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 Kanitscheider 단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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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교수 Kanitscheider 회고 내가 학위를 받은 학과는 철학과가 아니라 물리학과 과학철학 센터(Fachbereich Physik und am Zentrum für Philosophie und Grundlagen der Wissenschaften der Justus-Liebig-Universität Gießen)였다. 지금은 그 센터가 없어졌는데, 독일 기센Gießen대학교 철학과는 여전히 과학철학 박사준비생이 많은 것 같다. 나의 지도교수 카니촤이더Bernulf Kanitscheider는 칼날같은 성격으로 당시 그 교수 아래 독일인 박사생이 거의 없었다. 나는 그의 이력만 보고 뭣도 모른 채 그의 독토란트(박사준비생)로 되었다. 박사과정에 있는 동안 행정적인 작은 문제도 있었다. 나의 한국 내 석사학위가 인정되지 않아서, 석사에 해당하는 별도 시험을 따로 치루었다. 시험준비하느라 일 년 걸렸다. 실제로는 지도교수 제미나seminar수업에 참가하면서 시험을 치루었으니 시간적으로 큰 손해는 아니었다. 진짜 어려웠던 일은 제미나 수업에서 거쳐야할 주제발표를 하는 일이었다. 내가 발표를 하면서 내 지도교수는 그럭저럭 참아주었으나 학생들의 질문은 매우 공격적이었고, 답변하기가 벅찼었다. 내용보다는 독일어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상당수의 갖가지 예상질문지를 미리 A4 이면지에 적어 와서 수업참가자 질문에 적절히 혹은 적당히 응대했다. (그땐 궁핍하여 에이포 용지를 사는 대신 도서관 유료 복사기 옆에 놓인 버려지는 에이포 용지함에서 그 종이를 가져다 이면지로 활용했다.) 이상하게 그렇게 까다로운 지도교수가 오히려 내 대신 질문에 대한 방어를 해기도 했다. 어느 수업을 들어가도 동양인은 나 혼자라서 얄궂은 질문들도 있었다. (그때 seminar 수업시간 발표자료를 올려는데, 여기 클릭하시면 그 자료 내용들을 볼 수 있다.) 2년이 지나면서 논문초고를 쓰기 시작하면서 난관을 맞았다. “양자역학의 존재론”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겨우 지도교수로부터 승인받은 후, 나는 원고를 시작했지만 창의성있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목차 설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해보려는 소재와 주제들 대부분이 이미 유럽의 기존 학자들이 다 해놓은 것이라서 새로운 나만의 창작품을 구성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내 논문의 기본틀은 1935년 아인슈타인과 닐즈 보어 사이의 양자역학의 파동방정식의 완전성에 관한 논쟁이었는데, 이미 수만 편의 관련 논문이 나왔을 정도로 열띤(핫한) 것이어서 도무지 내가 들어가 낄 틈새가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나는 논문전략을 약간 수정했다. 나의 석사학위 주제였던 화이트헤드와 아무나 접근하기 어려웠던 불교 화엄경을 각각의 개별 챕터로 추가 삽입한 새로운 논문을 디자인했다. 그런데 지도교수 카니촤이더는 의외로 쉽게 내가 새롭게 구성한 목차를 적극 지지했다. 어찌어찌하고 겨우겨우 논문작성이 끝나갔다. 당시는 지금처럼 워드프로세서가 발전되지 않아서 초기에는 타자기로 원고작성했었다. 나중에는 퍼스널컴퓨터 XT와 좀더 개선된 286 PC가 나와서 조금 수월했다. 당시 한국에는 286/386 PC가 퍼졌지만 독일에는 PC의 시작수준 기계였던 XT PC가 시장에 겨우 나왔을 정도였다. 어쨌든 원고작성과 수정되는 속도가 조금 빨라졌다. 초기 타자기 시절엔 에이포 한장에 단 하나의 단어라도 지도교수의 빨간 펜 코리기렌(커렉션)될 경우 그 한 단어 수정하는라고 전체 에이포 용지를 다시 타자해야 했다. 지도교수의 빨간 펜 수정작업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지금 보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세월은 흘러 논문이 완성되고 진짜 마지막 관문을 남기게 되었다. 소위 구두시험이라고 일컫는 면담 과정이다. 내 학위 논문 심사위원이 모두 5명이었다. 과학철학부 센터의 센터장이 심사위원장이고 주 심사위원장은 물리학과 지도교수였다. 그래서 철학과 교수 1인, 신학과 교수 1인, 물리학과 교수 1인, 내 지도교수 카니촤이더를 포함한 센터 소속 교수 2인 모두 5명이다. 그런데 5명을 정해진 시간에 모으기 힘들어서 구두시험 일정 잡는데 일 년 걸렸다. 나로선 잘 되었다. 그동안 면담 구두질문 예상지를 만들어서 달달 외울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어린 지원이와 지우 그리고 마누라가 내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서 조바심도 났지만 어쩔 수 없이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드디어 구두시험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예상대로 준비해놓은 질문이 쏟아져서 어느 정도 답변을 했는데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질문이 나오기도 했다. 내가 약간 당황했는데 웬걸 지도교수가 내 대신 방어를 해주었다. 결과는 통과다. (여기 클릭하시면 학위논문 파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나는 겨우 직장도 잡고 이렇게 저렇게 살아왔다. 살기 바빠서 독일 지도교수를 챙기기는커녕 생각지도 못했다. 정년할 나이가 되니 그때서야 카니촤이더 생각이 많이 났다. 그는 바이올린을 취미로 하는데, 그때 나도 바이올린을 습득하는 중이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바이올린 줄을 받치는 소리통 위 브릿지를 그것도 아주 고급의 브릿지를 구입하여 그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했다. 우편으로 부치려했는데 당시 독일에 갈 계획이 있어서, 그러면 선물을 직접 들고 만나서 인사하고 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6개월이 지나서 독일에 가게 되었다. 슬프다. 그 사이에 카니촤이더 교수님이 영면했다. 77세였으니 조금 이른 나이에 삶을 마쳤다. 나는 슬펐다. 주인을 찾지 못한 바이올린 브릿지는 아직도 내 방에 있다. 나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렇게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가 나에게는 상대적으로 잘해주었는지. 나의 독토란트 시절 그와 나눈 대화가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가족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빨리 가고 싶다고 그에게 말했다. 다시 말해서 논문 빨리 끝내기를 희망한다는 완곡의 의사표현이었다. 그의 답변은 이랬다. 실감나게 하려구 독일말 그대로 적어본다. "Das ist nicht meine Sache, sondern Ihre Sache." (그것은 내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입니다) 찬바람 휘~익 부는 것을 느끼게 하는 그의 냉냉한 대답이었다. 그 정도로 차가웠던 그가 나의 논문 과정에서 대체적인 호의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했지만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요즘 거대언어모델 인공지능 GPT 유행은 나로 하여금 마이크로소프트 엣지edge에 붙은 코파일럿copilot 인공지능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코파일럿 기능은 최소한 나의 공부와 관련하여 GPT4 보다 뛰어났다. copilot으로 카니촤이더 교수의 과거 이력을 훝어보았다. 그동안 오랫동안 나는 그에 대해 무심했었는데 요즘 자꾸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하여 내가 갖고 있는 정보는 거의 논문과 저술 작품일 뿐이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코파일럿 인공지능을 활용하니 그 답변의 수준과 질이 굉장하다. 결론적으로 알고보니 그는 나의 관심과 비슷했다. 그동안 무심했었는데 이제서야 그에 대한 관심을 깊이 갖게 되었다. 이하는 지도교수 Kanischeider에 대해 코파일럿으로 검색한 결과이다. 그는 함부르크 출신이지만 대학 공부를 오지리 인스부르크로 유학을 갔다.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그는 물리학과 기하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가 그곳으로 가게 된 이유는 특별한 데 있었다고 나는 추정한다. 20대 초반 어린 카니촤이더는 티벳 불교에 관심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선불교를 서구사회에 알림으로써 상당한 지적 인기를 누리던 일본의 불교학자 D. T. Suzuki(1970-1966)를 연구한 학자가 인스부르크에 있었기 때문에 어린 카니촤이더는 함부르크에서 먼 인스부르크까지 유학한 것이라고 나는 추정한다. 카니촤이더는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의식의 문제”Das Problem des Bewusstseins로 박사학위를 마쳤다. 박사학위 이후 그의 관심분야가 180도 바뀌었다. 그는 모르는 것을 괄호 안에 머물게 하고 알 수 있는 것만을 탐색하는 철학 공부를 선택했다. 그래서 그는 오리무중인 의식의 철학에서 물리학과 수학의 철학으로 이전했다. 이후 그는 자연의 실재reality가 어떻게 현상으로 드러나는지를 분석하는 주제 “기하학과 실재”Geometrie und Wirklichkeit"라는 주제로 교수자격시험Habilitation을 통과하고 기센대학교 과학철학부 센터 종신교수로 부임하여 돌아가시 전 2017년까지 재직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의 전체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동양인이었던 나를 떨어트리지 않고 끝까지 살펴준 그의 동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양자역학 주제에 한 챕터로서 불교 관련 소재를 추가삽입했던 것이 나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내 추측일 뿐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남들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6년 반이라는 획기적으로 빠른 시간에 내가 학위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을 반추해 보았다. 바이올린 브릿지의 주인은 지금 없지만 나는 그의 바이올린 현의 진동을 느낀다. 그에게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울리지 않은 진동에 공명하게 해준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에게 감사하기 그지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