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보기2 - 프랙티스와 사용 철학
해보기(수행성)와 사용 철학
해보는 것(수행, practice)은 나의 행위로 국한되지 않고 사물을 사용하는 데 의미를 갖는다. 사물의 사용은 나와 사물을 연결하여 사물과 나, 주체와 객체가 하나로 공존하게끔 하는 존재론적 통로이다. 사물을 사용함으로써 사물을 인식하게 되지만 사물의 인식에 그치지 않고 사물의 실재가 생각보다 더 깊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엄격히 말하면 '파악'이 아니라 '깨닫게 된다'는 뜻인데, 그 말이 갖는 비정의적non-definitional 성격 혹은 감성적 선입관 때문에 "깨달음"이라는 용어 사용에 하기에 망서리기도 한다. 그래서 대신 "파악"이라는 말을 쓴 것뿐이다. "파악"prehension 이라는 말은 화이트헤드의 실재를 접근하는 언어를 따온 것인데, 이는 인식론적 인지, 인식, 지식이라는 개념 등과 달리 존재론적 범주에 얹혀있다.
결국 "해보기"는 인식 과정의 제한에서 벗어나 프랙티스라는 깨달음의 존재화 과정이다. 여기서 말하는 해보기(프랙티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용use 철학으로 직결된다. Ludwig Wittgenstein 후기철학에서 사용use은 단순히 사물을 써먹는다 라는 뜻이 아니라 의미를 파악하는(깨닫는) 존재론적 과정이다.
The meaning of a word is its use in the language.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43)
“한 단어의 의미는 언어 속에서의 그 사용이다.”
해보기practice는 수행performance 이며 사물을 사용함으로써 비로소 사물을 깨닫는 통로이며 사물과 사용자가 존재론적 공존으로 가는 파악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용은 언어적 '단어' 수준에서 설명했지만 여기서 말하는 '해보기'는 언어 수준이 아니라 모든 사물 수준에서 설명된다. 비트겐슈타인에서 단어는 정의(definition)에 도움으로 의미(meaning)를 확득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use하면서 비로소 의미meaning를 얻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내가 말하는 사물은 정의definition되기 이전에 사용use됨으로써 의미가 생성된다. 그 사물은 주체에 의해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주체를 사용하는 능동적 존재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이 사물을 사용할 수 있지만 사물이 어떻게 사람을 사용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다.
이 의문에 대한 응답은 2 단계 논리를 거치면서 이뤄질 수 있다. 첫 단계로서 '사람'이라는 단어 대신에 '주체'로 그리고 사물이라는 단어 대신에 객체로 바꾸는 일, 둘째 단계로서 주체와 객체는 고정된 범주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일이다. 그래서 주체1도 객체1 입장에서는 객체 2의 하나로 될 수 있다. 모든 객체는 그 자체로 세계(우주)의 여타 사물들을 또 다른 객체로 응대할 수 있는 주체로 될 수 있다.
이 둘째 단계를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그런 어려움을 나도 이해는 한다. 인류 발생development과 발달development 자체가 인간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중심 사유는 단번에 깨진다.
인류가 없어도(인류 멸망 이후에고 인류탄생 이전에도) 세계는 엄연히 존재했었고, 그 때는 사물들 하나하나가 다 저마다 고유한 주체였었다는 분명한 우주적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그런 사물들은 저마다 충돌하고 저마다 융합하고 저마다 밀고 댕기며 저마다 관계 생성 운동을 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인간이 없어도 말이다. 그래서 객체가 주체를 사용한다는 말이 성립된다.
원래 사용의 말로 돌아가자.
해보기를 통해서 사물과 주체는 하나의 공존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러한 공존은 항상성 상태라서 프랙티스라는 운동을 멈추는 순간 박물관의 박제된 고형물로 전락한다. 해보기는 나라는 주체가 사물이라는 객체를 써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객체와 주체의 공생을 유지하는 통로이다.
해보기는 사물과 하나되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사용하지 않고 존재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해서 사물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관조나 향유가 아닌 사용의 해보기가 중요하다.
어떻게 해보기를 하느냐구?
그냥 엄두를 내면 된다.
키워드: 사물을 깨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