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학벌 제국주의 |
시대와 철학 20권4호 (200년 12월) 게재글로벌 학벌제국주의1. 미국 군인이 참전한 전쟁과 미국 기업이 관여한 전쟁 세계 곳곳에서 오늘도 끊임없는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 많은 전쟁은 딱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미국 군인이 참전한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기업이 관여된 전쟁이다. 서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많은 전쟁은 종족 간 내전으로 비춰지지만 실제로는 중국을 포함한 서방국가 사이의 에너지 쟁탈전에서 야기된 간접적인 국제 전쟁이 대부분이다. 아프리카와 달리 중동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많은 전쟁은 미군이 직접 참여한 직접적인 전쟁이다. 미국은 이를 테러 방어 전쟁이라고 하지만 과거 어느 전쟁 이상으로 잔혹한 참상을 낳고 있다. 이 글은 위의 두 전쟁 부류 중에서 미군 참전의 상황적 의미를 접근해 보려는 생각으로 쓰고 있다. 특히 중동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조명한다. 중동아시아의 이해를 통해 우리 자신의 자화상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찾고 싶기 때문이다. 2. 이라크의 상황들 2003년 미국은 유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량 살상무기에 의한 이라크 안보위협 문제를 해결한다는 목적으로 이라크를 침공하고,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다. 아버지 부쉬 대통령과 친분관계가 돈독했던 후세인도 9.11 사태 이후 미국과의 새로운 이해관계에 따라 악의 축 중심으로 거세되었다. 미군은 이라크 전쟁의 승리를 선포했지만, 일 년이 지나자마자 이라크 대부분의 지역은 미군의 통제에서 벗어낫다. 미군이 전쟁의 이유로 주장하던 대량 살상무기의 존재가 허구였음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일 년이 되는 2004년 9월 이후 이라크의 팔루자, 나자프, 사드르, 사무라, 라마디 등 수니파의 거점 도시는 이라크 저항세력에게 넘어갔고, 모술, 키르쿠크 등의 북부 쿠르드족 도시마저도 통제 밖이었다. 미군이 가장 타격을 입혔던 남부 시아파 지역에서도 미국의 세력은 희미해졌다. 미군은 실질적으로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일찌감치 이라크 신설 정권은 철저하게 미국의 이해관계에서 수립되었다. 당시 2004년 10월 미군이 세워준 이아드 알라위Ayad Allawi 이라크 임시정부 총리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유엔 등을 방문하여 온갖 아양을 다 떨었다. 그 다음 해 2005년 1월에 치러진 국민자유선거에서 결정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함이다. 알라위 전 총리가 미국에 요청한 내용의 핵심은 이라크의 외채 탕감과 새로 구성되는 “이라크방위군” 지원에 관한 것이다. 외채 탕감 요청에 대하여 부쉬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대량살상무기의 존재가 이미 허구로 드러난 상황을 타개하려는 부쉬의 이라크 재건 약속조차도 당시 부시의 대통령 2기 재당선과 함께 흐지부지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소위 토사구팽이었다. 반면 국가방위군 지원과 친미 정권 수립에 대하여는 적극적이다. 역사적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전 바스당 소속이며 CIA 인물이었다고 알려진 알라위 총리는 당연히 국민들로부터 친미 허수아비로 인식되고 있다. 알라위와 미국이 합작하는 방위군 조직은 알라위를 지지하는 세력과 유급 외국용병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사담 후세인 시절의 경비대 소속 군인들로 구성되고 있다. 이 사실은 국민의 전반적인 지원을 받는 저항군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며 국민의 뜻과 어긋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의도는 선거 이후 알라위 정권의 권력 독식과 동시에 미국의 석유시장 확보를 위한 친미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으로 이라크 국민들은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이런 정치적 절차는 대부분의 제국주의 국가가 행하는 분리주의 기본전략의 일환일 뿐이다. 2005년도 이라크 선거 결과 현재의 탈라바니Celal Talebanî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탈라바니는 이미 조지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 정부군 지휘관이었으며 쿠르드 민족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미군 측에 적극 협력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직 보장이라는 마군의 달콤한 카드에 쿠르드 민족권리는 내팽겨쳐졌다. 아랍인과 쿠르드족 사이의 불화를 조장함으로써 미국의 이익을 챙긴다는 미국의 분리주의 정책이 내면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5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국민들로부터 심정적 지원을 받는 저항세력과 새로이 구성된 친미 정치세력 사이의 갈등이 노골화되면서 이제 미군은 솔질하게 패전을 인정해야 할 판이다. 3. 그루지아 이제 그루지아Georgia 사태를 보기로 하자. 얼마 전 북한 무기수출에 제동이 걸린 사태에서 중개유통을 맡았던 화물기 제공국가로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그루지아Georgia 북쪽은 러시아와의 경계이며 남쪽으로는 아르바이젠과 아르메니아 그리고 터키와 접경을 한다. 동으로는 카스피해 서로는 흑해에 연안하여 동서의 교역로, 에너지 수송로 등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터키 지배를 받다가 19세기 들어(1801년) 러시아 지배권에 속하게 된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에 귀속되었다. 1991년 소비에트가 무너지는 바람에 자동적으로 독립되었다. 독립이 될 때 남서부 오세티아 지역의 북쪽은 러시아에 편입되었지만 남동쪽은 그루지아로 편입된 것이 문제였다. 2008년 그루지아는 남오세티아를 침략하자 그 대응으로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공격한 것이 바로 그루지아 전쟁이었다. 남오세티아는 원래 그루지아가 아닌 독립자치구였으며 인구의 70-80%가 러시아계 인종이어서 당연히 친러시아적이다. 2002년 구 그루지아 정권을 무너트린 소위 장미혁명이 기억난다. 당시 텔레비전에도 멋있게 비춰졌다. 구 집권 권력을 무너트리기 위해 국민 모두가 장미 한 송이씩을 들고 손에 손잡고 무혈혁명으로 구정권을 붕괴시켰다. 서방세계는 이러한 혁명을 장미혁명이라고 했다. 정말 멋있었다. 그런데 그런 장미혁명은 권력이 미국으로 돌아서는 첫 단추였다. 새로이 대통령이 된 사카슈빌리Mikheil Saakashvili는 제일 먼저 그루지아 영토를 정착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래서 주변의 4개 지역을 그루지아로 편입시켰다. 미국의 부쉬는 당시 이라크에 파병된 그루지아 군대를 다시 고향으로 원대복귀시켜 러시아와의 전투에 투입시켰다. 미국은 사카슈빌리 정권 이후 그루지아 군대에 대한 전투교육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에 밀리게 된 그루지아는 억지로 휴전했다. 그러나 구 동구권 국가들의 연합인 CSI를 탈퇴하고 서방 나토에 가입하려는 그루지아의 꿈은 괜스레 먼저 시작한 전쟁으로 인해 무너졌다. CSI에 재가입한다는 조건이 정전 조건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2004년에 혜성처럼 등장한 사카슈빌리는 과거 세바르드나제 대통령과 달리 매우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듯 보였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인기도 많은 편이었다. 외모도 매우 준수하여 젊은 여성으로부터 인기가 최고였다. 더욱 큰 인기는 사카슈빌리의 정책 대부분이 미국을 따라 한다는 점이다. 지금 사회주의권에서 벗어나거나 독재정권에서 벗어난 전세계의 신생정권들은 대부분 미국을 닮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 국민들 역시 잘못된 계몽으로 인해 친서방, 미국지향적인 문맹이 되었다. 남 이야기로 들리질 않았다. 4.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은 1979년 구 소련과의 전쟁 이후 탈레반이 집권하다가 2001년도 미국의 치밀한 작전 아래 철저하게 미국 친화적 정권이 들어섰다. 테러집단을 보호하는 탈레반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미군은 독자적으로 아프가니스탄 구 정권을 무너트리고 그 대신 탈레반 시절부터 미군의 가교역할을 담당했던 카르자이Hamid karzai를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실크로드의 요충지인 아프가니스탄은 19세기에서도 영국령 인도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의 전쟁 놀이터였다. 1919년 영국 지배에서 해방되었으나 다른 식민지 국가가 대부분 그렇듯이 제국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가버린 자본가와 농노들 사이의 분리주의 휴유증을 세게 앓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현재 해외 원조로 재건되고 있으나 심각한 내부 분쟁을 겪고 있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구 소련 전쟁 당시 미군의 지원으로 반소련 무자히드 활동을 한 경력을 갖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전 CIA 직원이었다가 대통령까지 된 대표적인 부역 정치인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지금도 연일 일어나고 있는 연속된 전쟁은 미국이 말하듯이 반테러 전쟁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국민의 입장에서는 처절한 국권 회복 전쟁인 것이다. 파키스탄도 마찬가지다. 파키스탄은 큰 나라다. 전세계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으며, 2번째로 이슬람교도가 많은 나라이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다시 1970년대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등 인도로부터 분리하면서 파키스탄은 무슬림들의 성지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 집권에서 밀려난 탈레반의 신 거점지역으로 여겨지면서, 이에 대항이라도 하듯이 미군은 더욱 더 가열차게 친미정권을 만들어가고 있다. 파키스탄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지 오래 되었어도 여전히 과거 제국주의 지정학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해방 이후 정권을 주도했던 부토 가문은 여전히 영국의 입맛에 따라 움직였다. 아버지에서 딸에 이르는 기나긴 집권을 한 부토 가문은 철저히 서구 자본에 의존한 채 국민들의 아픔을 무시했다. 국민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무샤라프 전 대통령도 미군의 시나리오 아래 결국 독재의 그늘에 빠지고 말았다. 나아가 현 대통령마저도 미국의 정책적 과정에서 탄생한 인물이다. 중동아시아 및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나라들은 영국의 오랜 지배 아래 있었기에 영국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 제국적 봉건영주 의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문제에서 미국은 영국에 대해서만큼은 긴밀한 협조를 고려한다. 반면 미국은 유엔이나 여타 서방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이슬람 최초의 여성총리였던 부토의 남편이면서 영국 제국주의의 수호자이기도 한 자르다리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시대적 토양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4. 글로벌 학벌 제국주의 전쟁 중인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의 정치적 난제들은 한결 같이 미국의 허수아비 정권에서 기인한 자국 국민들의 자멸감에서 시작했다. 그런 경우들의 정권을 자세히 보면 놀랄만한 공통점이 있다. 그런 친미적 정권 세력 혹은 집권자가 미국이나 영국 유학생 출신이거나 미국안보 관련 관료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루지아 대통령인 사카슈빌리는 죠지워싱턴 대학과 콜롬비아 대학 출신으로 미국 성향이 무엇이고 미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라크 과도집권 총리였던 알라위 총리는 런던대학 의과대 출신으로 미국 CIA 협조자이면서 제국주의의 충실한 계승자이기도 하다. 현(2009년 기준) 이라크 탈라바니 대통령 역시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던 2003-4년 당시 미군을 대행했던 이라크 군사령관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카르자이 대통령은 앞서 말했듯이 미국의 CIA 출신으로서 미국의 목소리를 대행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런던 대학 출신인 파키스탄 현 대통령 자르다리는 부토 가문과 함께 영국 제국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인물로서 역시나 파키스탄 국민들의 고통이 무엇인지보다는 미국의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데 더 혈안이 되어 있다. 결국 오늘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의 이곳 저곳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자살폭탄 및 반정부 테러전쟁이 도심 한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자살폭탄이 이어지는 한 미군은 승리할 수 없다. 이번 글에서 빠졌지만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벌인 일차 이라크 전쟁의 당자사였던 쿠웨이트 현 대통령 나세르Sheikh Nasser도 런던 대학 출신이다. 2005년 죽기까지 미국의 전방위 대변자를 자임했던 사우디아라비아 왕이자 총리였던 파드Fahd 역시 미국 대학 유학생 출신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막 벗어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정권 초대 집권자 이승만 역시 미국 유학생 출신이어서 중동아시아의 현 집권세력을 보는 나의 시선은 아픔의 스펙트럼으로 더 가득 차있다. 더군다나 한국은 친미적 이승만과 친일적 박정희, 두 양면성을 고루 갖춘 정권이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 우리를 더 슬프게 한다. 오늘을 사는 한국인으로서 눈에 확 띄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미국의 패권주의, 그보다 더 심각한 병증으로 등장한 미리 알아서 기는 증상 등, 그런 병증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지 분명히 진단해야 한다. 그런 병증의 바이러스는 국제 현대사를 숙주로 한 분리주의의 망상들이다. <끝> |
시대와 철학 20권4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