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투르의 종교철학 - 11장 해제
원저 : B.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
실린 곳 : philonatu, philonatu
(한글판) 브뤼노 라투르 2023, 『존재양식의 탐구, 근대인의 인류학』 (황장진 번역) 사월의책. 742pp

(영어판) Bruno Latour 2013, 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An Anthropology of the Moderns, Catherine Porter (tr.), Harvard University Press, 2013, 486pp

(불어판) Bruno Latour 2012, Enquête sur les modes d'existence: Une anthropologie des Modernes. La Découverte


라투르의 존재양식 3부 11장
종교철학

- 해제와 해석 (인터넷 자유판) -

최종덕 (독립학자, philonatu.com)



이 원고는 오로지 이 책 『존재양식의 탐구』 한 권만을 위한 해제본임을 밝힙니다.



『존재양식의 탐구 : 해제와 해석』 읽는 지도

①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의 책, 프랑스 원판(2012)과 영어판(2013)이 출간되고 10년 만에 한글판(2023)이 나왔다. <해제와 해석> 작업이 원래 더 오래 걸릴 일이었는데, 2023년 12월 전문성이 돋보이는 한글 번역판 출간 덕분에 좀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② 『존재양식의 탐구』 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전체의 기초 개념들을 설명하고, 2-3부에서는 정치, 법, 경제 등 구체적인 준주체 존재양식을 다룬다. 1장에서 16장까지 각 장 별로 해제 원고를 차례로 실었다.

③ 챕터 별 서술이 적절한 지 문제를 따질 수 있는데, 이 원고는 이 책 『존재양식의 탐구』한 권만을 위한 <해제>라는 성격에 충실하고자 그렇게 했다.

각 장의 내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책의 특성 때문에 개별 장을 따로 읽기가 힘들 수 있다. 개념에 따라 문단을 나누었는데, 문단을 연결하는 비가시적 연결망의 노드들을 체현하려는 시도를 했다.

④ 이 책은 들뢰즈의 몇몇 개념과 라투르 자신의 책들(생태 저작물 이전 시대) 『근대인』,『실험실』,『동맹』,『판도라』 등에서 제안된 용어를 어느 정도 이어받고 있지만 단순 계승이 아니라 변신된 번역화의 작품이다. 그래서 책의 내용도 상당히 압축적이다. de Vries의 책(2016)과 관련 해설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⑤ 인용 출처는 괄호 안 쪽수 (123)로만 표기했는데, 영어판 출처는 숫자 앞에 * 표시(*124)로, 프랑스 원본의 쪽수 표기는 (** 124) 로 표기했다.







11장 라투르의 종교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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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체로서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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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합체collective란 문화, 사회, 문명 대신에 사용되는 용어라고 라투르는 정의한다.(435)연결망[NET]은 존재들의 결합association을 통해 이뤄진다. 행위자 연결망이론 ANT에서 "사회적"이라는 뜻은 다양한 존재양식들이 잘 직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양식들의 연쇄를 의미하며 이것이 집합체의 사례이다.(436) 예를 들어 종교, 정치, 법, 경제의 양식들은 전부 사회적이며 집합체이다.

2. 종교도 사회적인 집합체의 하나이다. 종교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세심하고 가장 널리 퍼져있고 가장 까다로운 제도이다.(438) 제도화된 종교는 서구사회에서 정치, 도덕, 예술, 우주, 법, 경제 구조에서 가장 깊은 기저를 갖고, 그 위에서 가장 큰 영향력과 지배력을 행사해 왔다.

3. 종교의 막강한 지배적 영향력은 사회의 폐쇄성 안에서 되었지만 거꾸로 자신을 타자화하지 못하고 자기동일성의 폐쇄성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했다. 세속적 종교인보다 직업적 종교인이 자신의 종교 제도를 더 무너뜨렸다고 강조한 라투르의 표현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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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것의 귀환 - 종교의 내재성과 초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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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투르에서 종교의 중요한 특징은 초월성transcendence이 아니라 내재성immanence이다.

2. 종교를 초월성을 만든 것이 근대인이 종교를 스스로 무너뜨린 이유 중의 하나라고 라투르는 말한다. 종교의 초월성은 지나친 이분화의 결과일 뿐이다.

3. 오늘의 종교, 즉 근대인의 종교는 잘못된 초월성에 빠져있고 초자연성을 마치 자연성처럼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념적으로는 초자연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적으로는) 자연적이라는 것이 라투르의 날카로운 지적이다.(439)

4. "영성"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물질성" 안에 갇혀있다고 한다. 천국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유물론이나 오도된 합리주의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439)

5.오히려 종교는 "부동자,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 지고의 것, 이상적인 것, 절대적인 것"을 숭앙하는 접근법으로 오류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440)

6. 지금까지 언급된 잘못된 초월성, 절대적 부동자등의 근본주의가 득세하는 것을 라투르는 "종교적인 것의 귀환"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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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에 대한 근대인의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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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아는 스스로 충만하고 완전한 자율적인 무엇을 추구한다고 근대인은 오해하고 있다.

2. 이런 자아의 소유자는 자신을 변신[MET]의 양식으로 확장시킬 수 없다.(442)

3. 변신 없는 자아는 스스로 정신을 생산하는 존재자로 나아가지 못한다.(442)

4. 정신을 생산하는 존재자를 수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대상화된 타자로만 볼 뿐이다.(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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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종교는 초월성이 아니라 사랑의 친밀감이라는 존재양식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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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사랑의 친밀감이란 다음과 같다.

1. 통일된 인격적 개인들을 하나로 묶는 변신 양식을 수반하는 그런 "말건네기"이다. 사랑은 인격적 개인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뜻이다.

2. 그런 말건네기에 귀를 닫아버린 사람들은 인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관심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444)

3. 사랑은 우리가 존재하고 서로 친근하여 통일되고 온전하다는 확신감(자신감)을 준다.(444)

4. 사랑은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데려오는 특성이 있다.

5. 사랑의 언어는 종교의 계시에 비유될 수 있다. 천사는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존재자로 이해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사랑이 일으킨 영혼의 격동을 전달하는 존재자라고 라투르는 사랑을 강조한다.(445)

6. 사랑의 말건네기는 기능적이고 가시적이고 계량적인 접근태도인 더블클릭[DC]으로는 전혀 이해될 수 없다. 앞 장에서 논의했듯이 더블클릭의 존재양식을 수행하는 "사악한 천재"는 사람의 전달자인 성모마리아나 가브리엘 천사의 뜻을 알 수 없다.

7. 이 점은 역설적으로 천사를 제도화하기 어렵다는 문제로 연결된다. [DC]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의 존재자는 가시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어느 누구나 모두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상호작용의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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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구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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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의 전달자로서 천사는 [DC]로 해명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역설적으로 천사의 존재양식은 제도화되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천사라는 영식 대신에 다른 전달방식의 양식을 찾아보아야 한다.

2. 지시[REF]양식의 지식이나 [DC]로는 사람의 내부성이나 주체성을 접근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인생의 고통을 치유하거나 죄에서 구원받고자 교회 등의 성소sanctuary를 찾아가지만, 사람의 내부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치유와 구원도 형식적 제도에 그칠 수 있다. 구원을 희망하려면 성소같은 "외부자" 존재 이상으로 돌봄의 내부성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3. 신학적 지식에 의존하거나 성소에 가서 외부화된 천사에 기도를 드리는 그런 [더블클릭] 한 방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라투르는 말한다.(447) 종교의 진짜 존재양식과 기독교 신학은 다르다는 뜻이다.

4. 구원을 향한 진짜 방편은 사랑과 돌봄이다. 물론 이러한 존재양식은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런 비난의 요점은 사랑과 돌봄의 정신 양식이 세속적일 뿐 종교의 신성함으로 될 수 없고 겨우 감상적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난이다. 그러나 그런 비난에 움칫거리거나 머뭇거리지 않아도 된다고 라투르는 강한 어조로 말한다.(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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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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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는 탁월한 말들, 즉 계몽(깨우침)이라는 말들의 반복이며 그런 말의 갱신이다.

2. 종교 양식에서 말은 그 자체로 불연속성과 공백을 포함한다. 말과 대비되는 로고스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는 실체로서 연속성의 존재양식이다. 종교는 로고스를 닮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들의 반복체라고 라투르는 해명한다.(450)

3. 종교를 [더블클릭]으로 혹은 로고스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이 점 때문에 종교가 비합리주의 혹은 신비주의로 오해받기도 한다. 종교 존재자를 합리주의로 간주하는 시도를 양식good sens라고 옹호했던 근대의 "사회적" 접근방식은 인간본성의 원형을 간과하거나 무시한 데서 나온 판단이다.

4. 종교를 말들의 반복체라고 했지만 바로 그 말이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소생시키고 구원하는 존재자들을 가져다준다. 그것이 종교 존재자의 실제이며, 그렇게 가능하게 하는 내재된 동력이 바로 종교의 방향과 의미이다.direction /sens (452)

5. 종교에서 이뤄지는 말들의 반복은 성직자나 신비주의자들이 수행할 때 신자로 하여금 영혼을 격동시키는 힘을 더 커지게 한다. 이것이 종교[REL]양식만이 갖는 특별한 사양specification이다. 성직자, 신비주의자, 천사와 같은 영혼의 전달자는 종교라는 정신의 전달자가 열어 놓은 길을 간다.(452)

6. 종교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그리고 강한 목적의식으로 회심conversion을 요구한다."

7. 신비주의자나 신자 등 종교양식을 가능하게 한 정신의 전달자는 성인이나 신부 등 다양한 변이의 경험 상태들을 창설한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양식[REL]이 곧 변신 양식 [MET]은 아니다.

8. 종교는 신성divinities이라는 이름으로 신Gods의 구원을 선포한다. 그런 신성의 종교는 초자연적 방식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고 소생시킨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비합리주의의 선포가 절대적 신성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결국 합리적이라고 근대인은 자찬한다.

9. "신"이라는 단어의 실체가 명확하지 않지만 로고스로 가는 길이라고 근대인은 생각했다. 신이 로고스이어야만 신의 실재가 보장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로고스와 사랑이 분리되는 이분화의 오류가 생기기 시작한다.

10. 종교에서 말의 음조(톤)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설교와 강론에서 튀어 나오는 말들도 사람들을 회심시키지 못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한다.

11. 근본주의로 전이된 종교 존재양식에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사이의 틈새가 너무 크다.(456)

12. 성경은 [DC]가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해석과 새로운 이해 그리고 새로운 수정과 방향을 담고 있어서 고정된 형태로 포착되지 않는다. 그래서 틀에 박힌 복음GOOD News을 제공하지 않는다. 주어진 정보가 없고 만들어지는 해석만이 가능하다는 점이 종교적 존재양식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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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엄페성 - 종교가 변신 양식이 아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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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 존재양식도 변신의 존재양식처럼 자신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엄폐"하는 유형이다. 엄폐하지만 곳곳에 세워진 "성지"들을 흔적으로 남긴다. 그 흔적은 남아도 종교적 존재자는 사라지기도 한다. 종교적 존재자가 처음 나타날 때도 그러했지만 사라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우연에 속한다.(453) 이런 점에서 종교 존재양식은 변신의 존재양식으로 될 수 없다고 라투르는 말한다.(454)

2. 종교 존재양식이 변신 존재양식과 다른 차이가 있는데, 종교의 회심conversion능력에서 회심의 주체(회심을 주관하는 주도권 존재)와 회심을 당하는 피주체가 구분된다는 점이다. 회심의 주체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려는 분명한 목표를 갖는다.(454) 반면 변신의 존재자들에서 주도권은 일방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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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광신주의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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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교는 종말의 약속 혹은 "영원"과 "영생"을 목표로 하면서 시간을 초월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적인 (풍부하고 결정적인) 무엇을 추구한다.

2.종교는 그런 모순을 모순이라고 하지 않ㄱ도 "갱신"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초시간적 "성"과 시간적인 "육신"이 만나서 성육신Incarnation을 이뤄내는 종교의 정교화 산물이 있다.(458) 그런 산물은 실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실체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정교화라고 했다.

3. 이러한 갱신이 종교의 특유한 변이 양식이다. 연속성의 "성스러움"이 불연속성의 "육신"으로 체현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거꾸로 불연속의 육신이 연속의 "성스러움"으로 둔갑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을 라투르는 "함정"이라고 표현했다.(459)

4. 종교 존재양식의 길 잃은 연악함, 현세의 불연속성을 내세의 연속성으로 둔갑하게 된다면 믿는 자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분노를 갖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위대한 신학, 헌신적인 생명, 대단한 의례(예배), 감동의 교리, 이런 모든 것들이 허튼 소리로 되고 나아가 전쟁의 명분으로 바뀔 수 있다.(459-460)

5. 종교 텍스트를 해석하는 주석들 사이의 상대주의적 갈등이 종교의 한 특징이다.(460) 거꾸로 말해서 타자의 해석을 일체 허용하지 않고 자신만의 해석을 절대적이라고 하는 입장이 곧 종교 광신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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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이분화를 답습하는 종교의 범주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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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과 죽음, 구원과 저주, 시간의 현재와 종말, 현존의 위기와 미래의 충만성처럼 본질의 이분화 안으로 종교가 빠져 있다면 정신과 물질, 영혼과 신체, 실재와 현상 등의 이분화에 빠진 근대인의 과학의 범주오류와 다를 바 없다고 라투르는 말한다.(460-1)

2. 근대인의 신학은 종교 양식의 신을 실체화시킴으로써 일신교만을 보존하게 했다. 이런 실체의 형상화는 범주오류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종교양식에서 신은 연속성과 불연속성, 반복과 차이, 전통과 신생, 생존과 갱신, 일신과 다신, 초월과 (신성한) 내재를 이분화시키는 범주오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라투르는 강하게 말한다.(462)

3. 라투르는 "신"에 대하여 특별한 특권이 주어져서는 안 되고 다른 존재자들을 넘어서 위치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신이 다른 존재자들을 심판할 수 없다는 라투르의 태도는 종교적 존재양식의 다원성을 역설한 것이다.(463)

이런 특징은 종교와의 연결망 양식의 기본이다. 예를 들어보자. 신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는 지나친 특권을 누리고 심판을 행사한다. 종교양식의 다른 많은 존재양식을 포획하여 자기 안에 종속시키는 것은 타자 존재의 독립성(헤게모니)과 존재양식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일이다.(463)"

4. 종교도 다양한 존재양식들의 한 부분일 뿐이지 세계 전체일 수 없다는 라투르의 태도는 매우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464) 종교가 다른 존재의 빈칸을 채우면서 우리는 다른 여타의 존재양식을 잃게 된다.(464) 종교가 권력이라는 자기동일성 맥락에 빠지면서 다른 모든 실재를 정복해도 된다는 자기 오류를 갖게 된다.

5. 종교는 타자를 포용하지 못하고 타자와의 갈등과 투쟁인 `대조"contrast를 간직하면서,(대조 개념은 아래에서 따로 설명한다) 타자와의 조화와 연합을 해주는 "교차"의 연결망에 들지 못했다.

근대인이 대조의 이분법으로 세상을 파악했듯이 종교도 이분법의 대조에 머물고 있다고 라투르는 판단한다. 이렇게 과학과 종교에서 드러난 근대적 이분법의 오류를 라투르는 "근대주의의 비극"modernist tragedy이라고 표현한다.(471)

6. 이분화의 오류에 노출된 종교는 합리화rationalization를 통해서 신을 실체화한다. 이런 합리화는 종교 자신을 [더블클릭]에 위임하는 것과 같다. 그럼으로써 종교는 변신 양식과 멀어지고 오로지 더블클릭 양식에 종속된다. 합리화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합리적인 것the rational일 수 없다. 라투르는 합리화rationalization와 합리적인 것the rational을 구분한다.

합리적인 것으로서의 종교를 되찾으려면 '실체적인 것'something substantive 혹은 "멀리 있는 존재"remote beings가 단순히 논리적으로 파생된 것에 지나지 않음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469)

7. 그런 실체는 자연 "너머에" beyond nature 초자연적 무엇을 설정하는데, 그런 설정을 하는 순간 종교는 이미 이 땅에서 지금 바로 여기라는 현존성을 저버리게 된다. 라투르는 시종일관 종교는 반드시 저 너머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바로 지금 여기의 이웃의 문제를 체현해야 한다는 태도를 갖는다. 이런 점에서 종교를 지나치게 저 너머 세상의 실체로 환원시킨 근대인의 종교를 범주오류로 라투르는 본다.

8. 라투르 종교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너머가 아닌 바로 여기 이웃의 목소리를 듣는 access to one's neighbors종교로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472,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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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대조contrast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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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날것과 요리된 것, 자연과문화, 말과 사물, 신성한 것과 불경한 것, 실재적인 것과 구성된 것,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 야만적인 것과 문명화된 것, 그리고 근대와 전근대의 이원론은 대조된 것을 구획하는데서 시작된 발상이다.(5장; 222)

2. 이러한 대조가 교차로 전환하지 못한 근대인은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거나 인정하는데 매우 서투른 자기동일성이라는 감옥에 빠진다.

3. 다시 말해서 대조가 이분법의 오류로 빠질 수 있고 다른 편으로 교차의 연결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근대인의 대조는 대체로 이분법의 오류였지만 이제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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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6장에서 논의했던) 믿음의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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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종교양식은 진리의 존재양식과 대비되는 존재자이지만, 믿음이라는 양식도 [전치사] 존재양식에 해당하는 것은 맞다.(258, 6장)

믿음의 대상이 다를 경우, 믿음의 종교양식의 개별자는 서로를 비난하게 된다.

믿음의 종교 양식은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하나는 [더블클릭]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믿음과 진리가 상충된다는 점이다.(6장;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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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의 존재론적 탈선, 그들만의 양식good sense에서 상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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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웃에 눈을 돌리지 않고 관념론적인 저 너머 먼 실체를 신으로만 모셨다는 점에서 라투르는 이를 존재론적 탈선ontological skid이라고 표현했다. 과학의 탐구영역을 오로지 물질로 환원시키기 용이한 가까운 곳으로 한정했고 다른 한편 종교의 믿음 영역을 오로지 도달하지도 못할 저 너머 먼 곳으로 한정했다는 것이 근대인의 존재론적 탈선이다.(472)

2. 과학을 물질로 종교를 영적인 것으로 이분화 시키기, 과학을 지상의 지식으로 종교를 천상의 지식으로 이분화 시키기 등이 존재론적 탈선에 해당한다. 근대인은 그런 탈선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과학과 종교를 접근하는 그들만의 오도된 태도를 양식good sense이라는 자부심으로 숨겨왔다.

3. 이제 과학으로 하여금 환원시키기 좋은 가까운데서 탈피하여 더 먼 곳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인정해주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종교로 하여금 관념으로 둔갑한 천상의 실체에서 탈피하여 가까운 이웃을 돌보는 시선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근대인이 가졌던 합리화된 그들만의 양식을 멈추고 진짜 합리적인 상식common sense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라투르는 강조한다.(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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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의 종교와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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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 너머 먼 곳과 이웃을 이분법적으로 구획하는 근대인의 '견고한 양식'이 아니라 멀리 있는 타자를 보는 시선과 이웃에 있는 타자를 보는 시선을 그때마다 적절하게 찾아가는 연결된 상식을 되찾자는 뜻이다.(473)

2. 초월성의 종교가 아니라 이웃을 돌보는 내재성의 종교 그리고 폐쇄된 객관성의 과학이 아니라 개방된 객관성과 확장된 합리성 그리고 생태주의를 포용하는 과학을 실천하는 지구인으로 재생하자.(475)

11장 주석과 해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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