과 전체성(Ganzheit)이라는 두 가지의 자연철학적 개념으로 요약된다. 여기서 보어의 관계성 개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보어는 양자현상이 독립적 실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하였다. 양자역학적 결과에서 볼 때 물리적 실재의 기술은 측정장치와 대상의 상호관계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양자대상과 측정장치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것은 고전적 의미의 객관성의 기준으로 볼 때 용인될 수 없는 개념이었다. 물리적 대상은 어떤 관찰자가 관찰을 하더라도 여전히 객관적 성질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양자론에서는 측정장치와 관찰자의 상황과 상태에 따라 물리적 대상의 결과는 다른 값을 유발하는 기괴한 결론이 나온다. 파동함수를 통해서 본 대상의 양자역학적 기술description은 관찰수단과 관계된 상대주의적 요청에 따른다. 관찰되는 대상은 관찰이라는 측정행위가 시작되면서 대상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없으며 동시에 대상과 관찰자의 상호관계가 모종의 힘으로 작용한다. 이를 보통 “외부적 교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외부적 교란을 인정할 경우 전통적인 인과율의 엄격성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보어는 실제로 한쪽의 물리체계에 대한 완전한 기술을 시도한다고 해도 다른 쪽의 상태에서 무슨 과정이 일어날 것인지를 분명히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위치와 운동량이 동시적으로 정확하게 정의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위치를 정확하게 잴 수 없으며, 에너지를 정확하게 측정하려 한다면 시간을 더 이상 정확하게 잴 수 없다. 인과율과 시간 좌표도 동시적으로 기술될 수 없다. 이러한 두 변수들을 상호공액가능한 연산자라고 말하는데,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통하여 이미 작용양자의 존재로 인한 인과적 정확성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보어는 이러한 불확정성이라는 미시세계 자연의 한계가 곧 자연법칙적 한계라고 본다.

양자세계의 작용양자에 의존한 비인과성은 양자대상과 측정장치간의 분리불가능성과 항상 연관된다. 양자역학에 있어서 작용양자의 존재는 바로 그 대상과 측정장치간의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그들간의 분리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측정장치가 관찰대상에 미치는 영향의 교란값을 계산한다든가, 두 연산자들의 공액값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알려 진 바와 같이 두 공액 연산자들의 가관측량들의 동시적 인식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에 의해 제한된다. 이러한 한계가 양자대상에 대한 인간인식의 한계인가 아니면 양자대상의 존재 자체의 한계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상보성 개념을 통하여 자연철학적으로 답변되어야 할 것이다. 결국 여기서 양자적 관찰대상과 거시적인 측정도구 및 관찰자와의 상호관계가 문제된다.

측정장치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장치와 양자 대상은 비가역적 방식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태로 진입된다. 그 과정에 있어서 측정 결과는 거시적으로 한정된다. 비가역적 과정은 거시적인 결과로 진행된다. 우리는 항상 양자적 과정의 결과를 거시적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이 상황은 보어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하는 이해방식의 핵심 개념인 상보성 개념에 의해 서술되었다. 그의 상보성 개념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사유방식을 전격적으로 전환시킨 자연철학의 새로운 길”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은 양자물리적 개체에 대한 엄밀한 예측이 측정 행위 이전에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근거한다. 그 해석은 실재와 이론간의 일의적인 대응을 주장하는 EPR의 입장을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물리에 있어서도 고전적 언어로 기술될 수 없는 현상을 다시 고전적 언어로 기술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보어는 실토하고 있다. 이것은 양자역학의 근원적인 난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보어는 양자론의 역설적인 모습에 대하여 새로운 개념이나 자연법칙을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히려 기존의 개념을 적용하는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을 보여주었다.

앞서 말했듯이 보어의 상보성원리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측정하는 관찰행위자는 거시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일상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인과율과 같은 기존의 전형적인 개념들은 이미 인간의 언어 속에 단단히 짜 맞추어져 있다. 그와 같은 기존의 개념적 언어들이 미시현상의 영역에서도 제한 없이 적용범위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맞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양자역학에서 관점의 변화는 단호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외형의 언어를 뜯어고치는 일보다 생각을 다시 새롭게 갖는 일이 더 중요하다. 고전역학의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 원자론적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보어는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진 체계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상관성을 보이는 공동의 한 체계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양자적 대상의 미래 생태에 대한 가능한 방식의 모든 예측을 주는 조건들은 측정장비와 관찰자 그리고 양자적 대상을 하나로 간주하는 전체 체계에 의존되고 있음을 주시한다.

양자 차원의 물리적 실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측정하는 행위에서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국 물리적 실재는 관찰된 현상마다 달리 해석이 가능하다. 보어의 말을 빌리자면, “고립된 물질입자는 추상적인 것이며, 그것의 속성들은 다른 체계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으며 인지될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도 이와 유사하게 쓰고있다. “그 안에서 다양한 연결망이 조성되는 복합적인 그물망으로서의 이 세계는 과정들이 서로 교차되고 작용하는 듯이 나타나며, 또한 이런 방식으로 전체 그물망의 구조를 결정한다.”

2. 미시세계에서 관찰행위의 의미

자연을 관찰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일상 세계 안에서 관찰 행위는 관찰 대상을 건드리지 않고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양자 단위의 소립자 세계에서는 양자를 관찰하는 행위가 바로 관찰대상을 건드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측정도구를 통한 관찰행위는 양자의 위치와 에너지를 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관찰이란 결국 대상과 관찰자와 상호관계의 결과를 반드시 수반한다.

이 의미는 관찰이라는 행위가 있어야만 비로소 대상은 관찰자에게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관찰되기 전의 대상과 관찰 후의 대상은 분명히 다른 물리적 상태에 있다. 양자 상태에서 관찰되기 전의 관찰대상의 양자 상태를 중첩 상태라고 부른다. 이러한 중첩 상태는 관찰하는 동시에 붕괴되면서 물리상태의 변화가 일어난다. 쉽게 말해서 관찰은 물리적 교란이며 교란이 있어야만 비로소 대상은 인간에게서 인식 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파동함수로 기술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순간 그 파동함수는 변화된다. 그것은 중첩된 파동함수에서 특정 상태로의 순간적 전이를 의미한다. 대상의 상태는 관찰되기 전의 상태와 관찰한 이후의 상태가 다르며 관찰되기 전의 상태는 물리적 상태의 모든 가능성을 다 포함하는 그런 모종의 복합적 상태이다. 이를 중첩 상태라고 앞서 말했다.

이런 복합적 상태들의 잠재적 가능성들 중에서 오로지 하나의 상태만이 관찰을 통해 현실화된다. 따라서 측정과정 및 관찰행위를 통하여 관찰대상의 실재 모습이 드러난다. 이러한 과정을 양자론에서는 붕괴라고 말한다. 정확히 말해서 관찰행위를 통한 파동함수의 붕괴(Reduktion)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붕괴의 과정은 반드시 비가역적이다. 쉽게 말해서 관찰행위를 통한 변해진 양자 상태는 관찰행위 이전의 중첩상태로, 즉 거꾸로는 절대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파동함수의 순간적 붕괴를 유도한 양자역학적 측정과정은 고전 역학적 입장에서 볼 때 믿기 어려운 결과를 보여 준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양자론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파동함수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는 가능한 사건들의 동력학적 기술이다. 양자론에서 처음시간 (t)의 파동함수가 관찰을 통해 결정되어지면, 이 이론 법칙으로부터 임의의 나중시간 (t+δt)의 파동함수가 예측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파동함수는 시간에 따른 사건의 경과 그 자체를 기술할 수는 없다는 것이 강조되어져야만 한다. 파동함수는 그 과정의 경향, 그 과정의 가능성 혹은 그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인식만을 어느 정도 표현한다는 사실을 하이젠베르크는 강조한다. 파동함수는 측정을 통해 얻어지는 인식의 한 표현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식의 획득을 통해 갑자기 변해질 수 있다.

옴살론적 측면에서holistic view 볼 때 파동함수는 측정된 체계의 모든 가능성들의 복합체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가능성들의 단순한 혼합체가 아니라, 그 부분들이 항상 변화되는 유기체적 전체와 같은 종류이다. 우리가 관찰을 수행하자마자, 파동함수의 비가역적 붕괴가 일어난다. 파동함수의 붕괴는 다양한 가능성에서 하나의 유일한 사실로 이끈다. 동시에 그 붕괴는 이론적 무한차원의 실재에서 하나의 차원으로의 비약이다. 이러한 붕괴는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등록‘(Registrierung) 이라고 불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관찰자는 그것이 기계이든 인간이든 상관없이, 시공간에서 등록을 위한 결정을 한다.

보어는 양자현상의 기술을 특정상황아래서 이루어지는 관찰과 관계되는 무엇으로 간주하였다. 막스 야머Max Jammer는 보어의 유명한 말을 고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자 세계는 없다. 단지 추상화된 양자역학적 기술만이 있을 뿐이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무엇인지를(how nature is)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리학은 자연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what we can say about nature) 관한 것이다." 양자세계는 원자론적 대상들의 단순 집합이 아니다.

그렇다고 양자세계가 주관적이라고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어의 주장에 의하면, 하나의 순수한 전체상태의 확률 분포는 주관적 요인이 아니라 양자대상의 원천적인 속성이며 자연의 객관적 사실일 뿐이다. 드리슈너(Drieschner, Michael)는 양자론의 파동함수 기술방식이 마치 객관적이지 못한 것처럼 오해하는 고전역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 객관성의 기초공리를 다시 따져 보자고 제안하였다. 드리슈너는 양자 대상이 시간 변화에 따라 그리고 측정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방식으로 기술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사실은 고전역학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대상은 시간에 따라 힐버트 공간의Hilbert's Space 일차원적 하부공간 즉 힐버트 공간의 벡터로 혹은 이차원적 하부공간으로 투사되는(projiziert) 투사연산자(Projektionsoperator)를 통해 기술된다. 양자역학에서도 변화하는 시간에 따른 각 대상에 대하여 원자 차원의 기술이 해당될 수 있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또한 매우 그럴 듯 하다.”

이러한 대상개념에서 양자 대상도 원리적으로는 확률의 개념을 빌어 기술될 수 있다는 점이 성공적으로 유도되었다. 양자론에서 실제로 힐버트 공간의 `거의 모든’ 가능한 상태들은 확률분포 lΨl2 으로 연산화되며, 구체적 측정으로는 그 모든 상태를 기술할 수 없다. 양자역학에서는 물론 보통 강한 의미의 결정론적 객관성이 성립되지 않지만, 확률적 의미의 객관성은 적용된다. 따라서 양자론에서도 관찰의 물리적 의미를 포용하는 속성으로 실재적 대상에 대하여 모순 없이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양자 상태를 확률 분포의 체계로서 이해할 수 있다면, 양자적 기술도 당연히 객관적이다.

측정결과를 단지 관찰자로서의 주관에만 의존적인 것으로 본다면, 코펜하겐 해석은 관념론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고전론자들의 오해나 편견과 달리 양자론의 코펜하겐 해석은 관념론과는 무관하다. 양자 상태는 대상과 측정장치 사이의 상호작용을 함의한다고 이미 말했다. 하지만 그 관계는 대상과 주관 사이의 직접적 관계가 아니다. 그 첫째 관계는 순수 물리적이며, 지각하기 위한 조건이며, 대상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로 양자론에서 보듯 주관과 객관 사이의 관계는 관찰수단과 피관찰체 사이에 형성되는 일상언어적 관계로 비유될 수밖에 없는 역설적 속성을 갖는다.

보어는 이러한 인식론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사유활동에 의한 기술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내용과 그것을 대하는 주관의 대비를 요청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엄격한 분리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주관과 객관이라는 두 개념은 우리의 사유내용 속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보어는 이러한 개념들에 대한 기존의 분석이 개념에만 매몰되어 있어서 개념이 말하고자 하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보어의 생각과 유사한 생각을 요르단(Jordan)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의 개념구조는 “감각적 경험을 넘어서는 인식의 표출을 통해서 자연현상의 실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질서화시키고 제어하는데 도움을 주는 보조 구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르단의 해석은 보어의 기본사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인식이 주관에 제한되기보다는 주관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관찰결과로서의 현상을 정의하는 보어의 방식에 따르면, 측정장비의 한 부분을 변화시킬 때, 물리적 현상을 새롭게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현상주의적 테제는 붕게(Mario Bunge)의 표현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물리적 대상은 인식하는 주관 혹은 관찰자로부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존재하는 것은 관찰자와 그가 행하는 관찰수단 그리고 관찰대상으로 (숨겨진 방식으로) 구성된 하나의 닫혀진 통일체이다. 한 체계 안의 이 세 요소들 사이의 구분은 일의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다.

대상을 관찰수단에 편입시키거나, 관찰수단의 연장으로 보는 것은 인식하는 주관의 판단에 달려있다. 모든 관찰은 관찰수단과 상호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양자역학의 모든 형식은 이러한 조건들을 만족한다. 즉 실험적 상황에 관계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코펜하겐 해석의 입장을 현상주의로 간주하는 것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코펜하겐 해석을 전형적인 현상주의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현상주의에 따르면 사물과 과정에 대한 모든 명제는 감각자료에 대한 명제로 환원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인식은 감각적으로 주어진 것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반면 코펜하겐 해석에서 실재에 대한 인식은 대상의 감각자료들의 모음이 결코 아니라, 인간과 대상 사이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인식론적 입장은 아인슈타인의 인식론적 입장과 전혀 다르다. 코펜하겐 해석의 입장은 현상주의적 차원이기보다는, 보어의 관계성 개념에서부터 나온 실재의 전체성을 추구한다. 관찰행위는 대상세계에 간섭한다. 관찰행위는 주관적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찰행위가 있음으로 해서 대상세계는 완전한 물리적 실재에 가까워진다. 대상과 자아, 객관과 주관을 이어주면서 동시에 세계를 추상성에서 구체성으로 전환하는 행위가 바로 관찰행위이다.

3. 물리적 실재의 의미

하이젠베르크에 의하면 객관성과 고전적 의미의 실재성은 서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파울리도 다음과 같이 쓴다. “대상에 대해 가능한 정보의 원천이 관찰을 통해 비가역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처럼 대상의 상태가 관찰에 대하여 독립적일 수 없다 하더라도, 원자적 현상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여전히 객관적 기술이다. 관찰을 위한 전체 실험장치에 의해 정의된 현상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완전히 새로운 현상을 낳기 때문에, 그러한 전환은 고전물리학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던 자연의 새로운 전체성을 밝혀준다.”

파울리는 존재하는 것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자의 고유하고, 고정되고, 일정한 속성을 부정한다. 관계의존적 전체상태를 존재론적 실재로 이해할 수 있다면, 코펜하겐 해석을 현상주의로 몰고 갈 필요가 없다. 이러한 존재론적 이해의 관점에서 볼 때, 양자적 실재는 경험적 행위와 아주 긴밀하게 관련된다. 이러한 경험적 행위와 관련하여 데스파냐(Bernard D'Espagnat)는 `현상주의’대신에 ‘경험의 철학’이라는 말을 쓴다. 이러한 ‘경험의 철학’은 기존의 현상주의와도 멀지만, 아인슈타인의 경직된 실재론과도 거리가 멀다. 다음 장에서 코펜하겐 해석의 실재 개념을 다루려고 한다.

상보성의 개념은 서로 대립되는 두 가정들의 종합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의도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물리적 실재에 대한 상세한 이해가 필요하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실재의 올바른 기술은 개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실재의 올바른 기술은 관측장치와의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이 양자물리학에서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적 현상은 거시적 언어를 통해서 기술되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거시적 언어를 통해서만 설명될 수도 없다는 사실에서 심각한 어려움이 생긴다.

측정 순간에 파동함수의 붕괴는 인식론적 해석에 속한다. 왜냐하면 양자역학에서 인식론적 과정은 곧 측정과정을 말하기 때문이다. 상보성원리에서도 현상의 인식론적 과정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에 상보성원리를 굳게 믿고 있는 물리학자에게 전통적인 존재론적 실재개념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코펜하겐 해석과 관련하여 실재개념을 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그 가능성은 대상의 양자상태와 포텐셜의 공존성 사이의 상관성을 통해 열려진다.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물리적 대상의 실재에 대한 보어의 견해는 아인슈타인의 물리적 실재론과 분명하게 대비된다.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서 물리적 실재는 다른 실체들과 어떤 관계로도 독립적인 속성들을 갖는 그런 실체(Substanz)이다. 반면 보어에 있어서 실재는 실체들 사이의 관계이며, 측정은 그 관계의 한가지 특수한 경우이다.

아인슈타인에게는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리적 상태를 발견하는 것이 물리적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며”, 보어에게는 “관찰 전에는 전혀 달랐던 상태를 관찰을 통하여 새로운 물리적 실재가 형성된다.” 결국 물리적 실재를 파악하는 일은 양자적 대상의 상태와 측정장치의 거시물리적 상태 사이의 상관성을 해명하는 일이다.

파동방정식은 측정 혹은 관찰과 동시에 일순간에 갑자기 변한다. 물리적 상태의 동시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쉬뢰딩거의 고양이’라는 비유를 자주 든다. 쉬뢰딩거의 고양이는 보이지 않는 블랙박스 안에 들어 있는 한 마리의 고양이를 일러 말한다. 그 고양이는 관찰하기 전까지 살아 있는지 혹은 죽어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상태이다. 즉 블랙박스의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고양이의 상태를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고양이는 관찰하기 전까지 `살아 있거나 혹은 죽어 있는 것’(or)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것’(and)이다.

그러한 특수한 상태에 놓인 고양이를 쉬뢰딩거의 고양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블랙박스를 열고 관찰하는 그 순간에 그 쉬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아 있거나 혹은 죽어 있는 것’으로 된다. 즉 “and"의 상태에서 ”or"의 상태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관찰의 작용이고 그러한 전환을 파동함수의 붕괴라고 말한다. 이 점은 기존의 개념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종래의 물리적 실재란 대상 세계에만 해당하는 물리적 상태를 의미했지만, 이제 양자론에서 말하는 물리적 실재란 관찰자와 대상이 하나로 연관된 하나의 전체 상태를 실재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관찰자를 포함한 전체계의 파동함수는 다양하고 거시적으로 서로 차이가 나는 상태들로 나뉘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 파동함수의 순수상태나 파동함수의 붕괴과정이 아니라, 단지 관찰결과만을 경험할 뿐이다. 이렇게 미분화된 상태들의 가능성들은 경험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데스파냐는 이러한 경험실재(Erfahrungsrealität)를 ‘실재 그 자체’(Realität an sich)와 구분하였다. 관찰 전의 순수상태를 포함하는 ‘실재 그 자체’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전이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통상적 의미의 물리적 실재가 아니었다.

보어는 양자상태의 전체성을 강조한 반면, 하이젠베르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세태의 의미로 측정과 측정장치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불확정성을 이해하고자 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잠세태적 실재를 불확정성의 관계 속에서 말한다. 그는 그러한 실재를 제 3의 실재 혹은 중간 실재(dritte oder intermediäre Realität)라고 했다. 그의 이해방식에 따르면 전체상태는 단지 가능태이며, 경험실재와 실재 그 자체 사이에 있는 어떤 중간 실재이다. 이러한 “실재는 측정장치의 수단을 통해 현실태를 낳게하는 가능태일 뿐이다”. 그 실재는 “고전물리학의 의미로서의 실재는 아니지만, 진정한 물리적 실재를 함축하는 가능태이다”.

이러한 잠세태의 실재개념에서 양자역학적 존재론이 나올 수 있으며, 그 안에서 공존의 상태(der koexistente Zustand)가 형이상학적으로 언급될 수 있다. 공존의 상태는 “양자역학적 존재론을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여기서 강한 과학적 의미로 그 존재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양자역학적 존재론은 우리의 언어로 완전하게 기술할 수 없다고 하는 실재론의 새로운 형이상학적 근거를 마련하는 특별한 방식을 제시한다.

데스파냐는 이러한 실재론을 `먼 실재론’(fernen Realismus) 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먼 실재론은 실재와 우리의 언어 사이에 놓여있는 간극을 이어주기에는 쉽지 않은 난제를 안고있다. 결국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는 우리의 언어로서 어떻게 존재론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품고 있다. 양자역학에서 새로운 언어의 요청은 일상언어의 구조 안에 다 품어지지 않는 존재론적 이해를 다시 우리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최소한의 당위적 문제이다.

이제 작은 결론을 내려보자. 상보성원리에 걸맞는 실재개념은 관계의존적 전체상태의 개념에 의존된다. 관계 의존적 전체상태로서의 실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실재 문제는 인식론적 관점과 더불어 존재론적 관점을 같이 갖고 탐구되어야 한다. 이런 시각으로 하이젠베르크의 자연관을 그의 말을 통해 보기로 하자: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질문방식에서 드러난 자연이다. 삶의 조화에 대한 추구에서 삶이라는 연극에서 우리는 관객이며 동시에 배우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4. 철학적 반성

앞서 논의한 의미분석은 상관적 물리현상에 대한 사례분석으로 볼 수 있지만, 단순히 몇몇 귀납적 사례로부터 상관성 주제로 귀결시키는 그런 일반화 논지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연계에 이런 상관적 현상을 보이는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물리계에서 그렇거니와 생물계에서는 더 많은 사례를 들 수 있다.

물리계에서 장이론, 색이론, 초끈이론, 양자론, 복잡계이론 등뿐만이 아니라 생물계에서 계통진화론, 이타주의 논증, 면역학, 생체신호이론, 발생학 등, 대부분의 생명과학에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관적 생명현상의 복잡 과정이 주요한 연구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철학의 사변적 태도는 여전히 기존의 실체론적 존재론의 관성에서 벗어나 있지를 못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과학에 대한 이해가 기존의 뉴턴의 지평선에 머물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첨단 현장과학 연구의 주제는 고전역학적 인과율의 현미경으로는 볼 수 없는 그런 복잡-상호-계통적 현상에 대한 통찰적 망원경을 요청하고 있다. 물론 서구 과학적 탐구의 발단은 그리스-히브리 사유 둥지에서 잉태된 것이어서, 환원적-실증적 방법론이 주류였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최근 과학의 연구주제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과학적 존재론과 과학적 방법론의 혼돈상태에서 빨리 벗어나야만 한다. 존재론적으로는 실체주의가 붕괴된 지 오래 되었지만, 방법론적으로는 여전히 실증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일선과학의 면모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방법론적 태도를 존재론적 이해방식에 뒤집어씌움으로써 현대과학의 상관적-계통적 현상을 부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둘째, 과학사회학적 측면에서 볼 때, 연구투자가 단기에 효과를 발생하는 실증적 연구에만 집중되면서, 장기적 연구를 필요로 하는 생태학적-우주론적 이론연구가 등한시되고 있다는 데에 그 이유가 있다. 이러한 사회적 쏠림 현상은 과학자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사회에서 활성적으로 작동되는 프로그램의 쏠림 현상에 기인한다. 나는 이 프로그램의 틀을 약간은 추상적이지만 “가까운 프로그램” 과 “먼 프로그램”으로 나누어 설명하곤 한다. 과학연구 프로그램을 이분화하여 두 개로만 절개할 수는 없지만, 설명을 위하여 연구 프로그램이라는 스펙트럼의 양단을 은유적으로 제시할 필요는 있다.

<연구프로그램의 은유>
researchProgram

어쨌든 과학 특히 자연과학은 계량화의 강령을 무시할 수 없다. 먼 프로그램 역시 수학적 표현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 단지 먼 프로그램의 수학적 표현은 기존의 선형방정식의 한계를 넘어서 비선형적 표현 및 다체논리 표현을 과학의 장르 안으로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이다.

시스템 논리에서 수학적 표현은 비선형성과 다체논리 표현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말해지고 있다. 우선 부분과 부분의 관계를 표현하는 기술방정식뿐만이 아니라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표현하는 기술방정식이 개입되어야 하므로 기존의 단일 해를 산출하는 선형방정식으로는 그 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시스템 기술방정식의 가장 단순 형태인 피드백 효과에서부터 부분이 전체에 대해 작용력을 미치고 다시 그런 전체가 부분에 재작용하며 나아가서는 근접 시스템으로부터 미치는 복잡계의 작용력까지를 고려한다면 어느덧 수학 기술방정식의 단순성의 미학은 붕괴되고 만다.

이런 어려움으로 인해 시스템에 대한 수학적 표현은 쉽지가 않으며 따라서 규범적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점 때문에 시스템 철학에 대하여 계량적 표현을 포기하고 신비주의적 감성으로 접근하는 몽매한 태도가 난무해지는 것이다. 시스템 과학도 역시 이성적 과학의 대상일 뿐이며 이를 신비화해야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다.

가장 단순한 유체역학계나 열역학계, 전산 피드백계에서부터, 양자장계, 카오스계, 면역학계나 생체신호계, 혹은 신경망계 그리고 블랙홀의 음엔트로피계에 이르기까지 혹은 자연 생태계에서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의 계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스템계를 간단히 전일주의적 형이상학으로 간주해버리는 무책임한 태도보다는 더욱 정교한 수학적 표현을 기다리는 과정적 복잡계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단지 “먼 프로그램”의 인식론적 합의가 요청될 뿐이다.

5. 무엇을 어떻게

이제 모두 눈치 채셨겠지만, 생태지향적 네트워크의 구조는 “먼 프로그램”에 속한다. 그러나 미래의 지구환경을 고려할 때, 곧 다가올 미래에는 “가까운 프로그램”으로 전환되는 어쩔 수 없는 변화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까운 프로그램”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되면 그 프로그램의 의미가 상실되는 자기 모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말이 어려울 뿐 간단히 말하자면, “먼 프로그램”의 탐구내용들을 미리미리 준비해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너무 당연한 논리이지만, 개별 과학자의 개인연구에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라 국가 혹은 대학, 또는 먼 투자를 할 수 있는 기업 등의 공공적 연구기관에서 “먼 프로그램”을 작동시켜야 한다.

(2)연구비를 타내기 위한 모자이크 연구가 아니라, 실질적인 협동연구가 실천되는 학제간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현재 막혀 있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을 이루어 내야 한다.

(3)작은 프로그램들을 역어내는 통합적 지식네트워크가 필요하다.

(4)현재 진행 중인 생명윤리 및 기술윤리에 관한 사회적 텍스트 작성에서 자본논리의 치우침을 경계하면서 상관적 생태논리의 주장이 강하게 도입되어야 한다.

(5)“먼 프로그램”을 신비주의적 신과학운동이나 종교적 도그마의 정당한 근거 만들어 주기의 도구로 전환하려는 시도들을 냉정하게 방지해야 한다. 이성체계와 믿음체계는 서로 다른 범주에서 상호공존할 수 있지만, 범주가 혼동되어 서로 혼재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6) 끝으로 과학이 무엇인가라는 인문학적 반성이 지속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 우리의 과학문화에서 과학은 없고 기술만이 존재한다는 핀잔을 자주 받는다. 반성 없는 과학은 과학이 아니라 기술일 뿐이다.

일반인들의 과학에 대한 인식태도도 그러하거니와 과학자 스스로도 과학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봄직 하다. 그럼으로써 과학 연구의 실용적 성과를 더 많이 산출할 수 있는 부수적 효과도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먼 프로그램”의 수행이 인문학적인 반성의 제의를 거치면서 이념 가치와 더불어 실용적 효과의 측면에서 더 많은 현실 가치를 발생한다는 것이다. <끝>
동국대 에코포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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