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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평 : 엥겔스 자연변증법에 대한 생태적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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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와 철학연구회 2025 봄 학회

__한국사회와 신유물론__



엥겔스의 연착륙을 위하여
-김현 선생님 논문에 대한 논평-


논평자 : 최종덕(philonatu.com)


이 논문의 완성도가 아주 높아서, 논평자가 논증의 시비를 걸 데가 별로 없다. 시비를 걸기는커녕 논평자 역시 엥겔스의 귀환을 맞이하는 필자 글쓰기에 열열이 박수친다.

엥겔스는 리비히의 물질대사 개념을 비유하여 ‘인간과 자연의 지속적 물질대사’(the consistent material metabolism between humans and nature)를 통하여 인간이 자연과 다른 차별적 존재이기는 하지만 자연과 소통하면서도 물질적 존재자들의 일탈을 제어할 수 있다고 필자는 설명한다.

필자가 적어낸 문장을 그대로 따오면 이렇다. “물질 운동을 층화된 관점으로 이해하는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자연변증법󰡕에서 ‘인간’은 그 자체 물질적 존재자이지만, 여타의 물질적 존재자와 차별화된 특성을 갖는 것으로 규정되며, 자연 세계에 자리하기에 자연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면서도, 이 물질적 존재자들이 일군 사회‧역사적 층위를 분석하기 위한 별도의 접근을 요구하게 된다.”

인간은 차별화된 이성을 한껏 활용하고 노동을 세계에 실현함으로서 사회와 역사 그리고 지구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한다. 한편의 인간이 대행자본과 착취를 통해서 사회와 역사 그리고 지구를 엉망으로 망쳐놓았다. 이제 이를 회복시키고 재생시키고 개선하려는 주체도 우리 인간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렇게 인간이 책임지고 다시 나설 수밖에 없는데, 이를 보증하는 문서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 있다고 토로한다.

이런 관점에서 1990년대 들어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신유물론의 비인간주의 담론만으로는 망가진 사회-역사-지구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결해나가기 어려울 것으로 진단한다. 신유물론 철학에서는 해결의 주체인 인간이 빠져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유물론이 아닌 엥겔스의 유물론이 다시 귀환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논지이다.

그런 논지를 위하여 필자는 신유물론으로서 제인 베넷의 생기론적 존재론과 캐런 바라드의 행위실재론을 적절하면서도 상세히 서술한다. 베넷의 신유물론과 바라드의 신유물론은 서로 다르듯이 신유물론 스타일의 연구자들마다 서로 달라서 신유물론을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그래도 대체로 공통적인 성질이 있다면, (i)물질의 능동성, (ii)탈이원론, (iii)비인간 행위성, (iv)관계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신유물론 담론에서 필자는 인간 없는 행위주체와 그 안의 존재론적 비근대성을 비판하면서 신유물론자들의 실천적 공허함을 결정적으로 문제 삼았다. 그래서 엥겔스의 실천적 물질론이 다시 귀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필자의 논지다.

논평자는 이런 논증생산을 위한 필자의 틀-안-논리를 인정하고 동의한다. 이에 더 나아가 논증 안에 주름 잡혀 보이지 않는 틀-밖-논리가 필자 논증에 추가하여 생성되기를 희망한다.

예를 들어보자. 1980-90년대 독일 녹색당은 자기 내부에서 근본파fundis와 현실파realo의 상호논박을 심하게 치렀다.

근본파는 심층생태론의 유형으로 생태공동체주의를 강조했다. 인간중심에서 생명중심으로 옮겨가고 내재적 미시정치를 추구하여 문명전환과 같은 철학적 존재운동을 내세웠다. 한편 현실파는 사회생태론의 유형으로 적녹연정을 통한 실천적 환경정의를 강조했다. 지구와 현실정치에 손괴를 끼친 인간이 이제 거꾸로 책임지고 실천적으로 회복해야 하는 사회적 실천운동에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녹색당의 근본파와 현실파의 문제는 하나의 사례로 든 것이지만, 거시적으로는 철학과 정치과학 사이의 오래 묵은 지식 트러블에 속하며 미시적으로는 논평자 자신 안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묵혀진 이론과 실천 사이의 내면적 이중성에 속하기도 하다.

필자가 비판하는 객체지향 신유물론과 필자에 의해 재소환된 인간지향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사이의 관계도 그와 비슷하다.

신유물론에 대한 이해를 잠시 조명하자. 신유물론의 탄생, 특히 라투르와 해러위이 그리고 바라드와 스탕게르에서부터 토마스 네일과 티모시 모턴에 이르는 신유물론 스타일의 출생은 담론과 행동, 지식과 윤리, 이론과 수행(실천)의 얽힘과 연결에서 비롯했다.

마찬가지로 근본파 상징과 현실파 상징은 서로에게 배중율적 모순관계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얽혀서 상보적이고 보완적이며 공생적이라는 것이 논평자 입장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유물론을 비판하는 필자의 엥겔스 유물론 귀환의 논증을 전개하는 필자의 틀-안-논리는 그 자체로 문제없다. 단지 좀 더 보태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근본파 상징과 현실파 상징 사이가 모순관계나 이분법적 관계가 아니라 상보관계라는 틀-밖-논리이다.

오늘 전체주제에 따라 신유물론 논의는 다른 발표자 세션에서 충분할 것이기 때문에 논평자는 신유물론 이야기를 따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신유물론과 엥겔스 변증법적 자연은 비인간주의라는 담론 말고 다른 성격들 즉 관계성, 물질의 능동성, 발생적 연결성 측면에서 거의 동일 지평에 놓여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엥겔스 변증법에서 말하는 인간중심주의도 정확히 말하면 침탈과 파괴를 일삼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자기중심주의에 대한 전투적 대척점이다. 신유물론에서 말하는 비인간주의 역시 그 근본에는 우월적 주체로 과몰입된 자기중심주의를 붕괴하려는 대척점이다.

필자는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신유물론자 브라이도티의 말을 인용한다. ‘정치적 행위성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더 비판적이어야 하며, 그것의 주된 목표는 반드시 대항 주체성의 생산’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브라이도티는 여기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항적인 주체성의 생산성을 역설했다.

신유물론이라는 말을 처음 조각한 브라이도티에서 주체성은 가타리의 주체성을 이은 개념으로서, 주체성subjectivity은 주체subject와 구분하여 근대인에 의해 이미 주어지고 만들어진 독립-실체형의 주체가 아니라 생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창의적으로 생성되는 관계적 객체에 해당한다. 관계적 객체가 행동 실천에서 주체적일 수 있지만, 그런 주체성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성을 탈출하여 벗어나 있다.

자기중심주의에 대척하는 공동의 지평이라는 점에서 신유물론의 생태주의 철학과 엥겔스 변증법의 유물론적 정치사회학은 거리낌 없이 만날 수 있다. 다름을 서로에게 번역하고 같음을 회절시킨다면 둘 사이의 조우와 화해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논평자는 강하게 추측한다.
<끝>

** 시간여유 있으며 닐즈 보어 비판의 슈뢰딩거 논점을 추가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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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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