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
중앙대학교 대학원신문 청탁원고 2010년4월

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


최종덕(상지대 교수, 과학철학)

비어 있는 항아리에 쌀을 부우면 끝내 항아리는 쌀로 꽉 채워진다. 항아리의 상태는 결핍에서 충족으로 될 것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체의 경우는 다르다. 채우면 빠져 나가고 다시 채우면 또 빠진다. 생명체는 살아있는 한 항아리와 달리 항상 결핍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결핍상태가 한때 채워질 수 있지만, 다시 결핍의 불완전한 순환계에 영원히 걸쳐있다. 결핍은 그 자체로 채움의 지향성을 내포한다. 결핍은 완전한 채움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결핍에서 충족으로 가는 지향성은 최종의 종착역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신념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서구 사상사에서 결핍에서 완전한 충족으로 가는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라인이 바로 플라톤 이래로 서구인이 제작한 ‘형이상학의 책’이다. 그 책 안에는 플라톤의 이데아에서 기독교의 신의 말씀까지, 아르카디아와 천년왕국에서 유토피아까지, 근대 이후 개정판에는 보편적 과학법칙이나 절대 정신이 써져 있다.

19세기에 개정된 현대판 ‘형이상학의 책’에는 형이상학 같지 않은 형이상학이 등장하는데 이는 곧 과학기술과 자본의 권력이 추가되었다. 즉 과학기술에 대한 신념과 자본에 대한 신념이 형이상학적 유토피아의 지위를 대신 갖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더 나은 과학기술과 더 많은 자본이 더 풍요로운 미래를 보장한다는 신념이었으며, 이러한 신념의 실현이 곧 진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학기술과 근대 자본이 유토피아를 대신하면서 심대한 역사적 질곡에 빠지게 되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역설적이지만 물질적 진보는 형이상학적 진보의 배경을 두고 있었다.

‘형이상학의 책’을 조금만이라도 들춰보면 결핍에서 충족으로 가는 길이 거의 앞으로만 뻗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래서 백 리를 간 사람과 천 리를 간 사람,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충족함의 종착역에 누가 더 많이 다다랐는지 쉽게 판정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누구든지 종착역에는 원천적으로 결코 도달 할 수 없다는 형이상학의 비밀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종착역에 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종착역으로 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종착지의 절대 존재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한다면 충족함의 목적점 자체도 처음부터 없었음을 뜻한다.

그런 형이상학의 절대적 지위를 처음으로 위협한 도전이 같은 빅토리아 시대에 등장하였다. 다윈의 <종의 기원>이었다. <종의 기원>이 말하는 진화론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모든 종은 동일한 선조를 갖는다는 사실과 (2)종은 절대자에 의해 불변적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변화의 흐름은 일정하게 주어진 목적점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진화론의 과학적 사실은 원천적으로 기존 ‘형이상학의 책’에 조금도 실릴 수가 없었다. 새로운 자연의 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변화의 책’ 이었다.

그러나 ‘변화의 책’을 여전히 형이상학의 책읽기로 읽는 사람이 많았다. <종의 기원>에서 말하는 진화론을 약육강식 논리로 포장하려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이다. 소위 스펜서의 색안경으로만 진화론을 읽는 계층들을 말한다. 그런 읽기 방식은 이름만 변화일 뿐 실제로는 옷을 갈아입은 전통 형이상학의 재현이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읽기 방식 안으로 진화론을 가두어 놓으려는 제국주의적 수순이었다. 과학기술과 자본의 진보를 믿는 근대 유럽인의 신념체계는 밖으로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승화시켰지만 안으로는 빈부격차나 환경파괴 등의 인간소외를 야기했다.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변혁이 태동되기 시작했다. 자본권력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과학기술과 자본의 진보가 아닌 현실사회의 진보가 실질적인 진보라고 확신했다. 사회적 진보는 곧 정신의 역사가 오늘에 재현되는 삶의 현장으로 투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사회적 진보를 해명하는 정신의 역사는 ‘변화의 책’에 실리게 되었다. 진화론이 제시한 생명의 역사와 함께 말이다. 과학과 사회의 서로 다른 스펙트럼이 묘하게도 ‘변화의 책’으로 같이 묶이게 되면서 진보와 진화가 만나는 통로가 열렸다. 사회변혁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신의 역사와 생명의 역사가 ‘형이상학의 책’에서 탈피하여 변화의 진보론을 축조하게 되었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맑스는 “다윈의 책은 매우 중요하며, 나에게 계급투쟁에 대한 자연과학적 토대를 제공해준다”라고 썼다. 우리는 ‘변화의 책’, 진화론의 장에서 자유주의자들의 경쟁논리가 아닌 사회평등주의자들의 진보논리를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런 진보 개념을 나는 <진화론적 진보>라고 말한다. 진화론적 진보는

(1)종착역 즉 목적의 설정을 부정한다.

(2)권력의 도구로 전락된 목적지향적 이데아를 거부하는데서 진화론적 진보의 가능성은 시작한다.

(3)인간의 욕망이 무한 보충될 것이라는 환상, 자본의 무한증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기초한 진보가 아니라, 결핍을 그 자체를 인정하는 진보를 뜻한다.

(4)진화론적 진보의 철학적 성격은 결핍은 부족함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5)오히려 결핍이 있기 때문에 또 다른 것을 새롭게 채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사실은 진화론적 진보의 중심이다.

너무 당연한 말만 했지만 이것이 진화론적 진보를 담고 있는 ‘변화의 책’의 서문이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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