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투르의 존재양식 7장 해제와 주석


(한글판) 브뤼노 라투르 2023, 『존재양식의 탐구, 근대인의 인류학』 (황장진 번역) 사월의책. 742pp

(영어판) Bruno Latour 2013, An Inquiry into Modes of Existence: An Anthropology of the Moderns, Catherine Porter (tr.), Harvard University Press, 2013, 486pp

(불어판) Bruno Latour 2012, Enquête sur les modes d'existence: Une anthropologie des Modernes. La Découverte



라투르의 존재양식 2부 7장
- 해제와 주석 -

최종덕 (독립학자, philonatu.com)




①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의 책, 『존재양식의 탐구』 영어판이 출간되고 10년 만에 한글판(2023)이 나왔다. 영어판을 힘들게 읽다가 한글판이 나오니 독서가 아주 수월해졌다. 어려운 라투르 독서를 위해 출간된 해설서가 다수 있을 정도다.(Gerard de Vries, Bruno Latour. polity 2016) 각종 해설서의 도움을 받아 나도 비슷한 해설과 주석을 달아보려고 시도했다.

② 『존재양식의 탐구』 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서론에서 6장까지) 원고를 나의 홈페이지 <필로나투>philonatu.com에 먼저 싣고 나머지 2부와 3부는 원고가 다듬어지는 대로 올릴 예정이다. <해설과 주석> 작업이 원래 더 오래 걸릴 일이었는데, 한글판 출간 덕분에 좀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나의 <해설과 주석>은 전적으로 한 권의 책, 『존재양식의 탐구』 만을 위한 것이다.

③ 이 책 1장에서 16장까지 각 장 별로 해제 원고를 차례로 올리기는 하지만, 각 장의 내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책의 특성 때문에 개별 장을 따로 읽기가 힘들 수 있다.

④ 한글판 번역자에게 감사드린다. 전체적으로 훌륭한 번역이지만, 몇몇 용어 번역에 코멘트를 달거나 영어판 쪽수를 그대로 따른 것도 많다.

⑤ 인용 출처는 괄호 안 쪽수 (123)로만 표기했는데 영어판 출처는 숫자 앞에 * 표시(*124)를 했다.




이분화의 오류를 막는 변신의 존재양식[MET]
그리고 존재론적 다원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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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전체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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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약 비가시적 존재양식을 부정한다면 가시적 세계 같은 것도 없다.

2. 주체 자율성이란 내부 자체의 존재론적 귀결이 아니라 외부와의 연동과 섭동에서 온 것이다 그래서 존재는 알기 위하여 내부와 외부의 경계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

3. 창설은 치료적 장치의 역량을 보여주지만 치료장치만이 아니라 우주론적 존재론을 팜의한다.

4. 왜 경험인가- 근대인이 만든 실재론 혹은 객관주의에 잡혀있지 말고 라투르가 생각하는 진짜 실재, 진짜 객체성의 의미를 변신의 존재양식과 재생산의 존재양식으로 되살릴 수 있다.

5. 7장과 8장의 질문: 비합리성과 기술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근대인의 개척 전선 혹은 전쟁 전선의 탐구방법(질문지questionnaire)을 비가시적 존재자에 적용되는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가시적 물질적 존재에 적용하는 것이 8장이다.

6. 7장은 주객 이원화에 빠진 근대인들이 자기의 주체, 주관, 자아, 에고를 어떻게 고집하고 있는지를 관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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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로서의 존재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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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 유형에서 겉으로 보여지는 연속성을 잘 관찰하면 비로소 그 불연속성과 공백이 드러난다.

2. 모든 각각의 존재양식은 항상 타자로서의 존재being-as-other의 한 버전이다. 불연속성과 연속성, 차이와 반복, 타자성과 동일성은 하나의 존재양식 안으로 합생한다.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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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과 박탈institution and destitu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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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신이나 판타지로 여겨지는 비가시적 집합체collectives를 방지하려고 근대인은 합리성 무기를 들고 전선에 나섰다.

2. 근대인이 보기에 전자를 관습이라고 보고 후자를 박탈이라고 본다면, 관습의 전근대 제도는 말도 안 되는 괴물이어서, 근대는 그런 괴물과 싸워서 미신의 마법과 돌팔이들의 권력을 종식시켰다고 말한다.(275)

3. 양쪽에서 이해하는 존재양식은 전혀 다르다. 근대인은 비합리성의 존재양식을 수용하지 못하면서 그런 비가시적 존재양식을 또 다른 문화의 고유성임을 깨닫지 못한다.(276)

4. 근대인은 가시적 물질성이 아닌 비가시적 물질을 '허상'과 '환영'이라고 폄훼하면서 그런 비가시성을 전적으로 회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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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은 비합리 집합체에 대해 왜 그렇게 회의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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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학혁명 시기에서조차 교회 신도들과 선교사들은 (물신적인 모습으로 여겨지는) 마녀와 무당들을 화형에 처한 끔찍한 전쟁을 치뤘고, 그 전쟁에서 타고 남은 재가 아직도 식지 않았다고 라투르는 표현했다.

2. 중세 마녀전쟁의 상흔을 목격한 근대인 역시 마녀전쟁을 벌인 교회와 권력의 비합리적 행동에 대하여 회의적이고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고 라투르는 말한다. 그 이후 근대인의 회의는 도를 지나쳐서 또 다른 비합리적 요소 모두를 제거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근대인의 문제가 생겼다.(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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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과 심리학
외부성exteriority을 접근하는 인식론 그리고 내부성interiority을 접근하는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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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리학은 비가시적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 정신 내면의 마음을 보는 것이고, 인식론은 가시적 존재를 묘사하기 위해 외부세계를 보는 것이라는 근대인의 이분법적 오류를 라투르는 지적한다.

2. 심리학의 내부성과 인식론의 외부성은 실제로 서로 연결되고 있지만, 이런 연결성을 놓친 채 외부세계를 과장하는 인식론과 내부세계를 과장하려는 심리학을 별개의 탐구방식으로 보는 근대인의 방법으로는 존재양식을 탐구하는 데 실패할 것이다. (277)

3. 근대인의 탐구방식은 그런 위험을 안고 있음을 라투르는 지적한다. 즉 비가시적 존재는 심리학으로 가시적 존재는 인식론으로 접근하려는 이분법적 태도가 잘 못 되었다. 거꾸로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을 나누는 것도 잘 못 되었다고 라투를는 말한다.

4. 심리학을 비판하는 라투르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

① 비가시적 존재양식을 서술하는 정신의 내부성을 라투르가 거절한다면 내부성을 구성하는 영혼의 정념passion까지도 버려야 한단 말인가? 주관(성)을 버리는 것은 좋으나 심층자아나 영혼도 함께 버려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② 이에 대하여 라투르는 대답한다. 보편적 인간성의 자아, 혹은 에고가 버려지지 않으며, 근대인조차도 그런 환상의 자아(심리)를 부정할 수 없다고 라투르는 말한다.(278)
③ 예를 들어 비합리성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근대인도 역시 불법 환각물질이나 향정신물질에 빠지고 점쟁이들의 리얼리티 티비 쇼를 넋 놓고 보고 있으며, 심리치료나 정신분석 관련 직업이 더더욱 왕성하며, 공포영화나 환타지 영화 혹은 그런 컴퓨터게임에 하루 종일 밤낮으로 빠지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5. 정신생성적 연결망 psychogenic : 이성적 외부를 지향하지만 비합리적 내부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을 라투르는 정신생성적 연결망이라고 했다. 이로부터 내부와 외부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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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 근대인이 자찬하는 건강한 유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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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hites 대문자로서 '백인'은 근대인을 인류학적 문법으로 표현한 말이다. 근대인은 정신의 내부를 제거한 채 물질을 해명했다고 확신한다. 그런 물질을 간강한 유물론이라고 한다. healthy materialism of the Moderns 여기서 건강한다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근대인이 스스로 건강하다고 "자찬하는" 유물론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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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와 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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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시는 객체 자체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연결망 내부를 기반으로 비로소 외부성을 생성한다. 반대로 심리적 존재양식은 내재성 자체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객의 연결망 혹은 물질-정신 연결망 안에서 외부를 기반으로 비로소 내부성이 생성된다. 즉 내부는 외부의 도움으로, 외부는 내부의 도움으로 파악가능해진다.

2. 판타지를 즐기는 근대인이 비합리주의자들을 거꾸로 비난만 하면서, 근대인 자신은 자아의 정신이 원래 주체로서 있었던 것이지 외부로부터 생성된 것이 아니라고 고집을 피운다.(280)

3. 내부성에 빠져있는 근대인에게 그런 내부 정신이란 외부와의 연관 속에서 심인적으로 생성된 정신생성이라고 지적해주면 근대인은 도리어 화를 낸다. 근대인 자신은 "자신에게는 그런 야만인의 관습"이 없다고 반박하면서 격분한다.(280)

4. 한 발 더 나아가 근대인 자신은 점쟁이나 예언자 혹은 자칭 도사들의 잡탕 이야기로 제작된 티비쇼에 빠지면서 다른 사람들이 부적을 쓰는 주술사나 물신주의의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other tribes” or the “bumpkins” 그것들 혹은 시골뜨기라고 야유와 비난을 즐기는 이중성을 보인다. (#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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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를 비판하는 라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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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로이트 가 한 말, "신이 존재하지 않듯이 악마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 정신활동의 산물일 뿐이다." 라고 한 프로이트의 말은 일종의 범주오류에 해당하는 착각이라고 라투르는 프로이트를 비판한다.(281)

2. 신이나 악마 등의 그런 추상 개념이 관념의 소산물이라고 보는 근대인의 태도에 대하여 라투르는 반대한다. 그런 관념은 자아의 단절된 주체에 빠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라는 것이다. 라투르는 신이나 악마 등의 존재를 단순한 심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을 강하게 비난한다.

3. 추상적 개념을 인간 관념의 소산물이라고 보는 관념론을 부정하고 비판하는 객체지향의 사유를 라투르는 거꾸로 그런 추상물을 만들어내는 주체(자아)에 빠진 주객분리의 이원론자로 간주한다.(281) 이런 라투르의 태도는 지나친 과장법을 활용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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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적 관념을 외부적 실재는 서로에게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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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념을 실재와 대비되는 용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 관념과 외부적 실재가 이항적으로 대립된 것이 아님을 강조햐려는 것이 라투르의 기본 태도이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2. 근대인의 인식론과 심리학은 연구대상이나 연구방법의 태도에서 이원론적이다. “인식론이 외부성의 탐구에서 신뢰할만한 안내자가 아니듯이, 심리학도 내부성의 탐구에서 신뢰할만한 안내자가 아닌 것 같다.”(282) 표현한다.

3. 근대인의 주체-객체 이분법 구분 때문에 이런 상황, 인식론과 심리학의 이분법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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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인은 정신을 마치 내면적인 무엇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 내면의 정신을 심리학으로 분석하려고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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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리학적 내부성 즉 심리학으로 본 정신을 근대인은 내부 혹은 내적 "구멍"이라고 착각한다. 근대인은 그런 구멍을 침수되지 않도록 하려고 물을 빼내는 큰 비용을 들이고 있다. 근대인은 그런 구멍의 지하도시, 물적 시설을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수도가 단순히 물리적으로 보이지 않는 지하에 숨겨져 있다고 해서 그것을 내면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한다.(282-3)

2. 합리주의 산물인 지시reference의 경로를 유지하는 데 드는 근대인의 노력과 비용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다. 단지 내면과 외면, 내부성과 외부성, 주관과 객관, 물질과 비물질, 개인적인 것과 제도화된 것은 그렇게 단절된 이분화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뿐이라고 한다.(283)

3. 물론 근대인의 지하도시 공간을 유지하는 상당한 규칙을 무시할 수 없다. 지시의 경로를 관리하고 이용하는 데 큰 비용이 드는데, 그 비용도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283) 여기서 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말은 근대인이 만든 이성의 산물을 다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의 산물이 깊은 내면의 경험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라투르의 중심태도다.

4. 지시의 경로(합리주의의 산물들)로 형성된 과학기술 발달을 이룬 근대인의 노력과 비용을 무시하자는 말이 아니지만 근대인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만약 현대 휴대폰 장치를 모르는 사람이 이어폰을 끼고 휴대전화로 혼자 마구 떠드는 사람(근대인)을 보고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근대인조차도 혼자 독백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 줄 수 있다.(284)

5. 근대인조차도 외적 장비와 타인들 그리고 주변시설들과 기술적인 것이 서로 묶여진 하나의 연결망임을 놓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근대인이 말하고 싶은 '자아'는 외부사물과 연결된 연결망의 부분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근대인은 자신의 자아를 내면의 깊은 사적인 절연체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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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존재양식: 민족정신의학ethnopsychiatry 으로 본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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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구중심의 분석적 정신의학과 달리 '자아의 문화의존성(연관성)' 혹은 '문화에 의한 자아 창설'을 경험할 수 있는 비근대 정신의학이다.(290)

2. 정신의학의 탐구대상인 자아는 스맛펀으로 혼자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독백)하는 그런 (근대적) 자아가 아니다. 고립된 자아는 문화적(라투르는 인공적 장치artificial arrangements라고 표현했음) '우리'로 재탄생되며 이를 라투르는 변신metamorphosize이라고 했다. 즉 인격으로서 개체화된 자아에서부터 타자화(타자와 연결된) ‘우리’로 변화되는 ‘변신’의 존재양식이 ‘우리’다.(*194) 즉 사적 자아가 공동체적 우리로 변하는 통과과정을 변신 metamorphose [MET]이다.

3. 내가 객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비근대 양식인 인공적 장치(문화적 연결망의 요소들)가 나를 소유하는 것이 창설이다. 근대인은 내가 객체를 소유할 뿐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가 객체를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객체가 나를 소유하고 있다.

4. 내가 객체를 treat하며 동시에 객체가 나를 treat하면서 나와 객체는 하나로 연결된 상태가 되며 그런 상태가 바로 '우리' 개념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레벨이 있다. 하나는 "나"의 주체들이 모인 우리이며, 다른 하나는 객체가 우리를 treatment 한 결과로서 '우리'이다. 후자의 ‘우리’ 레벨은 라투르의 비인간 존재자 양식을 함의한다. 그래서 우리의 요소는 단순히 인격적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5. 우리는 변신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변신을 거친 우리의 존재가 바로 [MET] 존재양식이다.(290-3) 사적 자아가 공동체적 우리로 변하는 통과과정을 변신 metamorphose [MET]라고 했다.

6. 우리는 환경으로부터, 문화로부터 단절된 절연체가 아니라,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환경의 비 혹은 문화의 비를 흠뻑 맞고 있어서, 빗물에 흡수된 연약한 ‘봉투’envelope와 같다는 비유법을 라투르는 사용한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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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에서부터 촉발되는 변신의 존재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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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빗물transformational beings은 '봉투'로 유비된 나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고 화나게도 하지만 한편 동기부여를 해주기도 하고 기쁘게도 해준다. 내가 자연-문화의 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비가 나를 소유하여 나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변신하며 그런 변신을 창설의 존재자라고 라투르는 표현한다.

2. 창설의 언어를 이해하는 두 가지 통로가 있다.

첫째, 창설의 존재자에 익숙해지면서 창설의 의례를 기꺼이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둘째, 창설의 존재자는 우리를 인격적 개인(자아)로 설정하지 않고 단지 수많은 타자 중의 한 외부존재로서 간주하게끔 그냥 놔둔다.--물론 우리 입장에서는 창설 존재자가 우리를 타자로서 "오인"mistaken하도록 그냥 놔두는 것이다.(#194)

3. 우리는 변형성 존재의 영향력에서 좋건 싫건“under the influence,” positive or negative벗어날 수 없으며, 그런 상황들 모두가 나의 심리지향“psychotropes”에 작용한다.(*196)

4. 기존 근대인의 심리학으로는 이런 변신의 존재를 규정하기 어렵다(293)

5. 자아의 연속성이란 형이상학적 자기동일성이 아니라 불연속적 파괴와 비예측의 생성 등의 역량과 에너지를 말한다. 그런 자아는 내적인 자기동일성의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과 공백 도약과 통과로 얻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변신) 연속성이다.(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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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존재양식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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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인류학적 변신의 산물을 단지 개인의 심리적 분석대상으로 취급하거나 두뇌 신경세포 회로의 변화로만 분석하려 드는 근대인의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297)

2. 변신의 존재양식은 비합리성, 마술, 사기라는 비난과 오명을 받는다.(295)

3. 변신의 존재양식은 로맨스잡지에 나오는 운세 지면이나 민간주술, 오컬티즘 등의 양식과 다르다. 이런 다름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적정성 기준이다. 변신의 존재양식의 창설이라고 해서 엉터리 사기, 나쁜 돌팔이들의 오남용 들을 창설이라고 하지 않는다.(296) 단지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을 수용할 뿐이다.(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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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존재양식은 개인의 심리적 구성인가 아니면 실재하는 실재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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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투르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괄호를 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한다.(297)

2. 라투르는 "타자화된 나를 '우리'라고 한다. “I is an other”(*199) 그런 우리가 실재의 존재다. they can - because they are not aiming at you - become the energy source that is going to transform you for real. At last, “I is an other”!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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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투라가 말하는 합리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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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정된 지시들을 단절적으로 분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혹은 사물을 움직이는 해석의 키[KEY] 즉 전치사 존재양식[PRE]으로 지시연쇄의 연결망을 끊이지 않고 따라가는 길이 라투르가 말하려는 합리성이다.(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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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을 왜곡하는 근대인의 만능도구 더블클릭 [MET·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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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인은 변신metamorphose의 존재양식을 더블클릭의 탬플릿으로 뒤집어씌우려고 한다.(299) 이러한 오류는 더블클릭으로 지시체를 뒤집어씌우려는 것[REF·DC] 만큼이나 큰 오류를 낳을 수 있다.

2. 정신적 존재자들을 더블클릭으로 접근하는 것은 '변형없는 운반'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근대인의 심리학이 그 사례이다. 더블클릭은 모든 변신[MET]의 존재양식의 기회를 피하려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블클릭을 활용하는 근대인은 자신의 더블클릭이 마치 '불변의 가동물'을 모방하고 있다고 착각한다.(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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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생성적 존재자와 물질적 사물을 혼동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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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신생성적 존재자와 물질적 사물은 범주가 다른 존재양식이다. 이들 존재양식의 무게를 우리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

(1*) 여기서 존재의 무게(weight of being)라는 말이 나오는데, 근대인이 자랑하는 기학학적 이성으로 포장된 존재는 그 무게가 없는 수학적 양상만을 가지기 때문에 존재의 진짜 실재를 만날 수 없다. 그들의 무게를 존중하는 태도를 라투르는 포기하지 않는다.

2. 그 둘의 존재양식이 서로 만날 수 있을지언정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3. 물질적 사물에서 말하는 물질matter이란 더블클릭이 사물에 부과한 범주오류의 산물이다.

4. 물질은 이러한 더블클릭의 범주오류를 심할 정도로 숨기고만 있어서 존재양식의 표준으로 될 수 없다.(한글판 번역오류)

5. 물질적 사물은 재생산의 존재양식과 지시체의 존재양식을 더 이상 융합할 수 없다.(한글판 번역오류)

(4+5*) 4번과 5번의 내용은 한글판(2023) 300쪽에 나오는 것인데 이 부분에서 오역이 나왔다. 영어판 p.200을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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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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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인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물질 개념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라투르는 말한다. 물기하학으로 전락한 물질이 아니라 구체성을 갖는 물질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라투르의 뜻이다. 기학학적 자연이 아닌 경험적 물질 사물을 라투르는 해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물질의 사물을 이야기할 때 물질이 죽은 자연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2. 여기서 그는 초자연의 범주로 오해받지 않고자 했기 때문이다. "초자연"의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자연"이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는 뜻이다. 라투르는 이런 방법을 "뺄셈"subtraction이라고 표현했다.(300) 뺄셈을 함으로써 (물질의) 내재성immanence 탐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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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양식마다의 사양spec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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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양식마다 다른 특징과 그렇게 양식이 다른 기준들을 사양specification이라고 표현한다. 사양이란 존재들이 표현되는 탬플릿, 필수요구조건 -대화를 위한 표준화를 기대하는 최소한의 합의사항이다.(273)

2. 사양은 내부가 외부로 투영된 표상이나 이미지 혹은 상상의 결과로 표현되지 않는다.(300)

3. 사양은 연속성의 동위태isotopy로 제한되지 않고 외부환경의 연관으로 맺어진 불연속성의 양식을 포함한다.(300)

4. 존재양식의 사양은 그 존재의 무게 그리고 그 존엄성을 갖고 있다.(300)"

5. 존재양식이 딱 2개라면 한 양식에 대립적인 방식을 다른 하나의 존재양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존재양식은 단 2개가 아니라 다양하고 다수이므로 대립의 분석방법으로는 존재양식의 사양specifications을 파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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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되는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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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물의 차이는 그 자체로 해명되지 않으며 그 사물에게 영향주는 외부 존재자와 만나면서 비로소 서로의 차이가 노출된다. 이 점에서 프랑스 사회학자 타흐드(Gabriel Tarde;1843-1904)의 말을 인용한다: “Difference proceeds by differing.”(*201)" 즉 차이는 외부와의 관계에서 생성된다는 뜻이다.

2. 뉴튼의 프린키피아 2판(1713) 부록에서 뉴튼은 "Hypotheses non fingo"라고 표현했다. 뉴튼은 자신의 이론을 상상이나 추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실험과 실증으로 수립한다는 뜻에서 쓴 표현이다. 사회학자이며 법학자인 타흐드는 뉴튼의 사유방식과 반대로 관계의 상상력을 통해 범죄심리학을 구성하려 했는데 물적 실증성 외에 경험의 차이를 강조했다. 그 점에서 타흐드는 뉴튼과 다르게 "Hypotheses fingo"(나는 상상력을 동원한다)라는 표현을 강조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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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사양, 변신의 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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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존재자 양식의 변이와 변동은 그 자체로 altering itself 해명되지 않는다. 불연속, 공백, 적정성 상태라는 궤적 변이는 외부 존재양식인 타자로서의 존재being-as-other로부터 인출된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라투르는 강조한다.(301; *201)

2. 변신metamorphose의 사양은 획일적이지 않으며 사물과 정신, 객체와 주체 사이의 갈등과 부정과 친숙함 등의 변형 등, 자아와 타자 사이의 상호변형을 거친다.

3. 타자로서의 존재양식은 (1)우리를 변형하여 새롭게 태어나게inventive 하며 (2)근대인의 악마의 천재성으로 사물을 자기마음대로 변형시킬까봐 주저하기도hesitant하며, (3)우리도 타자존재양식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무서워하기terrifying하기도 한다. 그런 다종의 반응이 동시에 일어난다.

4. 변신은 그렇게 서로에게 거부감과 친숙감을 같이 공유하면서 연결된다.

5. 우리가 만약 그런 타자로서의 존재양식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갖게 될 때 거꾸로 타자는 우리를 속인다.(301-2) - 우리에 의해 타자가 왜곡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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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시적 변신의 존재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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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기일식처럼 달에 의해 태양이 일시적으로 가려지는 현상을 가려짐(엄폐; occultation)이라고 부른다. 가려진 현상이 너무 신비하기 때문이다. 앞의 행성 때문에 뒤의 행성이 가려지는 현상을 어컬테이션이라고 부르는 의미처럼, 비가시적 변신의 존재양식도 어컬트하다고 말한다.(302)

2. 정신적인 무엇, 존재자들의 비가시성은 비합리적이거나 초자연적이거나 신비한 것이 아니다.(303) 오히려 객관성의 색다른 경로일 뿐이다. [MET]는 객관적이다.(303)

3. 변신의 존재양식은 항상 생성되고 소멸되는 변화가 끊임없이 유발되는 운동의 존재이다.(302)

4. 타자로서의 존재양식이다. 자신이 계속 변형하고 변형되는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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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존재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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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변신의 존재양식은 새로움을 창설하는 창의성에 있어서 무한에 가깝게 변형하다. 그만큼 존재의 폭이 무한하다는 뜻이다. 그 폭은 인간을 넘어서 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비인간 존재론의 확장을 암시한다. They are infinitely more inventive. Like the beings of reproduction, they precede the human, infinitely.(*203)

2. 변신의 존재양식은 언어-이전의 원시적 양식이라는 비난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상당히 발전한 존재양식라고 라투르는 항변한다.(305)

3. 근대인의 오해는 내-외부 분할에 있다. 근대인은 재생산 존재를 "외부세계"로, 변신의 존재자를 "내부세계"로 이분화시켜 고정함으로써 세계의 실재를 보는데 실패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그들의 이분화를 마치 미신에서 해방시킨 합리성의 성과로 생각했다.(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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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존재양식에서 우주론의 존재양식으로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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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료적 존재자만이 아니라 우주적 존재자these beings versions that are not only therapeutic but also cosmological로 확장되는 그런 존재론을 라투르는 추구한다.

2. 라투르의 존재론이란 근대인이 만든 이분화의 존재론이 아니라 외부에서 조망한 [재생산의 존재양식]과 내부에서 조망한 [변신의 존재양식[을 포괄하는 확장된 존재론이다.

3. 재생산의 존재양식에서 변이의 고유한 가치를 추출해내는 변신의 존재양식으로 확장 [REP.MET]을 의미한다.(304)

7장 해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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