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

최종덕(녹색사회연구소장)http://eyeofphilosophy.net

산과 숲을 그렇게 지키려 했건만 리조트와 올림픽에 밀려 아름드리 나무들이 무참히 베어지던 날, 눈시울 적시던 사람이 있었다. 흘러가는 물을 계속 흐르도록 노력했지만 콘크리트 저수지로 변한 강물을 보고 가슴 찢어지게 아파하는 사람이 있었다. 습지갈대 보전을 위해 일하는 도중인데도 하루 밤사이에 누구에 의해선가 의도적으로 갈대숲이 불태워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배가 나에게 전화한 날, 그날 저녁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이 술만 잔뜩 퍼먹는 일뿐이었다. 지역 환경사안을 같이 풀기 위해 갔지만 오히려 지역주민들에 의해 배척되는 일에 난감해 하던 사람들, 한 둘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갈등을 풀어내고 위기를 헤쳐간다. 그런 자부심이 어디서 나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자부심을 만드는 여러 가지 배후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인정욕구>가 제일 크다. 간단히 말해서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물질적 보상을 포기한 적은 이미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정신적 인정을 받고 싶다는 뜻이다. 나도 뭔가 근사한 일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라도 하면, 일 그 자체보다 누가 나의 공로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먼저 들 때가 많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큰 외로움을 느낀다. 인정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할 때 외로움은 나를 지독하게 엄습한다.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인정받고 싶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는 정말 냉정한 이유가 있다. 내가 이뤄낸 일이 가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한 일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말은 당연하지만, 나의 보수적인 뇌가 이런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다. 그래서 외로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변론가들이 말하기를, 그런 외로움을 극복해야 성공적인 인생을 누릴 것이라고 대중들을 억지로 가르치려 든다. 플라톤의 말을 슬쩍 인용하면서, 겨우 인간 주제에 네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덕담을 하기도 한다. 불교의 비유를 슬쩍 들면서, 남에게 인정받기를 포기하면 외로움도 사라질 것이라고 훈계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은 말 그대로 덕담이고 훈계일 뿐이다. 나의 실존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그냥 외로운 존재일 뿐이다. 그냥 외로움을 간직하시라.

나에게 엄습한 외로움을 이기려거나 억지로 없애려는 헛수고를 하지 않으면 된다. 죽을 때까지 나의 외로움을 같이 안고 갈 준비가 되었다면 행복기초지수는 이뤄진 셈이니까 말이다. 그러면 성과를 올리려는 허세로 가득찬 평창올림픽 권력자들에게 밀리지 않고 당당해진다. ‘사람 사는 게 중요하지 그깟 산양 보호가 대세냐’라는 비아냥에도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지역에서 급조된 가짜 환경단체의 이간질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좀 거창한 말이지만, 지구 온난화가 인간이 사용한 화석연료와 무관하다는 가짜 과학자의 기만에 흔들리지 않는다. 채식이 오히려 더 해롭다고 하여, 반란이라는 이름의 그럴듯한 의견에 대해서도 가벼운 미소만 던질 수 있다. 좀 사적인 말로 하자면 사랑은 고독과 다름이 아니다. 외로움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애인과 헤어지거나 친구와 싸우더라도, 지네들 자랑질하기 바쁜 동창회 모임에 가지 않거나 교회가서 외로움을 마취시키지 않더라도 정말 신나는 놀거리도 많고 할 만한 일거리도 많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와 더불어 곧 엄습할 외로움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함께 한다면, 이제 남으로부터 얻어진 자부심에 대해 안달하지 않을 것이며, 나로부터 온 자부심이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외로움을 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서 생태적 공동체가 가능해진다. 왜냐고? 첫째 외로움을 함께 하는 사람들만이 남들에게 진심으로 귀기울기 때문이다. 둘째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녹색희망

되돌아가기

전체목록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