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로 엮어 만든 가설교이다. 맹그로브 숲 얕은 바다물에 기둥을 박아 만든 다리인데, 2미터 마다의 대나무 기둥 사이에 두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한다.
맹그로브 숲은 정말 어마어마하다. 처음 100미터 정도는 다리가 그나마 튼튼했는데 나머지 200미터 길이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건넜다.
1.길이로 설치된 대나무를 두 개씩 같이 발로 사뿐히 밟는다.
2. 옆 손잡이로 설치한 대나무 바에 내 체중을 실으면 큰일 난다. 옆 바는 몸의 평형만 잡기 위해 가볍게 사용되어야 한다.
여기 맹그로브 숲의 크기는 해안가를 따라 무려 1Km 이상 뻗어 있다.
다리 끝에 바다 위에 가설된 관찰소가 있다. 내가 들어간 관찰소에는 마침 사람이 없었다. 관찰소 안 테이블에 기록용 노트가 있었다. 노트에는 빼곡히 날자/시간특이사항들이 기입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리인이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것 같다.
여기 필리핀 시골사람들은 부락이나 촌락이라는 뜻의 Barangay (바랑가이) 라는 촌락 공동체 생활을 한다. 최소 마을 단위라고 보면 된다. 바랑가이는 나름대로의 삶의 패턴과 규약을 갖고 있다. 중앙정부법으로 규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바랑가이 사람들은 자기의 바랑가이 정신을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기 생태보전지역도 중앙정부가 아닌 동네 바랑가이의 생태적 정신에 의해 유지되는 것 같다. (물론 지방정부에서 보전지역을 지정하기는 하지만)
그런 바랑가이 스피릿에 비할 바 못되지만, 나는 그 관찰기입장 노트 안에 약간의 기부금을 끼워 놓고 나왔다.
맹그로브도 다른 나무와 똑같은 광합성 작용을 할 뿐이다. 별개의 광합성 원리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맹그로브 나무가 짠물에서도 살 수 있는 이유를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뿌리에서 소금을 걸러내고 걸러낸 소금은 잎이나 껍질에 저장되었다가 떨어진다.
맹그로브 나무 역시 광합성할 땐 이산화탄소의 도움을 받지만 그런 광합성으로 생산된 포도당 에너지를 끄집어 써먹으려면 산소가 필요하다. 그런 과정이 식물의 호흡이다.
그런데 맹그로브 나무가 서식하는 비다물 땅은 아주 진한 진흙이어서 그런 진흙 속에서 맹그로브는 산소 호흡을 할 수 없다. 맹그로브 나무 뿌리는 물 밖에 드러나 있다. 맹그로브 나무 뿌리는 흙 밖으로 그리고 물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텔레비전 화면 등에서 보았을 것이다. 산소호흡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다.
광합성과 호흡을 위해 맹그로브 나무는 독특하면서도 그럴듯한 구조 변형의 진화를 거쳤다.
일반적으로 식물에서 광합성이란 물(H₂O)를 분해하여 산소와 전자와 수소이온으로 되는 과정에서 시작한다. 빛이 엽록소에 닿으면 전자가 "들뜬 상태”(고에너지 상태)로 되고, 그 전자가 이동하면서 ATP를 생성하고 이 에너지로 CO₂를 포도당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광합성을 하기 위해 바다물, 즉 Na⁺(나트륨 이온)과 Cl⁻(염화 이온)을 사용하지 않고 물(H₂O)을 사용하도록 진화했을까?
만약 진화론적으로 염화이온으로 전자를 생산하게 되었다면 식물 광합성 이후 온통 염소기체(Cl₂)라는 독성물질만 생성되어 지구생명 자체가 생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화는 단순하고 최적의 장구한 시간의 통로를 따른다. 광합성 원리도 그렇다. 그러나 다양한 식물의 서식환경에 따라 광합성이라는 진화원리는 약간의 보완이 이뤄진다. 맹그로브의 경우, 광합성이라는 진화작동 원리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바다의 짠 물을 걸러내는 부차적인 보완을 통해서 광합성의 일반작용을 유지한다.
환경에 따라 소금을 걸러내는 작용이 부가되는데, 이는 단순 부가가 아니라 맹그로브 생리작용에 "내재적"으로 결합된 상태로 진화되었다는 뜻이다.
내재적이란?
형이상학적 내재성은 자연학적 내재성과 연관된다. 진화적 내재성은 원래의 본성은 아닐지라도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다. 외재하던 고세균1(혹은 일반 세균)이 다른 세균2에 포획되면서 장구한 진화사를 거치면서 세균1은 세균2 안에 내재화되었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동물세포 안에 내재화된 미토콘드리아이다. 식물세포 안에 내재화된 엽록소도 마찬가지다. 공생적 내재화라고 말할 수 있다.공생성 내재화 개념은 생물학자 마굴리스가 처음 제안했다. 나는 마굴리스의 존재론적 내재화 개념에 부가하여 맹그로브 짠물 필터 기능과 같은 기능적 내재화 개념을 내놓는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내재화, 내재성 개념의 원조는 뭐니뭐니해도 스피노자이다. 그런데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법 철학도 전적으로 내재성 철학의 기원으로 보는 편이다. 스피노자의 내재성을 형이상학적이라고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내재성을 자연주의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현대철학에서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 철학의 기반을 내재성 철학이라고 말한다. 이들마다의 내재성 개념은 워낙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공통성이 있는데, 초월성을 부정한다는 데 있다. 화이트헤드에서는 초월적 신에 의해 이 세계를 설명하지 않고 내재된 관계로서 설명한다. 들뢰즈에서는 관계가 외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가 마치 맹그로브 나무의 소금 필터링 생리작용처럼 필터링 운동이 광합성 운동 안에 내재화되어 있다. 동양철학, 대체로 "기"를 언급하는 대부분의 동아시아 철학에서는 관계가 이니 깊히 인식과 가치에 내재되어 있다. 내재성 철학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나는 장횡거를 들지만, 장횡거 아니더라도 도가철학이나 황제내경을 포함하여 대체로 동아시아 전통철학은 관계 내재성의 철학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형이상학적 내재성을 자연주의 내재성으로 대신 설명하면 철학이 좀 더 쉬워진다. 나의 철학은 자연주의와 형이상학이 만날 수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여러 차례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