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눈으로 다시 보는 과학과 기술
순천향대학교 교양교과 교재 <인간사랑>(2006) 내 삽입 절

7장 인간의 눈으로 다시 보는 과학과 기술



<목차>
1 과학기술의 사회적 상관성
1.1 일상의 기술, 일상의 과학
1.2 혹시 기술이 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닌가?

2 생명복제 기술과 정보통신 기술의 현재와 미래
2.1 생명복제 기술의 사회적 문제
2.2 디지털 기술의 미래와 주체적 자아

<본문>

1. 과학기술의 사회적 상관성

1.1 일상의 기술, 일상의 과학

첨단의 산업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현대인에게 일상생활의 핵심단어가 무엇인지 개인적으로 질문하면 과학과 기술에 관련한 말들이 가장 많다. 컴퓨터나 인터넷, 개인 통신기기에 관련한 말들이 단연코 앞서 있으며, 그 외 공상과학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말들이 일상생활 언어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강의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이 교실에서만도 컴퓨터 칩의 수자는 아마도 수천 개에 이를 것이다. 디지털 시계나 휴대전화가 울리는 알람소리에 잠을 깨고 위성 텔레비전을 보면서 조리 시간을 맞추어 놓은 밥솥이나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여 아침식사를 해결한다. 전자식 교통카드를 이용하여 버스를 타고 엠피쓰리를 들으면서 학교에 간다. 1교시에는 중앙전송식 영어랩 수업을 듣고 4교시에는 시청각 교실에서 엘시디 화상화면으로 전공수업을 듣는다. 오후에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통해 친구들을 만나서 피시방에 들러 머그게임을 한바탕 하거나 채팅을 주고받는다. 집에 가는 길에 디카폰을 이용하여 사진을 같이 찍고 집에서 그 사진을 메일로 전송해준다. 그리고는 자신의 블로그에 사진도 올리고 오늘의 기억을 메모하기도 한다. 정말 우리는 온통 첨단의 과학기술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오늘의 모습이 일상화되었지만 막상 이런 기술 해택을 받고 있는 기술의 과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까운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기도 하다. 디지털 칩의 과학적 원리에 대해 우리는 잘 모른다. 게임제작의 구성적 원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게임의 도사가 될 수도 있다. 엘시디 방식의 화면구성을 이루는 반도체의 원리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첨단 과학기술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황우석 교수의 생명복제기술이 커다란 사회적인 이슈이면서도, 생명복제 기술의 이론적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가는 해외여행이 일상화되면서도 비행기가 하늘로 뜨는 원리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축구와 프로야구가 일상의 레저생활로 자리 잡았지만 축구의 바나나킥이나 야구의 휘는 공이 왜 휘는지에 대하여 우리는 과학적인 설명을 못 하고 있다. 공이 휘는 원리와 비행기가 뜨는 원리가 알고 보면 과학적으로 동일한 원리라고 말하면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질 뿐이다.

좀더 나아가 과학기술이라는 말을 자주 쓰곤 하지만, 그렇다면 과학과 기술이 같은 것이냐고 물으면 그게 무슨 말인지 의아해하기도 한다. 휴대전화의 일상화가 과학의 산물인지 아니면 기술의 산물인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그저 과학기술의 성과라고 말할 뿐이다. 이렇게 우리는 과학기술의 성과에 힘입어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과학과 기술 그 자체에 대하여 우리는 거의 무지에 가깝다. 그래도 최소한 과학과 기술의 어렴풋한 차이를 인식하고 있다. 과학은 일종의 연역적 추론과 경험에 의존한 귀납을 통한 정신적인 행위의 소산물이지만 기술은 전통적인 장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무엇이라는 정도이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인식으로는 오늘날의 첨단 산업사회의 과학과 기술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이해도 부족한 편이다. 과학과 기술은 윤리적인 가치규범과 무관하다는 기존의 교과서적 명제는 역사적인 이해가 결핍된 상황에서 나옴직 한 말이다. 예를 들어 뉴턴 법칙은 지역이나 시대에 관계없이 과학의 객관적 지위를 받는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과학으로서 의학이 지역이나 시대에 무관하다고 말한다면 억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새로운 소립자를 찾기만 하면 노벨상을 받던 30-40년대에서 소립자를 발견하기 위한 입자가속기의 건설비용은 철저히 사회적인 영향력에 의존되어 있었다. 더 쉽게 말해서 갈릴레이는 과학자였지만 당시 교회의 역사적 상황과 규범적인 갈등에서 벗어나 있지를 못했다. 현대에 들어와 최고로 각광받는 생명복제 기술은 사회적인 생명윤리의 문제와 너무나 긴박한 상관성을 갖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과학기술의 문제와 사회적 문제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상관성을 갖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1.2 혹시 기술이 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닌가?

1930년대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공상과학영화였던 <달>Moon이라는 미국의 영화는 그때 사람들에게 엄청난 공포와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미 70년대 달에 실제의 사람이 로켓 우주선을 타고 갔었고, 이제는 당시의 신비와 공포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얼마 전 나왔던 공상과학영화의 경전이라고까지 불렸던 <아이로봇>과 <매트릭스> 그리고 <터미네이터>가 현실의 상황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말들을 자주 하곤 한다. 혹은 아주 오래 전 영화였던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는 기계에 의해 속박된 인간의 모습을 잘 그리고 있다고 한다. 이 영화들이 전하고자 했던 주요한 메시지를 몇몇의 키워드로 말할 수 있다면 기술결정론과 과학문명의 자기파괴성 그리고 인간소외의 문제 등으로 축약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존엄성과 동시에 개체적 자유를 희구한다. 획일화된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기계의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역사와 지역을 막론하고 당연한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고도의 기술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양상 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파편화된 개체주의의 모습들이다. 대중매체에서나 사회관계에서 이제는 첨예화된 개인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편협한 개인주의는 결국 산업화의 한 단면이고, 상업주의 농락에 허우적거리는 자아들의 모습이며, 따라서 인간의 고립을 자초할 뿐이다.

기술사회가 낳는 고립성이란 도구적 기술의 편리함에 흠뻑 빠진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독립적인 존립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빠지게 하며, 때로는 자족적인 삶을 영유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어쨌든 이러한 환상과 착각이 존재한다는 점은 이 시대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현실 사회의 공동체적 관계들이 깨지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관계의 끈들을 상실한 자아는 생존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남을 헐뜯고 남이 안 볼 때 대충 무임승차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쉽게 포기하거나 반대로 편집광에 가까운 자만심에 몰입될 위험이 있다.

이런 강박감과 자만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새롭게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만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만을 비춰보는 주머니 속의 반사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의 그물망 속에서 내가 속한 위치를 거시적으로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객관적인 나의 모습을 세울 수 있다. 삶의 그물망을 무시한 역사성 없는 개인은 맹목적이고, 상업주의의 희생물이 될 뿐이다.

물질이 지배하는 왜곡된 기술사회는 수요가 공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억지 창출하는 끝없는 성장의 신화를 창출하기도 한다. 바로 그러한 성장논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람들이 조화롭게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의 끈이 아니라 자유라는 허울 아래 경쟁과 약육강식만을 낳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끈만을 강요한다. 그 끈이란 불필요한 소비를 끊임없이 강요하면서, 보이지 않는 왜곡된 경제논리를 받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계화된 기술문명사회가 갖는 부속품으로서의 끈일 뿐이다.

이제 현대인은 기계화된 산업화 속에 매몰된 자아를 되찾으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기계나 사회조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삶의 주체자로서 행동하고 싶어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 ‘순천향대학교의 학생으로서 나‘ ’동창회 총무로서의 나󰡑 󰡐모 인터넷 사이트 회원으로서의 나‘ 등 많은 역할을 하는 나로서 답변을 한다. 무수한 아이디를 갖는 나로서 분화된 자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내가 진정한 나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어떤 역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진정한 주체자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한다.

현대는 막강한 기술력에 의해 보장된 정보사회라고 말한다. 정보사회가 되면서 지구 구석구석이 더욱 가까워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분명히 과학기술의 산물이다. 이유야 어쨌든 이제는 나와 남이 더욱 가까워졌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가까워졌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아성을 더 높게 쌓고 결국은 그 아성이 나의 소외를 자초하곤 한다. 우리는 󰡐신화의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로 그리고 나아가 󰡐정보의 시대󰡑로 변화하는 길목에 서있다. 그 길목에서 첨단의 과학기술 체계를 낳고 산업화를 이루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었지만,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남과 벽을 만드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기술에 지배당하는 나 자신을 회복하는 데 있다. 기술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술을 결정해야만 한다. 가공할만한 첨단의 기술사회에 사는 현대인에게 기술결정론으로부터 자아를 보호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이다. 이렇게 기술결정론이라는 말은 복잡한 학술 영어이지만 간단히 말해서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사용되어야 할 도구로서의 과학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고 마는 왜곡된 문명의 한 단편을 일러 말한다. 기술결정론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우리는 포드주의(Fordism)를 든다. 이는 2차대전 이후 무한한 자원공급을 전제로 한 포드 자동차 공장의 공정모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대량생산 체제를 위한 콘베어벨트 식 공정은 노동자가 생리적 휴식을 취하기 위해 라인을 멈추는 법은 절대로 없으며, 거꾸로 라인이 정기적으로 멈출 때 비로소 노동자는 화장실이나마 겨우 갈 수 있는 기계중심주의의 전형이다. 기계에 구속된 인간상을 메타포로 표현한 것이다. 물론 포드주의는 70년대 중반 이후 평균이윤 창출의 감소로 무너지고 말았으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전히 오늘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술결정론에 대비하여 최근에는 기술구성주의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즉 기술과 사회는 밀접한 내적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을 사회적 상황과 무관한 객관적 요인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의 한 요인으로 보는 입장이다. 이는 단순히 기술결정론에 대한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 사회를 분석하는 주요한 이론적 도구로서 평가받고 있다. 예를 들어 포드주의를 기술구성주의의 관점에서 다시 보자면, 포드주의는 포드 자동차 회사의 극단 자본주의 성향과 물질제국주의의 성향들 및 미국 사회라는 특수한 물적 요건들 및 이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력 장악을 위한 경제전쟁 상황 아래에서 접근해야 한다. 과학이론의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859년 <종의 기원>이라는 출판물로 등장한 다윈의 진화론은 다윈 개인의 위대한 과학적 업적으로만 그 성립 배경을 돌릴 수 없다. 당시 자유주의가 정착되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가 갖고 있었던 물질적 진보관에 대한 강한 사회적 신뢰성이라는 구조적 측면에서 진화론의 배경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어쨌든 19-20세기 들어서 기술의 발전은 참으로 폭발적이었다. 도구적 인간Homo Faber의 진면모가 드러난 셈이다. 전기와 전화 및 자동차의 발명은 에너지와 이동 및 통신수단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옴으로써 세계는 좁아졌고 문명의 교류가 본격화되었다. 페니실린은 의료복지의 신기원을 마련했으며, 소립자의 발견과 핵에너지의 이용은 지구인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존립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묻혀있던 화석연료를 캐냄으로써 플라스틱 시대를 열었고, 결국 일상의 생활패턴까지를 바꾸어 놓았다. 그 중에서도 단연코 빼어난 기술의 혁명은 정보통신 기술과 생명공학 기술이다. 기존의 기술 진보는 인류적 삶의 개선이라고 볼 수 있지만, 최근의 정보통신과 생명공학은 인류의 삶의 구조 자체를 바꾸어 놓는 기술의 대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사례로서 생명복제 기술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 면모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생명복제 기술과 정보통신 기술의 현재와 미래

2.1 생명복제 기술의 사회적 문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매스컴에 떠오르면서 생명복제 기술이 새로운 국제적 산업기술 체계로 각광받게 되었다. 그러나 생명복제 기술이 세계특허권 사업으로 전환이 된 오늘의 현 상황에서 국제 거대자본의 권력과 순수한 복제기술에 대한 과학자 개인적 성과를 분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생명복제 기술의 생명윤리 논의는 나중에 하더라도 우리는 자본의 힘을 업은 기술력이 인간의 원천적 존엄성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때이다. 기술결정론은 생명복제 기술이 지니고 있는 객관적 성과에만 눈을 돌리기 쉽다. 예를 들어 생명복제기술은 난치병 환자나 재활환자에게 결정적인 의료복지 해택이 있다는 희망 때문에 적극적으로 생명복제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은 일종의 기술결정론적 시각이다. 반면에 생명복제기술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사회적 연관성, 즉 기독교 보수주의와의 윤리적 갈등들, 관련 특허권과 관련연구비 및 연계적 사회비용 등을 둘러싼 자본과의 사회적 결탁 위험성 등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이 기술 사회구성주의의 시각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료복지의 차원과 사회적 구성주의 입장 양쪽을 골고루 볼 수 있는 시각을 필요로 한다.

1997년 초 영국에서 돌리라고 이름 붙여진 양의 복제가 성공했다는 발표 이후, 생명복제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크게 늘었다. 그 전부터 인공 체외수정과 같은 전통적 생명복제는 이루어져 왔지만 그 방식은 생식세포를 인공적인 방식으로 접합시켜 복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생명복제는 난자와 정자라는 암수의 생식세포 교환을 통한 것이 아니라 체세포의 디엔에이 군을 자체적으로 증식시켜 어른 생명체를 만드는 경우를 말한다. 더 쉽게 말해서 손오공이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훅하고 불어서 자신과 똑같이 수많은 손오공을 만드는 것과 원리적으로 같은 이야기이다. 이것이 바로 체세포 복제이며, 암수의 구실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자기복제의 속성을 지닌다.

이런 이야기는 많은 공상과학영화에서 이미 선을 보여 주었다.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체세포 복제하여 일상생활 속의 역할을 나누어 한다는 둥, 자신은 죽지만 죽기 직전에 체세포 복제한 동일한 자신을 다시 만들어 영원한 생명을 꾀한다는 이야기, 또는 인류를 정복한 외계인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인간을 배양하여 생산하는 대규모 인간생산공장을 운영한다는 등의 황당하고 공상적인 이야기들이다. 이런 이야기들의 원조는 뭐니뭐니해도 프랑켄슈타인 소설일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키메라의 등장은 처음에는 생소함,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한편의 재미난 이야기를 제공했으나 이제는 시큰둥한 과거의 이야기로 되어 버렸다. 그만큼 과학의 발전이 황당한 이야기들을 무디게 받아들일 정도로 현실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더욱이 최근 생명공학의 획기적인 발달과 함께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체세포 생명복제 기술이 이제는 과학의 상상적 희망에 그칠 일이 아니라 과학의 구체적 현실로 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인류의 희망이 될 수도 있으며 동시에 비관적 미래의 우려를 내포한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인류의 희망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생명공학기술 분야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반드시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생명복제 기술을 무조건 반대하는 일은 낭만적인 항변일 수 있다. 과학자는 과학 연구의 자유를 침해받아서는 안 되며, 또한 생명복세 기술을 통하여 수많은 난치병 환자와 재활환자의 치료를 돕는 일은 의료복지의 책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요즘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인 생명복세 기술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일반인들이 막연하게 느끼는 생명복제 기술에 대한 인식은 마치 인간의 전체 생명 자체를 그대로 복제하여 또 다른 인간을 만드는 그런 영화 속의 과장된 기술로 과대포장하여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기술은 그런 차원에까지 이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적 미래를 우려하는 마음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기술의 미래는 모든 가능한 상황들을 낳을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다. 생명복제 기술에 대한 우려와 걱정을 항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생명복제 기술에 부가될 수 있는 기술 부작용과 인간성 파괴의 우려는 생각보다 심각하여, 단순히 윤리적인 제한이나 사회적 통제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우선 연구의 자유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 살펴보자. 현재 우주 공간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외계신호 및 행성 지질학 등의 천체과학 연구에 대하여 어떤 과학자들도 자신의 자유로운 연구를 침해받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상당한 지능을 갖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확인되고, 따라서 현실적으로 그들과 지구인 사이에서 교신하거나 교통이 가능해진다는 가상을 할 수 있다면, 우리 지구인은 어떤 방식이든지 우주물리학과 같은 천체 과학탐구의 일관된 내부 약속이나 자체적인 규제를 당연히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천체 연구는 아직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약속이나 규제가 필요 없을 뿐이다. 그러나 생명공학 분야 특히 줄기세포 복제연구와 배아 증식에 대한 연구는 사회적 공감대 안에서 어떤 일관된 약속을 반드시 요구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 되었다. 그것은 결코 연구를 제한하거나 통제하려는 규제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생명공학 연구의 실태는 37억 년을 이어온 지구 생명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인간 종의 존재양상과 인식구조 및 삶의 양태를 한순간에 뒤엎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생명위기의 기폭제를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게놈프로젝트의 성과는 유전자의 정보일 뿐이며, 사실 그 정보가 어떻게 교체가 가능한지, 그리고 교체된 유전자가 실제로 생명체 속에서 생명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증식 과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실험방법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결국 오늘 이야기하는 생명복제라는 현실적 연구결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생명복제의 연구방법의 현실을 더 말해보기로 하자.

생명복제 기술이 핵심은 체세포를 이용한 핵 치환이 방법과 착상의 가능성 여부에 있다. 핵 치환은 특정 난자에서 그 핵을 완전히 제거한 후, 다른 체세포의 DNA를 집어넣어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배양 증식시키는 방법이다. ‘돌리 양’이나 황우석 교수 연구팀에서 생산한 복제소가 바로 이러한 방법을 이용해 태어났다. 핵 치환에 의해 조작한 새로운 세포나 혹은 서로 다른 생명체에서 추출한 디엔에이를 조합하여 만든 세포를 배양하여 새로운 생명체를 형성하는 생성세포는 원리적으로 암수의 정상적인 수정을 통해서 형성된 수정란 세포와 동일한 생명기능을 가질 것이라는 희망이 지금 논란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세포라 할지라도 외형적으로는 정상세포와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환 혹은 접합에 의한 인공세포의 성장은 정상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 유명하던 돌리 양도 비정상 비만증과 노화현상으로 인해 얼마 전에 죽었다. 생명복제의 기술적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생명복제 연구를 수행하는 과학자의 연구목적은 당뇨병 치료 등과 같은 생체 호르몬이나 장기이식 수술 혹은 불임환자 치료와 같은 인류의 궁극적인 의료복지를 추구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적 가치를 산출하는 동물 우생 종자를 육성함으로써 획기적으로 고비용을 절감하는데 있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기술의 미래를 보여주는 의지이다. 그러나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수반될 수 있는 부작용의 심각한 위험성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있다.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둔 생명복제 기술에 대한 대략적인 사회적 요청은 다음과 같다.

(1) 복제연구를 위해서 필요한 난자를 인공적으로 수집하는 과정이 투명해야 하며, 인권 특히 난자 제공자인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어야 한다.
(2) 수많은 시행착오에서 결합되는 핵결합과 착상의 성공 확률에서 배제되거나 실패한 배아에 대한 연구자 공동의 사회적 약속이 요청된다.
(3) 텔로미어 염색체와 같이 예상하지 못한 부작용 현상이나 이상 면역기능의 부적응 현상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한다. 또한 이종교배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여 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가 수행되어야 한다.
(4) 2001년 8월 미국의 국립보건원 NIH은 금전적 관계가 없는 배아에 대해서만 정식등록을 받아준다고 했지만, 생명공학계에서는 금전적 관계가 이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실험용으로만 배아줄기주 하나 당 5천 달러에 팔 수 있다는 미국의 어느 성공한 실험실의 소문은 곧 미래 상업적 교환가치의 근거가 될 것이 뻔하다. 이렇게 특허전쟁과 관련하여 ‘생명의 상업화’가 가속화될 조짐이 벌써 나타났다. 2001년 5월에 이미 미국의 생명공학 관련 대기업인 제론은 돌리 양을 복제했던 영국의 로슬린 연구소로부터 복제 기술 라이선스를 4500만 달러에 사들여 영국 특허청에 특허를 신청했다. 로슬린 연구소는 이미 98년부터 한국을 포함한 세계 100여 국가에 복제기술에 대한 동시 특허출원을 신청한 상태이다. 영국은 세계적으로도 생명의 상업화에 적극적인 무모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무모함은 실제로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특허출원 전쟁에서 독점권에 밀리면 안 된다는 상업화의 강박감이 한국의 생명공학 실험실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특정 복제 기술 하나가 60억 달러 정도의 시장성을 갖는다는 경제예측은 생명이 이미 상업화 전략에 희생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상업화의 가속도가 더 커질 것이라는 사회적 예측은 결코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생명공학 수준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다다랐다. 그에 해당하는 상업화에 대한 견제장치가 요청된다.

이런 사회적 혹은 순수기술적 문제에 대한 철저한 대비와 함께 인문학적 고려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생명의 발현은 어디부터인가와 같은 질문들이다. 배아 줄기세포를 연구용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체의 정체성을 어디에서부터 볼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귀결과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에 대한 논쟁이 매우 치열하다. 그 내용은 수정 순간부터 혹은 착상되는 순간부터인가 아니면 원시선 발생이 끝나는 14일 이후부터인가 혹은 배아 세포의 8 세포기 이후부터인가에 대한 기존의 논쟁은 생명체의 실체를 어디서부터 잡아야 하는가의 논쟁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식의 논쟁은 ‘영혼’이 무엇인가 하는 형이상학적 존재론이나 이 ‘사과’의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물질적 존재론의 논쟁보다 더 어려운 점이 도사려 있다. 왜냐하면 무생명의 물체에 대한 정체성 논의가 아니라 변화하고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논쟁의 속을 잘 들여다 볼 때 사회적 이해관계 안에 그 논의가 매몰되어서 철학적 논의가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생명에 대한 철학적인 의미를 좀더 심각하게 살펴야 한다. 생명윤리 문제에서 철학적 논의는 당장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접근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철학적 사유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와 어른을 따로 나누어서 인간의 정체성을 구획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보면 아이와 어른, 어떤 이는 여성과 남성, 나아가 유색인종과 백인종을 구분하여 인간의 정체성을 우열 비교했던 불행한 우생학의 역사가 있어왔고 또 지금도 있지만, 차별을 의도한 그러한 구별은 사회적인 구별이었지, 철학적인 구별이 결코 아니었다. 아이는 어른이 가지고 있는 절제된 이성을 결핍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여성이 남성이 가지고 있는 근육을 결핍했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유색인이 백인들의 제국주의 권력을 선점하지 못했다고 해서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렇듯이 성체와 배아를 차별하는 것은 최소한 인류학적 오류에 해당한다. 인류가 대재앙을 맞아서 절대 인구수가 매우 희소한 그런 가상상황을 상정해보자. 그런 상황에서 인간의 난자나 배아를 파괴시키는 일은 분명한 범죄로 규정될 것이 당연할 것이다. 지금은 인류 개체수가 너무 많아서 배아 논쟁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인류학적 오류라고 말했다. 완전과 결핍은 전체를 정의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완전과 결핍은 양적인 차이일 뿐, 질적인 차별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완전과 결핍은 공통분모의 요소를 갖는 연속의 존재이다. 우리는 그 공통분모의 요소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인간성의 공통분모가 과연 이성理性뿐인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보아야 한다.

호모 사피언스가 자랑하는 이성만을 기준으로 한다면 분명히 구별론자의 입장이 옳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성만을 유일한 잣대로 해야 한다는 입장은 바로 인간 이기주의의 극단이기도 하다. 이럴 경우 유클리드의 공리와 뉴턴 역학과 상대성이론을 발굴한 이성의 소유자인 바로 그런 서양인만이 인간 정체성의 핵심적 본질이 되어 버리는 생물학적 제국주의가 버젓이 활개 칠 수 있다. 이런 결과는 구체적으로 우생학적 차별주의와 맞닿아 있다. 나치 독가스 실험과 일본군 생체실험이라는 바로 얼마 지나지 않은 근대사에서 우리는 그 현장을 분명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인간의 부당한 도구로 전락하는 이성理性의 문제는 정보사회의 특징에서 더 잘 드러나는데, 특히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미래 디지털 산업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기술의 지향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2.2 디지털 기술의 미래와 주체적 자아

본격적인 디지털 사회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엄청난 기술의 해택을 받고 있지만 반면에 가공할 만한 가상세계의 위협성에 직면하고 있다. 첨단의 통신기술과 디지털 기술로 인해 휴대용 통신장비를 들고 다니는 개인은 모두가 독립적인 개인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정말 놀라운 변화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불과 15년 안팎의 변화들이다. 4-500백만 년 동안의 기나긴 원시인류의 생명사를 통해서 볼 때 그 시간은 편린의 조각조차도 되지 못한다. 인류문명을 이루어낸 지나간 일만 년의 역사와 비교하더라도 첨단 과학기술의 역사는 한줌 모래의 시간도 되지를 못한다. 이러한 급변하는 기술의 역사는 한 순간의 창조적 성과로만 보기 어렵다. 이는 원시적인 신화적 삶에서부터 인간 이성에 이르는 기나긴 문명사의 누적된 결과일 뿐이다. 문제는 그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런 속도로 변화해가는 인간의 과학기술의 문명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칫 인간이성의 오만과 자만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벤처기업의 성장신화가 채 피기도 전에 자본의 허구가 드러나게 된 뉴스가 요즘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다. 어쨌든 벤처기업의 핵은 바로 인터넷 정보산업이었고, 정보산업의 영업성 평가는 결국 전자상거래의 기술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전자상거래의 기술력이 바로 포르노 산업의 한 결과라는 점이다. 즉 인터넷상의 포르노 전자상거래가 전자결재 기술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인터넷의 가상세계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게임산업과 역시 포르노산업인 것이 전세계 인터넷 시장의 경향이다. 게임산업은 정말 가공할 정도로 성장을 하고 있으며 포르노산업 역시 사이버섹스의 영화 같은 이야기를 얼마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비추고 있다. 또한 인터넷몰은 시장구조의 대단한 변화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시장구조가 인터넷 시장의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보산업은 결국 디지털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결국 디지털의 편집기능 덕분이다. 대중가수들도 카메라만 잘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목소리를 디지털 편집하여 좋은 목소리의 가수로서 조작해 낼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다. 일본 고에이사의 대표적인 게임인 <대항해시대2>를 하다보면 한국인조차도 일본인의 우위성을 인정하고 마는 대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의식교육의 교과서라고 여겨질 정도이다. 내가 원하는 섹스 대상자로서의 이상형의 체형을 온라인 상으로 입력하여 나온 출력된 이성과 섹스를 할 날이 영화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이버 섹스는 한낱 비대면 섹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지켜 온 가정이라는 인류학적 틀이 붕괴되는 위협을 줄 수도 있다. 디지털의 개념이 전자제품 적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구조까지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디지털에 대한 개념적 파악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디지털 기술에 지배되지 않는 주체적 자아의 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개념을 이해하려면 그에 대비되는 아날로그 개념을 생각해 보면 좋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정의를 딱딱하게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아날로그는 정보의 단위가 연속적인 반면 디지털은 정보단위가 불연속적이며 일정한 단위를 가진다. 예를 들어 디지털 카메라는 종래의 아날로그 카메라가 필름으로 찍은 연속적인 화면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원래의 연속적인 화면을 매우 작은 불연속적인 단위의 뭉치로 보관하고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미 다 아는 바와 같이 그 작은 단위를 픽셀이라고 부른다. 그 단위 크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혹은 다른 말로 해서 화소수가 크면 클수록 연속적인 원래의 화면과 비슷해지는 것이다. 요즘은 텔레비전 송출방식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국가 정책사업을 시행하면서 디지털 텔레비전 광고가 많다. 그러나 디지털 텔레비전 기능이 아무리 좋아도 방송국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전파를 송출하지 않으면 디지털 텔레비전은 무용지물임을 알게 되었다. 디지털의 상용화는 단연코 개인용 컴퓨터부터였다. 컴퓨터에서 사용하는 작동원리는 주어진 정보를 영0과 일1이라는 기본단위의 전기신호로 바꾸어 정보를 주고받으며 보관하며 편집하는 일이다. 영과 일이라는 두 가지 기본단위로서 모든 정보를 처리하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디지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너무 상식적인 이런 일반적인 설명은 독자들을 우롱하는 설명일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개념적 기초를 이해해야만 디지털이 일으키는 사회적 파급현상을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의 중요 개념은 먼저 모든 정보를 임의대로 편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점은 가상현실의 문화적 충격을 수용하기 위한 절대조건이다. 디지털 음악을 하는 사람은 원래의 음악소리를 디지털 신호로 저장한 후에 그 디지털 신호들을 다시 조합하거나 수정하여 새로운 음악을 창출할 수 있다. 음색을 곱게 다듬거나, 박자를 재조정하는 일은 기본이고 소리 단위를 그림 단위로 이전하여 음악을 그림으로 재현하기도 한다.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패러디 재구성은 디지털 편집문화의 직접적인 소산이며, 영화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 등은 디지털 편집기술을 상업적으로 전환시킨 성공적인 사례로서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우리가 가상세계라고 하는 것은 결국 디지털 편집의 결과이다. 가상세계는 구성하기 위하여 디지털의 단위를 더 작게 만들고 또한 편집기술이 뛰어날수록 가상과 실재의 차이를 감지할 수 없게 된다.

디지털 가상세계가 지니는 편집가능성이라는 특징은 정보의 제거와 대체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지금 나의 현실이 과연 진짜 현실인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비판적 의심을 이 세계에 대하여 던졌다. 혹시 가상의 세계가 현실의 실재를 대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묻는 철학적 반성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뭐나 대단한 철학자만의 형이상학적 사유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상업적인 매트릭스라는 영화에서 그대로 재현되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의심과 질문이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고상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재 산업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와 직접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져서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으키는 문제들이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는 단순히 컴퓨터 산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른들 역시 놀고먹고 부동산 투기 바람 등의 사회적 풍조에 집단적으로 최면되어 현실을 현실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취적 꿈의 가면을 쓴 채 가상의 길을 가곤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호환이라는 단어를 자주 말한다. 서로 다른 프로그램 사이의 호환이 가능하다고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호환의 말뜻은 서로 환원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이는 곧 대체가능성을 의미한다.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자. 정말 제대로 만든 인조로봇과 그것을 제작한 인간이 서로 사랑을 한다고 치자. 이런 경우 인간의 감정과 로봇의 프로그램된 인지능력 사이에서 인지적 정보가 서로 환원가능하다는 뜻이며 이를 두고 호환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가 판타지로 그칠지 아니면 미래 과학기술의 성과로 이어질지 단언하기 어렵지만, 원리적으로는 디지털 정보단위의 크기를 더 작게 만들고 디지털 편집기술이 향상된다면 그런 이야기들이 공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될 수도 있다. 원리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원리적이라는 표현이 가능하기 위하여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정량적이며 계량화시켜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만약 인간이 정량적으로 재구성되지 않는다면 인간과 로봇 사이의 공상적인 사랑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원리적으로 가능한지 아니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아니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든지에 관계없이, 오늘의 현실은 디지털 이미지의 사회적 파급효과가 폭발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

물질적으로는 디지털 산업기술의 물질적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디지털 이미지의 정신적 폐해를 말하고 있다. 자동차를 타도 디지털이며 집에 와서 월드컵 중계방송을 봐도 디지털이다. 이 원고를 쓰고 고치며 전송하고 또한 종이 활자로 전환하는 것도 디지털 정보기술의 덕분이다. 한편 우리는 디지털 사회의 정신적 병리현상에 대하여 목청 높이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 못하는 데서 생기는 사회적 범죄들이 늘어만 간다. 일종의 문명 병리현상들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개인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만남의 공간이 형성된다고 말들 하지만, 그것은 주어지고 만들어진 시스템 내에서 이루어지는 불연속의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방식의 디지털 문화는 분명히 우리들이 수용해야 할 것이며, 이를 부정하기에는 변화의 파고가 이미 지나갔다. 인간관계의 새로운 형성과정이 디지털 문화변동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 사회적 부작용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디지털 문화의 특징 중의 하나인 개인의 개체화 현상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수긍할 수 있다. 컴퓨터나 전자기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만이 디지털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용자들 역시 디지털화 되고 있다는 말이다. 혹자는 광화문에 모인 붉은 악마나 인터넷 동호회의 활성화 현상을 두고 디지털 문화의 개체화 증상에 대하여 동조하지 않거나 반대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현상을 두고서 디지털 문화가 공동체 문화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오류 중의 큰 오류이다. 개체화 증상이 정말 심해지면 자기 소외의 병증이 발로한다. 소외 병증은 자기를 밖의 세계와 담을 쌓게 하며 이러한 담은 자기를 더더욱 단절의 성곽 안으로 가두게 한다. 타인과의 소외는 자기에 대한 소외를 자기 안에서 유발하며, 이는 자기 마취현상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디지털 문화에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없으며 그렇게 문제를 회피해서도 안 된다.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 중독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중독현상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 부동산 투기 중독, 명품 중독, 학벌 중독, 고시 중독, 유흥 중독 등에 비하면 디지털 가상 중독은 아무 것도 아니다. 문제는 바로 자아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아의 주체성이다. 중독 현상은 자아의 주체성을 포기한 채, 삶의 근간을 주술적인 확률에 의존한다. 그러자니 삶의 추동력을 우연과 확률의 방식에 자꾸 기대게 된다.

이제 일상화된 디지털 문화를 자아 회복의 계기로 전환시켜야 한다. 디지털에 종속되는 자아가 아니라 디지털 상징매체를 적극적으로 운영하고 관리하는 주체적 자아를 스스로 찾아나서야 한다. 그렇게 자아를 찾아가는 길은 실제로 어렵지 않다. 기계는 여전히 기계일 뿐이며 인간은 여전히 인간만의 고유한 본질이 남아있다. 우리는 그 점에 주목하면 된다. 첨단의 과학기술사회일지라도 인간의 고유한 사회적 특질이 남아있다. 그것은 인위적인 그 어떤 것도 따라올 수 없는 자연성이다. 기술이라는 말의 어원은 테크네techne로서 이는 자연적인 것과 대비되는 인위성을 의미한다. 아무리 고도의 기술사회에 사는 현대인이라도 자연적인 무엇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주체적 자아를 찾게 되는 것이다. 자연적이라는 말의 구체적인 뜻은 스스로 한다는 것이며 또한 저절로 되어가는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며 그리고 남의 의지에 따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신의 목적에 의해 자신의 실천에 의해 산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면 시행착오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시행착오를 두려워해서는 자아를 찾을 수 없다. 정밀하고 엄밀한 논리적 기계와 첨단의 과학기술은 오히려 시행착오가 없다. 그러나 주체적 자아는 그 안에 이미 시행착오의 이미지가 내재되어 있다. 이 점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자아의 주체성 혹은 자아의 당당함이 어느덧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자아의 주체성은 자연이 부여한 최고의 선물이었는데, 기술의 외형적 편리성과 물질의 달콤함 그리고 기계의 논리성 이면에 숨겨져 있어서 못 찾았을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숨겨진 것을 다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기술은 단지 삶의 도구일 뿐이다.

<참고문헌>

오진곤, 과학과 사회, 전파과학사
이중원 외, 인문학으로 과학읽기, 실천문학사
최종덕, 시앵티아 - 과학에 불어넣는 철학적 상상력, 당대
홍성태, 현실 정보사회의 이해, 문화과학사
하버마스, 이데올로기로서의 기술과 과학, 이성과 현실사

<요약>

현대는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사회임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기술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매우 협소하거나 전무한 편이다.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과학에서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의 천체학을 거쳐 현대 소립자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오늘날의 배아복제 기술이나 정보과학에 이르는 모든 과학과 기술의 양상들은 과학기술의 문제와 사회적 문제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상관성을 갖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과학기술과 사회 혹은 자아의 주체성이 어떻게 충돌되고 조화되는지를 인식하는 일은 현대인의 필연적인 과제이다.

거대 자본에 의해 이어가는 기술사회의 왜곡현상은 현실 사회의 공동체적 관계들이 깨지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관계의 끈들을 상실한 자아는 생존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남을 헐뜯고 남이 안 볼 때 대충 무임승차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쉽게 포기하거나 반대로 편집광에 가까운 자만심에 몰입될 위험이 있다.

이런 강박감과 자만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새롭게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신만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 역사의 그물망 속에서 내가 속한 위치를 거시적으로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객관적인 나의 모습을 세울 수 있다. 삶의 그물망을 무시한 역사성 없는 개인은 맹목적이고, 상업주의의 희생물이 될 뿐이다. 물질이 지배하는 왜곡된 기술사회의 성장 신화 속에서 사람들이 조화롭게 함께 살 수 있는 공동체의 끈이 아니라 자유라는 허울 아래 경쟁과 약육강식만을 낳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끈만을 강요한다.

이제 현대인은 기계화된 산업화 속에 매몰된 자아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기계나 사회조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삶의 주체자로서 기술 사회의 소외와 고립을 반문하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한다. 소외로부터의 해방은 기술에 지배당하는 나 자신을 회복하는 데 있다. 기술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기술을 결정해야만 한다. 기술은 단지 삶의 도구일 뿐이다.

글쓴이 : 최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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