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한알 속의 장일순 읽기 |
원저 : ,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장일순 |
실린 곳 : 평론원주, 평론원주 |
1998 서평 : “나락 한알 속의 장일순 읽기”, 평론원주 창간호(1998), 1998년 12월12일, 258-264쪽 제목: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 장일순 읽기 저자: 최종덕 출저: 원주평론 98년 11월호 불교 동화 한 편의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길을 걷다가 길거리에 떨어진 장갑 한 짝을 아들이 보고는 주어서 가져 가려고 하자, 아버지는 남의 것에 욕심을 내면 안된다고 꾸짖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그냥 한 쪽의 장갑을 그냥 두고 가는데, 또 멀찌감치 나머지 장갑 한 짝이 마저 떨어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방금 전의 장갑을 주어 오라고 아들에게 말했지요. 이 동화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마음 속 깊이 배어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분명히 인간의 욕망은 인류의 창조적 진보를 가져다준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욕망이 개인화되면서 욕망으로부터 불화와 싸움이 일어나며 나아가 불신과 소외를 낳는 직접적인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고도의 산업문명으로 치닫는 오늘의 성장위주사회에서 개인화된 욕망은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로 점철되어 삶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습니다. 이렇게 왜곡되어 가는 삶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많은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의 사상적 흔적을 찾아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일순 선생은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책으로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묵화에 나타난 글씨 하나하나 마다에 우리는 그의 진정한 삶의 열기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전의 강연회를 통하여 인간에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짐작케 하는 생명의 혼을 호흡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의 열기와 생명의 혼을 주변 사람이 책으로 만든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3권으로 된 <노자 이야기>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생명사상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장일순의 사상은 우리 유불도에 이미 있었던 전통의 생명사상을 현대의 새로운 체험에 맞추어 재발굴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의 사상은 이론적 작업에 머물지를 않고 실천적 삶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실천의 삶은 유위(有爲)의 실천이 아나리 무위(無爲)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유위의 실천은 20세기 산업화의 역사에서 분명히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그 대신 인간파괴의 병리적 현상같은 너무 큰 삶의 폐해를 주었음을 위의 책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는 삶의 원형을 상실한 물질문명 속의 우리들에게 진정한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문명의 탈을 쓰고 온갖 갈등과 부조화를 자아내는 욕심의 이기성과 억지춘향의 인위성이 결국 오늘의 인간위기와 환경위기를 초래한 것이지요. 이제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되찾자는 무위의 실천은 현대 문명사회의 중요한 좌표계를 준다고 봅니다. 장일순 선생이 살아 계셨다면 아마도 스스로 부정하시겠지만 분명히 그의 실천과 생각은 그 좌표계의 굵은 바늘인 것입니다. 그의 책 <노자 이야기>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욕심 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로써,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를 채우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강하게 하며 언제나 백성으로 하여금 아는 바가 따로 없어 욕심이 없게 하고 무릇 안다는 자로 하여금 감히 나서서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無爲로써 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 결국 무위란 일부러 함이 없어도, 인위적으로 내세움이 없어도 그렇게 되어가는 자연스러움을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무위를 하겠다”해서 하는 무위가 아니라 무위 조차도 없는 그런 무위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원래부터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순리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인위적인 것에 길들여져 있어서 자연의 순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한 자기 나름대로의 수양은 마음으로 나오는 것인데, 이러한 자연의 길로 가는 마음의 과정 자체가 결과보다 중요하겠지요. 그런데 그 과정은 과정이라, 버릴 때가 되면 버려야 한다는 것이 노자를 이해하는 장일순 선생의 중요한 언표인 것입니다. “부유부쟁(夫惟不爭)하니 그러므로 무(無尤)라” 하여, 오직 다툼이 없으므로 그런 까닭에 근심이 없을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된다고 봅니다. <노자 이야기>의 텍스트가 되는 노자의 도덕경은 터럭만큼도 사(私)적인 마음을 가져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지영지기(持而盈之)는 불여기이(不如其已)”라, 소유하고 자랑하는 것, 내가 잘 났다고 하는 것, 내가 다 안다고 하는 것 등의 사적인 마음을 버리고 비우는 일은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묻어 있는 유혹의 갈고리를 떼어내는 일입니다. 최근 서구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이성비판의 문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성의 붕괴, 문명비판의 선봉인 생태주의 사상, 그리고 과학주의에 대한 반성들 모두는 ’꽉 차있는 것‘에 대한 거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꽉 차있는 것은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하여 아집과 편견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받아 들일 수 없지요. 반면에 비어 있음은 더 많은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지요. 그의 책에서 노자를 인용한 것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삼십복공일곡(三十輻共一?)하되 당기무(當其無)하여 유차지용(有車之用)”이라 하여 바퀴살 서른 개가 바퀴통 하나에 모이되 바로 거기가 비어 있어서 수레를 쓸 수가 있다 하여, 무(無)를 비어 있다(虛)고 해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비어 있기 때문에 바로 쓸모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이 비어 있다는 것은 거꾸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고, 반대로 사람이 뭔가로 가득 차있다는 것은 결국 욕심의 ’나(ego)‘ 로 차 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을 장일순 선생은 강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를 꽉 채우려고 자꾸 밖에서 찾으려는 사람은 결국 쓸모도 없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은 꼭두각시인데, 사람이 꼭두각시를 가지고 놀다보면 꼭두각시의 꼭두각시로 되는 수가 있다는 장선생님의 말은 많은 문명적 시사를 던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만들어 놓은 것들(造物) 속에서 서로 속고 속이며 살아가고 있음을 찔러 말한 것이지요.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스스로를 낮추는 자는 그로 인해서 높아진다는 뜻을 강조한 인간상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 윤리적 규범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말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계를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서는 시(侍)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侍)라는 것은 모시는 것이오, 같이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즉 모시면서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뽑내고(벌;伐) 남이 알아 주기를 바래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내세움 없이 천지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같은 약육강식의 시장경제 사회에서 이렇게 살다가는 흥부 꼴 나느 것이 아닌지 묻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의심이 가거든요. 그런데 앞의 두 책을 잘 읽어보면 그 해답이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미 사회주의 복지정책을 쓰고 있는 북유럽 국가에서도 경쟁보다는 공생의 원리가 먼저 들어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의심은 경제의 단위를 짧게 보기 때문에 생긴 의심일 뿐이고 길게보면 공생의 경제학이 우리를 살려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공생의 경제학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마다 자기 몫이 다 있으니 획일적으로 혹은 경쟁의 관계로 사람들을 묶어 놓으면 안돤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태어난 성품대로 물가에 피는 꽃이면 물가에 피는 꽃대로, 돌이 놓여 있을 자리면 돌이 놓여 있을 만큼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가면 그것이 바로 조화요, 공생인 것입니다. 요즘 교육개혁의 바람이 일고 있는데, 그 핵심은 우리 아이들을 획일화시켜서 죽어가는 교육이 아니라, 창의성을 돋우어 살아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공생의 교육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장일순 선생의 말 중에서 주역을 인용한 것이 있지요. “쉬우면 쉽게 알 수 있고 간단하면 쉽게 따를 수 있고 쉽게 알 수 있으면 친할 수 있고 쉽게 따를 수 있다면 공을 이룬다”는 말은 결국 가장 쉬운 것을 옆에 두고도 못보기 때문에 생기는 부조화와 싸움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제하기 어려운 사람의 욕심 때문이지요. 그래서 구체적으로 욕심을 자제하려는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노자가 말한 종사어도(從事於道)를 장일순 선생은 공생의 원리로 쉽게 풀어 주는 것 같습니다. 종사어도란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항상 도를 쫒아 가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일상사를 살면서 스스로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는 것이 천지자연의 법도를 어긋난 것이면 그 때에는 이미 죽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죽어 있으면서도 죽은 줄을 모르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진정한 삶의 길이란 엄청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단지 죽어 있는 것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바꾸고 같이 사는 방법을 실천하며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즘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개인주의와 전지구적인 환경파괴 현상은 결국 자연과 인간이 하나이고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서로를 헐뜯고 자신을 남으로부터 고립시키고 분리시킨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공해문제니 환경문제니 하는 말은 자신의 생활하는 바탕을 고침으로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집은 마냥 깨끗하게 쓸고 닦고 하는데 그 쓰레기를 담 너머로 던져 버리는 것과 같지요. 이제 우리 모두가 자연과 함께 하나라는 생각을 바로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결국 자연과 이웃이 되어야 하고, 하찮은 미물이라도 자기 몸 대하듯이 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입니다. 나무 싹 하나, 새 알 하나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소중히 여기면 나무가 무성할 것이고, 벌레나 새들이 거기 깃들고 모두 함께 기뻐할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말은 사실 저도 다른 데서 여러번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장일순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너무 쉽게 마음에 와닫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도 철학이나 한답시고 노자의 도덕경을 읽기는 했지만, <노자 이야기>만큼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 준 책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책들은 그저 말로만 좋은 이야기이고 한가한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좁은 생각에서 책의 내용들이 현실적 삶의 구체성과 처절함이 없는 것 같아서 책의 내용을 조금 앝보았습니다. 그런데 차근차근 읽으면서 제가 얼마나 아집에 쌓여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집과 관련된 비슷한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치운동과 중립화 평화통일운동, 그리고 70년대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졌던 그가 왜 80년대 들어서 수묵화 속으로 침잠하였는지를 묻는 질문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80년대 초 한살림을 창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생명운동을 하신 이유를 그의 책에서 유추해보려 합니다. 그에게서 혁명조차 보듬어 안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생명에 대한 전제없이 혁명이 완수될 수 없을 것이며, 혁명은 인간에 대한 애정, 그릇된 것에 대한 거룩한 해결이 아니면 안된다고 본 것입니다. 첨단의 과학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이지만 그의 수묵화 속에서 여전히 우리들이 잘 새겨야 할 배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물질과 경쟁만이 기준이 되어버린 우리의 사회는 결국 오늘의 국가적 구제금융 시대라는 경제위기를 낳게 한 것입니다. 장일순 선생이 남긴 글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수묵화 한 편에 소리없이 쓰여진 글과 그림은 엄청난 철학의 진리나 거창한 사상보다 더 큰 일상적 삶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