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밥꽃양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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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최종덕(독립학자/철학, philonatu.com) 2024년 2월 22일 영화리뷰 임인애 감독의 <밥⦁꽃⦁양> 임인애 감독의 <밥⦁꽃⦁양>이라는 영화를 봤다. 1998년 여름부터 2000년 봄까지 현대자동차 노조식당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을 그린 다큐 영화다. 대기업의 정리해고 칼날이 가장 약한 사람들에게 먼저 찌르니, 그 칼날의 상처들, 치유되기 어려운 상흔의 보고서다. 남성 중심의 거대 노조 앞에서 무력하지만 강력한 엄마이며 아내들의 처절한 이야기가 정제되지 않고 노출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단순한 페미니즘 영화는 아니다. 기업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는 노조의 투쟁과 타협 그리고 중재라는 묘한 심리들이 충돌된 채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겹 스크린을 찢어 내버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겉으로 보이는 혼재는 모순의 엉킴이 아니라 변증의 얽힘임을 느낄 수 있다. 기업과 노조의 충돌, 여성과 남성의 갈등, 권력과 현실의 변신, 희망과 절망의 괴리들이 혼재된 듯 얽혀 있는 불연속 내러티브를 재생산하는 영화다. 스크린에 비춰진 불연속과 단절의 고통들은 감독의 수정체를 통해서 연속과 연결의 내러티브로 변성되었다. 이 영화는 그래서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을 서술하는 단순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밥>은 공장에서 혹은 논밭에서 땀 흘린 일의 대가로 얻는 숭고한 스토리의 소재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밥>에는 ‘밥만 먹으면 되지 뭘 또 반찬까지 먹으려 드냐’는 식의 조롱섞인 권력 아이러니도 묻어있다. 마지막까지 남은 144명 여성노동자들 한 달 여 간의 천막농성과 단식투쟁이 ‘중재’라는 단어의 은폐와 ‘타협’이라는 단어의 위선에 밀리고 밀려 끝났다. 끝은 없었고, 그 상흔은 지워질 수 없었다. 결국 그녀들은 토로한다. “우리가 뭐 밥이가?” 자조적으로 던지고 만 한 마디가 아니라, 칼날이 베고 들어온 상처에서 곪아 뿜어내는 이산화탄소 가스가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고통의 파열음이었다. 감독 임인애, 그가 만든 이 영화는 아픔의 이야기를 수집하여 객석-내부 관객들을 계몽하려는 메시지 대신에 자아의 망막을 객석-외부 보행자들에게 투사하여 그들 보행자 스스로 아픔을 공유하도록 하는 전술을 펼친다. 감독 혼자서는 그런 전술로 승리하기 어렵다. 감독이 혼자서 창조한다는 영화예술은 계몽의 작은 진지 몇 개를 탈환할 수 있을지언정 공감이라는 저 언덕의 생존지를 뚫고 들어갈 수 없다. 임인애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창조하면서 동시에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현장 투쟁자들이 임인애 감독을 거꾸로 창조한다. 작가는 세계를 창조하며 동시에 그 세계가 작가를 창조한다. 창조는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향일 때 비로소 창조가 창조적일 수 있다. 그러했기에 <밥⦁꽃⦁양> 영화에서 그 공감의 전술이 먹힐 수 있었다. 프랑스 예술철학자 수리오(Étienne Souriau, 1891~1979)에서 예술가가 대상을 창조하는 행위는 대상에 의해 예술가가 창조되어야 함을 전제한다. 창조는 일방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호적인 섭동의 결과라는 것이 수리오 예술철학의 핵심이다. 수리오는 그런 양방향의 창조를 ‘창설’(instauration)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표현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자신이 예술가로 일컬어지기를 싫어하겠지만 수리오 철학의 창설을 수행한 섭동의 행위예술가였다. 말과활아카데미라는 작은 공간에서 몇몇이 모여 본 영화였지만, 그 객석의 크기는 더 없이 컸었다. <원고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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