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생물학자 프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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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유전학자로 알려진 프라이스George Price는 원래 화학을 전공하고 연구소에 근무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해밀턴의 저서를 접한 후 유전학 공부로 돌아섰다. 해밀턴이 바라 본 이타주의 해석에 대한 엄청난 충격은 프라이스로 하여금 진화론에 대하여 생애를 바칠 정도의 심각한 인생의 변모를 끌어냈다. 그는 독학으로 유전학과 진화론을 공부했는데, 그 짧은 기간 동안의 이뤄낸 그의 학문적 수준은 해밀턴 스스로 고백했듯이 핵심을 갈라놓는 혁명적 도전이었다. 그는 이타주의가 이기주의의 양상일 뿐이라는 해밀턴의 이론을 논박하는데 그의 공부를 모두 투사했다. 해밀턴과 프라이스는 공동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프라이스의 깊은 고뇌는 공동연구를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기적 유전자 프로그램의 기원을 마련한 해밀턴 역시 프라이스의 고민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해밀턴 역시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의 메타포가 사람들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이기성으로의 환원주의로 해석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그러나 해밀턴의 성격은 그 고민에 빠져들기 보다는 오해를 풀기 위한 논문을 쓰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의 선배격인 크로포트킨 Peter Kropotkin이나 르원틴이 지녔던 이타성의 호소적 해명을 잘 알고 있었다. 해밀턴은 크로포트킨이나 르원틴의 논지를 극복하고 동시에 포괄하는 이기주의 노선을 너무나 논리적으로 너무나 합당하게 펼침으로써 현대 진화론의 대장격으로 승격될 정도였다. 그런 해밀턴도 프라이스의 심각한 고뇌에 대하여는 코멘트를 가볍게 하지 않았다.

프라이스는 해밀턴의 이기주의 논증에 대하여 치밀한 반증을 구상했지만, 나중에는 그런 구상이 해밀턴의 이론과 점점 비슷해짐을 알게 되었다. 그의 고뇌는 더해갔다. 인간의 이타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녔던 프라이스는 이타주의 이론기반이 허약하다는 데에 대한 깊은 비애를 느꼈다. 인류의 역사를 극복하는 계기는 결국 이타적 행위였음을 주장하며 이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을 시도했지만 당시의 유전학 연구 열기는 그의 주장을 비웃기나 하듯 이기주의적 사유의 지평선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행동으로서 이타성을 실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도시빈민자들에게 기부했다. 이후 도시 부랑자를 도우면서 살면서 자신 역시 폐허 건물(6층짜리 건물)에 무단주거를 시작하였다. 그 건물에서도 그는 틈틈이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타성 이론에 대한 공부는 세상을 변하게 하기에는 역부족임을 느꼈다. 그는 그가 살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높은 데는 이기성의 천국이었고 낮은 데는 이타성의 지옥이었다. 그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 1975년 그의 삶은 그렇게 마감했다.
키워드: 생물학적 이타주의를 도덕적 이타주의로 바꾼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