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윤구병님 오실래나
2006년 한철연 여름 수련회 특강

한 도시인의 자기 고백 - 오늘 윤구병님 오실래나



나는 원래 서울 토박이다. 을지로와 청계천 주변에서 살면서 광화문과 동대문운동장 사이는 거의가 내 관할이었다. 서울의 핵심을 쥐락펴락 했었다는 뜻이다. 그 관할 사이에 당시에는 어린이 놀이터가 최소 10개 이상 있었다. 하루에 두 군데 이상 돌아다니기도 했으나 역시 볼거리가 많은 청계천과 먹을거리가 많은 오장동 방산시장 주변이 아주 괜찮았다. 청계천 둔치는 염색공장이 널려 있어서 줄에 걸어 놓은 천 사이로 술래잡기 놀이가 안성맞춤이었고, 방산시장은 2원 짜리 꿀꿀이죽이 있어서 돈을 모아 항고 한 그릇이면 네 녀석의 배를 팅기기도 했다.

당시 아버님이 건축공사장 십장이었기 때문에 살림살이가 괜찮았던 것 같았다. 그때 광화문 신문로는 우리나라 최고 부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는데 그곳 어느 부자 집을 아버님이 공사를 하신 연유로 5학년 말 우리 집 주소를 그곳 공사막 주소로 옮겨, 영희국민학교에서 그 치맛바람 드세게 휘날리던 덕수국민학교로 옮겼다.

그전 학교에서는 그래도 반에서 10등 정도 하다가 학교를 옮기니 반에서 78등(82명 중)이 내 차지였다. 6학년 때는 아이큐 검사를 했는데 아이큐 점수 결과를 점수 순으로 교실 벽 게시판에 붙여 놓았다. 정말 잔인한 사회였다. 나는 아이큐 93이 나왔다. 그래도 87명 중에 내 밑으로 두 놈이나 깔려 있었다.

이때부터 나는 기를 못 폈다. 소심해지고 나가 노는 것도 싫어졌는데, 그 대신 중학교 이후부터는 계림극장과(2편 상영; 을지로6가) 초원극장(3편 상영; 을지로 3가)에서 나만의 인생을 지냈다. 그러면서 나는 당시부터 도시인의 세련된 면모를 이미 다 갖춘 셈이었다. 쿠퍼 류의 가식화된 미국식 신사도나 더글러스 류의 터프함과 드롱 류의 프랑스 식 고뇌적 인간형에 대한 나의 인지도가 깊어만 갔다. 대학 들어와서 술집에서 공부하느라 영화관 출입은 끊어졌지만, 운동권 짬뽕의 탈춤을 추면서 탈의 안과 밖을 내면에 공존시키는 상당히 정제된 도시문화를 몸으로 놀았다.

이후 석사만 졸업하면 교수가 된다는 감언이설로 부모를 설득하여 철학계로 접어들었지만 석사 졸업 후 20만원 짜리 고물 자동차를 사서 교수직 대신에 많은 대학을 순방하면서 다양한 학생들을 강의하면서 교수만큼만 돈을 벌면 된다는 식으로 뛰어 다녔다. 그러나, 아, 그 한계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일찌감치 나는 도시화의 상징인 차를 몰고 다니면서 남의 부러움을 받았다. 당시 내가 아는 사람들 범위에서 차를 소유한 사람은 나와 모 대학 교수해서 둘 뿐이었으니까.

벌써 마흔 넘어 한철연에서 인간 윤구병을 뒤늦게 만났다. 당시 어느 술집에서 격렬한 학술행위를 하는 중에 이미 교수 자리를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간 초년이셨을까, 윤구병은 나를 보고는 어떤 이미지를 느끼셨는지, “최종덕이도 시골로 내려가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 딱이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겠는가?

나는 그때 윤구병 선생님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당신은 교수나 해봤으니 단칼에 그만두는 멋있는 폼이라도 나지만, 나는 뭐야? 교수 해보지도 못하고 농촌 내려가서 살라고? 역시 나는 그렁저렁 사는 도시인이었다. 그러다가 내 나이 마흔둘에 원주로 이사 왔다. 교수가 되어 왔으니 겁날 것도 없고, 마누라에게도 목에 힘 좀 줄라고 하는데 지나온 관성 때문에 잘 안 되었다.

그런 가운데 청계천 시절부터 맺혀 왔던 중앙권력과 관습권위에 대한 두드러기 반응증세가 확 드러나곤 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원주에서 부지런히 지역사회의 작은 활동을 했다. 전혀 딴 판인 과학철학과 도가철학을 동시에 공부하면서 말이다. 나에게서 자연과학 공부는 아주 소중하다. 자연을 대하는 일종의 철학적 실전이었다. 이런 방식의 사유는 아주 오래 전 자연철학 분과모임 공부를 하면서 많이 느꼈다.

그런데 자연에 대하여 거의 투쟁에 가까운 실전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도가철학이었다. 나의 도가철학 공부는 소요와 관조의 무위를 실습하는 공부가 아니라, 현실과 자연 및 자아를 투쟁 속에서 만나는 통로였다. 다시 말해서 노장자 등의 도가 공부가 시골로 내려가서 유유자적 및 근본 혁명 지향의 진지전으로 나가자는 공력의 길이 아니라, 도시화의 또 다른 이면을 관찰하는 계기였다는 점이다.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도가철학 분과모임의 마력이 매우 컸다.

도시와 돈은 대부분 같이 놀고 있다. 그만큼 도시화에 익숙한 나는 돈에 대하여 관심이 많다. 그런데 현실은 돈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 여기 모인 사람들 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래도 나는 꾸준히 돈을 나름대로 연구한다. 나는 10여 년 전부터 한겨레와 함께 경제신문을 구독하는데, 특히 내가 구독하는 매경은 조선보다 몇 십 배 꼴통들이다.

그래도 꾹 참고 이 신문을 본다. 그런데 이런 신문 보면 볼수록 부화가 나서 돈과 멀어진다. 이렇게 fta의 미국이 우리 안에 도사려 있기 때문에 거리로 나가기는 나가야 할터인데, 그러면 자꾸 돈과 멀어지는 역설이 작용된다.

도시와 시골, 그 사이를 묶어 낼 수 있는 방법이 돈 말고 또 무엇이 없을까 고민 중이다. 내가 직접 보리 농사한 이야기를 잠시 하고 싶다. 4년 전 백화점 먹거리 매장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는데 점원이 포장용지를 버리길래 뭔가 봤더니 40만 원짜리 영광굴비 포장용재로서 사용한 보리알이어서 내가 달라고 하여 집으로 가져 왔다. 작년 11월 그게 생각나서 시험 삼아 나의 소중한 작은 텃밭에 한 평 규모로 뿌려 보았다. 그런데 웬걸, 올봄에 푸릇푸릇한 싹이 나더란 말이다. 대단한 일이었다.

역시 생명의 힘이 막강하였다. 거대도시의 쓰레기장으로 갈 운명이었던 보리알에서 생명의 기운이 돋아난 것이었다. 나는 올 봄 술 먹고 빌빌해질 때 마다 텃밭의 그렇게 기운나는 보리 크는 것 보고 힘을 내었다. 역시 시골의 힘은 여전하였다.

돈만 좀 있으면 강원도의 힘이 발휘할 터인데.. 돈 갖고 해결하려는 맘보가 글러 먹었다구?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생각은 농촌의 현실을 모르는 도시인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도 많이 컸다. 이렇게 까지 시골을 생각하게 되었다니.

다시 윤구병을 생각해 본다. 요즘 복지부 산하 재단으로 설립준비중인 민족의학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윤구병 선생님의 실천철학 사업을 김교빈, 박석준 등의 사람들이 진행 중이다. 이전만 해도 돈 가진 기준으로 나는 윤구병을 나와 동급으로 여겼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신의 출판사는 어느 정도의 독자적 재력을 확보한 상태이며 돈의 수준으로 봐서 나와는 급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단 설립을 위하여 그의 많은 재산을 기부하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내가 따로따로 읽었던 그의 두 책, 전혀 다른 주제의 두 책, <실험학교 이야기- 새로운 공동체로 가는 길>(1995)와 <윤구병의 존재론 강의, 있음과 없음>(2003)이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급수가 다른 것은 돈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돈을 무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과거 논문 에피쿠로스에서 나타난 ‘자연성’과 ‘인위성’의 갈등과 종합은 일종의 무위와 도시를 연결하는 끈처럼 여겨진 것이다. 말이 될려나? 원래 이 글은 윤구병을 비판적으로 쓰려 했다.

왜냐하면 나는 deep-생태주의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를 이런 이유로 비판하려는 나의 편견이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서양식 생태주의의 분류방식으로 가르는 것이 나의 편견이었다는 말이다. 입이 좀 간지럽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

나는 놀기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어느 한 가지를 치열하게 내세우는 주장보다는 싸우지 않고 융합하여 하나로 대충 묶어내려는 심보가 있다. 논다라는 것이 원래 어우르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융합이 아니라 기름과 물처럼 영원히 따로따로 노는 것이 아닌가? 나에게 도시의 상상력 역시 그러하다.

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고, 실천도 아니고 이론도 아닌 것이, 돈도 아니고 이상도 아닌 것이 뒤섞여 혼재되었다. 그래도 아이큐 93의 점수가 교실 벽에 붙었던 13살의 내가 생각했던 것, ‘그래, 니들은 그렇게 살어라, 나는 그 대신 재미나게 놀면서 오래 살께’. 좀 거창하게 말하면 그게 나의 작은 철학이었다. 철학이란 말을 여기다 갖다 붙이니 좀 웃긴다.

나는 오늘 이 글에서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도시와 농촌의 이미지를 통하여 권력과 권위의 거부를 말하기도 싶었고 혹은 시대와 철학의 만남을 말하기도 싶었다. 그런데 논점을 놓치고 말았다. 실은 논점이란 지금부터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새롭게 만들어져야 한다. <끝>



윤구병 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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