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뒤 살곶이 다리

이 사진은 한국서 활동하던 사진작가 Homer Williams 1968년 촬영입니다. (한양대 뒤 살곶이 다리 풍경)


을지로 4가 수도 파이프 가게를 하던 아버지, 집도 국도극장 뒤에 있었다. 나는 거기서 태어나고 대학갈 때까지 자랐다.
아버지가 천식으로 드러눕고서 우리 집 가계는 급격히 기울었다. 그후 구의동으로 이사했다. 소위 화양동 종점이라는 곳이었다. 그리고 중량천이 한강으로 이어지는 종점인 한양대 뒷편 거리에 철공장을 운영했다.

철공장을 먼저 시작하고 집을 그 근처로 옮겼다고 말해야 한다. 철공장에서는 목욕탕 용 보일러와 평철판을 눌러서 둥글게 만드는 유압프레스 사업을 했다. 아버지 대신에 내가 급조된 사장역할을 했다. 학교를 자퇴하고 공장일을 시작했다. 휴학은 뭔가를 뒤에 사려둔다는 느낌이 있어서 아예 자퇴를 해버렸다. 돌아갈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다.(1975년) 실은 그때 나는 폐결핵 진단이 나와서 쉴 필요도 있었다.


직원 두 사람과 같이 일했는데, 나는 명색이 사장이지 그들에게 일을 배워갔다. 그래도 나는 대학의 이과물을 먹어서 수학계산을 좀 하는 편이어서 당시 KS 마크에 해당하는 전기/전열/보일러 관련 제품에 부여하는 <열> 마크를 보일러 계 국내 2호로 땄다.(제1호는 당시 로켓트 보일러사였다.) 열량과 입력량과 출력량 사이의 수학적 가성비를 따지는 것이 <열> 마크를 따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나는 힘들었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육체노동이라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건축 보일러현장에서 어리고 어린 나의 존재감이 무참히 깨져 버렸기 때문이다. 일이 잘 안 풀리면 나는 공장 뒤편 둑방길을 걸었다. 둔치로 지나 살곶이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한양대 뒷 편 동네가 나온다. 뒷편으로 한양여전이 세워졌다.


이후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공장 직원분이 간이 숙소에 자다가 연탄가스로 사망했다. 우리 집은 고인의 배상을 다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팔았다. 나는 그 힘든 공장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학교를 다시 들어가려니 휴학이 아니라 자퇴를 한 상태라서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런데 당시 퇴학당한 운동권 학생을 위한 특별 복학 조치가 이뤄졌는데, 나는 그때 꼽살이로 끼여 복학했다.(1976년)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그대신 학교로 돌아와서 뭔가를 잘해봐야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전공학과인 물리학 공부 대신에 역사와 문화인류학 공부를 혼자 많이 했다. 철학 공부는 나중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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