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과 중심
원저 : 심재관, 탈식민시대 우리의불교학
실린 곳 : 둥근책상, 둥근책상
독서토론모임 <둥근책상> 6주년 모임

심재관 지음,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책세상,2001) 에 대한 열린 서평


주변과 중심




원주시 법천면 백제 초기 추정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현재까지: 점토대토기, 생활면1기, 토광묘6기, 백제유물출토구덩이 2개소, 석실분2기, 웅관묘2기, 횡구식 석관묘1기 및 토기, 철기, 옥 등 200여점) 발굴주체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원주의 문화재로 잘 알려진 부론면 거둔사지 국보 및 보물급 유적의 진짜 중요한 것들은(지광국사현묘탑, 진공대사탑비 몸체, 흥법사지 3층석탑,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묘탑) 대부분 경복궁이나 중앙박물관에 있다. 얼마 전 원주시인가 아니면 그 관련된 사람인지 잘 모르겠으나 경복궁과 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그런 유물들을 원주로 되돌아오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겉보기에는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와의 관계와 유사하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리슐리에 도서관은 한국 자료를 돌려 줄 경우 아마 그들의 동양학부 서고의 반은 텅 비어 버릴 수도 있다. 프랑스 유물관계자는 외규장각을 돌려 줄 경우 그 역사적 가치에 견주어 볼 때 한국이 자체적으로 보관할 능력이 모자랄 수 있으므로 프랑스가 보관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하는, 되게 웃기는 이야기도 한다. 자,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원주와 중앙박물관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 보자는 말이다. 우선 유물이 돌아오려면 원주박물관이 다시 건축되어야 하며 학예사도 지금보다 5배 정도는 더 있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원주 일반 혹은 원주 공무원들의 문화적 의식이 향상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다.

물론 중앙박물관과 프랑스 박물관계를 비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는 독일과 1970년대부터 독일의 프랑스 점령기 때 탈취해 간 프랑스 유물 반환 조처 국가 간 협약을 맺었고 그에 따라 반환이 실현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국과의 관계에서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꼴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들의 변명은 이중적 태도라는 이유다. 바로 이런 이야기를 심재관 교수의 생각을 통해서 하려한다.

심재관의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책세상, 2001)은 불교학을 소재로 했지만 근원적으로는 서양과의 피동적 조우에서 비롯한 우리의 정체성을 질문하고 있다. 우선 그는 전통적 불교학과 근대적 불교학이 다른 성격임을 전제하고 그 둘을 구분하여 근대적 불교학의 문제를 삼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전통을 만나야 하며 서양을 보고,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면 먼저 한국의 근대 불교학이 무엇인지 구명되어야 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佛學이라 하는 전통적 불교학과는 기원이 다른 역사적 이질성을 갖는다.

(2) 제도교육권 체계를 통해 배우는 커리큘럼에 해당하며 이는 일제 이후 근대화에 대한 갈증의 소산이기도 하다.

(3) 문헌학적 엄밀성을 연구태도로 한다.

(4) 기존 전통 불학을 대체하는 힘을 갖고 있다.

(5) 그러나 아직 미완의 상태이며 더 근대화되어야 한다.

(6) 과거의 전통 불교학은 급변하는 현대에 적응하지 못하며 소실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에 대한 반전일 수 있다. (이상 29쪽)

(7)이런 설명과는 다른 차원이기는 하지만, 근대 불교학은 자생적 불교학이 아니라 i)서구에서 시작하여 ii)서구학문으로 정착한 iii)서구동양학의 하나인 불교학이 거꾸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유입된 불교학을 뜻한다.

8) 따라서 근대화 시점은 일제로 시작하는 1900년 대 초로 잡는다.

(9) 그 방법론적 특성은 서구 문헌학적 배경을 지니며 많은 경우 실증주의 방법론에 충실 한다.

(10) 서구가 적극적인 태도로 수용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문헌수집과정에서 제국주의 전형이 드러난다.

이런 설명에 근거하여 필자는 서양의 지적 헤게모니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해방이 곧 학문적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인가라는 자조적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도 한다. 문화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 근대의 해체가 곧 “우리 것이 좋은 거여”라는 국수적 민족주의로 연결되는 것 역시 그는 경계하고 있다. 심재관은 분명히 해체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 해체할 것인지를 매우 고민하고 있다.(83쪽) 나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어디까지 해체하느냐라는 고민은 진정한 해체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심중에 해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조금 있다고 본다. 해체는 전부 해체하는 것이다. 부분 해체는 해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현상에서 더욱 그렇다. 대부분 결단력이 부족한 경우 해체를 부분 해체하려고 들 든다. 그런데 필자도 그런 형세가 꽤 짙다.

나도 그런 모습이 좀 있는데 나는 완전 해체하는 대신 <해체>와 <근대>를 동시에 (정확한 표현으로는 이중적으로) 등에 이고 산다. 그게 내가 사는 법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원히 이중적 고리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중성을 벗어나 있다면 그의 존재는 거의 분명히 신God 아니면 동물로 추측된다. 이제 우리 시선을 내적 성찰에서 벗어나 외적 역사로 다시 돌려보자.

5장의 내용은 그동안 논의되어 온 우리 시대의 글쓰기 담론 및 동아시아 담론과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반부는 제국주의 지식 혹은 그 지식인을 비판하면서도 후반부는 민족주의 학문풍토를 자성하고 있다. 고고학, 지리학, 인류학, 민속지 등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학문으로 나는 규정한다. 필자도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신나는 드라마의 귀결은 그들 식민지의 탈취 유물로 가득 채운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제국박물관을 정당화한 꼴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이 이름 붙여준 동양이 아니라 우리가 찾아간 동양이어야 한다고 한다. 동학이라는 표제어는 먼저 있었던 서학이라는 표제어에 대한 반동이었다는 점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 동양학에 지나치게 편도된 김종명의 이야기에 대하여(102-108쪽) 지나치게 과민반응 할 것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필자의 생각을 듣고 싶다.

김종명의 이야기는 논의가치도 없지만, 김종명 같은 이야기가 회자되기 전에 먼저 우리 내부의 동양고전에 대한 우리말 번역 역량이라도 키워야 한다고 본다. “서구 동양학자가 더 잘해? 아니면 우리 동양학자 실력이 더 좋아?” 라는 단순비교논법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니 날조된 전통(114쪽)을 깨부셔야 하고, 근대를 해체하고, 지적 헤게모니의 음모를 드러내야 하는 둥, 괜히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요즘 나도 일이 바쁜데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그런데 근대를 해체해야 하는 것인지 근대를 하려면 제대로 된 근대를 해야 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더 어려운 문제라서 더 무겁다. 아무래도 색다르게 풀어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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