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 무엇입니까?
[질문] 기가 무엇입니까?

여기 놓여진 사진기가 어떻게 작동되며, 저기 책상 위에 놓여진 물건은 무엇이며, 그 사람은 어떻게 생겼는지와 같은 질문처럼 기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은 처음부터 범주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질문] 서구에서도 氣에 대한 관심은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구체적인 상황이나 성과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것이 매우 적은 듯 합니다. 왜 서구에서까지 다루기 어려운 氣에 관심을 갖는지 철학 분야와 과학 분야를 망라하여 개관해 주실 수 있는지요?

인터넷에서 ‘taoist’ 혹은 ‘chi’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기와 관련한 서구의 사이트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많은 사이트들 대부분이 수련공동체 혹은 주술 지향의 신비주의 집단 성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 공통의 특징은 기를 직접적이 아닌 신비적인 통로로서만 파악할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일본식의 선불교나 티베트 풍의 신비화된 불교 혹은 중국 신선도의 양생술 등을 그들 서구인의 입맛에 맞게 변형시킨 집단적 취향을 강조하곤 합니다. 아니면 국적불명, 정체불명의 혼합 신흥종교 형식을 띈 정신 수양집단도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서, 티베트 불교신자인 유명한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 때문에 티베트 불교는 더욱 신비화되어 버렸고, 과학을 통해서 우주적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거대자본의 신흥종교인 사이언톨로지의 신도임을 스스로 밝힌 미션임퍼서블의 영화 배우 톰 크루즈 때문에 기에 대한 서구인의 환상은 더욱 왜곡되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 동양 불교 바람이 불고 있는 프랑스의 이상 열기는 사이비는 아닐지언정 가장 현실적인 종교로서의 불교를 가장 신비적인 종교로 탈바꿈하는 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신비화의 요체는 기의 존재를 그들 나름대로 물질화와 자본화를 시키는 사회적 변형과정과 아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되어가는 문명적 이유가 다 있습니다. 하나는 서구가 자랑해 오던 이성주의와 과학주의의 한계를 반영한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기계와 자본 아래 압사 직전에 놓여진 인간성, 즉 인간소외의 문명적 피폐현상이 팽배해졌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기에 대한 서구인의 유행은 과학주의와 소외의 만수의 저수지가 터진 물꼬를 찾아가는 사회적 현상이라는 분석입니다. 꼭 옳은 분석만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봅니다. 이런 흐름이라면 기는 서구인의 심리적 불안의 꽁무니를 닦아주는 휴지로 전락되고 말 것 입니다. 문명위기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기를 접근하는 과정은 결단코 기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를 방해할 뿐입니다. 이러한 지적은 사실 서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인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 더 슬픈 사회적 병리현상입니다.

물론 기에 대한 건전한 연구 동향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대안의학, 보완의학 부문에 대한 서구인의 전문적 관심은 동양의학의 상당한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기에 대한 과학적 연구 성과가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구 대부분은 기의 존재를 물질적 대상으로 국한한 연구이므로 기학에 대한 진정한 성과를 내놓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서구 동양철학자들에 의한 철학적 연구는 그들의 문명적 분위기와 전혀 다르게 상당한 학문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수준은 한자문화권의 동양학자들을 뛰어넘기도 합니다. 고대 중국의학 부문에서, 선진 도가철학 부문에서 그리고 넓게는 동양철학 전반에서 서구학자들이 이루어 놓은 기학 이론은 오히려 동양학자들의 학문적 종설 reviews 을 낳게 하는 지경입니다.



[질문] 선생님께서는 흔히 과학철학 전공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오히려 선생님께서는 선생님의 작업을 ‘자연철학’이라 불러 달라고 어느 책인가에서 밝히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학철학과 자연철학이 어떻게 구분이 되는지요? 그리고 그러한 자연철학적 관점에서 氣에 관해 철학적 연구를 오랫동안 진행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연철학적 관심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왜 하필 그 중심에 氣가 자리하고 있는가요?

자연과학은 자연을 경험과학으로 접근하는 일이고 과학철학은 그러한 자연과학의 인식론과 방법론에 대한 철학적 분석과 해명을 하는 일인 반면, 자연철학은 과학을 통해서 혹은 형이상학을 통해서 자연을 이해하고자 하는 폭넓은 일입니다. 그래서 자연철학은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를 인정하여 과학적 세계관의 구조와 형성과정을 추적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구성물 혹은 자연의 계통성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접근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연철학은 과학과 형이상학을 포괄해 내야 합니다.

기 연구가 저의 학문의 핵심도 아니며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지만, 위와 같은 이런 연구의 일환으로 즉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저는 기를 사유하기 때문에 기에 대한 저의 관심은 과학적 분석과 존재론적 이해라는 두 가지 통로를 연결시키는 데 있습니다.



[질문] 어떤 이들은 서양의 과학적 사유가 물리학 중심인데 반해 동아시아의 과학적 사유의 경우는 생물학 중심이라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주로 한의학 관련 연구에 주력하면서 氣를 연구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진화론과 생물학, 진화론적 의학, 면역학 등에 관련된 자연철학적 의미에 대해 매우 활력적인 연구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관심에는 氣論이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인지, 만약 관계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 말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동아시아 과학적 사유 양상이 생물학 중심이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말인 듯 합니다. 하와이 대학 동양학부 에임즈 교수는 동양철학의 특징을 유기체적 자연관의 리학理學적 표현이라고 했는데, 서구의 결정론적인 물리적 세계관과 대비될 수 있는 이해방식이라고 여겨집니다. 물론 이런 표현은 동양과 서양을 단순 이분화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주범이 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볼 경우 동양의 세계관이 생물학적 패러다임에 놓여 있다는 인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의 존재가 생물학적으로 모두 구명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강조해야 할 듯합니다. 저는 기를 신비화시켜 만병통치의 문명적 도구로 만드는 신비주의 산업을 적극 비난하고 비판합니다. 기를 이성의 도피처로 전락시켜 간주하는 많은 사회적 풍토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과 비판을 하는 입장입니다. 기에 대한 그런 접근방식은 일종의 사회적 집단 마취현상일 뿐입니다.

철학적으로 저는 이기론의 기틀에서 기를 다루어야 하며, 의학적으로는 항상 자신의 몸이 속해 있는 사회적 환경과의 관계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수양론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를 자신만의 기가 아닌 타인들 그리고 사회와의 연관성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기를 개인 차원이 아닌 역사적 존재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역사적 존재란 기의 생명진화론적 이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체 차원에서만 기를 자꾸 반복하여 말한다면 결국 자기 일신의 양생과 안위만을 추구하는 신비주의로 빠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에 대한 저의 자연철학적 관심은 기를 생명의 진화론적 역사 그리고 사회사적 역사를 통해 어떻게 조명되는가를 찾는 일일뿐입니다.




[질문] 氣라는 용어는 과학적이기 이전에 철학적인 성격이 강하며, 구체적이고 경험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성격이 강하며 때론 신비주의적이기까지 합니다.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리고 어떤 관점에서 氣가 과학적인 성격을 가질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더욱이 氣에 과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은 새로운 “과학 개념”을 요청한다고 하는데,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다면?

이 질문의 전제는 과학이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음을 은근히 인정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저는 기를 신비주의의 틀에서 보는 것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수준의 자연과학의 틀로만 보는 입장 역시 반대합니다. 기를 사유하는 저의 기본입장은 유물론이지만 과학적 유물론이 아닌 역사 존재론으로서의 유물론입니다. 역사 존재론이라는 말은 매우 어려운 개념이지만 간단히 말해서 앞서 잠시 비추었듯이 첫째, 기의 존재를 시간이 정지되고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존재의 틀에서 벗어나야 하며 둘째, 단순한 환원주의 방법론을 동원한 물질론적 유물론의 사유에서 벗어나야 함을 함축합니다. 생명의 탄생부터 시작하는 진화론적 시간 속에서 선택된 존재의 변이과정 및 인간사회 속에서 관계성의 다양한 힘들이 농축하거나 분산하는 존재의 시간적 과정 그 자체를 역사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존재로서의 기는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범주가 아니며, 현재 시간에서 물질을 분석하는 과학적 존재론의 범주도 아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에 대한 연구가 과학 연구에서 제외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를 과학으로 연구할 수 있지만, 이때 말하는 과학은 시간의 역사를 담아낸 그런 과학이어야 합니다. 불행히도 시간의 역사를 담은 과학은 그 연구 결과를 실증적으로 확증하기 어렵다는 방법론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현재의 과학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진화생물학입니다. 그러나 진화생물학을 과학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기를 과학의 영역에서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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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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