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투르의 경험 개념 |
라투르의 “경험”이란? (라투르의 존재양식을 중심으로) 정리 : 최종덕(독립학자, philonatu.com) 라투르의 존재양식을 그의 고유한 “경험” 개념으로 다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괄호 안 숫자는 한글판 쪽수 표기이며, 숫자 앞 * 기호는 영어판 쪽 수 표기이다.) 1. 근대 경험론empiricism에서 라투르의 경험으로 경험은 경험의 실로 드러난다. 라투르가 말하려는 "경험"은 기존 경험론 철학자들이 말하는 경험과 다르지만 불행히도 라투르 자신의 대안적 경험을 처음부터 말끔히 정식화하기에alternative formulation 쉽지 않을 것으로 실토한다.(*11) 근대 경험론에서는 사실facts만이 경험의 대상이었으나 라투르에서는 가치values도 경험의 대상이 된다. '사실이 경험의 대상'이라는 것은 계량화 가능한 사실(1차 자연)만을 정량화함으로써 실증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근대인의 주장이다.(*8) 근대 경험주의자들은 일차 성질과 이차 성질을 이분화하여 경험의 관계들을 제거하고 오로지 실증주의에서 말하는 소위 “감각데이터”만을 남겨 놓았다. 감각데이터에서 경험을 회복하려면 그 감각데이터에 관계를 (전치사의 도움을 받아) 다시 부착시켜야만 한다. 관계가 회복된 경험을 두 번째 경험주의second empiricism라고 라투르는 표현한다.(267) 경험은 존재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타자로서의 존재의 굴절표상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267-8) 라투르의 두 번째 경험주의는 윌리엄 제임스의 “근본 경험주의” radical empiricism에서 따온 것인데, 근본 경험주의는 경험의 실가닥을 따라가서(놓치지 않고) 내재된 공백과 작은 초월을 통해서 경험의 방향과 궤적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 방향과 궤적이 바로 존재자의 “의미”이다. 의미는 행위과정이며 그 경로는 굴곡지며 좁으며 높은 곳으로 방향 지워있다.(351) 2.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라투르의 경험 논리적 인과, 존재론적 필연성, 연장-사유의 이분법으로 만들어진 물질로 된 세계는 경험과 대조된다.(178) 특히 주객체 연장-실체의 이분화는 공통경험에도 반한다.(181) 재생산 양식이 지시양식 안으로 가둬진 융합은 경험과 반대되는 세계로 제한된다.(190) 다시 말해서 더블클릭이란 획일적인 기준으로 경험 자체를 표현할 수 없다. 라투르 표현대로 경험은 쉽볼렛(“쉽볼렛”이라는 말을 발음하게 하여 그 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타 민족을 분리하는 관습)같은 절대적이지만 기획된 그런 비적정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경험은 형식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3. 연결망의 경험 연결망은 경험적 조사로서만 발견된다.(*31) 즉 연결망은 불연속적 이질적 요소들의 결합을 통한 연속성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인데, 그런 통과를 파악하는 능력이 경험이다.(*33) 연결망의 경험은 존재양식의 교차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존재양식의 교차, 예를 들어 재생산 존재양식과 더블클릭 존재양식의 교차에 대한 [재생산⦁더블클릭] 경험과 재생산 양식과 픽션 양식의 교차인 [재생산⦁픽션] 양식에 대한 경험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XX) 이분화 인식론과 경험의 인식은 전혀 다르다.(4장) 예를 들어 관념화시킨 물질 개념은 재생산REP 양식이 지시REF 양식 안으로 묶여졌기 때문에 생긴 혼동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런 혼동의 물질관에서 벗어나 재생산양식을 따라가면서 물질을 보는 것이 경험의 실이다. 4. 생존을 향한 절실한 탈관념화 과정으로서 경험 형이상학적 존재는 실체에 의존하지만 경험은 생존subsistence에 의존한다.(244) 경험이란 생존에 필요한 작은 초월성의 실the threads of the mini-transcendences을 찾는 과정이다.(*175) 경험은 그만큼 현실에 절실한 작은 초월의 경험이다. 경험이란 표상이 아니다. 불행히도 유클리드 기학학을 숭상하는 근대인은 표상을 경험으로 오해한다. 그리고 실험실에서 하는 행위를 경험이라고 오해한다. 그런 오해로부터 나온 것이 근대인의 기학학적 공간이다. 그들의 경험은 기학학적 공간을 찾는 일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라투르에서 경험이란 그런 기하학적 공간이 아니라 “살아갈 공간” living space을 찾으려는 절실한 탈관념화de-idealize이다. (*106) 5. 상식으로서 경험 경험이 형식화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경험을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225) 경험을 주관적인 것으로 폄훼시키지 말고 제도화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라투르의 생각이다. 여기서 제도화란 이성의 도구로 제작하는 또 하나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 내재한 상식과 상식 세계의 결합을 이해하는 공유 폭을 넓혀야 한다는 뜻이다. 물질적 경험계에 대한 과학탐구는 매우 많이 이뤄졌지만, 역설적이게도 상식세계common-sense world의 경험계에 대한 이해는 너무 초라하다고 라투르는 고백하지만(183),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 지식보다 우선이라는 라투르의 해명은 이 책 전체에 관통하는 기초로 여겨진다. 우리는 물질화된 자연을 넘어선 자연의 공백hiatus을 경험할 수 있으며, 문법화된 언어를 넘어선 언어의 공백을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고대 조상으로부터 받아왔다.(601) 그런 능력이 바로 상식으로서 경험이다. 그 한 사례로서 기성 종교는 물질과 규칙에 사로 잡혀 있다면 우리의 경험을 담아낼 수 없다고 라투르는 말한다.(441) 이런 점에서 라투르는 형식 종교 대신에 돌봄과 구원이라는 사랑의 경험을 권유한다. 6. 탈연동으로서 경험 라투르는 조직화나 탈연동shift out; dépassement des dichotomies 개념으로 경험을 해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피엘과 폴이 정해진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만나기로 역속을 했다면 그 약속을 이행하기 위하여 혹은 이해하면서 다른 시간, 다른 장소 다른 행위들이 전부 재조정되어야 한다. 그런 재조정은 억지가 아니더라도 폴과 피엘의 대본은 다른 대본과 구획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어서 고립된 대본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고립된 대본이 없다는 의미는 탈연동의 가장 중요한 사례이다. 분화된dichotomies 대본이 없다는 것은 독립된 사건은 없으며 분리된 사물도 없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건이 조직되면서 다른 수많은 연결망 속의 사태들이 탈조직되거나 재조직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의 조직화는 다른 것의 탈조직화나 재조직화를 수반한다. 그리고 이런 연결 상황을 경험이라고 말한다.(*393) 7. 전체가 아닌 부분을 직관하는 경험 근대인의 심리학이 만든 자아는 고립된 무인도와 같다. 그런 근대인의 자아가 말하는 경험이란 오로지 외부 감각자료에 한정된다. 이런 근대적 시각의 오류를 벗어나는 길은 우리의 경험을 회복하는 길이다. 근대인이 생각하는 전체집단이란 초월화된 사회(전체) 관념의 소산물이며 근대인이 생각하는 개인이란 고립된 주체 혹은 개인화된 자아individual 관념의 소산물이다. 이런 관념들은 모두 우리 경험에 어긋난다.(583, 599) 근대인은 전체가 부분들의 총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가 부분보다 항상 우월하고 크다는 결론을 미리 확정지웠지만 실제로는 한 개인이라는 부분이 전체에 휘말리지 않고 전체보다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경험을 하고 있다.(607) 8. 준주체와 준객체로서 경험 주체는 그(해당) 주체 상황에 연결된 다양하고 수많은 객체들 즉 준객체들의 집합이다. 거꾸로 말해서 객체는 그 (해당) 객체 상태에 연결된 수많은 주체들 즉 준주체들의 집합이다. 준객체들과 분리된 주체에 대한 경험은 불가능하며 준주체들과 고립된 객체의 경험은 불가능하다. 우주에 대한 경험을 강조하지만 실제로 우주에 대한 경험이란 우주를 경험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을 파악하는 생득적(선천적이지만 형이상학적이거나 선험적이라는 뜻이 아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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