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시평 (원주투데이 2005년)
2005  원주투데이 시평 연재 차례

2005  시평 : “문화가 없다” 원주투데이 (1월10일자)
2005  시평 : “사람이 사람처럼 사는 문화” 원주투데이 (2월28일자)
2005  시평 : “원주의 정체성”, 원주투데이(4월11일)
2005  시평 : “당신은 돌아가셨지만”, 원주투데이(5월16일)
2005  시평 : “원주의 선택“, 원주투데이(7월)
2005  시평 : “지역대학의 역할”, 원주투데이(8월15일)
2005  시평 : “고교 비평준화는 누구에게 좋을까”, 원주투데이(9월26일)
2005  시평 : “원주천을 생태공원으로”, 원주투데이(11월14일)
2005  시평 : “한 해를 마감하며”, 원주투데이(12월26일)

12월19일
원주투데이 시평



한 해를 마감하며
최종덕(상지대, 철학)

어느덧 묵은해가 지는군요. 유난히도 매서운 설풍으로 시작하더니 이 추위를 새해까지 안고 넘어갈 모양이네요. 묵은해라 새해라 그렇게 햇수는 달라지지만 우리 사는 삶이야 달라질게 뭐 있나요. 저기 부론면 아래 남한강 강물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저 흘러가고 있으며 그 밑의 물고기들도 그저 노니고만 있는데, 사람들일랑 충북이니 경기도라 강원도로 금을 그어 갈라놓고 있군요.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모양이에요. 저 역시 그래요. 사람들 만나면 내 자랑 아니면 남 헐뜯기니까요. 웬 놈의 시시비비는 그렇게 많은지, 싸울 것 갖고나 싸워야지요.

어떤 두 사람이 서로 시비를 걸고 한창 싸우고 있더군요. 한 사람은 1300미터라며 다른 이는 1700미터라고 기를 쓰고 자기 말이 맞고 네 말은 틀리다며 서로 헐뜯고 싸우고 있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싸움에 간섭을 했어요. 아니, 알고 보니 한 사람은 치악산 높이가 1300미터라고 주장하며, 다른 이는 얼토당토 설악산 높이가 1700미터가 맞는 말이라고 하는 거에요. 한심한 노릇이죠. 싸울 것을 갖고 싸워야죠, 조금 잘난 체 하면서 그들에게 여차저차 말을 건넸어요. 지금 당신들의 문제는 시비 거리조차 될 수 없는 싸움이요, 싸우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구요. 실은 저도 이런 싸움을 해봐서 아는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싸움은 거의 이런 종류의 싸움이더란 말이에요. 진짜 문제는 지금 싸우고 있는 내가 이런 싸움에 휘말려 있는지 자기 자신도 잘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길지 않은 나의 삶의 노정에서 싸움과 시비, 질시와 노여움, 괜한 기대에 그 허망함들, 접시물 욕심과 접시 깨지는 좌절들이 쌓이니, 우선 이런 내 안의 싸움들을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올해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삶의 와류에서 시비 같지 않은 시비 속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요. 무위당 선생님이 남겨주신 무위의 가르침을 잊고 있었지요. 벽에 걸린 무위당 작품액자 속에 그 가르침을 가두어 놓지 마시고, 그 표구 액자를 과감히 깨어버려야겠어요. 이제 무위의 가르침을 내 마음 속에 다시 표구해서 걸어놔야 할 것 같아요. 까짓 무위당 작품 몇 개 소장하고 있어봐야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 해가 넘어가기 전에 버릴 것은 다 버려야겠구요. 무위당 선생님 말씀대로 정말 버릴 수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새해에는 빈 마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낫겠지요. 어제 제 아들놈과 눈길을 걸었어요. 길가에 장갑 한 쪽이 떨어져 있는 거에요. 아들아이가 주워 가려기에 제가 얼른 혼냈지요. 남의 것에 욕심내지 말고 그냥 두거라 하고요. 그런데 20미터쯤 더 가다보니 나머지 장갑 한 쪽이 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아들아이에게 아까 그 장갑 어서 다시 주워오라고 하지 않았겠어요. 역시나 초발심을 잊지 않는 일이 삶의 뿌리인거 같아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한 해 한 해 또 묵은 이 한 해를 보내면서 새해 일랑 뭐나 대단한 것이 올 거라는 쓸데없는 기대만 하고 있었던 거에요. 이번만큼은 욕심과 허망을 버리고 새해를 맞이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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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투데이 시평(11월3일 씀)

최종덕(상지대, 교양학과 교수)

원주천을 생태공원으로

금대리 고라니의 크고 검은 눈빛을 머금은 그 눈덩이와 얼음 녹은 물이 흘러오고, 개경사 오디 끝에서 떨어진 이슬이 모여 반곡동 골짜기로 내려오니, 어느덧 여름이 되어 홍수길에 돌부리를 밀쳐대는 와류가 치악교 다리를 치고 돌고, 가을 코스모스 비추이는 둔치길에 산보하는 이들의 땀방울이 흘러들어가는 원주천.

우리는 그런 원주천의 가치를 너무 모르고 있다. 수도꼭지만 틀면 줄줄 나오는 그런 물이 아니며, 하늘에서 마냥 쏟아지기만 하는 그런 물이 아니다. “나를 물로 봐?” 라는 말 자체가 바꿔야 할 판이다. 70년대 치악교 밑에서 물장구치고 멱 감던 그 물이 이제는 무릎도 안 차게 되었다고 하니. 원주천은 생명의 동맥이다. 원주를 살리는 엄마의 젖줄이라는 말이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추상적이라구? 그렇지 않다. 서울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청계천에 열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된다. 원주천이 썩으면 폐수 유입이 많다는 것이며 폐수 원천의 주변 지역 사람들은 이미 오염된 환경을 갖고 있다는 일종의 지표이다. 원주천 방재공사를 한다는 명목으로 직강하 공사를 하면 결국 강물의 자생적인 정화능력이 없어진다는 것이며 물고기가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수초도 없어지고 썩은 냄새는 순식간이라 시민들이 둔치를 산보하는 일도 없어지고 결국은 시민들의 대형 스트레스만 쌓여갈 뿐이다.

시민축제라고 하지만 외지인 배만 불려주는 둔치의 술판행사는 올해도 여전했다. 치악교 밑의 야밤 포장마차가 없어지고 둔치 새벽장 순두부 파는 가게도 없어졌는데, 그 엄청난 환경파괴를 가져오는 둔치의 술판장사를 왜 허용하는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이 한번 가설텐트를 치고 나면, 깔아 뭉겨진 그 둔치 잔디밭은 신음소리를 내고 만다. 둔치를 포함한 수변지역이 살아야만 강물이 살아나고 우리들도 살수 있지만, 원주천에는 이미 2 개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내년에도 또 하나의 거대 아파트 단지가 원주천과 붙어 있게 된다. 치악산 조망권 뿐만 아니라 원주천의 생명 역시 줄어가고 있다.

원주천의 생명은 원주 시민의 생명과 같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급한 대로 우선 할 일이 있다. 금대리에서 원주하수처리장까지 다시 섬강까지 2 단계로 나누어 둔치 생태공원화 사업을 해야 한다. 또한 원주천으로 이어지는 생활하수관을 보완하고 오폐수 방출 기업의 물 이력제를 실시해야 한다. 수초가 살아나는 제방공사법과 수중보 옆으로 자연물길을 되살려야 한다. 그리고 정지뜰의 얕은 물 공원계획은 생태적 자생가능성 검토사업을 병행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일은 그 수많은 지류를 우선 보호해야 한다. 반곡동, 봉산동, 태장동에서 흘러들어오는 지류 주변의 오염원을 방지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하여 당연히 거주 주민의 적절한 보상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저것 따지면 그 엄청난 사업비를 어디서 마련할 수 있냐고 되묻겠지만, 실은 지자체의 의지만 강하면 의외의 시행안이 따라오며 돈도 마련할 수 있다. 결국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느냐라는 우선순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발에 눈이 멀면 원주천은 그저 죽어갈 뿐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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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투데이 시평(9월22일 씀)

최종덕(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교 비평준화는 누구에게 좋을까

고교 비평준화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알 수 없다. 천안과 부여 그리고 우리 원주, 강릉, 춘천만이 마지막까지 유명무실해진 비평준화를 고집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평준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서울의 유명대학 진학을 위해서 경쟁력 있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선입관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의 지역 명문고교의 이름값을 보전해야 한다는 편견일 듯 하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구태의연한 오판임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망국의 학벌 사회인지라 대학 진학률이 고교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겠다. 그런데 지난 5월 중순 이미 평준화 시행 4년차인 군포 지역 고등학교의 대학 진학률 통계를 보면, 비평준화와 소위 명문대 진학률 사이의 상관성이 결정적 오판임을 알게 해준다. 과거 비평준화 시절과 평준화 이후를 비교해 본 결과 대학 진학률이 오히려 5.1% 높아졌으며, 소위 명문대 진학률은 그 이상의 훨씬 높은 상승률을 보여 주었다. 군포 지역만이 아니라 창원, 마산 지역 등에서도 평준화 이후 뚜렷한 대학 진학률의 상승을 보고하고 있다. 다른 대부분의 도시에서도 평준화의 높은 실질적 효율성을 인정하였다. 그들의 교육청이라고 해서 학벌사회의 기득권을 과감히 버리거나 이상적인 교육공동체 이념을 내세워서 평준화를 했을까? 절대 아니다. 단지 평준화의 효율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앞으로는 대학 진학이 예전처럼 암기 경쟁만 해서는 나아질 리가 없다. 논술과 같은 자유로운 창의성 교육이 뒷받침 되어야만 대학 진학률이 높아진다는 점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이런 교육환경의 변화를 빨리 읽을 수 있다면,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우리 도교육청이 나서서 학생들의 창의성을 키우고, 교사들의 힘을 북돋우고, 학부모의 과외비 걱정을 덜어내는 그런 강원도 교육을 살려 내야 한다. 지난 주 강원지역 평준화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이미 그러려니 했지만 76% 가 평준화 찬성으로 나왔다. 당연한 결과다.

비평준화를 고집하는 남은 이유를 살펴보자. 기득권을 가진 도내 명문고의 입김이다. 명문고의 기준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실은 소위 명문고교 역시 명문을 유지하려면 성적 좋은 중학생 뽑아 서울 소재 유명대학에 겨우 몇 십 명 보내는 수준의 자만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급 수준의 자생적인 교육전통과 창의적 학습방법 개선을 위해 선배를 포함한 구성원의 의식전환이 바로 명문고의 제일 조건이다. 그러다보면 명문대 진학률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이제 명문고의 정체성은 입시성적만의 지역적 경쟁우위가 아니라 창의성과 국제화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작게는 기업도시와 혁신도시가 요구하는 창의적 교육 공간을 준비하기 위하여, 크게는 세계화의 단초를 원주에서 만들기 위하여, 먼저 명문고의 자부심은 우리 내부에서 만족하는 명문이 아니라 외부 사람조차도 부러워하는 명문으로 이어져야 한다. 결국 시대의 변화를 읽어가는 보통 사람이라면 너무 당연히 고교 평준화를 할 수밖에 없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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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투데이 시평(8월10일 씀)

최종덕(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지역 대학의 역할

지역혁신과 지방분권 시대를 맞이해서 지방대학들도 산학 협력 사업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중앙에 집중된 기존의 지식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참여정부의 정책을 실현하는 과정일 것이다. 지역대학들도 바빠졌지만, 지자체 역시 전에 없었던 결정과 판단을 더 많이 행사하게 되었다. 대학은 기존 구도와 달리 내부의 구조혁신을 이뤄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으며, 동시에 외부의 간섭이 아닌 자발적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구조혁신의 첫째 조건은 대학의 지식기반과 지역산업이 구체적으로 연계할 수 있는 토대적인 교육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전국의 대학 전체정원보다 적은 고교 졸업생수라는 인구변화에 따른 자체적인 정원조정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이런 피치 못할 상황에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정부의 구조혁신 기준은 더욱 더 처절한 경쟁논리를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지방사립대학은 이 경쟁의 거미줄을 벗어날 수 없으며 오히려 생존 프로그램의 주역 배우가 되어야 하는 난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지방의 많은 사립대학들은 이러한 지역대학의 외적인 환경변화만큼이나 내적인 어려움을 이중으로 떠안고 있다. 과거 사학재단의 고질적인 엉터리 경영과 비리로 인하여 지역민으로 하여금 지역대학을 멀게 한 불행했던 사태들의 그림자가 아직도 상존하는 어려움이 있으며, 또한 겉으로는 지방화 시대라고 하지만 오히려 공고해져만 가는 학벌사회의 풍토가 여전하다는 점이다. 중앙과 지방의 학벌편견이 존재하듯이, 지방 안에서도 국민의 세금으로 형성된 막대한 국가자본이 투입되는 국립대학으로 여전히 ‘선택과 집중’에 의한 결정권이 행사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방의 사립대학은 생존하기가 더욱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시민과 밀착하려는 노력이 지역대학의 과제이다. 대학혁신 프로그램 중에서 산학협력 사업이 첫째 조건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산학협력 프로그램의 성과가 지역 주민에게 체험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생활적인 일상 환경에서 대학과 지역이 만나는 일이 소중하다. 이를테면 지자체의 급식조례 제정에서 급식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님이 나서 주는 일, 지역의 소비자 생활협동조합 사업에서 관련 교수님들이 나서서 도와주는 일, 지역의 노인복지 사업을 원활하게 해주는 일, 동네의 작은 약수터 물을 수질검사 해주는 일 등등, 아주 사소해보이지만 생활속의 정말 소중한 일들에 대해서 대학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지역과 대학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지역의 시민대학으로 가는 문화적인 접근일 것이다. 지역대학의 이러한 문화적 연대활동은 몇 백억 짜리 거대한 정부지원 규모의 사업은 못되지만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소중한 일들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공동체가 형성될 때 비로소 지역대학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지식기반이 시민들과 지자체에 실질적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나아가 국비로 운영되는 국립대학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지식산업과 관련하여 원주에서 해야 할 일들을 춘천으로 가지고 가려는 사태가 늘어나기 때문에 오늘의 이런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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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투데이 시평(6월27일 씀)

최종덕(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원주의 선택

요즘 지방 도시마다 기업도시니 혁신도시니 혹은 클러스트 사업이니 신활력사업이니 하면서 중앙에 집중되었던 기존 구조를 분산 유치하려는 노력에 온 힘을 쏟고 있다. 우리 원주도 마찬가지다. 전체적인 틀은 국가균형발전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땅투기 균형발전이라는 부작용이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어쨌든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한국의 서울공화국 현상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이를 위하여 적절한 방안들이 합리적으로 선택되어야 한다. 우선 균형발전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형평성과 효율성이라는 정부 선정기준쯤이야 다 알고 있을 터이지만, 그 이면에 놓치기 쉬운 몇몇 중요한 선택 조건이 있음을 되새겨야 한다.
첫째, 먼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며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사업을 원주까지 나서서 구상하는 것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점이다. 현재 원주는 관광과 의료기기 사업이 각광받고 있다. 확실히 특화된 지역산업이기는 하지만, 원주를 벗어나 전체적인 조망을 해 볼 경우 핵심요소인 관광의 컨벤션센터 사업은 제주에 이미 넘겨준 상태고, 의료기기의 핵심과학기술 부문은 충북 오성 단지에 밥그릇을 놓친 상태다. 청정산업을 지향한 생명자원산업 역시 경북과 전북의 노하우를 따라잡기기 쉽지 않다. 그래서 원주 안에서 무성한 자화자찬의 소문에 만족하지 말고 멀리 보는 귀를 열고 창의적인 눈을 떠야 한다. 하던 사람들끼리만 하지 말고 지역 내의 새로운 일꾼과 시민단체의 역량을 과감히 발굴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혁신도시 사업은 당연히 분권과 분산정책과 엇물려 있는데, 이는 기업과 공공기관 이전에 따른 자본과 사람의 이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일상적 삶의 이동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건물과 공장이나 짓고 도로나 만드는 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생활공간을 창조하는 일이 더욱 중요함을 인지해야 한다. 더 쉽게 말해서 친환경적 문화공간의 개념과 기획이 결여될 때 선정조건에서 탈락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뜻이다.
셋째, 당장 두 달 여 후면 발표할 혁신도시 선정도 중요하겠지만 정말 시민이 함께 잘 살기 위한 원주의 미래는 누구나 다 하고 있는 그런 유명한 테마를 반복하지 말고 한발 앞서가는 창조적 기획을 구상해야 한다. 창조성이란 없는 것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이미 일상적으로 있는 것에서부터 찾아내는 그런 새로운 생각의 덩어리다. 신행정도시와 수도권에 대한 수월한 지리적 접근이라는 최상의 물리적 조건과 생명과 청정 이미지를 갖는 정신적 조건을 원주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이제는 구태의연한 따라잡기의 생각을 버리고 남들이 따라붙게 하는 그런 매력적인 도전이 필요하다. 즉 기존의 ‘공단’ 개념에서 벗어나 문화와 교육이 살아 있는 복합적인 ‘생활공간’이 실현되어야 한다. 얼마 전 발표한 13개 공공기관의 강원도 이전계획 중에서 원주의 몫은 바로 그러한 행복도시의 의지가 어떻게 기획되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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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투데이 시평(5월13일 씀)

당신은 돌아가셨지만

얼마 전 환경관련 토론회에서 농약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 통계를 놓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나는 농약 중독 사망자 통계수를 농촌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농약의 심각성을 강조한 사례로 들었다. 그런데 어떤 반론자가 나오더니 그 통계 수치는 농약에 의한 순수 중독 사망자 수보다는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사람들의 통계 수치가 대부분이라고 하면서, 나의 주장과 사례의 부적절함을 꽤나 논리적으로 반박하였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그 말을 참으로 잘했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농촌의 근본적인 위기는 농약 중독도 심각하지만, 농약 그 자체가 아니라 농협 빚 때문에 농약으로 자살하고, 농사져 봐야 본전도 못 건지는 현실 농정정책 때문에 농약 마시고 죽는 등의 사회적인 문제가 더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라고 그 자리에서 말했다.
이름모를 농부병이나 도시인의 급증하는 알레르기성 질병들, 아이들의 아토피 질환이나 비만, 그리고 무수히 많은 각종의 성인병 등은 개인적 병리현상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병들어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다. 사회적인 병을 모른 채하고 자기 개인만의 건강을 도모하는 일은 결국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질병을 확대하는 결과에 이른다. 웰빙의 열기는 좋으나 건강 보전 방식에도 빈부차가 일어나니, 없는 사람은 더 아프게 되고, 좀 있는 사람은 더 건강해지는 모순 가득한 건강사회학이 이 시대를 풍미한다. 웰빙 먹거리 사업을 하는 모 기업은 일조 원에 가까운 매출액을 자랑하고 있지만, 우리들의 시장바구니에는 비록 농약이 묻어 있다하더라도 여전히 값싼 먹거리를 담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사람답게 잘 살아보자는 구호와 함께 생태주의가 또 하나의 사회적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협동사회를 위한 현실 활동을 무시한 채 나만 잘 살아보자는 자기만의 성곽 안에서 신비화되어가는 생태주의는 진정으로 생명을 무시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나만의 보전과 나만의 위안은 절대로 생명적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대 의학서인 󰡔황제내경󰡕은 환경과 신체 사이의 조화가 깨질 때 병이 생긴다고 하며, 동시에 한 사람의 건강은 한 사회의 건강이 유지될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그 책은 의학서이지만 바로 생명의 의미를 잘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뜻은 자연과의 합일성과 함께 사회와의 합일성을 같이 전한다. 사회를 무시한 채 자연과의 합일성만을 말하면 자기만을 위한 고립되고 신비화된 반쪽 생명이며, 자연을 무시한 채 사회와의 합일성만을 말하면 자칫 인위적인 권력구조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반쪽의 우려를 현실에서 타개하려고 한 어른이 바로 우리 원주에 계셨으니 그 분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이셨다. 이번 주는 원주의 자랑이며 우리들이 이어가야 할 생명사상의 스승 무위당 11주기 기일이 되는 때이다. 당신은 돌아가셨지만 우리들에게 자연과 사회의 보전이라는 두 가지 업보를 두고 가셨다.





투데이 시평(4월7일)

원주의 정체성

막국수나 닭갈비의 원조는 춘천이란다. 인형극과 마임 그리고 요즘은 미디어 센터 확장과 게임산업단지까지 생긴다고 한다. 그것도 국제적인 차원에서 문화 이벤트를 꾸려가고 있다. 욘사마 열풍은 춘천을 또 하나의 이미지 문화산업도시로 부풀려 놓았다. 문화뿐만이 아니라 생명산업이나 농축산 산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원주 사람으로서 사촌이 땅 사는데 배 아플 것까지야 없지만, 춘천과 우리 원주의 차이가 무엇인지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대립각을 세운 정서적인 대응이 아니라 냉철한 합리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춘천의 다양한 문화 이벤트사업이나 산업화 아이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꽤나 부풀려진 점도 있으나, 작은 규모라도 전국적인 이미지로 전환하고 창출해내는 실현의지가 우리보다 월등 강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세부적으로는 지역대학과 시 공무원의 공조가 긴밀하며, 시민이 제안하는 문화이벤트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공 지원이 준비된다는 점이다. 요즘 들어 국제적인 규모로 키워가고 있는 춘천의 인형극이나 마임도 처음에는 몇몇 사람들의 초라한 동호회 수준이었으나, 소수의 주체가 주변의 많은 문화의지를 지닌 사람들을 모아내어 협동과 공조의 기획과정을 이루어 내었으며, 이제는 시 공무원들이 나서서 지원체계를 준비하는 가속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동안 원주의 정체성을 찾는 논의가 간간이 있어 왔다. 정체성 확보는 개인의 지명도 혹은 지자체만으로 성립할 수 없다. 정체성은 억지춘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만들어지거나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도록 문화적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정체성 만들기의 첫째 기준은 자생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하며, 둘째는 시민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이니 우리도 억지로라도 따라서 하거나 아니면 중앙정부 시책의 일환으로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으로 되기 어렵다. 이런 조건을 눈여겨본다면 원주시가 추진하는 특화사업이나 시민단체가 추진하는 문화사업의 성공 여부를 대충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정체성 찾기는 총론적인 당위성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각론적인 기존의 자생적 영역을 지속적인 공공지원과 함께 새로운 문화적 이미지로 창출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질 뿐이다. 원주 의료기기 산업이 충북 오창 단지보다 규모가 크다고 한들, 그에 따라 붙는 문화적 이미지를 창출하지 못한다면 오래 가기 어렵다. 한지문화제 역시 지금처럼 지자체나 문화담지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다면 공공 지원금이 아무리 많다하더라도 원주의 자랑거리로 정착되기가 쉽지 않다. ‘무위당의 생명사상’ 혹은 ‘토지’의 문화적 이미지 역시 거치러진 삶과 세속적인 민초들의 소외감을 지나친다면, 마냥 고고한 이미지로만 남게 될 것이다. 원주의 정체성은 소수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관공서의 정책적 사업만으로 이루어지는 결코 아님을 정확히 아는 것이 우선이다. <끝>


시평 - 사람이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
최종덕(상지대 교수, 철학)
05년 2월 22일


감기에 걸리거나 큰 병이라도 나면 내가 의지할 곳은 병의원밖에 없다. 그래서 막상 병의원을 가면 의사 권위에 주눅 들어 의사와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고 말 한번 제대로 못한 채, 그저 주사나 한 방 맞고 약이나 타가지고 온다. 내 엉덩이에 들어오는 주사약이 항생제인지 스테로이드인지, 혹은 어느 정도의 몸 상태인지 아무 설명도 없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시늉으로만 했는지 환자의 알 권리는 철저히 무시당하는 것이 이제 예사로운 일이 되어 버렸다. 한의원에 가도 마찬가지다. 침이나 맞고 그칠 일이라면 다행이지만, 약이라도 지어갈 상황이라면 십 몇 만원이 훌쩍 넘어 버리니 약 지을 엄두를 못 낸다. 언제부터 한약을 한 재 씩 지어야만 했는지 모르겠다. 나 어릴 때 기억으로만 해도 기껏 서너 첩이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척박해진 의료환경에 대하여 의사나 환자 모두 책임이 있기야 하겠지만, 역시 병의원에서는 환자가 약자라서 환자의 마음고생이 큰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시대적인 흐름에 따라 의료서비스 개선이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일방적인 관계가 지배적이다.
유럽에서는 미시적으로 보험수가를 조절하는 방식을 택하거나, 거시적으로는 의사 계층에게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상부지식 계층의 사회적 연대의식을 공유하는 의식형성을 유도함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의사의 근본 역할은 진료실 외의 사회적 지위에서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위의 두 방식이 실현되기가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주민들이 나서서 작은 의료기관을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의료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가는 지역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우리 원주에서도 의료생협을 세운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이제 의사와 환자가 진료실뿐만이 아닌 생활 속에서 만나면서 병원 문턱은 낮아지고 자존심 상했던 환자의 마음고생도 덜어지게 되었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원주 사는 작은 즐거움이기도 하다.
이 모두 우리 시대 생명사상의 큰 스승이시고 생활협동의 정신을 뿌리내리신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덕분이다. 이렇게 생명의 기운이 서렸는지, 이제 원주는 다른 지역에서 크게 부러워 할 정도로 생활협동조합이 많아졌다. 아이들을 서로 키우는 생협에서부터 우리 지역의 유기농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생협도 있다. 특히 무위당선생의 생명사상을 실천하며, 한국 협동정신의 근원지이기도 한 원주한살림과 밝음신협은 가난한 시민단체들과 생활협동조합 단체들을 물심양면으로 아주 크게 후원하기도 한다. 역시 원주에 내려진 생명문화사상의 뿌리는 건재한 듯 하다.
이제 의료생협이나 소비자생협은 조합원만이 아닌 원주 시민 모두의 자산이 되었다. 이제 조합원 개인의 복지뿐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공공성이라는 축을 세워가야 한다. 원주가 일구어낸 생명문화의 기운 속에서 말이다. 생명문화란 거창하고 명분만 세우는 고담준론이 아니라, 바로 현실 속의 구체적인 실천과 사람이 사람처럼 사는 삶의 복지를 구현하는데서 시작되고 있다. 이러한 실천운동의 원동력은 뭐니 뭐니 해도 협동정신 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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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문화가 없다 (04-01-08 ; 최종덕 상지대학교 철학)


오래 전 시립박물관을 지을 때 최규하 전대통령 생가복원을 같은 땅에 짓는다고 해서 말들이 많았다. 시민단체 모두의 힘을 합쳐 반대한 끝에 생가복원을 어렵사리 막고서, 그 자리에 겨우 전통 한옥을 지었다. 또한 현대의 박물관 기획은 전시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 및 체험 공간을 포함한 생활 공동체를 구현하는 살아있는 종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반면에, 우리 원주시립박물관은 달랑 전시공간만을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요즘은 한지테마파크 사업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 같다. 국비와 도비까지 이미 책정된 대형사업을 시에서는 경제적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스스로 포기한다고 한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문광부에서는 한지문화제를 한국의 문화관광대표 예비축제로 선정했다고 하는데 지자체에서는 한지테마파크사업의 미래 수익구조가 형편없다고 하니, 평가기준을 어디에 두고 그런 모순된 결과를 내놓은 것인지 한 평범한 시민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러한 희한한 상황은 생활 속의 문화의식이 결여된 채, 권력과 권위가 낳은 결과로만 비춰질 뿐이다.
치악제가 끝나고 난 자리, 그 좋았던 둔치의 잔디가 몇일 사이에 망가지는 현장을 쓸쓸히 지켜보면서 다른 한 켠에서 원주천 보전사업을 한다는 말이 모두 허튼 소리로만 들릴 뿐이다. 군지사 담을 길게 따라 힘차게 뻗어있던 사오십 년 된 그 많던 나무들이 하루 사이에 무참히 베어나가던 그 때, 나는 그날 온 종일 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차 없는 거리’ 하나 만들지 못하는 그 마음으로 과연 ‘더불어 함께 사는 행복한 원주’를 만들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모두골의 손곡리 전용 예술극장과 노뜰의 후용리 문화공연센터가 만들어졌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시골의 마을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작지만 정말 행복한 문화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런 공간이었다. 문제는 그런 작은 문화공간이 지자체의 주관이 아닌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지자체의 입장에서 그런 작은 문화공간은 수익성 평가에서 제외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화 관련 사업이 그런 단면적인 수익성 기준으로서 평가될 수 있다는 생각은 매우 편파적이다. 물론 문화에 대한 경제적 평가를 무시한 낭만적 문화옹호론은 허무할 수 있으므로 문화의 수익성 구조가 중시되어야 한다. 일본은 문화산업의 경제규모가 천억 달러(2002년 기준, 100 billion USD)이며, 이는 자동차 산업규모의 반이며 철강산업규모의 두 배에 해당한다. 미국이나 영국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 중에서 국제적인 영상매체 산업과 같은 대형프로젝트 말고, 일본 지자체 차원의 작고 소박한 문화실천 단위의 수익구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삼분의 일 정도나 된다. 동네방네의 작은 문화의식과 실천운동이 궁극적으로 커다란 문화산업으로 연계된다는 뜻이다. 다른 산업은 몰라도 문화 영역은 전통적이며 아주 작고 지역적인 것이 비로소 세계적인 위상과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작은 지역문화산업이 곧 세계화의 통로라는 지방문화가치론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행복한 원주’는 저 멀리 있을 뿐이다.

원주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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