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진화, 생물학적 휴머니즘 |
|
한알마을 강의 2021년10월4일 생명, 노화, 죽음: 생물학적 휴머니즘 최종덕(philonatu.com) 1. 생명공감의 공부 이 강의록은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2장은 10월4일 강의용이고 3장은 10월11일 강의용이다. 1장은 전체를 읽는 관점에 해당한다. 진화생물학의 과학철학 전공자로서 삶과 죽음이라는 큰 주제로 진행되는 프로그램 중에서 생명철학 이야기가 이 강좌의 중심이다. 이 이야기를 위해 과학이론이나 철학담론으로가 아니라 먼저 두 가지 삶의 스토리로 시작하려 한다. 하나는 미국 보디빌더 출신 65세 남성 앤드레이드 이야기이며, 다른 이야기는 심장 수술을 원하는 87세 여성의 심정을 그린 담당의사의 보고서이다.(최종덕 2020) 젊었을 때부터 철인경기를 포함한 근력운동으로 미국 보디빌더 계에서도 유명했었고, 어느 덧 65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30대의 몸매로 부러움을 받아온 앤드레이드Eddie Andrade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생을 마감하는 극단의 선택을 했다. 건강강박증으로 시작된 우울증으로 65세의 젊은 나이에 권총 자살을 한 것이다. 나이가 더 들면 지금의 몸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극심한 불안증에 시달려 왔었다. 남들이 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정도의 탄탄한 몸매를 가졌지만, 자신이 보기엔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미래의 그림자만이 자신에게 비춰질 뿐이었다. 결국 그는 남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으로 향했다. 또 다른 이야기는 노인을 보는 선입관에 관한 것이다. 대동맥 판막과 관상동맥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알게 된 87세의 여성 이야기인데, 그녀는 이미 개심술에 관한 의료정보를 충분히 인지하고 수술을 요청했다. 처음에 담당의사는 그녀가 개심술을 받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라고 생각했다. 담당의사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그녀의 의지를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 나이에 자연적인 노화현상이라서 위험한 개심술 같은 큰 수술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담당의사는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환자의 의지는 환자 나이 87세이거나 혹은 37세이거나 무관하게 질적으로 같다는 점을 깨달았다. 의사는 개심술을 결정했고, 이후 그녀는 6년을 건강하게 살았다. 담당의사 티볼트는 87세 환자의 관점에서 이런 임상상황을 논문으로 발표했는데, 그 논문제목이 “87세, 내 나이가 어때서”Too Old For What?이다. ‘나’라는 인생 안에 이 두 가지 삶의 흔적들이 이미 상존하고 있다. 첫째 이야기처럼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는 나이와 무관하게 나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끊임없이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잘 아는데, 실상은 인정욕구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나아가 둘째 이야기처럼 나 역시 나이 들어 제풀에 죽지 않고 젊게 살아보려고 애 쓰고 있지만, 남들은 나의 노력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현실이다. 남들이 나이든 나를 쳐다보는 편견과 선입관을 뭐라 탓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도 젊었을 때 노인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급속한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에 대하여 많이들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노후를 살아가는 구체적 대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취미생활도 찾아보고 새로운 것에 도전도 해보고 저 멀리 여행도 가보지만 아직도 오래 남은 노후의 여지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50대는 물론이거니와 소위 오팔 세대도 자신을 나이 많이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점이 베이비붐 세대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래도 세대 차이에서 오는 나이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느낌과 남이 나를 생각하는 느낌 사이에는 크레바스 간극처럼 깊이 파인 내면의 갈등이 존재한다. 내가 돈이 많아도, 권력이 세도, 친구우정이 쌓여도, 내 몸이 건강해도, 하다못해 사랑하는 배우자가 곁에 있어도 이런 크레바스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간격을 좁히지 못할지라도 간극을 연결하는 다리가 가능한데, 그것은 세상을 해석하고 나를 행동하게 하는 생명을 공감하는 공부이다. 필자는 이를 “생명공감의 공부”라고 표현한다. 생명공감의 공부는 외로움과 죽음에 마주한 나 자신을 직시하는 삶의 태도로 확장될 수 있다.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지만, 죽음 이상으로 외로움을 더 두려워한다. 외로움은 나의 현실로 다가오는 두려움이지만, 죽음은 나의 현실보다 그들의 현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두려움의 상황이지만, 막상 죽음은 나의 죽음이 아니라 3인칭의 죽음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전호근 2021, 316) 쉽게 말해서 말로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말을 많이 하지만, 막상 그 죽음이 나에게 올 것이라는 생각까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3인칭 죽음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보다 외로움을 더 실질적인 고통으로 그리고 현실적인 두려움으로 받아들d는 역설에 빠진다. 남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 이후에는 나의 사회화는 없어진다. 그러나 외로움은 외로움을 겪는 과정 자체에도 사회화는 진행되기 때문에 사람은 외로움을 더 많이 더 세게 느끼는 악순환에 빠진다. 살아있는 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의 본성을 피할 수 없어서 서로 모여 사는 연결망(공동체)에서 쫓겨나거나 빗겨난 사람은 자신의 외로움을 자기 파멸로까지 과잉대응한다. 농경정착기 이전 구석기 시대에서 그런 외로움은 곧 자기 생존의 종말로 이어졌다. 이를 거꾸로 볼 때(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감정은 개체보존에 이익이 되는 인간본능의 형질로서 공동체 번성에 도움되는 긍정 요소로 볼 수 있다. 문명환경으로 급변한 현대인에게 그런 긍정 요인은 실현될 수 없지만 말이다.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그런 외로움은 자기 내면화된 고통 속에서 죽음이라는 극단의 선택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무서운 외로움의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우리는 가족도 이루고, 친구도 찾고, 돈도 벌고, 유투버로 활동하거나 SNS에 댓글을 열심히 올리는 등, 취미생활도 열심히 하지만, 아무리 그런들 내 내면에서 치밀어 오르는 외로움의 감정을 없애기 어렵다. 채우고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욕망이듯이, 아무리 이겨내려고 온갖 인생활동을 투자해도 악순환되는 외로움의 감정은 계속 밀려올 뿐이다. 욕망이나 외로움의 느낌이나 본질적으로 인간 본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1)태어나면서 엄마의 품을 찾는 순간부터 (2)왕따를 당했던 외로움의 어린 시절을 거쳐 (3)친구와 애인을 갈애하며 질풍노도로 몰아치는 청년의 고독 전쟁 시절로 넘어서 (4)왕성한 사회활동에 외로움조차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였던 중년에게도 내면의 외로움이 엄습하는데, (5)임종 직전까지도 외로워하면서 이 세상을 마감한다. 이렇게 외로움의 느낌을 피할 수 없어서 삶의 실존이라는 지평선 안으로 외로움의 느낌은 아주 가깝게 다가오지만 죽음에 대한 느낌은 지평선 저 너머 멀찌감치 있어서 자기에게는 오지 않을 것으로 착각한다. 외로움 여기서 ‘외로움’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표현은 ‘외로움을 느끼는 감정’ 이다. 다시 말해서 ‘외로움’은 ‘외로움을 느끼는 감정’의 줄인말로 생각하면 된다. 과 함께 하여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일, 너의 죽음, 그들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실존으로 느끼는 일은 나이 먹는다고 자동적으로 되지 않고 항상 연습해야 가능해진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외로운 존재이며 물리적으로 죽어가는 존재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 외로워지고 죽음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외롭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삶의 사태가 바로 삶의 실존이지만, 우리는 그런 삶의 사태를 직면하기 싫어한다. 생명공감이란 그런 삶의 실존을 수긍하고 당연한 삶의 사태들을 현재 시점으로 수용하는 일이다. 현재로 수용하는 일은 나 자신을 순간순간 관찰하여 현재의 나를 되돌아보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 노력이 바로 외로움의 사회화를 이루면서 나의 죽음, 내 죽음의 실존을 공감하는 공부이다. 이런 공부를 “생명공감의 공부”라고 표현한 것이다. 생명공감의 공부를 위한 구체적인 내용은 (1)외로움의 사회화와 (2)죽음의 현존화이다. 첫째 외로움의 사회화란 외로움의 내재화에 빠지지 않는 삶의 연습이며 쉽게 말해서 외로움을 피하지 않고 외로움을 마주하고 죽음까지 어깨동무하고 같이 간다는 뜻이다. 외로움과 싸우지 말고 내 삶의 방편으로 함께 하는 내 인생경로 통채의 생명공감 프로젝트는 요즘과 같은 코비드-19 시절에 딱 맞는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외로움과 싸우느라 지쳐서 오히려 외로움 안으로 깊이 빠져버리는 것을 ‘외로움의 내재화’라고 한다면, 외로움을 향유하여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성찰하고 삶의 주인으로 만드는 외로움을 ‘외로움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다. 외로움을 더 많이 연습한 사람이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활동도 더 잘한다. 왜냐하면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행동습관은 결국 공동체 유지와 번성에 중요한 원동력으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이겨보려는 한 가지 수단으로 사회적 활동에 빠지는 사람은 결국 그 공동체에서도 자신의 연결망을 직조하기 어렵다. 외로움을 피하지 않는 구성원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집단일수록 바로 그 집단 안에서 성공적인 협동성이 더 많이 나타난다는 행동주의 심리학의 연구결과는 흔한 편이다. 그런 연구결과에 따르면 외로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작업수행율을 높이는 기능성 학습보다는 인문학 공부를 권유하면 더 좋다. 외로움의 사회화란 나의 뇌를 행동하게 하여 인지력을 높이고, 나의 몸을 행동하게 하여 운동력을 유지하게 하며, 우리 공동체를 움직이게 하는 생명공감 능력을 넓히는 일이다. 노화의 결과로 신체-정신 행동이 줄어든다기보다 신체-정신 행동이 줄어든 결과로 노화가 온다는 사실은 노화의학의 기본이다. 이 사실을 인지할 때 외로움의 사회화는 나에게 비로소 체현된다. 그래서 더 행복해 질 수 있다. 둘째 죽음의 현존화란 죽음을 현재 시점에서 받아들이는 일이다. 사람들은 죽음의 현존을 대체로 거부한 채 죽음 이후의 미래를 설정하여 오지도 않은 미래가 현재를 지배하게 만든다. 혹은 태어나기도 이전 과거가 현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죽음의 이해는 죽음을 관념화시키는 일이다. 죽음의 관념화는 죽음의 사태를 영원한 미래(실제로 도래하지 않는 관념화된 미래)에 두거나 영원한 과거(거스를 수 없는 없는 결정된 과거)에 두면서 현재를 회피한다. 예를 들어 미래가 현재를 지배한다는 관념에는 내세론이 있다. 과거가 현재를 지배한다는 관념에는 운명론이 있다. 이런 관념의 공통점은 죽음을 관념화한다는 점이다. 관념 생성 능력을 갖게 된 호모사피언스는 죽음 관념을 제의祭儀로 발전시켰다. 관념화된 죽음 인식은 인류문명사에서 급진적 발달을 준 긍정적 전환점으로 볼 수 있지만, 문화인류학에서 죽음의 관념화는 인류발달의 역사에서 문명전환을 가져오게 한 중요한 변화였다. 우리 조상 호모사피언스는 자신의 정신행위에서 자연을 추상화하고 관념화하고 기호화하는 상징 능력을 얻게 되었다. 조상의 상징 능력은 더 발전되어 제례를 지내고 기복을 구하며 과거의 행로를 추적하고 미래의 경로를 예측하는 의례문화를 만들어 내었다. 의례문화에서 죽음이 관념화되는 경우들이 생긴다. 동시에 죽음을 공포와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고 불로장생의 욕망처럼 생애에 대한 강한 집착을 표면화시키는 부정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나 불로장생과 영생의 욕망은 죽음의 현재성에 대해 눈감아 버린다. 거꾸로 말해서 죽음을 현재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전환은 생명공감의 조건이다. 죽음이 나의 시간 안에서 현존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나의 생명개체가 처음부터 미소한 한 알의 좁쌀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 일에 보탬이 된다. 미리내가 흐르는 밤하늘의 웅장함을 느끼는 조상의 마음에서 혹은 첨단 천체물리학의 지식을 가진 현대인의 마음에서 ‘나’라는 한 개체의 미소함을 인정한다면 나에 대한 집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며 내 죽음에 대한 공포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죽음인식의 현존화라고 표현했다. 2. 생명과학에서 생명과 노화: 생물학적 휴머니즘의 가능성 이하 원고는 본인의 저서 <의학의 철학> 10장 노화의학 부분에서 차용된 것입니다. 강의용 원고로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도 태어나면서, 재촉해서 죽음으로 가는구나.” (That he not busy being born, Is busy dying) 밥 딜런의 <괜찮아, 엄마> 중에서 2.1 노화 죽음인식의 관념화가 현대자본과 만나서 의료비즈니스가 증대된다. 무병장수, 불로장생의 욕망의 구조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은 철학자와 과학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하여 불로장생의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2012년 혈액 분석기구 ‘에디슨’ 의료장비를 통해 피 몇 방울로 암과 당뇨 등 노화 관련 240여 질병을 검사할 수 있다는 스타트업 기업 테라노스는 2018년에 와서야 창업자의 사기극으로 끝났다. 이 사기극은 과학기술 기반 창업은 자유이지만, 창업 후 상업적 주도권은 과학지식이 아니라 자본권력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기술수준이 불완전하지만 기업의 현란한 노화방지 광고에 대중은 현혹될 수밖에 없다. 죽음인식의 관념화가 현대자본과 만나서 드러나는 문화적 증상은 삶과 죽음이 단절되는 데 있다. 그런 단절 속에서 생명의 소외가 나타난다. 생명은 죽음을 인지하고 있을 때 생명다워지며, 생명이 죽음과 단절되면 그 소외의 깊이는 더 깊어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노화를 인정하면서 생명은 더 생명다워지며, 노화를 거부하면서 생명은 소외되어 간다. 소외되어가는 생명은 모습은 형이상학적으로 박제화 되어가고, 생명은 자본에 종속되어 시장에 진열된 상품이 된다. 그리고 진시황 혼자 독차지했던 불로장수의 욕망을 현대인 개개인 모두가 똑같이 꿈꾸면서 불로장생의 욕망이 이념화되고 우상화된다. 삶과 죽음이 단절되고 생명이 소외되면서 죽음은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고 죽음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치부되기 때문에 미래를 향한 삶의 진보도 이뤄내기 어렵다. 자살율 세계 1위라는 한국인에게 삶과 죽음의 단절은 개인의 실존적 소외로 그치지 않고 한국의 정치경제학적 위기와 문명 퇴보에 맞닿는 총체적 소외로 빠질 수 있다. 소외에 빠지지 않고 삶에 의미를 찾기 위하여 죽음에 친숙해지는 일이 중요하다. 이런 과정이 앞서 말한 죽음인식의 현존화이다. 노화가 생명의 소외라는 오도된 편향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런 오도된 인식을 바로잡고 소외 없는 노화가 결국 건강한 노화의 길이다. 건강한 노화는 과학기술의 힘만으로 되지 않고 개인의 철학적 성찰만으로도 이뤄지지 않으며 사회적 협력으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건강한 노화는 의과학의 추구하는 과학적 생명과 개인이 추구하는 실존적 생명과 더불어 사회가 추구하는 관계적 생명이 함께 받쳐질 때 가능하다. 과학적 생명을 무시하면 우리의 삶이 무모해지는 소외로 빠지며, 실존적 생명을 놓치면 우리의 삶은 공허해지는 소외에 빠지며, 사회적 생명을 배제하면 우리의 삶이 경직되어지는 소외에 빠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노화의학의 목적도 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노화방지과학이론을 임상에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실존적 삶과 사회적 삶을 조명하는 복합적 건강정책에 관심을 공유함으로써 소외에 길들여지지 않는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다. 과학적 생명, 사회적 생명, 실존적 생명의 연속성을 인지하고 이를 현대의학이 수용한다면 의과학과 의료자본과 인본의학이 충돌되지 않는 그런 노화의학이 정착될 수 있다. 노화의학은 의료과학기술 측면과 인간의 욕망구조를 이해하는 실존적 태도 그리고 의료관련 기관정책과 건강공동체 개념을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이 누리는 욕망의 깊이를 인정하되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과학의 탐구력과 그 성과를 인정하되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사회공동체에 접속하되, 집단이기주의를 경계한다면 노화의학은 상품화된 자유의 허상에서 탈출할 수 있어서 나 자신의 삶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우리는 오래 살고 싶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기 어렵다. 삶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죽음의 현존도 받아들여야만 건강한 노화가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무병장수, 불로장생의 끝없는 욕망을 앞에서 언급했듯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당연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죽음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순간적인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죽음의 현실과 죽음의 실존은 그만큼 거리가 멀다. 죽음의 실존보다 죽음의 현실이 앞서있다는 점은 생명의 기본적인 존재특성이다. 달리 말해서 죽음의 현실에 봉착하면 죽음의 실존조차 느낄 수 없으며 생각할 수도 없다. 죽음의 실존은 죽음의 현실을 예고하는 생물학적 과정이면서 동시에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교량이다. 죽음의 현실을 거부하지 않는 죽음의 실존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바로 늙어감이다. 그래서 늙어감도 실존이다. 생명을 죽음의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자. 생명의 삶은 태어남과 더불어 시작하면서 점점 자라나면서 끝내는 죽음에 맞닿아 있다. 자라남이 멈추고 몸을 챙기는 막다른 길목에 늙음이 있다. 그 건너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향후의 죽음을 알고 있다는 것에서 생명의 실존이 시작된다. 죽음의 초입으로서 늙음과 삶의 종반으로서 늙음이 교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과 삶을 연결하는 생명의 실존이다. 나의 실존은 삶과 더불어 죽음을 내포한다. 실존 차원에서 삶을 기리듯 죽음을 기려야겠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을 기리는 사람은 없다. 죽음을 기리기는커녕 죽음을 회피하려고 온갖 방술과 묘안을 세운다. 불로초를 찾아 머나먼 미지의 땅을 찾아갔다. 불로장생의 신선이 되고 싶은 욕망을 실현시킨다는 약이 있는데, 고대 중국 도교의 신선술의 하나인 연단술鍊丹術로 만든다는 신선환이 그것이다. 또 다른 고대 문명권에서는 죽음 이후에도 죽음에서 삶으로 회생하리라 믿으며 미이라를 만들어서 영원의 욕망을 채우려 했다. 현실에서 죽음을 피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자 이승이 아닌 죽음 너머의 저승에서 현재의 이승과 비슷한 삶을 누리려는 사후의 존재세계를 가상하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죽음은 종교와 만난다. 종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죽음의 실존을 대체하는 실용적 효과가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는 죽음의 실존을 보상으로 영혼의 건강을 추구한다. 그러나 종교나 신화에서조차 죽음은 현존한다. 종교 안에 영원성을 추구하는 가상 효과가 있지만, 청춘의 묘약까지 제공하는 일은 분명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1세기 현대 의생명과학의 폭발적인 발전은 죽음의 실존과 죽음의 현실을 연결시키는 객관적 고리를 찾으려는 엄청난 도전에 이르렀다. 왜 죽는가를 알기 위해서 왜 늙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했다. 20세기 현대의학은 죽음을 유발하는 질병 연구에 치중해왔다. 반면 21세기 현대의학은 질병 연구만큼이나 왜 늙는지에 대한 노화 메커니즘 자체를 연구하는 데 공을 많이 쏟고 있다. 노화의학의 연구방법론의 핵심은 죽음과 늙음의 관계를 연속적으로 보는 데 있다. 달리 말해서 점점 늙어가다가 나중에 그 늙음의 결과로써 죽음을 맞게 된다는 뜻이다. 건강한 늙음이란 늙어가지만 죽의 시점까지 질병 노출을 최대한 줄이려는 상태를 의미한다. 건강한 늙음은 시간적으로 볼 때 비록 죽음에 가까워지면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질적인 측면에서 젊음에 접근된 관계를 유지하는 심신 상태를 말한다. 현상적으로 볼 때 늙음이 없는 죽음처럼 보이는 것이 가장 건강한 늙음일 수 있다. 야생 포유류에서는 이러한 관계, 즉 늙음이 없는 듯한 죽음이 나타난다. 연어와 같은 회유성 어종에서는 늙음과 죽음의 근접현상이 두드러진다. 쉽게 말해서 마지막 부화를 마치고 곧 죽음을 맞이하는 회유성 어류에서 수명 전체 기간 중의 늙음의 시간이 매우 짧다는 점이다. 반면 가축동물이나 인간종은 죽음에 닿는 늙음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다. 늙음과 죽음의 관계에서 이러한 차이는 당연한 듯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를 주목하는 것이 노화과학을 위한 구체적인 철학적 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다. 건강한 늙음이 생명 연장 혹은 수명 연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건강한 늙음은 장수를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또한 건강한 늙음에는 유전적 요소의 작용이 필요하지만 환경요소들 혹은 사회적 요소들의 작용도 필수적이다. 건강한 늙음의 사회적 요소 중에서 생활습관이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라고 현대의학은 말하고 있다. 건강한 늙음을 위해서 어느 특정 요인이 충분한 조건을 갖추는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장수를 위해서 어느 특정의 요인이 충분한 조건을 충족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2.2 야생종이고 싶지 않은 문화종의 욕망 늙음과 죽음은 어디까지 그리고 얼마나 상관적인가? 늙음 현상은 호르몬 분비의 변화와 밀접하지만, 동시에 내외적 원인에 따른 면역체계 이상 때문이기도 하다. 심장 활동이 원만하지 않으며, 체온 항상성 유지가 점점 어렵게 되며 신장과 폐의 여과 능력도 떨어지고, 관절 윤활성이 감소하고 동맥경화가 시작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주름살이나 흰머리가 늘어나고, 혹은 2형 당뇨와 고혈압이 생기고 근력과 관절이 약해지면서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누구나 알고 있다. 점점 늙어가다 마지막에 죽음을 맞게 된다는 생각이 상식적이며 일상적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 늙음은 죽음을 향한 선형적 관계이다. 사람이나 가축의 경우 늙어가는 모습들이 시간의 계기에 따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람이 허리가 꼬부라지고 눈이 잘 안 보이고 기력이 없어서 걷지도 못하게 되듯이, 집에서 키우는 반려동물도 나이가 많이 들면 털이 빠지고 몰골이 흉해지고, 신부전증에 관절통으로 잘 걷지도 못하기는 거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사람과 더불어 사는 소 같은 가축의 경우에서도 늙어가는 소의 모습을 거의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애처롭게 죽고 만다. 이런 경우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늙음의 정도는 더한다. 점점 더 늙어지다가 마지막에 죽게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의 노화나 문화적으로 길들여진 가축동물의 노화는 ‘문화종의 노화’로 이름 붙여질 수 있다.(최종덕 2011) 반면 늙음의 증상이 크게 드러나지 낳은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 경우도 많다. 다시 말해서 연속적으로 늙는 자연적 현상이 자연적인 죽음의 특정 계기에 필요조건이기는 하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다. 논리적으로는 늙는 이유와 죽는 이유가 질적으로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야생동물은 사람이나 가축처럼 서서히 늙어가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는 것처럼 보인다. 야생동물 역시 늙어가겠지만 그런 늙음 현상이 장애 증상으로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단순히 그런 야생동물의 늙은 모습이 사람들에게 드러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노화의 행동장애 기간이 아주 짧기 때문에 늙은 모습이 안 보일 수 있다. 겉보기에는 성체로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다가 어느 특정 계기에 이르러 갑자기 죽음을 맞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포유류를 제외한 많은 동물에서 후손으로 유전자를 이어주는 생식활동인 산란 과정을 마치면서 얼마가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산란 목적으로 자신의 탄생지로 돌아오는 회귀성 어류 대부분은 자신이 부화한 원래의 하천 상류로 회귀하여 산란 목적을 이룬 이후 즉시 죽음을 맞이한다. 회유 어종에서 노화 현상은 일생에 한번 하는 산란 전후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노화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비늘 색깔이 변하는 것처럼 외형상 특이현상이 발생한 후 곧 죽음을 맞는다. 그들의 죽음 직전 발생하는 신체적 변화는 전해질 농도저하 및 체액 삼투압 증가에 따른 생리적 결과로 유추되지만, 그러한 생리적 변화가 생물종마다 다른 기대수명 막바지에 치우쳐서 급격히 나타난다. 이러한 노화는 ‘야생종의 노화’로 표현될 수 있다.(최종덕 2011) 문화종의 노화가 야생종의 노화와 다른 점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한다면 인간의 건강 장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야생종의 노화와 문화종의 노화의 차이는 죽음에 이르는 노화가 급격히 발생하는지 아니면 서서히 발생하는 지에 대한 것이며, 이렇게 관찰된 거시적 차이를 분자적 차원에서 분석하는 일은 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인간이나 가축동물과 같이 문화종의 노화는 문화종이 속한 문화 환경에 의해 자신의 원래 기대수명이 증가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받는다. 반면 야생종은 기대수명 전체 기간에서 늙음으로 인한 활동장애 기간이 차지하는 비율이 미미하다. 문화종의 노화는 물리적 환경과 영양학적 환경에 의한 문화적 영향력을 많이 받기 때문에 기대수명의 연장이 가능할 수 있다. 문화종으로서 인간의 경우 생식가능 시기 이후에도 연장된 기대수명의 결과는 장구한 시간동안 거쳐 온 문명진화의 소산물이다. 생명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야생종의 자연생명은 자연선택의 진화압력을 통해 개체의 신체 보존 그 자체보다는 성장과 증식에 더 많은 투자를 하도록 진화해왔다. 생명의 후손번식이 생명의 가장 중요한 진화요소이기 때문이다. 개체 번식이 끝나면 개체 유지에 사용하는 에너지를 감소하도록 진화되었다는 뜻이며, 결국 번식활동 이후 얼마가지 않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점이 야생종 노화의 진화적 특징이다. 인간과 같은 문화종에서는 증식과 후손번식에 드는 에너지를 절약하여 개체유지 및 보수에 많은 에너지를 들인다. 이렇게 개체번식과 개체유지 사이에는 서로 트레이드오프trade-off 관계가 유지된다. 개체유지와 보수에 소모되는 에너지와 성장과 증식에 드는 에너지는 서로에게 상쇄적 관계라는 뜻으로 노화의학의 선구자인 커크우드Tom Kirkwood는 트레이드오프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트레이드오프 개념은 진화의학 챕터에서 충분히 설명했는데, 커크우드는 트레이드오프 개념을 노화과학에 적용하여 노화 현상의 많은 것을 설명했다.(Kirkwood 2010, 29) 기대수명은 진화적으로 늘어났지만 후손을 번성시킬 수 있는 생식가능한 건강수명은 기대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그 결과가 늙음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게 된 이유이다. 기대수명과 생식기간의 차이는 문화종과 야생종의 차이이며, 그 차이의 의과학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면 문화종의 대표자인 인간에게 발현되는 노화와 질병을 설명하는 또 다른 의학적 개념장치가 생성될 수 있을 것이다. 2.3 노화, 유전과 환경의 복합적 요인 노화와 죽음의 관계가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모든 동물은 유전적 차원에서 자기 종마다 일정한 수명을 갖는다. 동물종의 유전전 수명은 보통 최대수명maximum recorded life spans의 기준으로 매겨진다. 하루를 산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하루살이부터 그 최대수명의 기준으로 잠자리는 4개월, 집쥐는 4년, 개는 29년, 고양이는 36년 독수리는 75년, 말은 62년 침팬지는 59년, 거북이는 80년, 노랑눈 우럭yelloweye rockfish은 120년, 아시아 코끼리 86년, 그리고 인간은 122년, 바다가재는 170년, 붉은 성게는 200년 이상을 살기도 한다. 종마다 수명의 폭이 대체로 일정하다는 뜻은 종마다 수명을 정하는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Kirkwood 2010, 26-27)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동일한 종인데도 수명 차이를 보이는 종도 많다. 예를 들어 일벌은 3-6개월을 살지만, 여왕벌은 6년까지 살 수 있다. 동일종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수명 차이는 유충 시기 로열젤리 섭취 여부와 관계있다고 추측한다. 초파리 경우 고온 30도에서는 14일 정도만 살 수 있지만 10도에서는 120일을 생존한다고 보고되고 있다.(이인 1991, 17) 이러한 사례의 의미는 수명을 결정하는 데 유전자 이상으로 환경 요인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사람의 경우로 돌아와서, 덴마크, 핀란드와 노르웨이인 20,502명 대상으로 20세기 전체에 걸쳐 추적한 역학조사 결과로 쌍둥이 형제의 수명에 관한 보고서를 보자. 이 보고서에 의하면 평균적으로 일란성 쌍생아 경우 34개월 수명 평균값에 비해, 이란성 쌍생아 경우는 75개월 평균수명 차이를 보이고, 그리고 형제간에는 106개월의 평균수명 차이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Hjelmborg et al. 2006) 이 보고서가 곧 수명값에 대한 절대적 의미를 가질 수는 없지만, 환경요인이 수명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유전적 동일성이 높으면 높을수록 수명 차이가 적어진다는 상대적 결과를 보여준다. 결국 수명과 유전적 요인 사이의 객관적 인과율은 없다고 하더라도 상대적 상관성은 있다. 앞의 역학조사에 공동으로 참여한 크리스텐슨의 다른 논문에 의하면 수명에 미치는 유전적 요인이 최소 25% 이상이라고 한다.(Christensen et al. 2006) 종간 수명의 차이는 유전적 요인이 수명을 결정한다는 간접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일란성 쌍생아 경우를 통해서 본 유전요인의 간접증거 역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들은 종마다 다른 수명에 관한 간접증거일 뿐, 개체의 수명을 유전적으로 결정하는 관계를 밝힌 것은 결코 아니다. 개체 차원에서 노화와 죽음을 설명하려는 과학적 탐구는 지속되어 왔다. 그리고 실질적인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인정받고 있는 노화가설은 세포사멸Apoptosis; programmed cell death 이론, 헤이플릭Hayflick한계 이론, 텔로미어telomere 이론 등이다. 그리고 장수유전자 등의 노화조절 유전인자를 찾는 가설 등도 있다. 노화 증상을 미시적으로 보면 세포 내 물질이동 억제로 인한 세포 노화가 가속되고 호르몬 분비가 변화하거나 자기면역력이 약해져서 염증 발현이 증가하는 등의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심장활동, 체온 항상성, 신장 여과율, 폐활량, 백발, 백내장, 2형 당뇨, 암, 대머리, 관절윤활성 감소, 동맥경화, 알츠하이머 등 신체적 손괴현상으로 드러난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본 노화 원인은 세포의 죽음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세포 죽음에는 세포괴사necrosis와 세포사멸 혹은 세포자기사멸(apoptosis)이 있다. 앞의 세포괴사는 세포와 미토콘드리아 팽창, 세포 파괴, 내용물 유출, 염증, 대식세포에 의해 포식당한 결과로 나타난다. 세포사멸은 세포가 자기응축되거나 소체로 분해소멸되거나 혹은 발생학적으로 예정된 죽음으로programmed cell death 가는 주어진 경로로 발현된다. 이러한 세포살이의 경로는 세포 외부 원인으로 인한 노화와 세포시계aging clock 메타포처럼 세포 자체적으로 내장된 순서에 따른 세포의 발생학적 변화이다. 2.4 생물학적 휴머니즘 |
한알마을 고전공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