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몸이다 고로 생각한다
서평: 여인석 번역의 『라메트리 철학선집』 (2020)

게재지 : 의철학연구 2020년 겨울호 (30호); 135-147쪽

게재일 : 2020년 12월 31일

서평자 : 최종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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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이다. 고로 생각한다.”
(볼테르, Letter Philo. sur L'Ame; 이 책의 246쪽에서 인용)


라메트리 번역 : 갈레노스가 말했다는 “좋은 의사는 또한 철학자이다”라는 표현은 유명하다. 마찬가지로 이 책 『라메트리 철학선집』의 옮긴이 여인석 교수는 라메트리 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갈레노스에서 라메트리까지 이어지는 철학적 전통에서 찾는다. 즉 의사이면서 철학자의 동시적 시선이 세계를 보는 더 좋은 시각을 준다는 점이다.(39쪽) “의학은 의술(at work)에서 철학인 것이고, 철학은 사회나 인간에게 의학에 해당한다.”(Gay, 2) 마찬가지로 의사로서 라메트리는 자신의 의학공부가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의학은 끝없는 공부가 필요한 정도로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Thomson 1995, xi) 번역자 여인석 교수는 이런 중요성을 자신의 의철학의 과제로 삼았다고 말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라메트리의 작품을 이해하는 일은 철학과 의학 양쪽의 지혜와 지식을 겹쳐놓아야만 가능하다. 그런 기회를 우리들에게 제공한 것이 여인석 교수의 이 책 『라메트리 철학선집』이다.

여인석 교수가 옮긴 책 『라메트리 철학선집』은 의사이며 철학자이면서 자연학자인 라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 1709-1751)의 『인간기계론』(1747) 인간기계론은 1747년 홀란드에서 출간했는데, 당대 최고의 지식인 뷔퐁의 자연사Natural History를 참조하여 인간에 대한 자연사적 접근을 시도한 책이다.(Thomson 1995, iv)
, 『영혼론』(1745/1750) 이 역서의 원본 판형은 1745년 초판이 아니라 1750년 수정판이다.(25쪽) 『영혼론』 초판은 『영혼의 자연학』Histoire Naturelle de L'Ame이라는 이름으로 1745년 출판되었다. 그 내용에서나 제목에서나 무신론을 강조한 『영혼론』은 당시 지식인에게 큰 충격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이런 비난을 감안하여 1750년 수정본을 다시 발간했는데, 라메트리는 수정본의 제목을 『영혼의 탐구』Trait de l’Ame로 바꾸어서 세상에 내놓았다. 수정본이라고 해서 크게 바뀐 것은 아니지만 신을 부정하는 듯 여겨지는 표현을 자제한 것이 수정판의 의도였다.(Thomson 1995, xv; Verbeek 1988) 이 번역의 원본은 『영혼의 자연학』(1745년)이 아니라 수정판 『영혼의 탐구』라고 역자는 말하고 있으며, 실제로 이 원고는 수정판이라고 라메트리가 쓰고 있다.(271쪽)

, 『인간식물론』(1748)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라메트리의 기본 입장은 위 책의 제목에서 보듯 기계론과 반-관념론에 있다.

라메트리는 분류학자 린네(Carl von Linné, 1707-1778) 그리고 뷔퐁(Comte de Buffon, 1707-1788)과 함께 18세기 최고의 자연학자로 인정받는다. 라메트리는 동시대 린네의 종분류를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라메트리는 린네의 자연의 목적론적 개념을 크게 비판하지만, 생명종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린네의 유비추론 analogical reasoning방법론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라메트리는 린네의 생물종 분류법을 대중에게 알린 사람이기도 하다.(Duris 1995) 한편 라메트리는 린네와 동시대 자연학자이면서도 린네의 실체론 기반 자연학을 철저하게 비판한 경험주의 자연학자인 뷔퐁에서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최종덕 2020, 149)

라메트리 기계론에 대하여 : 과학철학자 해킹은 라메트리를 기계론자mechanist이며 유물론자materialist이고 동시에 최고의 자연학자natural historian로 평가한다.(Hacking 2009, 184) 라메트리는 자신의 『인간기계론』(1747)에서 자주 언급했듯이,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기하학적 기계론이지만, 자신의 기계론은 생명구성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질적 기계론에 해당한다고 스스로 설명한다. 데카르트가 제기한 실체론과 기계론을 비판하며 라메트리는 임상의사를 거치면서 느끼고 경험했던 것을 형상화한 경험론 철학과 질적 기계론을 제시했다.(40쪽) 그런데 질적 기계론의 의미는 철학적으로 애매한 편이다. 왜냐면 단순히 톱니바퀴로 구성된 기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로 구성되었지만 그 구성방식은 인간에게 다 알려져 있지 않은 생명의 역동성을 갖추고 있다고 라메트리는 생각했다. 생명을 가진 몸의 기계성은 운동과 감각 작용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품고 있어서 데카르트의 설명방식으로는 해명이 되지 않고 오히려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우주론에 해당한다고 라메트리는 말한다.(이 책 26쪽) 라메트리는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기계론에서 실체 관념을 배제하고 순수 물질로 기계론을 설명한 자연학적 일원론의 기계론을 보여주었다.(Zammito 2008)

데카르트와의 차이: 기계의 의미는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1)인간의 제조물로서 기계, 2)신의 소산물로서 기계, 3)자연의 현상으로서 기계이다. 데카르트의 기계는 신의 소산물로서 실체의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 기계이다 반면 라메트리의 기계는 자연의 소산물로서 기계이다. 그런 기계는 실체의 위상이 아니라 자체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라메트리 기계론의 존재론적 특징은 기계를 작동시키는 동력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내부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실은 이런 기계의 특징은 뉴턴에서도 마찬가지다. 라메트리의 기계론은 이렇게 운동의 원인을 초월적 존재에 두는 기존의 실체론이나 형이상학적 접근을 거부한다. 그래서 우리의 몸도 자신을 활성화시키는 운동력을 몸 안에 갖고 있다.(27쪽) 인간의 몸은 스스로 태엽을 감아 영구 운동을 하는 살아있는 기계라는 점에서(54쪽) 라메트리의 기계론은 데카르트의 그것과 다르다. 이런 기계론을 생기론적 기계론vital materialism이라고도 하는데, 실제로는 라메트리만이 아니라 동시대 프랑스 자연학자였던 모퍼티Pierre Maupertuis, 뷔퐁, 디드로도 같이 살아있는 기계의 사유방식을 취했다.(Zammito 2008)
내부가 아닌 외부에 존재하는 절대자 신이 기계를 움직이게 하는 태엽을 감아주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이유로 기계가 작동할 수 있다는 사유방식이 바로 데카르트 기계론이다.(144쪽) 이런 점에서 데카르트와 라메트리 기계론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와의 관계 : 데카르트와 라메트리의 차이는 라메트리와 스피노자 사이의 관계를 유도한다. 데카르트 철학과 대척점에 놓여 졌다고 평가되는 스피노자 인식론에 라메트리 사상이 근접되어 있다는 측면과 데카르트와 라메트리가 이해하는 기계론에 대한 차이가 있다는 측면, 이 두 측면이 동일한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스피노자에서 물질과 정신이란 하나의 실체가 양태의 두 가지 속성으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유물론자로서 라메트리도 자연의 단일성을 말했다. 물론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 스피노자에서 물질(연장)이 양태의 수준이었다면, 라메트리에서 물질은 정신을 포괄하고 지배하는 단일한 자연의 실체라는 점이다. 정신은 물질에서 파생되고 물질에 의해 조직된 속성일 뿐이며 사유도 감각작용의 일환이라는 것이 라메트리 존재론의 핵심이다.(40쪽)

정신과 혼에 대하여 : 우리들 대부분은 정신이라는 압박아래 가리워진 몸의 실제를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의사는 임상경험을 통해 몸의 진실을 볼 수 있다고 라메트리는 생각했다. 몸을 무시하고 정신만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철학자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말이다.(49쪽) 경험세계를 무시한 채 공허한 구름 속에서 헤매는 철학자들을 라메트리는 장님에 비유했다.(50쪽) 몸에 대하여 무지하고 그 무지가 광신으로 확장되어 공부의 길을 완전히 잘못 든 신학자들을 풍자한 말이기도 하다.(50쪽) 정신이나 영혼에 사로잡힌 철학자나 신학자의 오류를 보여주기 위하여 라메트리는 다음의 예를 들었다. 자신의 다리가 침대 속에 들어 있는지를 묻는 사지마비 환자가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이런 환자의 고통은 일종의 환지통에 해당하는 데 이런 통증의 느낌은 환자에게 환각과 착란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51쪽) 이런 문구도 있다. “강한 술을 몸 안에 부어보라. 오만한 용기로 무장한 영혼은 용맹스러워지고, 물을 마셨으며 도망쳤을 병사가 난폭해져서 북소리에 죽음을 향해 기꺼이 돌진한다.”(55쪽) 혈관 안 피의 박동의 이상 현상을 의사가 알아챌 수 있다면 불안증과 강박증에 연관되는 불면증의 원인을 찾아볼 수 있고, 나아가 질투와 증오 그리고 탐욕이나 야망에 사로잡힌 영혼을 평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울 수도 있다.(53쪽) 그만큼 몸이 소위 영혼이라고 일컫는 작용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는 뜻을 라메트리는 강조했다. 그의 생각은 관념적 언급이 아니라 의사 경험을 거치면서 얻은 무수히 많은 임상결과였다. 정신에 해당하는 “혼은 본질적으로 육체의 기관에 의존하며, 그와 더불어 형성되고 생장하고 쇠퇴한다. 따라서 혼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274쪽) 라메트리의 의철학은 기존의 신학자와 형이상학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상상력과 주의력 : 그러면 상상력, 관심, 사랑, 주의력 등 현실적으로 보여지는 정신 작용에 대하여 라메트리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정신의 모체matrice로서 뇌를 상정했다. 뇌는 몸의 모체(자궁)에서 변화된 몸이다.(57쪽) 우리는 몸에서 우러나온 감정과 본능을 통해서 정신을 작동하도록 되었다. 정신 작용을 활용하여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고 상상력을 불러 확장시킬 수 있었다. “상상력 덕분에 학문은 꽃을 피우고 예술은 아름다움을 더하고 숲은 말을 하며 메아리는 한숨을 쉬고 바위는 눈물을 흘리며 대리석은 숨을 쉰다. 상상력은 죽어있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 또한 상상력은 사랑에 빠진 젊은 여인에게 자극적인 관능적 매력을 더해준다. ,, 상상력은 추론하고 판단하고 분석하고 비교하고 심화시킨다.”(73쪽)

라메트리는 상상력에 의한 욕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상상은 단순히 혼의 작용으로 그치지 않고 몸(근육)의 작용을 일으키고 몸의 작동이 다시 혼의 교감을 상승시킨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라메트리의 언어를 여인석 교수는 ‘상상력과 교통하는 감응’이라고 아주 적절한 우리말로 번역해냈다. “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욕망이 일어나는 이유 - 근육들이 상상력과 교통하는 일종의 감응sympathie”에 있다. 이런 감응의 상상력도 전기나 운동능력, 불침투성, 연장 등과 같은 물질의 속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116쪽) 앞서 논의한 스피노자의 일원론의 존재론이 여기에 침윤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라메트리 기계의 작동원리가 외부 동력이 아닌 내부 자체적인 힘이라고 앞서 말했다. 이는 스피노자의 내재적 운동력에 비유될 수 있다. 스피노자의 내재적 운동력은 단일한 우주의 질서와 정열로 드러난다.(143쪽) 마찬가지로 정열의 상상력을 제어하는 또 다른 혼의 질서가 있는데 그것이 주의력이다.

정신의 모체로부터 상상력만이 아니라 주의력도 태어났다. 상상력이 예술과 학문, 사랑과 슬픔과 기쁨, 감정과 추론을 활성화시키는 힘이라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사물의 표면만 보는 가벼움에 빠지거나 한곳에 빠져 다른 세상을 보지 못하는 광신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이를 제어하는 연습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주의력이다.(77쪽) 서평자는 ‘상상력’과 ‘주의력’이라는 두 가지 작용에 대하여 큰 흥미를 갖게 되었다. 라메트리가 말한 상상력과 주의력은 오늘날의 범주에서 말하면 인문학적 사유구조와 과학적 사유구조의 원형에 해당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감각에 대하여 : 고대 철학자들은 몸과 혼을 두 실체 형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혼은 식물혼, 감각혼, 이성혼으로 나뉜다고 보았다.(151쪽) 그러나 라메트리는 그런 혼이라고 하는 작용은 실제로 감각 작용일 뿐임을 알아차렸다. 그런 감각은 신체기관에 의해 파생된 결과라는 점을(163쪽) 파악한 것이 라메트리의 놀라운 기계론 철학이다. 라메트리 철학의 또 다른 놀라운 점은 당시 인식론자들에 의해 많이 언급되어진 사물의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에 대한 반성이었다. 사물의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구분은 로크(John Locke, 1632-1704),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 뉴튼(Isaac Newton 1643-1727)이 강조한 점이다. 1차 성질은 크기 무게 등의 연장처럼 사물 본연에 내재된 성질로서 누구나 측정해도 객관의 값으로 표현되는 성질이다. 2차 성질은 맛, 소리, 촉감처럼 사람마다 다르게 느낄 수 있는 주관적인 성질을 말한다. 이러한 경험론자들의 구분은 관념론자인 버클리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버클리는 1차 성질조차도 지각된 성질이고 객관적인 값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모든 관념론자들은 당연히 버클리처럼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라메트리는 다른 관점에서 1차 성질의 의미를 반성했다. 1차 성질의 감각조차도 실제로는 우리 몸 감각기관이 파악한 감각작용의 결과라는 것이다. 관념론의 형이상학자인 버클리는 1차 성질마저도 신이 지각하는 대로 표현되는 것일 뿐이라고 한 반면 라메트리는 사물의 객관적 성질도 몸(뇌)의 감각기관에 의존된 성질이라고 한다. 이성적 파악력도 몸의 소산물이라는 점이다.(244-5쪽) 이와 관련하여, “감각이 없으면 관념도 없다. 감각이 적을수록 관념도 적다. 교육(후천적 경험)이 부족하면 관념도 적다. 받아들인 감각이 없다면 관념도 없다”는 라메트리의 구절은 유명하다.(274쪽) 경험과 관찰만이 우리를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라메트리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본성에 대하여 : 인간의 혼이나 동물의 혼이나 다 같이 몸이라는 자연사의 변형일 뿐이다. 물론 동물과 인간 사이의 양적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298쪽) 동물이나 인간이나 하나의 자연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을 라메트리는 재미나게 표현했다. 자연은 하나의 동일한 반죽을 사용하여 인간 기계나 동물 기계를 만들었는데, 단지 다른 효모를 넣어 반죽했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은 다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유를 한 라메트리의 생각은 인간의 선천적 본능에는 양심이나 선한 행동을 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있으며, 이런 메커니즘은 동물에게도 작용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84쪽) “자연은 우리 모두를 오직 행복하도록 창조했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고 타인에게 감사함으로 느끼는 기쁨은 지극히 크며, 덕을 행하고 온유하고 인정있고 유순하며 자비롭고 동정심 많고 관대함(덕을 포함)에서 느끼는 만족감은 지극히 크므로 덕성을 타고나지 못한 불행한 이들은 누구나 충분히 처벌받았다고 나(라메트리)는 주장한다.”(87쪽)

의학적 행복론 : 『인간식물론』(1748)에서 라메트리는 “자연은 그다지 통일적이지 않다”고 말한다.(277쪽) 서평자는 여기서 ‘통일적’이라는 용어 대신에 ‘제일적’(齊一的 )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라메트리가 크게 영향받은 고대 유물론자 에피쿠로스의 인식론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라메트리는 고대 유물론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후예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다.(40쪽) 예를 들어 혼은 크건 작건 어떤 크기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는 유물론과(176쪽) 도덕적 행복론은 전적으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이어받고 있다.

에피쿠로스에서 영혼을 포함한 물질의 단위인 원자는 운동의 변화를 통해서 비로소 인식되어진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모든 사물은 운동 그 자체가 아니라 운동의 변화를 통해서 인식된다는 점이 에피쿠로스 인식론의 요지이다. 운동의 변화란 물질(원자)의 고정된 궤도운동이 아니라 궤도에서 벗어나 탈선(clinamen)될 때를 의미한다. 우리 철학사 책에서는 이런 탈선을 보통 일탈성 혹은 원어 그대로 클리나멘이라고 부른다. 클리나멘의 일탈적 운동성은 에피쿠로스 철학으로 가장 잘 알려진 향유하는 도덕주의(쾌락주의)의 존재론적 토대이다. 클리나멘의 운동이 자연의 기본 형상이며, 그래서 자연은 고정된 운동이 아닌 일탈의 운동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질서적이라고 해서 제일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일탈의 의미는 자연의 운동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외부 절대자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그 대신 자연 자체, 물질 자체 혹은 원자 자체의 자족적인 동력autarkeia에 의해 자연의 물체들이 움직이고 있음을 뜻한다. 이 점이 바로 라메트리가 에피쿠로스를 좋아하게 된 이유이다. 우리의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은 외부에서 오거나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만들어지거나 혹은 나로부터 생긴다는 것이 에피쿠로스의 행복론이고, 에피쿠로스는 이런 행복을 헤도네hedoně로 표현했다.(최종덕 2017, 160)

『인간식물론』에서 라메트리가 말한 전성설preformation theory의 유비는 완전한 형태를 갖춘 극소형의 인간이 정자 안에 미리 존재한다는 내용을 시사한다.(282쪽) 그런데 라메트리의 전성설의 진짜 의미는 외부의 절대자나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이미 우리 안에 행복의 씨앗이 존재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데 있었다. 19세기 라메트리 최고의 해석가 랑쥐(Friedrich-Albert Lange 1828-1875)는 라메트리의 무신론과 행복론을 연결하여 “무신론자가 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Lange 1877, 354) 그리고 고대철학과 의학을 연결시킨 울프는 라메트리를 평가하기를, 에피쿠로스의 행복론과 데카르트의 기계론을 합쳐 놓은 것이라고 말한다.(Wolfe 2009, 69) 울프는 그런 라메트리의 행복론을 “의학적 에피쿠로스주의”(medical Epicureanism)라고 표현했다. 의학적 에피쿠로스주의에서 보건데, 건강은 선천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1)자신의 몸으로부터 어떻게 몸의 내재적 기계성을 인지할 수 있는지, (2)자신의 몸을 스스로 어떻게 관리하여 몸의 가소성plasticity을 유지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울프는 그런 몸의 행복을 라메트리의 ‘살아있는 기계’living machine에 비유하여 “생명의 행복”(organic happiness)이라고 했다.(Wolfe 2009, 82)

번역서에 대하여 : 옮긴이는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메트리의 번역이 인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번역자로서 더없이 큰 보람과 기쁨이 될 것이다.”(302쪽) 여인석 교수가 번역한 이 책 『라메트리 철학선집』은 라메트리 사유구조에 관심이 많았던 서평자에게 전보다 훨씬 진척된 공부의 계기를 올려주었다. 라메트리 작품에서 특히 기계론과 관련하여 데카르트와의 미묘한 차이를 놓칠 수 있는 함정이 많은데, 옮긴이는 원전의 의미를 번역한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의미의 난관을 잘 헤쳐 나가도록 해주었다. 라메트리 3권의 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서 출판한 이 책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라 근대의 인식론과 의학을 연결하여 조직한 의철학의 원형을 담고 있다. 데카르트에 치우친 종래의 기계론과 다르게 생각하는 독자, 현대 의과학의 인식론적 원형에 관심을 둔 독자에서부터 형이상학 없이도 철학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까지 모두에게 강추한다.

<참고문헌>

Duris, Pascal 1995, "Monsieur Machine contre l'homme-cheval. La Mettrie critique et vulgarisateur de Linné." History and Philosophy of the Life Sciences 17(2): 253-270
Gay, Peter 2013, The Enlightenment: An Interpretation, vol.2, The Science of Freedom, 2.
Hacking, Ian 2009, "La Mettrie’s Soul: Vertigo, Fever, Massacre, and The Natural History." CBMH/BCHM 26(1): 179-202
Kathleen Wellman 1992, La Mettrie: Medicine, Philosophy, and Enlightenment. Duke University Press
Lange, Friedrich-Albert 1877, De la Mettrie. in Histoire du matérialisme, et critique de son importance à notre époque Traduction par B. Pommerol. C. Reinwald, 1877 (tome 1, p. 336-376).
Thomson A. 1996, Machine Man and Other Writings. Cambridge University Press
Verbeek, Théo 1988, Le traité de l'âme de La Mettrie: Julien Offray de La Mettrie : le traité de l'âme; l'abrégé des systèmes / éd. crit. avec une introduction et un comm. historiques par Théo Verbeek, Volume 1.
Wolfe C.T. 2009, “A happiness fit for organic bodies: La Mettrie’s medical Epicureanism”, in Leddy N and Lifschitz A.S.(eds.) Epicurus in the Enlightenment. Oxford 2009. pp.69-84
Zammito, John 2008, "Médecin‐philosoph : Persona for Radical Enlightenment". Intellectual History Review(2008)
최종덕 2017, “마르크스가 본 에피쿠로스의 행복한 자유”,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정암학당 편 『아주 오래된 질문들』 동녘출판사 2017: 137-162
최종덕 2020, 『의학의 철학』 씨아이알
의철학연구 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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