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영화5선


중고등 학생 때 나는 거의 매주 영화를 극장가서 봤다.

대부분 극장 한 번 들어가면 2-3편 영화를 볼 수 있는 재상연관에 갔다.

서울 시내 한복판 을지로 2가에서 현재 디자인센터가 위치한 을지로 6가에 이르기까지 많은 재상영관 극장들이 있었다.

바다극장, 극동극장, 초동극장, 청계극장, 계림극장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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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많이 들락거리던 재개봉관 극장, - 내가 놀러 다니던 시절엔 극장명이 아테네 극장이었는데 나중에 극동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소위 일류극장이라던 상영관들, 대한극장, 국도극장,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등은 입장료가 200원 수준이었다. 우리 집이 국도극장 골목 바로 뒤에 살던 터라 공짜표가 가끔 생겼지만, 나는 어려서 혼자서는 입장 불가였다. 재상영관 혹은 초원극장 같은 3상영관은 50원 수준이었던 것으로 어렴풋 기억된다.

그땐 고등학생 이상 입장가능한 영화들이 유독 많았었는데, 중학생이었던 나는 고교 형들이 입는 교련복을 빌려 입고 용케 안 걸리고 고등학생처럼 영화관에 스며들어갔다. 영화관 창구직원도 나를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것 같다.

그때 보던 영화중에서 아직도 강한 기억으로 남는 영화들이 있다.

① 그 유명한 배우 아랑들롱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1960, 프랑스)이다. 어린 나에게 욕망의 끝이 저렇구나 라는 것을 처절하게 보여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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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우리말로 잘 모르겠는데 그 당시에도 아마 영어 발음 그대로 “투써위드러브”(To Sir With Love, 1967, 영국)로 광고했던 것 같았다. 흑인 교사가 없던 영국 60년대, 이런게 교육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어린 나도 이 영화를 보고 눈물 흘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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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수업이 3시에 마쳤는데, 집에 오면 가방 던져놓고 영화관으로 갔다. 당시 나에겐 집 근처 공짜표가 많았다. 극장업자들이 영화 포스터를 골목마다 벽에 붙이면서 담벼락 주인집에게 영화표를 2장씩 혹은 4장씩 주었기 때문이다.

③ 고등학교 2학년 땐가 “포세이돈 어드벤쳐”(The Poseidon Adventure, 1972, 미국)라는 재난영화를 보았는데, 배우 진해크만이 목사 역할 했던 그 영화는 내 삶의 의미를 되물었다. 나는 그 물음에 직접 답하지 않았으나 간접적으로 인생에 걸쳐 답하게 되었다. 이 영화는 몇 십 년 지나서 다시 리바이벌되었는데, 새 영화는 안 봤다. 어렸을 적 품었던 그 문제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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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대학생이 되고나서 이후 영화관에 간 적이 별로 없다. 그래도 청년인 나를 감동하게 한 영화가 몇 편 더 있다. “고래사냥”(1984)이었다. 주인공 안성기보다 고래 찾으러 정처 없이 떠난 가수 김수철의 캐릭터는 내 심장을 섭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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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최근 아니 벌써 35년이나 지난 에스에프 영화 “터미네이터2”는 재미도 있지만 지구 인류세Anthropocene의 현장과 실제를 보는 것 같았다. 주연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캐릭터보다 사라코너의 역할은 더 많은 사회적 이미지를 변화시켰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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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다녀봤지만 크게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터미네이터 2편 시절까지도 한 편의 영화만 상영하는 단관극장이 주였었는데 그 이후 단관극장은 점점 줄어들고 대형 멀티플렉스로 변해갔다. 영화가 바꿨는지 내가 바꿨는지 모르지만 그 이후 크게 기억나는 영화가 없다. 내가 나이 너무 들어서 그런가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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