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투르의 미학 기초 - 9장 해제 |
원저 : B. 라투르, 존재양식의 탐구 |
실린 곳 : philonatu, philonatu |
(한글판) 브뤼노 라투르 2023, 『존재양식의 탐구, 근대인의 인류학』 (황장진 번역) 사월의책. 742pp (영어판) Bruno Latour 2013, 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An Anthropology of the Moderns, Catherine Porter (tr.), Harvard University Press, 2013, 486pp (불어판) Bruno Latour 2012, Enquête sur les modes d'existence: Une anthropologie des Modernes. La Découverte 존재양식 9장 라투르의 미학 - 해제와 해석 - 인터넷 자유판 - 최종덕 (독립학자, philonatu.com) 이 원고는 오로지 이 책 『존재양식의 탐구』 한 권만을 위한 해제본임을 밝힙니다. 『존재양식의 탐구 : 해제와 해석』 읽는 지도 ①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의 책, 프랑스 원판(2012)과 영어판(2013)이 출간되고 10년 만에 한글판(2023)이 나왔다. <해제와 해석> 작업이 원래 더 오래 걸릴 일이었는데, 2023년 12월 전문성이 돋보이는 한글 번역판 출간 덕분에 좀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② 『존재양식의 탐구』 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전체의 기초 개념들을 설명하고, 2-3부에서는 정치, 법, 경제 등 구체적인 준주체 존재양식을 다룬다. 1장에서 16장까지 각 장 별로 해제 원고를 차례로 실었다. ③ 챕터 별 서술이 적절한 지 문제를 따질 수 있는데, 이 원고는 이 책 『존재양식의 탐구』한 권만을 위한 <해제>라는 성격에 충실하고자 그렇게 했다. 각 장의 내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책의 특성 때문에 개별 장을 따로 읽기가 힘들 수 있다. 개념에 따라 문단을 나누었는데, 문단을 연결하는 비가시적 연결망의 노드들을 체현하려는 시도를 했다. ④ 이 책은 들뢰즈의 몇몇 개념과 라투르 자신의 책들(생태 저작물 이전 시대) 『근대인』,『실험실』,『동맹』,『판도라』 등에서 제안된 용어를 어느 정도 이어받고 있지만 단순 계승이 아니라 변신된 번역화의 작품이다. 그래서 책의 내용도 상당히 압축적이다. de Vries의 책(2016)과 관련 해설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⑤ 인용 출처는 괄호 안 쪽수 (123)로만 표기했는데, 영어판 출처는 숫자 앞에 * 표시(*124)로, 프랑스 원본의 쪽수 표기는 (** 124) 로 표기했다. 9장 세상의 미학을 위하여: 기호의 자의성에서 탈출하기 ------------------------------------- 기존 표상론의 이분화: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표상이라는 이분화bifurcation에서 벗어나기 ------------------------------------- 1. 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연장실체 RES EXTENSA 라는 이해방식을 해체하는 것이다. 2. 연장실체에 대비(대칭)된다고 잘못알려진 (말하는 주체의) 사유실체에 대한 집착the symmetrical obsession with a “speaking subject"을 치료해야 한다. 3. 세계(존재)가 물질과 잘못 융합되었다고 라트르가 말할 때 그 때 융합은 영어로 amalgamation의 번역이다. 이 책 전반에서 라투르는 amalgamation이라는 용어를 대체로 부정적(비판적)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라투르는 이렇게 잘못 연결된 융합이 대표적인 이분화의 오류라고 보면서, 그는 이러한 융합을 해체disamalgamate 하는데 전력을 다함으로써 근대인에게 전혀 다른 세상을 제공하고 싶어한다.(*234, 348) 3' 5장 정치 존재양식에서 이미 융합의 문제점이 제기되었었다. 5장에서 주석자는 융합 대신에 강한 권력이 다른 것을 녹여서 흡수함으로써 "하나"로 만든다는 뜻에서 "용융"이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 9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맥을 이해하는 독자라면 전체 컨텍스트로 볼 때 용어번역에서 큰 문제될 것은 없다. ---------- 이분화란 ---------- 1. 객관적 지식이 사회나 언어와 분리되어 가능하다는 이원론의 입장이다. 2. 지식이 자연과 분리하여 존재가능하다는 자연에서 분리된 이원화 입장이다. 3. 2번의 이분화는 이미 화이트헤드 (중기) 자연철학에서 구체성을 잘못 놓은 오류에서 충분히 지적되고 비판되었다. 그리고 자연과 분리된 이분화의 오류를 피해가거나 해체하기에 상대적으로 쉽게 여겨진다. 4. 그러나 자연과 지식 사이의 이분화 문제에는 사회와 언어와의 이분화 문제가 이미 내포되어 있어서 언어라는 환경과 사회의 컨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어서 우리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다.(348) ------------------------------------ 정신, 사회, 집단의 표상 ------------------------------------ 1. 객관적 지식이란 언어와 사회라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배후offstage를 마치 없는 것처럼 가상하여 자연 그 자체를 절합할 수 있다는 오도된 표상, 혹은 경험이 배제된 관념일 뿐이다. 2. 자연은 정신적 표상, 사회적 표상, 집단적 표상 세 가지의 협동collaboration에 의해 실재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235, 349) --------------------- 이분화의 또 다른 문제점 --------------------- 1. 부피, 질량, 크기 등 수로 환원가능한 일차 성질과 냄새, 색깔이나 촉감 같이 수로 환원되지 않는 이차 성질의 구획은 일차 성질을 물질로, 이차 성질은 체험(주체성이나 감정 등)에 의존하는 이분화를 결정해 놓았다. 그리고 일차 성질에게만 존재를 부여하고 이차 성질에서 존재의 무게를 빼버리고 존재의 전치사를 모조리 삭제시키려 한 것이 바로 근대인의 이성이었다. 2. 이런 이성의 이분법은 처음에 해결책처럼 보였지만 결국 “재앙”으로 되고 있다고 라투르는 말한다.(349) ---------------------------- 라투르는 왜 재앙이라고 표현했나? ---------------------------- 1. 계량화된 자연, 경험이 배제된 채 이성화된 자연, 의미의 전치사를 박탈당한 자연, 근대인이 보기에 "진정한 자연"real reality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자연, 그래서 그런 계량화된 자연으로 표현되기 어려운 모든 경험적인 것들을 무작정 "상징세계"symbolic realities라는 작은 곳으로 가두어 버리던 근대인의 자연, 바로 그런 근대인이 만든 허구의 실재가 오히려 근대인 스스로를 실재로부터 쫒아내었다. 슬프도다. 쫒겨난 근대인은 관념화된 분석과학(이상화된idealized hard science) 안으로 자기만의 성곽을 쌓아놓은 것이다. 라투르는 이런 근대인의 현상을 재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236, 350) --------------------------- 자연의 이분화는 언어에서도 적용 --------------------------- 1. 자연을 물질화하여 경험으로부터 자연을 이분화시킨 근대인의 오류는 같은 방식으로 언어에도 적용되었다. 2. 근대인은 물질과 상징을 대비하여 자연을 설명했듯이 언어에 대해서도 상징이라는 구획 안에 가두어 놓았다. 3. 언어는 기호sign로 제한되지 않으며 의미sense로 연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지식은 연결없는 기호들의 구성물로 되어서는 안 되고 의미들로 채워져야 한다. 그것이 지식의 연결망이다. ------------------------------------- 근본 경험주의와 2세대 경험주의를 구분하다. ------------------------------------- 아래 2세대 경험주의가 바로 존재를 파악하는 경험을 보여준다. 1) radical empiricism: 윌리엄 제임스처럼 철학사적 경험주의 2) second-wave empiricism 2세대 경험주의: 도약, 공백, 작은 초월로서의 경험으로서 굴곡진 길을 가는 행위과정course of action을 말한다. 그런 행위과정으로서 경험의 길은 "좁지만 높은 데까지" 갈 수 있는 존재양식이다.(351)" ------------ 존재의 과정 ------------ 1. 이 책에서 궤적, 존재, 방향, 의미(sense or meaning)는 동의어다. Consequently, in this inquiry, trajectory, being, and direction, sense, or meaning, are synonyms(*237, 352) 2. 존재의 의미는 존재의 결핍을 파악하고 그것을 채우려는 과정들, 즉 번역하고 구현하고, 재생하며 해석하는 등의 과정으로 정의된다.to translate it, to take it up again, to grasp it anew, to interpret ---------------------- 픽션 존재양식의 특징 [FIC] ---------------------- 1. 변신하는 접힘과 반복의 과정이다.it folds and reprises them(*249) 2, 형상화의 수단이다. 예를 들어 정치 양식에서 형상화가 없다는 것은 픽션이 없다는 것을 뜻하며 그렇게 되면 정치정당이나 권력 같은 집단의 존재양식도 불가능하므로 결국 형상화 없으면 정체 양식도 불가능하다.[FIC.POL] 3. 형상화가 없으면 종교도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교회의 신에 대하여 우리는 얼굴figuration이라는 픽션 혹은 교회라는 형식 공간의 픽션을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종교의 행위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법도 마찬가지다. 사회(특정 공동체)가 만든 그들대로의 법적 장치fictio legis가 없는 법은 생각될 수 없다. 4. 여기서 '형식'이라는 말이 반드시 '상징'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즉 법이나 정치 혹은 종교가 "상징적 세계"일 뿐이라는 주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지 법과 픽션 사이, 정치와 픽션 사이, 종교와 픽션 사이에 상호 상대방의 이익과 가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법이나 종교 혹은 정치의 존재양식이 잘 설명될 수 있다는 뜻이다.(370) -------------- 미학의 무한성 -------------- 1. 산너머 해지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노을 하늘의 자연 경치 혹은 장관sprctacular을 감상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픽션의 도움으로 자연이 재생산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는 재생산-픽션[REP.FIC]의 존재양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2. 마치 누군가가 저 멀리 산너머 등성 위로 노을의 빛을 그려넣은 듯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다시 말해서 햇빛, 산등성, 하늘, 새들의 비행, 구름 등등은 서로가 서로에게 질료 요소로 변신되고 그런 질료를 바탕으로 자연 스스로 창조되는 무한한 표현양식으로 드러난다. 3. 가상의 배치자(가상의 설계자; un agenceur virtuel; **257)가 햇빛, 산등성 하늘 등을 평면des plans에 투영시켰다고 생각해보자. 그런 평면의 도면들 각각은 서로에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질료의 역할을 한다. 그 질료들이 서로 연결되어 (연쇄적으로 겹쳐서) '형식화'를 이룬다. 그 형식화의 결과가 바로 "아 장관이구나, 경치가 아름답구나" 라는 경험으로 드러난다. 미학은 이런 형식화로부터 시작된다. 4. 형식화의 결과는 자연의 피조물이 일방적으로 만든 경관(아름다움이라는 경치)이 결코 아님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가상의 배치자”(디자이너) 그 이상으로 이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경험의 주체자 역시 임의적이고 다양하고 주체마다 다른 "가상의 관객"(경험의 향유자; spectateur virtuel)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배치자에게 물질화되고, 관객에게 체화되고 서로에게 뿌리내려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는데 그러 차이를 진동의 강도 차이라고 라투르는 표현했다. 5. 형식화 사이, 진동의 강도가 생기는 이유는 첫째 """가상의 디자이너와 가상의 관람자""" 사이의 관계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이기 때문이며 둘째 가상의 관객들 사이의 경험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6. 그런 차이가 존재양식의 진동에서 오는 것이며 그런 진동으로 인해 자연을 바라보는 양식, 기술을 수행하는 양식들이 무한하다. 이것이 바로 미학의 무한성이다. 미학의 무한성은 존재양식의 진동에서 오므로 그 진동을 경험하지 못하면 미학도 뿌리내릴 수 없다.(370-1) 7. 미학의 무한성은 경험자의 해석이 다양하고 무한하다는 의미로 그치지 않는다. 경험자(관객)의 해석(창조)의 무한성 이상으로 (자연, 기술 등) 세계 스스로 배치되고 스스로 창조되는 무한성 때문에 미학이 생성된다는 라투르의 강한 뜻이 엿보인다. --------------------------------------------- 과학에서도 미학만큼이나 픽션의 존재양식이 발휘된다. - 과학에서 픽션의 역할 --------------------------------------------- 1. 지시와 픽션, 두 양식의 교차 혹은 협력에서 세계의 아름다움이 생긴다.[FIC.REF] 2. 픽션의 양태인 내러티브는 지시의 연쇄를 가능하게 해준다. 즉 픽션의 내러티브없이 지시의 연쇄도 없다. 3. 바이러스나 DNA 원자입자 등을 취급하는 과학 논문 혹은 조사연구보고서 안에서조차 단순한 지시체들의 단어나열이나 종이묶음이 아니라 그런 지시체들의 내러티브들이 마치 희곡의 캐릭터들처럼 등장한다. 이런 내러티브로부터 바로 과학의 추상적 능력이 생긴다. 4. 사실의 내러티브가 객관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픽션의 내러티브는 상상력이라는 이분법은 맞지 않는다. 5. 픽션의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는 다른 미지의 세계까지 존재의 여행을 할 수 있지만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와 그 존재자들을 전개할 필요가 생긴다.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존재자의 귀환을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과학적 세계관에서 과학의 탐구결과들이 일률적이고 주어진 표현방식으로 보고될 뿐이다. 그런 과정에서 풍성했던 픽션 내러티브가 축소되고 상실된다. (372-3) 6. 픽션보다는 지시체를 많이 다룬다고 하는 과학에서도 그런 지시체들의 시프트(탈연동; 변환)가 일어난다. 과학적 발견의 창조는 대체로 기존의 관습적인 관찰(기존 익숙해진 관찰장비에 의존한 것들)을 일탈하는 시프트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과학은 그런 시프트의 결과들을 다시 익숙해진 표현수단으로 되돌려 복귀시키고 있다. 그것을 라투르는 귀환(shift back in; 한글본에서는 재연동)이라고 표현했다. 근대인은 그런 과학의 귀환을 ‘객관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라투르는 훈육되고 길들여진 재생 disciplined and domesticated replayingdp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한다. 7. 과학에서도 픽션의 요소를 부정할 수 없다. 과학은 원래 픽션의 발견논리와 지시의 정당화논리를 다 같이 갖고 있다고 표현한다면 대체로 그런 표현은 과학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로 여겨질 듯하다. 과학에서 취급되는 그런 의미의 픽션은 앞서 말한대로 기초 재료인 질료들을 어떻게 재구성하는지에 대한 형식화의 수준일 것이다.(374) 8. 픽션과 지시는 미학과 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이 결코 아니다. 픽션의 내러티브와 지시의 네러티브를 변환(시프트, 탈연동)의 양식과 귀환(shift back, 재연동)의 양식으로 대비하여 겨우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대비가 그들 사의 객관성과 상상적인 것, 혹은 참과 거짓, 사실의 문제와 아름다움(가치)의 문제the True and the Beautiful로 대비될 수는 결코 없다고 라투르는 강조한다.(*252, 374) ------------------------------------------------------------- 픽션과 지시체는 서로 유사하므로 대응론적 형상화가 가능하다는 오해 ------------------------------------------------------------- 1. 픽션의 양식과 지시의 양식 사이의 차이가 두 양식 사이의 협력을 낳을 수 있지만 한편 서로간의 오해를 더 늘릴 수도 있다. 혹시 픽션이 만드는 형상화가 지시체를 모방한 형상화가 아닌지의 의심, 더 나아가 지시체와 픽션의 작업이 일대 일 대응관계가 아닌지라는 이상한 오해에 이를 수 있다. 마치 모델과 사본의 모방적 유사성mimetic resemblance 관계처럼 말이다. 예술에서나 과학에서나 이런 오해는 마찬가지로 생길 수 있다. (375) 2. 사실주의 회화가 세계를 묘사한 것이라는 태도는 과학이 서술하는 실재 세계의 원본이 있다는 태도와 비슷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런 태도의 요점은 양쪽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하며 둘째 보이지 않는 원본을 형상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있다. 3. 그런 자신감 즉 지시의 연쇄의 복잡하고 다면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마치 객체처럼 여겨지는 마지막 사테를 대응론적으로 보는 태도는 근대인이 범하는 결정적인 오해에 속한다. -------------------- 근대인의 자연주의 오해 -------------------- 1. 픽션 양식이 지시체 양식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라는 태도 중의 하나가 바로 자연주의이다. 자연주의는 알려진 세계를 모방하여 나름대로 형상화시킨 결과이기는 하지만 대응론으로 형상화시킨 잘못된 미학의 소산물이라고 라투르는 말한다. 2. 자연주의라는 태도에서부터 근대인의 연장실체 관념이 만들어졌다고 라투르는 본다. 그래서 연장실체 관념도 오해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픽션과 지시를 결합하는 자연주의 방식의 오해에 빠지지 않고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근대인은 아쉽게도 다 놓치고 말았다. 그 이후 근대인은 외부세계를 직접적인 기호를 통한 표상 즉 "상징적 표상"이라는 안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 기호에서 탈출하여 의미로 접근하기 --------------------------------- 1. 그런 오해의 안개에서 탈출하려면 기호를 의미로 오해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기호는 무수히 많은 픽션의 변종일 뿐이지 기호가 곧 의미로 될 수 없다. 2.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 의미가 얹혀있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연결, 혹은 기호분석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의 사용하는 언어행위와 그런 행위가 벌어지는 사회의 언어관습 등이 얽혀진 형상을 보는 능력이다. 3. 의미는 그 의미를 표상했던 기존의 단일 기호를 분석하는 것으로는 전적으로 부족하다. 기호 사이의 연결, 의미존재가 다른 의미존재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환과 공백과 변신 등의 작은 초월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기호화된 주체의 존재 자체를 분석하여 의미를 찾으려는 근대인의 동일자 탐구방식은 폐쇄된 악순환의 고립된 원환이다. 이런 폐쇄에서 탈출하여 타자의 존재의 실타래를 끝까지 찾아나서는 일이 중요하다. 그런 일이 바로 초월을 수행하는 행위이다.(376-7) ------------------------ 기호와 상징에 대하여(378) ------------------------ 1. 기호는 픽션 양식이지만 픽션의 장소를 지나치게 과장한 결과다. 2. 기호는 상징이지만 고정된 상징에 가깝다. 원래 상징은 방향과 전치사 양식을 특징으로 하는데, 기호는 그런 방향성과 전치사의 특징을 제거해버린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3. 존재의 자기 내부에서 투명하며 고립된 것만을 지식이라고 규정한 근대인의 물질 관념에 대응하는 것이 기호다. 4. 기호들만의 연결을 통해 하나의 세계, 하나의 체계, 하나의 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는 믿음은 픽션 양식의 지나친 유혹에 빠진 결과이다. " 5. 기호들만의 세계는 물질과 상징이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결되지 않은 그런 이분화의 오류를 낳게 한다는 점을 라투르는 경고한다. 6. 그런 오류의 하나는 다음과 같다. 기호화된 언어가 물질 객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근대인의 유혹인데, 그런 유혹에 빠지게 되면 언어가 객체에 대응함으로써 진리가 획득된다고 하는 기호의 진리성을 더 많이 부여하려는 추가 유혹에 또 빠진다는 것이다.(379) to give verisimilitude to this artifice of languag(*256) 7. 물질과 상징의 범주오류로 인한 이분화를 비탈길에 미끄러지는 모습으로 라투를 표현했다. 라투르는 이제 그런 비탈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걷기를 제안한다. -------------- 영어본 번역 오류 : 한글본(379)에서는 잘 되어 있는데 영어본에서 번역 오류가 하나 있다. le monde et le sens(불어 원본, **263) <---- the word and meaning (영어본, *255) "world"에서 'l'을 실수로 빠트린 것 같다. 사소해보이지만 9장 컨텍스트에서 자칫 오해를 낳을 수 있다. 한글번역서 도움으로 이 오해를 풀었다. -------------------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1898–1967, 벨기에)의 작품(1929)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This is Not a Pipe; "Ceci n'est pas unepipe") 라투르가 인용한 마그리트의 이 작품은 브라이어 파이프라는 그림으로 보여지는 기호가 반드시 해당 브라이어 파이프라는 객체에 대응된다는 기존 관념의 오류를 보여주려는 의도로 인용된 그림이다. 이 작품의 의미는 이미 미셀 푸코에 의해 인용되었었다. 푸코는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비대칭 혹은 모순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라투르는 푸코와 약간 다르게 이미지라는 기호가 사물을 고립적으로 상징한다는 생각에 갇히게 되면 이미지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을 말하는 데 있다. 이미지는 사물에 대응하는 진리 의미가 아니라 사물이 놓여진 환경, 이미지와 작가의 관계 등 타자와의 무수한 관계항들 속에 도사려 있다. 그런 타자 속에 거주하는 관계항들을 놓쳐버린 독립된 기호로서 이미지는 없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마그리트의 작품을 활용하고 있다. 라투르는 이 작품을 통해서 상징이 사물을 따라서(후행하여) 표현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후행이 같이 작용된 것임을 강조한다. ----------------------------------------------------- 라투르의 제안: 비탈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오를 수 있는 걷기 ----------------------------------------------------- 1. 기호는 무엇인가를 대신하는 “ for something else”것이 아니라 단순히 다른 것으로 표헌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서 최소로 붙어다니는(최소 대립쌍;“minimal pair”) 하나일 뿐임을 알아차린다.(*256) 2. 기호는 관계 경험을 제거한 채 오로지 물질의 대응체로만 오해한 산물이다. 기호는 대응적이지도 않고 필연적이지도 않으며 단지 자의적“arbitrary”일 뿐임을 알아차린다.(379) 3. 연기와 불의 관계가 기호와 사물 간의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예측불가, 일탈, 변신(변이), 다양성 등의 무한한 차이를 안고 있는 것처럼 세계 존재자들은 변이들로 가득한 차이의 세계임을 아는 데 있다. 즉 동일성의 기호에서 벗어나 차이의 의미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4. 언어의 고립이 아니라 세계의 절합을 파악한다. 세계가 기호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경험의 발화와 반복의 절합이라는 the world itself that is articulated 것을 파악해야 한다는 뜻이다. 5. 절합의 의미를 상실한 기호들의 세계는 근대인들만의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세계일 뿐이라는 점을 가이아는 경고하고 있다고 라투르는 말한다. (380-1) 가이아의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이 세상에 의미를 다시 부여하여 절합시키는 경험의 삶을 수행하는 것이 험난한 비탈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오르는 방법이다. 9장 해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