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위기와 극복-창조문학
인문학의 위기와 극복 󰡔창조문학󰡕 원고(1999-5-15) 최종덕

창조문학 주관 토론회

토론참석자:
황필호(철학, 강남대)
홍문표(문학, 명지대)
엄창섭(문학, 관동대)
최종덕(철학, 상지대)
김차규(사학, 명지대)

사회 유창규(창조문학 편집국장)

이하 최종덕 씀

<1> 지난 역사 속에서 인문학의 위상은 선비의식의 겉치레 계승이거나 안주하는 상아탑의 한 요소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요즘들어 인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다양한 문제들이 여러 각도에서 반성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안찾기이며 좁게는 한국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지식의 건강한 의미추구에 관한 비판적 담론들입니다. 약육강식의 경쟁논리가 실용주의라는 옷을 입고서 인문학의 가치는 더욱더 평가절하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할 때, 저는 그 위기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곤 합니다. 첫째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왜곡된 학문, 둘째 군사정권 이후 이데올로기가 권력의 도구로 전락된 현상과 그로부터 발생되는 지식의 편협성, 세째 위의 두 문제를 정당화시키려는 상황조작의 권위가 지식사회도 만연되어 있다는 점과 그 권위구조가 학문의 질을 막고 있다는 사실, 네째 서구문화가 여과없이 직수입되면서 생긴 지식의 시녀현상, 다섯째 서구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 내지는 국수주의로 인하여 고전문헌에만 매달려 훈고학만 하면서 발전적 비교해석과 전통의 창조를 거부하는 일, 여섯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실천의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아래서 잘못된 선비의식을 정당화시키는 편의주의적 상아탑의 가면, 일곱째 물질우선주의가 야기했고 또한 우리가 근원적으로 안고 있는 병폐적 교육구조때문에 생긴 현상들 즉 경제논리에만 맞추어서 지식평가를 왜곡하는 관료행정 등입니다.
인문학은 학문의 기반으로서의 구실을 상실한 채, 오늘에 와서는 거대한 산업화의 물결에 따라 경제논리와 과학기술 우선주의에 밀려 그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성의 역사의식과 문명사관의 날개가 꺽이고 만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의식과 문명사관이라는 말은 일면 거창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문명사관으로부터 과학적 창의성의 개발이나 근원적인 경제 효용가치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 선다는 뜻에서 말한 것일 뿐입니다.

<2> 장기적인 가치를 보지못하고 인문학이 당장의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생산물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제도권 교육에서마저도 인문학의 위상이 여지없이 붕괴되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인문학의 보금자리였던 과거의 대학과 달리 오늘의 대학은 계량주의적 잣대에 휘둘려 대학 본래의 가치가 전도된 상태에 이른 실정입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앞서 말했듯이 소위 근대화라는 구호 속에서 누적되어 온 사회적 병리현상의 결과인 것입니다.

다행히도 90년대 들어와 대학의 이러한 병리현상들을 치료하기 위한 자정노력이 대학인 내부에서 조급씩 시작되었습니다. 먼저는 글쓰기에 대한 반성이 일었습니다. 조헤정, 김영민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올바른 글쓰기 담론은 우리 대학인이 얼마나 상아탑에 안주되어 왔는 지를 여실히 깨부수는 작업이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교육의 근원적인 문제가 대학의 허약한 경쟁력에 있다는 판단을 내리면서 대학의 경쟁력 강화라는 기치를 들고서 대학의 구조조정에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판단하게 된 배경에는 많은 근거가 있습니다. 우선 대학을 기업화하여 장사속으로 이익을 챙기는 많은 사학재단의 비리가 불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대학의 비리는 까짓 약간의 행정 제재를 받거나, 재단 이사장이 쫒겨난다해도 실제로는 배후에서 여전히 대학행정을 쥐게되는 현실을 우리는 보아 왔습니다. 그리고 학벌에 따라 계급적인 위상이 매겨지는 학벌주의 사회풍토는 너무 심각하여 국가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했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대학의 구조조정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요즘 흔한 말로 대학의 구조재조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안주하는 대학풍토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라보고 놀란 놈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대학의 구조재조정이 마치 기업의 구조조정인양 생각하는 정부관료가 많다는 점입니다. 문사철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는 교육정책가는 아무도 없는 듯합니다. 강내희 교수에 의하면 우리 교육부는 교육정책만을 남발하였지 학문정책에는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정말 옳은 지적입니다. 신자유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과연 어떤 사회적 파장을 낳게 될 것이지에 대한 진지한 반성없이 그 말을 너무 쉽게 쓰고 있는 것입니다. 강치원 교수는 간략하게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효율성이란 자본을 위한 효율성이지 교육을 위한 효율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창조성도 공동체의식이 없는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적 창조성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3> 인문학 역시 세계화의 추세에 눈감고 있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 말 자체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세계화 의식은 종합을 지향해야지 종속으로 가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종합을 이루어내기 위하여는 먼저 차별성이 부각되어야 합니다. 시공적 역사를 호흡하는 사유의 지평선으로부터 창의적 학문이 나오는 인문학은 자연과학과 달리 그 차별성이 선제되어야 종합이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인문학에서도 세계화의 추세에 맞추어 21 세기를 코 앞에 둔 현 시점에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인문학의 장래를 예측하는 다양한 논의꺼리들이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풍토가 혹시 20세기와 21세기, 혹은 밀레니엄의 시대적 경계의 실체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적인 흐름에서 밀레니엄이 오거나 21세기가 온다하여도 인간의 변화를 스스로 창출하지 못한다면, 밀레니엄의 새시대는 일종의 환상이며, 시류적 무임승차를 엿보는 허구의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일고 있는 21세기 증후군의 증상들 즉 정보화, 후기 산업사회, 세계화, 경쟁력 제고, 개혁의 기치, 신지식인, 개방화 등의 언어유희는 인문학적 지식과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도태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한 언어의 깃발이 과거와 현재의 현실과 조건을 잊은 채 처부수자 돌진형으로 될 때, 깃발의 위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문학과 관련된 21세기 담론은 철저하게 과거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장미빛 미래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실례를 들어 봅시다. 문학은 번역의 전문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며, 역사는 전지구적인 고민거리 중의 하나인 민족주의 문제를 문명사관의 입장에서 다루어야만 할 것으로 봅니다. 철학 역시 동서양의 사상적 위화감을 없앨 수 있는 학제간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우리 인문학의 시급한 과제는 이론과 실천을 역사적 고민을 갖고 접목시키는 작업일 것입니다.

<4> 실상 인문학의 위기는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이미 시장논리로 편입된 미국의 인문학 연구 흐름은 철저하게 경쟁주의의 연구체제로 돌입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인문학 정책이 없어진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국 교육부의 교육정책이 학부제, 구조조정, 혹은 대학평가제니하여 대학 간 경쟁을 유도하는 철저한 천민적 경쟁주의임에 반하여, 미국은 전공 별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대학 전체의 경쟁을 유도하여 심각한 무차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만큼은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학 전체를 평가함에 따라 전부문 경쟁에서 진 대학의 인문학 교육은 자연 붕괴될 뿐만이 아니라 경쟁에서 이긴 대학에서 조차도 인문학부의 무임승차가 이루어져 전반적으로 인문학의 총체적 부실이 예상됩니다.

독일 대학 내에서도 요즘 인문학의 위기가 논의되고 이에 대한 극복방안을 학자들사이에서 모색 중입니다. 예를 들어 몇몇 독일대학에서는 인문학과 교수가 정년이 되어 나가도 그 전공분야의 신임교수 채용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연적인 도태를 꾀하는 것입니다. 아직 독일대학의 전반적인 현상은 아닐지라도 실용공학과 순수인문학의 연구프로젝트의 불균형이 나타나고 통일 이후 국가예산의 4/1이나 되는 공교육비의 부담이 지나침에 따라, 그 반향력에 가장 쉽게 노출되는 인문학에서 먼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과학이나 기술공학 그리고 인문사회과학에 관계없이 인문학에 대한 독일 지식인의 인식과 이해는 국가의 이념을 정초시키는 중요한 위상으로 정착되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처럼 관료정책가가 지식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른 지식인의 압력이 정책에 영향을 주면서 인문학은 그 원래의 위상을 지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인문학의 위상이란 추상적이고 폐쇠적인 인문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 과학에 사유의 기초가 되면서 실천적이고 창의적인 결과를 자아나게 하는 장기적인 관점의 실용성까지 포함합니다.

<5> 궁극적으로 인문학의 지향점은 하늘에 지배당했던 땅의 복원과 물질에 지배당한 인간의 해방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 대한 인식이 바로 역사의식이며 문명사관이 됩니다. 거꾸로 역사의식과 문명사관을 정립하는 것이 인문학의 과제입니다. 결국 우리 인문학의 위기는 역사의식과 문명사관을 상실한데서 오는 위기입니다. 오염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염의 역사를 발판삼아 지식의 패권을 쥐고 있는 인문학은 결코 인문학이 될 수 없습니다. 인문학은 더 이상 역사의식을 회피하는 기술로서, 지식제국주의의 우체부로, 품위유지의 상징으로, 나만이 할 수 있다는 독단주의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인문학의 역사의식이란 거창한 역사가 아니라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하는 자기 물음입니다.

지식이 정보의 개념으로 바뀌어가면서 인문학에서도 지식의 역사적 문맥을 묻는 질문이 안타깝게도 소실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공학 지식인의 몰역사성도 결국은 인문학에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분자유전학과 정보산업의 비약적인 성과가 사회적으로 문제되면서 생명윤리와 정보윤리와 같이 본격적인 인문학의 필요성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나 할 수 있는 문제지적이 아니라, 반성과 비판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21세기를 대비하는 새로운 방향제시나 특별한 대안이 필요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 새로운 대안이란 또 하나의 사회적 토론거리만을 일시적으로 제공했을 뿐이며 실천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에서 지적한 기존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타파하는 일이 먼저라고 봅니다. 그것이 가장 구체적인 대안일 것입니다.

90년대 들어와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동아시아 담론 등의 긍정적이고 창출성있는 인문학의 성과도 크다고 봅니다. 인문학의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반성작업, 그리고 실천적 대안찾기에 분주했던 때라고 보여집니다. 전통과 근대, 근대와 탈근대, 종속과 탈식민, 정체성 찾기와 민족주의의 해석론, 과학비판과 큰 기세를 얻고 일어나는 문화담론들, 문명의 위기와 관련된 환경과 생명사상의 논의들, 우리 글쓰기와 오늘 속의 고전읽기, 정보사회론, 그리고 학제간 연구를 통한 인문학의 구체적 실천방법을 찾는 일에까지 인문학은 다양한 각도에서 반성과 비판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교육부를 포함한 정부의 정책적 오류를 짚어내고 과감한 정책비판과 대안을 내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문학의 위기와 직접 연관된 한국의 대학교육 행정에 대한 대학교수의 구체적인 항변이 모아지고 정책결정에 대한 압력행사가 현실화되어야 될 것입니다. <끝>
창조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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