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읽어버린 장자 |
2015년3월3일 <장자> 서평 최종덕(상지대, 철학) ● 전호근, <장자 강의, 혼돈의 시대에 장자를 읽다>, 동녘 2015년1월 (511쪽) ● 그레이엄(김경희 옮김), <장자>, 이학사 2014년12월 (771쪽) 내가 사는 원주로 들어가는 초입, 문막 부론면에는 충주에서 흘러오는 큰 남한강과 치악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섬강이 합류하는 데가 있다. 그곳에는 조선시대 세금을 걷어 물길 따라 한양으로 보냈던 흥원창 자리가 있는데, 거기서 왼 건너편에는 자연의 둔치에 오른 건너편에는 기암절벽으로, 정면으로는 여주로 흘러가는 삼각 방사형 전경을 마주하게 되는데, 4대강 개발명목으로 강을 저수지로 바꾸어 놓은 후 그 경치도 볼품없어졌다. 그래도 그 강물에는 붕어, 잉어, 납자루, 모래무지, 쏘가리, 메기와 뱀장어 등 갖은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다. 이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삼도 경계지역인데, 사람들은 강 한가운데 선을 그어놓고 강원도와 충청북도 그리고 경기도의 분별을 만들고는 다투고 시비한다. 강 한 가운데 보이지도 않는 선을 그어놓고, 쓰레기 처리문제나 둔치관리 문제로 같은 강을 두고 사람들끼리 서로 티격태격한다. 사람들이야 그렇게 다투고 있지만, 강물 속의 물고기들은 강원도나 충북에 경기도 구분 없이 그냥 자유자재로 넘나들기를 원래부터 그랬으며, 스스로 그러하고, 지네들 저절로 물속을 노닐고 있을 뿐이다. 흥원창 다녀 온 저녁 무렵, 택배로 막 도착한 두 권의 책을 받아 펼쳐보니 남한강 물고기들이 노닐던 강물의 기운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책 두 권은 요즘 막 출간된 전호근 선생의 <장자 강의>와 김경희 선생이 번역한 그레이엄의 <장자>였다. 장자 책, 이 두 권의 신간은 단순한 <장자> 번역서가 아니라 해설과 주석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여겨진다. 전호근은 이미 장자 번역의 전거로서 <역주 장자> (안병주 공역, 전4권 2002/2008)를 출간했던 전문가이며, 김경희도 로버트 앨린스의 <장자, 영혼의 변화를 위한 철학: 장자 내편 분석> (2004)을 번역했던 전공자이다. 10년 가까이 책장에 꽂혀 있었던 그들의 지난 책 2권을 이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펼쳐 보니. 이번 신간의 의미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동양학이 아닌 현대자연철학을 공부하는 서평자는 생물학에 별난 관심을 갖고 있었던 터에 장자 우화에 등장하는 가공의 동물들에 대한 목록을 만드느라 장자를 자주 펼쳐본 편이었다. 장자 책은 한번 쓰윽 흩어보고 서평을 쓸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나의 그런 전력 때문에 재빠른 서평에 도전해 보았다. 우선 장자와 관련하여 전호근과 그레이엄 그리고 김경희를 관통하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눈치 채게 되었다. 첫째 특정의 고전 문헌은 그와 다른 문파의 주변 문헌들과 연관하여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호근이 늘 강조했듯이 “<논어>만 읽어서는 <논어>가 보이지 않듯이, <장자>만 읽어서는 <장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전 508쪽) 전호근의 책에는 노자는 물론이거니와 공자와 맹자 한비자와 묵가로, 공손룡과 회남자로, 춘추전국시대에서 후한에 이르는 밀접한 사상적 고리들이 조직적으로 얽혀 있다. 김경희도 자신의 옮긴이 후기에서 <장자>라는 텍스트의 지질학적 층위는 매우 복합적이라고 했으며(김 751쪽), 원저자 그레이엄도 <장자>를 보기위하여 당대의 묵가와 유가 그리고 회남자나 양주의 철학들을 겹쳐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둘째 <장자>가 비록 도가 문헌이지만, 유가의 사상적 흐름과 연속적으로 볼 수 있는 철학적 시선을 갖추어야 한다는 공통점이다. 특히 전호근은 도가를 유가 스펙트럼에서 보기를 강조하는 유가기원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데(전 15), 그의 책에서 조선시대 박지원, 정약용, 이덕무, 조식 등에 의해 읽혀진 장자를 통하여, 나는 유가와 도가를 연속선에서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전호근의 책에서 조선의 박지원은 장자와 맹자 사이에서 다름보다는 같음을 강조한다고 했다. 이황의 <장자> 해석서인 <순언>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조선의 성현영成玄英, 임희일林希逸이나 박세당朴世堂이나 한원진韓元震등이 장자를 읽었을 때 유학의 관점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대주석가인 장태염(1869-1936)이나 곽말약(1892-1978)은 장자를 공자의 제자인 안연 계열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고 전호근을 설명한다.(전 458) 김경희가 번역한 그레이엄의 <장자>야말로 당연히 유가적 성격을 보여준다.(김 455-56; 610) 정확히 말해서 유가적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현실적이고 반신비주의적 중국전통의 흐름을 이어받고 있다. 그레이엄은 <장자>가 도가 계열의 대표적인 고전이지만, 한국인이 생각하듯 <장자>를 그렇게 신비화하여 해석하기를 거부한다. 예를 들어 사회질서는 지배자의 덕德, 즉 힘(권력)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에서 도가나 유가 모두 같다고 한다.(김 455) 이는 장자와 더불어 도가 일반을 해석하는 그레이엄의 사유기반이다. 즉 물러섬의 은둔이란 참여할 때를 기다리면서 현재의 삶을 잘 보전하는 양생법이며, 이는 도의 중요한 방법론이다.(김 460) 그래서 참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할 때를 찾지 못한 과도기적 성격으로서 은둔을 이해한다면 유가와 도가는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여겨질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권력에 휩쓸려 소집단주의의 이기심에 빠지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하고 그런 집단은 소동小同이라고 했다. 소동에는 차별이 있고 이기심이 난무하며 자기 것이 최고이며 옳은 것이라고 하여 남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다. 당장 한국의 정치상황을 보기만 해도 소동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소동이 뭐냐면, 소위 혈연-지연-학연에 메이고, 차별과 획일화를 당연시하고, 권력과 권위에 매달리고, 부정과 비리로 거칠 것이 없으며, 기만과 무임승차에도 염치 하나 없는 이기적 집단을 말한다. 대동의 핵심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대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전호근이 말하는 불상급不相及의 뜻만 한 것이 없다. 불상급은 원래 공자에서 나온 말이지만 장자 전반에도 딱 들어맞는다. 서로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뜻인데,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해주고 다양성을 넘어서 자유롭게 놓아둔다는 것이다. 전호근의 해석에 따르면, 상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상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제대로 이해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전 432) 그래서 공자와 장자를 놓고 어느 것이 더 옳다거나 좋다고 할 필요조차 없다. 그들은 불상급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생태계를 언급하면서 생태계의 니치 안에서 각각의 생명개체들이 상관적으로 공존하는 상태를 생태계 특성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각각의 생명개체들은 다른 개체를 염려하거나 고려하는 것도 아니고 배려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고 그저 각기 저절로 스스로 움직일 뿐이다. 그런 상태가 바로 장자가 그리는 이상향의 상태일 것이다. 그 과정으로 가는 길에 대동사회가 놓여 있을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니다. 소동에서 대동大同으로 바꾸는 길을 제시하는 것은 맹자나 장자나 마찬가지이지만 그 방법은 많이 다른 듯하다. 대동에서는 차이는 있지만 차별은 없다.(전 88) 그래서 김경희의 책에서나 전호근의 말대로나 양행兩行이 중요하다. 양행이란 상반되는 두 견해가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한다. 양자택일의 모순논리가 아니라 상호존재가 인정되는 상황이다.(전 126, 김133) 나는 장자에서 이 양행의 논리가 가장 맘에 들었다. 위 두 가지 공통점을 이해하면 도가의 고전을 읽는데 결정적 도움이 된다.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보통 도가 고전을 읽을 때면 신비하고, 은둔적이며, 세간을 초월하며, 정치를 멀리하고, 기성의 도덕과 관습을 거부하는 관념이 작동되며, 나아가 생태친화적으며, 결정론적 존재론과 과학인식론에 찌든 서구이성에 대비되거나, 혹은 더 자연적이면서도 역설적으로 더 인간적일 수 있는 긍정적 이미지들이 독자들을 지배한다. 도가와 유가를 이분법적으로 대비시키기를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는 일제 이후 우리에게 소개된 노자와 장자 문헌 대부분이 신비주의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유럽의 도가 연구자들은 도가의 ‘도’를 ‘야훼’로 해석하거나 아니면 산업사회의 기계문명을 치료하는 지적 처방으로 받아들인 도가 책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노장자 책이 처세술로 둔갑될 정도이니 말이다. 장자와 노자를 이렇게 신비주의로 과대포장하여 읽으면 인간학적 부작용이 늘어난다. 도가 공부 좀 했다고 해서 현실적 아픔에 눈을 감거나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하게 된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보았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처지에 대하여 장자의 ‘소요’나 노자의 ‘무위’를 들먹이며 지적 변명을 늘어놓는 것이 바로 그 부작용의 하나이다. 특히 한국사회처럼 툭하면 종북으로 몰리는 무시무시한 현실에서 장자나 노자와 같은 도가 고전은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파란 알약이 되곤 했다. 실은 장자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도 오늘의 한국 상황과 비슷했다. 그 당시에도 정치적 발언을 잘못하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사회적 발언은 몇 가지 방식으로 가능할 것이다. 곧이곧대로 말해서正言(전 8) 죽임을 당하거나 쫓겨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면 권력자에 아부하여 편승하는 권력무임승차들이 드글거린다. 발언을 하기는 하는데 시詩로 표현하거나 비유법을 과장하여 빗대어 표현하여 권력자들이 쉽게 알아먹지 못하게 하는 글쓰기도 있다. 그레이엄은 그런 비유법을 환어법mytonym이라고 했다.(김 31) 혹은 반어법을 적절히 사용하여 시니컬한 방식으로 시대상황을 표현하여 글쓰는 자신을 방외자로 인식하게끔 하는 고도의 지식인도 늘어난다. 앞의 두 유형은 유가에서 보이고, 뒤의 두 유형은 도가에서 드러난다고 보는데, 어느 유형이 더 좋고 나쁘다고 한 마디로 딱 부러지게 말하기 어렵다. 김경희가 번역한 그레이엄의 책에서는 사회에 접근한 사람들을 다음의 5 가지로 나누고 있다. (1)사회참여형 도덕주의자 (2)참여가 아니라 한발 물러나서 개인의 도덕심을 중시하는 도덕주의자 (3)권력을 잡으려는 야심찬 정치가 (4)전적으로 개인적 삶의 안락을 추구하는 사람 (5)개인 신체의 양생만을 추구하는 사람이다.(김 686) 아마 장자는 (2)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전호근은 장자를 정치적 상황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장자의 작품은 당대의 “정치적 이유”로 태어난 것이라고 소상히 설명해 주고 있다. 전호근은 말하기를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을뿐더러, 때로는 말을 바꾸기도 해야 살아남는 세상”에서 장자는 고도의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여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것이다.(전 23) 고도의 문학적 장치를 싫어한 주석가들도 많았다. 그들은 유가의 입장에서 장자를 비판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장자 비판가로서 전호근은 한유를 들었다. 한유는 장자의 이야기를 황당한 말이라고 비판한 것이 사기열전에 처음 등장했다고 전호근이 알려준다. 황당荒唐하다는 말도 긍정적으로 보면 아주 대단한 의미로 변신된다. 전호근의 해석에 의하면 장자의 황당함은 (i)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자유로움으로서 방황과 (ii)넓디넓어 그 어디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황당을 둘 다 포함한다고 한다.(전 13) 나는 도가의 유형과 유가의 유형 사이에서 우열을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는데, 어려움의 수준이 아니라 층위가 아예 다른 것이라고 전호근은 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아주 재미난 전호근의 표현이 있다. “맹자가 활동했던 곳은 천하였고, 장자가 활동했던 무대는 강호였기 때문에” 서로 비교될 일이 없다는 것이다.(전 8) 장자의 말대로 하면 같은 시공간이더라도 방내方內의 세계와 방외方外의 세계로 나눠지므로 그 둘을 억지로 하나의 평가기준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장자는 논어를 정독한 것이 틀림없다고까지 전호근은 강하게 말한다.(전 455) 그렇다하더라도 장자를 유가유래설儒家由來說로 간단히 분류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도가 일반에서는 참여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은 역사적 사실이며, 그 중에서도 그레이엄이 말한 권력지향적 부류들이 판을 치고 있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보듬어 들어야 할 일이다. 유가의 덕행과 참여가 반드시 도덕적 동기가 아닐 수 있다는 점과 도가의 무위와 소요가 반드시 무조건 무위라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도가와 유가를 나누는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이다. 권력지향의 목표가 강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오히려 그런 사람이 백성을 쥐 잡듯 하거나 전쟁을 일으켜 더 많은 피해를 준다는 현실을 장자는 여실히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전호근도 그런 현실을 보았다. 거기서 장자와 같은 글쓰기가 나올 수 있다고 본다.(전 33) 그래서 장자는 무위조차도 생각하지 않는 철저한 무위를 원했다. 그런 장자의 무위는 소요라고 말해진다. 목표를 갖고 하는 일 자체가 사람들을 더 고통과 곤혹에 빠뜨리기 때문에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 못하다는 것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개선하고 교정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장자는 본 것이다. 그럴 바에야 아예 그들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化)는 기성의 그들의 마음과 행동 그리고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들 자체를 소멸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전호근은 말한다.(전 39) 나는 이 점이 맘에 들었다. 우리 한국사회가 장자를 잘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독재화되고 독재권력은 종교화된 것이 바로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부정과 비리의 기만을 유지하기 위하여 사실을 위장하는 믿음의 사회적 장치가 바로 사회적 신비화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한국에서 출간된 노자와 장자 그리고 불교에 대한 일부의 신비적 해석은 그런 사회적 장치에 기여를 했다. 이런 점에서 그레이엄이나 전호근의 장자 해석은 현실 역사에서도 중요하다. 실은 전호근도 책을 읽으려면 잘 읽어야 한다고 은근 한 마디 경고했다. 엉터리 글을 읽는 것에 조심해야 하는데, 물론 아주 안 읽는 것보다는 낫다고 전호근은 말한다.(전 502) 우리가 아는 <장자> 내편 외에 외편과 잡편도 있다. 김경희가 번역한 그레이엄의 책은 외편과 잡편의 많은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외/잡편은 내편과 달리 장자의 글이 아니라고 알려졌는데, 최소 그 형식과 말하려는 메시지에서 내편과 많은 차이가 난다. 외/잡편은 <장자>를 신비화시켜 읽기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한편 <장자>의 본연인 내편에서는 유가를 무조건 거부하기보다는 절충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장자는 인간세상보다는 하늘세상을 쳐다보고 있다. 하늘과 인간을 굳이 구분하다면 말이다. 하늘과 인간의 대비를 확장하면 아래와 같아질 수 있다고 본다. 도가의 이미지 : 하늘 - 자연 - 선천 - 무위 - 소요 - 본성 - 낳음 유가의 이미지 : 인간 - 문화 - 후천 - 유위 - 지향 - 양육 - 기름 그러나 도가의 이미지와 유가의 이미지가 이분법적으로 구획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늘의 이미지와 인간의 이미지는 공존하고 공생하며, 외편에서는 자연과 문화가 공진화하듯이 인간의 것과 하늘의 것이 공진화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고 한다.(김 447) 하늘이라고 해서 신비화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만의 이익을 취하는 욕심의 성정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뜻에서 하늘의 의미가 강조된다. 성인은 오히려 자연과 문화의 합일과 일체를 아는 자이다. 이 점은 장자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레이엄의 분석에 따르면 장자의 시대는 갑작스런 철기문화가 물밀 듯 들어온 때였다. 그래서 그레이엄은 <장자>를 새로운 기술문명에 사람의 본성이 파괴되는 것을 경고하는 당대의 글쓰기로 간주했다.(김 493) 한편 <장자>는 급진적 사회변화의 부정적 요소를 경고한 것이지 과거의 전통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편과 잡편은 전적으로 기성의 관습과 도덕 전체를 부정하는 투로 전개되지만,(김 517) 장자 본연의 글인 내편은 하늘과 인간의 연속성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호근의 이번 책, <장자 강의>는 10여 년 간 시민강좌의 결과물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학문적 수준은 관련 국제학계 관점에서 볼 때에도 최고 수준으로 여겨진다.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하는 것 자체를 저자 전호근은 싫어할 게 뻔하지만 말이다. 문장도 대화체로 높임말을 사용했지만, 그 주석과 해석의 너비와 깊이는 그 어느 책에 비교될 바가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내용만이 아니라 그의 문장력은 뛰어나다. 책 곳곳에서 저자의 예민한 문장감각이 드러나고 있다. 그의 광범위하고 뛰어난 문헌 독해력, 선진유가시대와 조선시대를 넘나드는 시대적 관통력, 고전과 현실을 이어가는 현실파악력과 더불어 대조와 비유법을 통한 탁월한 문장력이 이 책을 빛나게 한다. 김경희 번역의 그레이엄 책은 워낙 명저로 알려진 책이라서 굳이 따로 소개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전문가들에게만 그렇지, 영어로 된 원서를 일반인이 접하는 것은 요원했다. 이 책은 영어 실력만으로 번역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장자를 어설프게 아는 사람도 번역하기 어렵다. 김경희는 장자 읽기의 폭을 우리말까지로 넓혀준 학자이다. 어떤 동양고전은 영어로 된 것을 읽을 때 더 쉽게 이해되는 경우가 있다. 왜냐면 고대 한문의 다의적인 내용을 일의적인 현대 영어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한문보다 서양언어에 좀 더 익숙한 서평자도 동양고전 문구에서 헤매고 있을 때 영어 책을 보면 쉽게 이해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했었다. 그런데 그레이엄의 영어 책은 단순한 일의적 번역이 아니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관점과 혜안으로 한문 고전의 다층적 의미를 살렸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평가된다. 그런 그레이엄 번역의 의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 김경희의 번역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서평이니만큼 사소하나마 약간의 오점을 지적하고 이 서평을 마치려 한다. 인간세 편에서 좌치坐馳라는 표현이 나온다. 가만히 앉아 있지만 마음이 뒤숭숭하다 못해 성난 말새끼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뛴다는 뜻일 지언데, 김경희는 좌치를 잘 뛰는 경주마처럼 “전속력으로 내달리기”로 표현했다.(김 182) 그것이 오역이라고 한 이유는 내가 한문을 잘해서가 아니라 전호근의 해석을 참조했기 때문이다. 외부의 물욕에 쫒아 가거나 분별의 집착에 빠져서 겉으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욕심이 이리저리 치닫는 좌치의 상태”에 놓여있다는 전호근의 해석에 (전 262) 나도 한 마디 거들었을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는 김경희의 오역이 아니라 그레이엄의 오역이다. 나는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김경희의 책이 좋다. 그레이엄의 번역과 해석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경희의 사소한 번역 실수도 보인다. 그저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다. 장자 외편 19편 <본성에 통달하기>에서 뭐 하나 작은 일이라도 그 일을 자기 것으로 한다면 천하의 명성도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내용인데, 김경희는 아래처럼 번역했다. “의지를 분산시키지 않으면, 신들린 상태에 가까워질 것이다”. 이는 그레이엄의 문장 “Intent sustained undivided, Will verge on the daemonic" 의 번역이다. 이는 “의지를 흩어지지 않게 하면”으로 번역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거의 교정 수준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김경희의 번역은 완전에 가까웠다. 그레이엄의 뜻을 거의 그대로 전달했다는 뜻이다. 나에게 고전 읽기는 오히려 새로운 생각의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일과 같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고전은 모두 오래된 과거 문헌이지만 그 작품들은 과거로만 머물지 않고 미래를 상상하는 생각의 창고가 된다. 고전작품을 읽을 때 나는 그 작품이 태어난 역사적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작품만이 아니라 그 작품이 나온 사상적 배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장자를 읽는다면 장자가 나오게 된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적 지평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에 낫다. 장자를 읽으면 같은 사상적 계열의 노자를 떠올리면 좋고, 계열이 좀 다르다고 말하는 공자와 맹자를 언급하면 더 좋은 듯하다. 사상적 배경을 볼라치면 당연히 역사와 지정학의 시대적 배경까지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실은 고전작품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렇게 갖춰서 읽기는 쉽지 않다. 단지 그런 설명을 덧붙여주는 좋은 주석서를 대하면 신나게 읽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두 권의 신간, 전호근의 <장자 강의>와 김경희 번역의 <장자>를 읽게 된 것은 정말 뜻깊은 기회였다. 욕망과 기만, 권력과 권위가 가득한 오늘의 한국사회에 거울의 구실로 칠만한 이 두 권의 책, 전호근과 김경희의 신간이 널리 읽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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