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삶, 외로움 |
부산의대 의예과 특강 2015년10월16일 공부, 삶, 외로움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 1. 삶과 공부의 상보성 우리들의 공부는 다양한 통로로 실현된다. 책읽고 책쓰기도 한다. 교실에서 TED에서 강의듣고 그룹세미나에서 발표하거나 토론하기도 한다. 과제나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런 행위는 주로 지식행위에 속한다. 삶을 꾸려가는 삶의 행위도 공부에 속한다. 삶의 행위에는 크게 2가지가 보인다. 하나는 먹고사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집안 내부의 가족관계의 문제이다. 여기 계신 분은 앞으로 우울증을 치료할 입장에 있을 수 있지만 치료하면서 당하고 있는 삶의 이중성이 우리를 지배한다는 점이다. 내가 정말 공부가 좋아서 공부를 하는 것인지, 미래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공부하는 것인지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그 사이에 단호한 경계선은 없기 때문이다. 공부는 다층적이다. 삶에 대한 공부와 지식에 대한 공부 등에 대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2. 공부의 다층성 2.1 남의 공부를 경청하고 남의 삶을 배려하는 공부 오래전 내가 살림하면서 조카와 같이 살던 적이 있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데 양파가 필요했다. 옛날 동네였는데 구멍가게들이 꽤나 있었다. 5살 먹은 조카아이더러 바로 옆집 가게 가서 양파 하나 사오라고 돈을 줘 보냈다. 5분 후에 왔다. 양파 대신 양파깡을 들고 의기양양하게 나에게 양파깡을 주면서 잘 나눠먹자고 그러더라. 아이는 그 아이 바로 그 수준에서 아이가 이해한 그대로 심부름을 한 것이다. 조카아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이가 자기 생각한 것만 믿는 경향이 강하다. 공부는 자기 생각만 아니고 다른 사람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알려줘야 한다. 2.2 자기 현실을 직시하는 구체적인 공부 또 다른 조카는 초등학교 이학년이 되었어도 셈을 잘 못했다. 내가 보기에는 정상인데 학교에서는 공부 못한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내가 셈을 가르쳐 보았다. 얘는 구체적인 사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200+300에 대한 셈을 하지 못했던 그 아이에게 내 주머니에 있는 100원짜리 동전 2개를 주고 다른 동전 3개를 더 준다면 모두 얼마냐고 물으니 총알같이 500원이라고 답했다. 200+300이라는 질문 대신에 200원과 300원을 합하면 얼마냐고 묻는 질문이 필요하다. 공부도 마찬가지다. 공부는 개체의 특수성을 기반으로 전체의 보편성을 찾아가는 삶의 길이다. 여기서 특수성은 구체적이고 보편성은 추상적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추상화하는 능력은 아마도 인류가 획득한 최대의 수혜이며 업보일 것이다. 그런 공부를 혼자만 하면 아무 쓸모없고, 공부를 남들과 공유하는 것이 좋다. 우선 가족들과 함께. 공부는 돌돌 말려진 그런 추상성을 다시 풀어서 구체적인 개체에 맞추어 투사할 때 가능해진다. 플라톤이든 헤겔이든 양명학이든 주자학이든 혹 나처럼 골치아픈 과학철학이건 간에 관계없이 특수에서 보편을 들이쉬는 공부에서 다시 보편에서 특수를 내쉬는 공부로 이어가야 한다. 사춘기 학생이건 철학박사이건, 촌노이건 블로거이건, 공부가 그런 문제를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공부는 오래가지 못한다. 2.3 공감하는 공부 고무지우개로 장난감 조각을 만들기 시작한 철수도 나름대로 남모르는 절실함이 있었다. 철수의 절실함은 철수의 물질-심리적 상황이 (어느 어느 상황) 언더under에 스탠드stand되어 있는가를 공감해야만 비로소 철수의 공부아닌 공부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철수의 절실함은 우선 피동적인 상황에서 유래한다. 영어 선생이 이유없이 (선생님은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모욕적 발언을 하거나 수학선생님이 이상하게 강압적이라든가 하는 사소한 이유로 보이는 상황들이 철수에게는 거부감의 전환을 만든다. 선생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는 일이 중요하다. 공부는 삶에 천착되어야 한다. 삶에 뿌리없는 지식은 theoria테오리아(멀리서 보는 행위, 관망)는 되지만 삶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멀리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기보다는 나 자신이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을 설명하는 공부법의 수식어가 바로 테오리아이다. 요즘 말로해서 객관적이 되려면 내가 대상에 개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상과 주관이 분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시어터(극장)의 어원과 같다. 극장 무대는 관객석과 분리되어 있다. 극장에서는 무대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에 관객이 흥분하여 관객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일체 금지한다. 테오리아의 공부법은 지나온 이천년 인류의 지식체계에 혁명을 가져왔다. 근대과학의 탄생은 바로 테오리아 공부법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극장 이야기 나온 김에 마당놀이를 꺼내 비교해보자. 민중들이 놀던 시장판의 놀이판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없다. 우리네 놀이인 마당극이 그 대표적인 무경계의 놀이판이다. 테오리아의 극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이를 공감의 놀이라고 표현한다. 테오리아의 극장에서는 배우로부터 관찰적 감동을 받을 수 있지만은 내가 참여할 수 있는 섭동적 감동이 결핍되어 있다. 관찰적 감동은 지식을 더해줄 수 있지만 삶의 실천을 변화시키기에는 부족하다. 그런 감동으로 과학이 잉태했다. 그래서 그런 감동도 중요하다. 과학이 중요하듯이 인문학과 예술이 중요하다는 뜻을 뭇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과학에서 테오리아가 중요하듯이 공부는 공감sympathy이 중요하다. 테오리아와 공감이 어느 것이 더 좋으냐는 그런 원색적인 질문은 그만하자. 그 대신에 사라져가는 공감능력을 어떻게 회복하느냐에 대한 질문과 반성을 하면 좋다. 2.4. 실천하는 공부: 규범적 실천과 공감적 실천 삶의 공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규범적 공부법이다. 삶의 양식, 행동유형, 사회체계 나아가 역사현실을 개선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체계 혹은 이데올로기를 학습하는 것을 규범적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런 규범적 실천이 아니라 공감적 공부법이다. 지시형 가르침(기존 관행적 교육)은 공부를 재생할 수 없다. 그 대신 거울형 가르침이 공부를 재생산한다. 거울형 가르침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너 내 말 안들려!, 밤나 또 그 짓이야!, 옆집 순엉이 공부하는거 반만이라도 �i아가봐라” 아내에게 자식에게 함부로 대하고 지맘대로 대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공부하라, 말잘들어라’ 백날 훈계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쯤이야 다 알 것이다. 아버지의 행동이 바뀌지 않고 아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나쁜 남자들이 하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지식인이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려만 들면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가 동원된다고 해도 끝내는 오히려 대중과 멀어진다. 아버지 어머니의 구실을 학습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를 모방하는 것이지 부모의 훈계와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지식인은 그 스스로 행동과 실천으로 보여줌으로써 타인이 지식과 삶을 배우게 된다. 공부의 재생산은 나의 지식이 아니라 나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실천적 공부법이라고 부른다. 3. 공부, 외로움 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갈등을 풀어내고 위기를 헤쳐간다. 그런 자부심이 어디서 나오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자부심을 만드는 여러 가지 배후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인정욕구>가 제일 크다. 간단히 말해서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물질적 보상이 아니더라도 정신적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뭔가 근사한 일을 성공적으로 치러내기라도 하면, 일 그 자체보다 누가 나의 공로를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큰 외로움을 느낀다. 인정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할 때 외로움은 나를 지독하게 엄습한다.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인정받고 싶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는 정말 냉정한 이유가 있다. 내가 이뤄낸 일이 가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단지 내가 한 일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말은 당연하지만, 나의 보수적인 뇌가 이런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질 못하고 있다. 그래서 외로움은 더욱 커질 뿐이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변론가들이 말하기를, 그런 외로움을 극복해야 성공적인 인생을 누릴 것이라고 대중들을 억지로 가르치려 든다. 플라톤의 말을 슬쩍 인용하면서, 겨우 인간 주제에 네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기를 일찌감치 포기하라는 덕담을 하기도 한다. 불교의 비유를 슬쩍 들면서, 남에게 인정받기를 포기하면 외로움도 사라질 것이라고 훈계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은 말 그대로 덕담이고 훈계일 뿐이다. 나의 실존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그냥 외로운 존재일 뿐이다. 그냥 외로움을 간직하시라. 나에게 엄습한 외로움을 이기려거나 억지로 없애려는 헛수고를 하지 않으면 된다. 죽을 때까지 나의 외로움을 같이 안고 갈 준비가 되었다면 행복기초지수는 이뤄진 셈이니까 말이다. 사랑은 고독과 다름이 아니다. 외로움을 피하려 하지 않는다면 애인과 헤어지거나 친구와 싸우더라도, 지네들 자랑질하기 바쁜 동창회 모임에 가지 않거나 교회가서 외로움을 마취시키지 않더라도 정말 신나는 놀거리도 많고 할 만한 일거리도 많다. 그러면 공부도 할만하다. 억지로 하는 공부 말고 말이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와 더불어 곧 엄습할 외로움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함께 한다면, 이제 남으로부터 얻어진 자부심에 대해 안달하지 않을 것이며, 나로부터 온 자부심이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첫째 외로움을 함께 하는 사람들만이 남들에게 진심으로 귀기울기 때문이다. 둘째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나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착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나 혼자 기꺼이 외로울 수 있어야 공동의 협동성이 가능하며, 외로운 나의 공부가 비로소 우리 그룹의 조별 스터디를 성공시킨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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