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스 문짝이 밋밋해보여서 거기에 시 한수 적었다. 밋밋한 거보다 나을까?
남들이 떠먹여주는 유무형 서비스를 내가 직접 수행해 본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당위적이라는 생각이었다. 요즘은 수영을 하는데, 텔레비전에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한국인 선수를 보고 감동받아 2년 전부터 동네 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했다. 지난 달 대부도 바다 수영과 한강 잠실 수중보 하단 횡단 수영을 하면서 텔레비전으로 보는 스포츠가 아니라 미약한 수준이나마 직접 수행하는 스포츠를 수행했다. 수행 중이다.구봉도 바다 수영 걷기 운동을 학원에서 배워야 한다고 상상한다면 아마 반발이 클 거다. 마찬가지로 수영이나 취미생활도 충분히 혼자서 수행할 수 있다.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 다만 그런 자기 잠재력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누구나 몸의 기억, 몸의 진화론적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편습된 기억으로 지워진 몸의 기억을 되살리면 된다. 3. 해보기 03 - 예술이것 저것을 하려면 배우는 데 큰 돈이 들 터이다. 나는 돈 드는 수업이나 강좌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수영도 유투브로 독학했고, 피아노나 바이올린도 혼자서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치게 되었다. 수준은 형편없지만 그래도 내 처는 들어줄 만하다고 말하니, 그 정도 수준이면 나에겐 대만족이다. 그림 스케치도 그냥 따라서 본뜨기 하는 수준으로 그릴 뿐이지만 나는 만족한다. 내가 남에게 내 그림을 보여주고 자랑할 일도 없으니 말이다. 나에게 예술은 감상이 아니라 수행이다. 예술의 원천으로서 구석기 조상의 동굴벽화를 들 수 있다. 동굴벽화는 생활 속의 예술이다. 동굴벽화의 예술art은 말 그대로 기술arts이며 기술은 저 멀리 두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고 행동하는 수행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τέχνη (techne)는 오늘날 말하는 예술과 기술을 모두 포함하듯이 말이다. 예술은 직업 예술가만의 소유가 아니라 일상인이 자기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A.N.Whitehead 는 예술과 기술 모두 창조성creativity의 수단이라고 했다.신유물론 철학자로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라투르Bruno Latour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흥미로운 글이 있다. 라투르 미학에서 예술은 작가가 객체를 창조하는 작가-중심 예술관에서 벗어나 객체(환경-네트워크)가 작가를 창조하는 예술관을 보여준다. 그 후자를 창조creation라는 말 대신에 라투르는 "창설"(instauration ;인스타우라시옹)이라고 표현했다. 나의 홀로함은 전적으로 개인의 사적 영역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 의해 관계지워진 창설 과정일 뿐이다. 전문가 아닌 일상인도 예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구석기 조상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 포스팅 썸네일로 사용한 앞의 꿀벌 그림도 내가 그렸는데, 이 그림은 내 책을 내준 '씨아이알' 출판사 표지 디자이너와 상의한 끝에 "생물철학" 겉표지로 활용되었다.
음악과 그림을 수행한 나의 초보자격 수행은 내 홈페이지 (‘일상과 감성’ 메뉴)에 실어 놓았으니 빗대어 보시면 이해하기 더 쉬울 듯하다.4. 해보기 04 - 요리에서 바이올린우선 해봐야 알 수 있다. 안 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겠지만 그래도 하면 된다. 나는 요리를 즐겨하는데 요리하는 방법을 배운 적도 없다. 단지 즐거운 마음으로 내가 먹어보았던 음식의 맛과 향을 기억하면서, 짜면 물을 더 넣고 싱거우면 소금 조금 더. 이런 수행을 반복하면, 반복하지만 똑 같은 반복이 아닌 창조적 반복을 하다보면, 그렇게 입맛 까다로운 내 와이프도 어느새 내 요리를 먹고 있다.내가 바이올린 연습한 이야기를 하면 될 것 같다. 10만 원 짜리 연습용 바이올린 하나 사서 켜기 시작한다. 음이 하나 틀리면 그 옆 음으로 손가락을 누른다. 아니면 한 뜸, 더 아래로 옮겨서 비슷한 소리가 나면 다음 소리를 따라한다. 이렇게 시작한 바이올린, 이제 대중음악 소리는 거의 따라 켤 수 있게 되었다. 피아노도 그렇게 연습했다. 깽깽이 소리 악기에 손놓은지 5년이 넘었지만, 자전거 타는 법 잊지 않듯이 바이올린 켜는 감성도 그리 쉽게 잊혀 지지 않는다. 그게 지식 배우기나 암기학습과 전혀 다른 감성의 연습법이다. 그림 그리기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배웠다. 5. 해보기, 프랙티스가 공생-공존-공감의 지름길이다. 남들은 혼자 외로이 하는 일을 개인주의로 보는 경우도 있다. 나는 그 반대라고 본다. 혼자 홀로 하는 일상의 연습을 많이 해야 공생-공존-공감의 더불어 사는 생활도 잘할 수 있다. 외로움을 억지로 이기려하지 않고 오히려 외로움과 더불어 사는 일상을 생활 속에서 연습해 온 사람은 남들과 더불어 사는 데 매우 지혜로운 수행(행위, 실천)을 할 수 있다. 홀로함의 연습이 없었던 사물관계나 인간관계는 거의 필연적으로 노예와 주인의 계급관계로 빠진다. 홀로함을 연습하지 않은 사람은 대부분 권력형 주인 행세를 하려하거나 종속형 노예 습성에 중독된다는 점이다.홀로와 홀로함은 다르다. “함” 없는 “홀로”는 그야말로 처절한 고립이다. 반면 수행하는 ‘홀로’는 세상과 직접 소통하는 창구가 된다. 그러면 홀로함은 어떻게 하나?그냥 하면 된다.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선에서 해봐야 한다. 그것이 시작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평소에 그것을 꼭 해보고 싶다는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말에 “엄두를 낸다”라는 표현이 있다. 엄두의 어원은 “염두”念頭인데, 평소부터 그 실천을 내 마음속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엄두라는 용어는 실제로 “엄두를 낸다”라는 긍정적 표현보다 “엄두가 안 난다” 라는 식의 부정적 습관으로 더 자주 쓰이고 있다. 그런 부정적 습관에 젖어 있어서 우리는 더욱 더 '해보기'에 약해진다. 그러면서 자기 고립에 자가당착으로 빠지고 결국 남들과 더불어 살며 행동하는데 미숙해진다. '해보기'는 더불어 삶을 위한 일상의 연습이다.부정적 습관이 아니라 엄두를 내어본다는 능동성 표현법을 받아들이면 해보기는 엄두로 이어지고 결국 혼자만의 수행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지름길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해보기는 공생과 공존 그리고 공감의 토대로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