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신과학 그리고 인문학
1994 논문/저서(16인공동) : 양자역학,신과학 그리고 인문학, 경상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역음,

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문학, 백의, 1994-2-28, 345-359쪽



신과학의 세계관과 인문학에 나타난 그 여파
최 종 덕

<문제제기>

20세기 이후 자연과학에 있어서 양자역학의 등장과 인문과학에서 합리성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일어남과 더불어 전통적인 서구의 결정론적 사유방식이 흔들리게 되었다. 현상을 단순화시켜 기하학적 구도로 자연을 형식적 반영(die Formulierung bei Reflektion) 혹은 재구성해보려는 작업은 예기치 못했던 자연과학적 현상들이 관찰되면서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더불어 현대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카리스마화된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반세력이 크게 대두되었다. 다원주의와 철학적 상대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들어 왔으며 이제는 질서를 기본정신으로 한 기하학의 정신을 더 이상 세계관의 토대로서 생각할 수 없게 된듯 보였다. 특히 인문학에서는 포스트모더니티라는 간판아래 서구의 이성이 해체되는 듯 느껴졌다. 그러나 과연 서구의 기하학적 정신이 그렇게 쉽게 도태되었는가를 그리고 우리는 그 현대사상적 조류밑에 깔려있는 서구의 계몽주의 정신을 올바르게 수용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이 발제문에서는 이와같은 해체성이 서구에 있어서 겉보기 해체일 뿐 근본적으로는 이성의 확장 내지는 재정립이라는 서구적 이성관의 일환일 뿐이라는 말을 하려고 한다. 그 근거를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는 감정적 차원에서 다루어서는 더욱 안된다고 본다. 발제자는 위의 입장에 대한 근거를 현대 자연과학의 존재론적 배경을 통해 이야기하려 한다. 고대 희랍의 철학은 그 이전의 자연철학 배경위에서 생겨났으며, 계몽주의는 당시의 천체역학의 논쟁과 더불어 잉태되었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뉴턴과 칸트의 사상사적 관계는 칸트의 후서에서 분명히 찾을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뉴턴이 없었다면 칸트의 인식론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헤겔의 독일 관념론 이후 과학과 철학은 멀어지기 시작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재적으로는(innerlich) 자연과학적 정신이 인문학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보는 것이 발제자가 이 발제문을 풀어가는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자연과학 중에서도 특히 양자역학을 통해서 나타난 과학적 세계관의 변모를 인문학의 연관성 속에서 검토해 보려 한다.

<고전역학의 배경>

뉴턴 물리학의 역학적 배경은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의 존재설정에 있다. 수학적으로 볼 때 그 역학적 체계는 미분방정식을 통해 완전히 기술되어 지는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이러한 역학체계의 특성은 그 초기조건만 정확히 주어진다면 미래의 모든 사건의 양상을 완전하게 결정할 수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고전 역학의 결정론적 체계는 다음의 몇가지 가정위에서 성립되었다.

첫째 관찰 대상은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와는 독립되어 주관에 영향을 입지 않는다.

둘째 이 (물리적)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계이다. 따라서 제작자는 원칙적으로 그 시계를 분해할 수도 있고 다시 조립할 수도 있다.

셋째 뉴턴 역학은 시간 방향에 있어서 대칭성을 갖는다. 과거를 알 수있듯이 미래를 과거와 같이 예측할 수있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등질적이다.

네째, 뉴턴 역학은 질점(質點) 역학이다. 즉 뉴턴적 대상기술은 한 대상이 그 대상이 되기위한 두가지 필요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대상의 위치와 운동량이다. 이는 고전역학의 환산질량(reduced mass) 개념의 기본정의이다.

<양자역학의 등장>

그러나 양자역학의 차원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을 낳는다. 양자론은 미시적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미시적 과정의 기본 성격인 확률의 파동함수로서 양자현상이 기술되어 진다. 이점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이해를 토대에서부터 바꾸어놓은 것이다. 양자론에 있어서 물리적 실재에 대한 이해방식의 변화요구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태도까지 변화가 요구되었다.

닐즈 보어(Niels Bohr)를 따르는 양자역학의 표준해석에 의하면, 미래의 완전한 예측을 위하여 현재를 아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재의 모든 이론적 방법과 실험적 도구를 동원한다해도 양자계의 미래 상태를 예측할 수가 없다. 그 들에 의하면 물리적 실재의 내적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이어서, 동일한 시간에 실재에 대한 수많은 측면을 정확히 측정할 수없으며 단지 관찰자가 측정을 원하는 측면 만을 선택해야 한다. 양자론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의 핵심은 측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파동함수의 붕괴(Kollaps)이다.

여기서 위상공간(Konfigurationsraum)위에 놓여있는 확률파의 파동방정식이 과연 개별 입자의 상태를 실제적으로 완전하게 기술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한다. 즉 미시물리적 대상이 단지 현상적 과정일 뿐인가 아니면 실제적 실재인가의 문제가 분명해져야 한다. 일상언어에서는 실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있다. 경험적 관찰에 의해 구성되는 일상적 대상들의 성질은 일정 의미론을 인정한다. 고전 물리학의 의미론은 물론 고전 물리학적 사태를 기술하는데 적용될 수 있다. 고전물리학의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전제는 그의 의미론으로 형성된 실재의 구조에서 생긴다. 그러나 이런 고전 의미론은 양자물리학의 영역에서 특히 닐즈 보어를 따르느 코펜하게해석에서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코펜하겐해석>

야머(Max Jammer)에 의하면 보어의 입장은 관계성(Relationalität)과 전체성(Ganzheit)의 두가지로 요약된다고 한다. 우선 보어의 관계성의 개념에 대해 말한다. 보어는 양자현상이 독립적 실재로 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하였다. 양자역학적 결과는 측정장치와 대상의 관계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양자대상과 측정장치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포크의 인용을 보자: “파동함수로 표현된 확률은 미시대상과 측정기구간의 상호작용의 어떤 결과의 확율이다.

파동함수는 그 자체로 미시대상이 다양한 형태의 측정기구와의 상호작용에 대한 포텐셜 확율로서 해석될 수 있다. 파동함수를 통해서 본 대상의 양자역학적 기술은 관찰수단과 관계된 상대주의적 요청에 따른다.”

<측정장치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장치와 양자 대상은 비가역적 방식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태로 진입된다. 그 과정에 있어서 측정 결과는 거시적으로 고정된다. 비가역적 과정은 거시적인 결과로 진행된다. 우리는 항상 양자적 과정의 결과를 거시적 영역에서 다루고 있다. 이 상항은 보어에 의해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개념인 상보성 개념에 의해 서술되었다. 그의 상보성 개념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사유방식을 전격적으로 전회시킨 자연철학의 새로운 길” 이라고 한다.

<비가역성>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의하면 파동함수에 의해 기술하려 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순간 그 파동함수는 변화된다. 그것은 중첩된 파동함수에서 특정 상태로의 순간적 전이를 의미한다. 대상의 상태의 가능성들 중의 하나가 관찰을 통해 현실화된다. 따라서 측정과정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그 핵심은 파동함수의 전환(Reduktion)에 있다. 미시물리적 사건들이 측정행위에 있어서 거시물리적으로 고정화된다는 것은 이 과정이 비가역적임을 말한다.

파동함수의 순간적 붕괴라고 하는 양자역학적 측정과정은 놀랄만하며, 또한 고전 역학적 입장에서 볼 때 믿기 어려운 결과를 갖는다. 한 파동함수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변화하는 가능한 사건들의 한 동력학적 기술이다. 양자론에서 처음시간 (t)의 파동함수가 관찰을 톨해 결정되어지면, 이 이론의 법칙으로부터 임의의 나중시간 (t+δt)의 파동함수가 예측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파동함수는 시간에 따른 사건의 경과 그 자체를 기술할 수 없음이 강조되어져야만 한다.

파동함수는 그 과정의 경향, 그 과정의 가능성 혹은 그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인식만을 어느정도 표현한다. 파동함수는 “측정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인식의 한 표현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식의 획득을 통해 갑자기 변해질 수 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객관이 주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이 말은 물리학에서는 하나의 큰 반란이다.

파동방정식은 측정 혹은 관찰을 하면서 일순간에 갑자기 변한다. 관찰 전의 고양이는 `살아 있거나 혹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는 것’이다. 이 점은 개념적으로 매우 이해하기 곤란하다. 관찰자를 포함한 전체계의 파동함수는 다양하고 거시적으로 서로 차이가 나는 상태들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우리는 전체 파동함수의 순수상태나 파동함수의 붕괴과정이 아니라, 단지 관찰결과만을 경험할 뿐이다. 미분화된 상태들의 가능성들은 경험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데스파냐는 이러한 경험실재(Erfahrungsrealität)를 실재 그 자체(Realität an sich)와 구분하였다. 관찰 전의 순수상태를 포한하는 실재 그 자체는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전이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물리적 실재가 아니다.

측정문제는 양자론에 있어서 핵심점이기 때문에, 양자론의 의미론은 측정과정의 해석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양자론에 함의된 인식론적 해석을 좀더 상세히 볼 필요가 있다. 양자론의 다양한 해석들은 결국 측정문제의 수수께끼를 풀고자하는 다양한 시도로서 간주될 수도 있다. 또한 각각의 인식론적 해석은 그 고유의 철학적 위치를 지닌다.

양자역학의 물리적 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논쟁에 있어서 우리는 철학사를 통해 이미 알려진 철학적 입장이 그 각기의 해석 속에 담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양자세계의 이해를 위해서는 인식론적 해석들의 의미론이 하나의 자연관을 내포하는 존재론적 콘텍스트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함을 인지해야 한다. 인식론만으로는 풀려지지 않는 유명한 양자현상에 대한 실험이 하나있다. 그것은 1935년 아인슈타인이 그의 두 제자인 포돌스키(Podolsky)와 로젠(Rosen)과 함께 한 EPR실험이다. 그 실험을 간략히 설명하자.

에너지 보존이 되는 광자(Photon) 한쌍을 반대방향으로 쏜다. -½의 스핀값을 갖는 한쪽의 쌍동이 입자와 +½의 스핀값을 갖는 쌍동이 입자가 180도 반대 방향으로 날라간다. 한 쪽을 S1이라고 하고 다른 쪽을 S2라고 하자. 여기서 S1에서 전하를 걸어주면 S1 쪽의 하전입자는 당연히 휘게된다. 그런데 문제는 S2 쪽의 입자는 전하를 걸어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동시적으로 S2 쪽의 입자도 반대방향으로 휜다. 이 사실은 양자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어떻게 S2가 물리인과적으로 아무 관계없는 S1와 상관성을 갖는 것인가? 물리학자들은 이 EPR현상을 놓고 50년 이상 논쟁을 벌여왔다. S1과 S2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기때문에 인과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아무 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의 기본가정이다. 이러한 가정을 보통 국소성의 원리(Lokalität)라고 한다. 국소성의 원리를 깨는 이 양자현상은 기존의 역학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S2의 현상을 놓고 아인슈타인의 진영과 닐즈 보어 쪽의 양자론자들의 논쟁은 끊없이 가는듯 하다.

EPR 논문이 나온지 채 4개월이 못되어 보어의 답변논문은 같은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EPR현상에 대한 보어의 해결책은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원자적 대상의 운동과 그것이 측정장치와의 상호작용간의 분명한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있다. 여기서 측정장치와의 상호작용이란 어떤 실험조건 아래서 어떤 관찰현상이 일어날 것인가의 문제이다. 두 개의 광자로 된 체계의 전체상태에 있어서 양쪽의 광자는 서로 상호작용이 없다. 실험 도중 어떤 광자도 다른 것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아포로 사고실험에서 보았듯이, S1에 대한 측정이 동시적으로 S2에 옮겨 작용한 듯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신이 실제로 주사위를 던지지 않았는지를 물어보아야만 한다. 아인슈타인의 명언인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에 보어의 답변은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다. 신이 주사위를 던졌는지 안던졌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신이 주사위를 던졌다든가 혹은 안 던졌다든가 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우리가 알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상호작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관적 영향력의 현상에 대해 보어의 답변은 본질적으로 코펜하겐 해석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에 의해 정초된 코펜하겐 해석은 오랬동안 물리학자의 사유를 흔들어 왔다. 코펜하겐 해석 이후 양자역학적 현상에 대한 기술은 양자대상과 그것의 성질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체계의 조건, 측정과정, 결과치를 얻어내는 방법등에도 관여된다. 보어는 다음과 같이 논쟁하였다. 피관찰 대상과 그 측정에 사용된 장치는 하나의 비분화적인 통일을 이룬다. 그 통일성은 양자 역학적 차원에 있어서 분리된 개별 입자의 결과를 고립시켜볼 수 없는 하나의 체계를 의미한다.

주어진 개별입자와 임의의 실험장치와의 결합은 근본적으로 그 같은 개별입자와 다른 실험 장치와의 결합과는 구분된다. 전체계의 상태 기술은 개별입자와 모든 주어진 측정 장치 사이의 관계로서 표현된다. 다시 말해서 s2대해 직접적인 측정이 없다해도 s2의 상태는 s1에 행한 측정 행위에 독립적이지 않다. 따라서 보어에 의하면 EPR의 논증이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대상측정에 있어서 대상과 측정장치 간의 분리불가능한 결합을 주장하는 보어의 입장을 수긍한다면, EPR의 역설은 더이상 역설이 될 수 없다.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근본적인 차이는 체계2의 양태에 대한 해석에 있다. 즉 파동함수의 기술이 체계와 측정장치간의 제어불가능한 상호작용을 그려낼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이 문제이다. S2현상에 대한 양자론의 코펜하겐해석의 입장은 S1과 S2의 입자가 원래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야머가 말한 세계를 보는 관계성과 통일성의 입장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물리언어적으로 즉 거시언어로 당장 말할 수 없다. 이 점은 코펜하겐학파의 가장 큰 난제였다.

상보성의 개념은 서로 대립되는 두 가정들의 종합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의도를 이루어내기 위하여 물리적 실재에 대한 상세한 이해가 요구된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실재의 기술은 개체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실재의 옳바른 기술은 관측장치와의 관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양자물리학에서 실재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양자역학적 현상이 거시적 언어를 통해서 기술되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거시적 언어를 통해서만은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어려움이 생긴다.

그러나 여전히 물리학은 불립문자가 아니며 인간언어를 써야 한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양자역학을 인식론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 존재론이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낳게 하였다. 존재론도 기존의 실체론적이고 환원주의적 존재론이 아니라 관계론적 존재론이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새로운 형이상학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이 새로운 형이상학이 바로 소위 신과학의 세계관을 만들어 나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코펜하겐해석이 소위 신과학적 세계관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실은 유기체적 패러다임도 이로부터 나온다. 닐즈 보어의 상보성이론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든 한 예를 보자. 우리가 생체조직을 검사한다고 하자. 그러면 살아있는 피부조직을 떼어서 그다음 물감을 들인 다음 현미경의 대물렌즈 앞에다 놓아야 한다. 그러나 피부조직을 떼는 순간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세포일 뿐이다. 우리가 과학을 하는 작업은 결국 고립화와 이상화(idealisation)를 거쳐야만 한다.

이는 과학의 기본작업이였다. 설명을 하기 위해서는 인과율을 어겨야 하고 인과율을 맞추다 보니 설명될 수 없었다. 그러나 상보성이론에서는 위의 둘은 모순적 관계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이고 조화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는 한 유기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물론 닐즈 보어의 상보성은 입자성과 파동성, 물질을 정의하는 기본요소인 위치(x)와 운동량(p), 혹은 시간과 에너지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것이였다. 이러한 개념의 상보성은 유기체론으로 발전되었으며 나아가 인문학에서 이야기하는 환원주의 비판 즉 옴살적(holistic) 세계관까지 이어진다.

S2를 설명하는 닐즈 보어의 입장도 결국은 옴살적 세계관을 취한다. 예를 들어 S1를 오른손이라고 하고 S2를 왼손이라고 하자. 사람이 상자속에 있고 두 팔만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내놓았다고 하자. 이 사실을 모르는 아이가 있다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동시적으로 알고 있다는 현상을 그 아이는 신비하게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EPR현상을 보는 옴살적 이해는 S1과 S2의 상관성을 신비하게 보지를 않는다. 그것은 이미 내적으로 연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시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신비적으로 보일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의 대안>

EPR의 사유방식에 의하면 양자론을 국소성의 원리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해가능하도록 해석할 수 있거나 혹은 해석되게끔 확장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한 국소성의 원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양자론의 파동함수에 포함되지 않은 그리고 지금까지는 실험적으로 발견되지 않은 어떤 변수를 지정해 주어야만 한다. 따라서 파동함수는 인간에 의한 측정가능성의 범위에 들어오는 상태요소의 한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고 말해질 수 있다.

아마도 양자론의 불완전성을 해결하는 어떤 추가의 상태요소가 있을 지 모른다. 이러한 요소를 “숨겨진 변수”라고 부른다. 이러한 숨겨진 변수는 EPR현상을 신비하게 보거나 아예 배제햐려는 의도를 불식시키는 매개체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아직 찾아내진 것은 아니다.

만약 그러한 변수가 없다면 S1과 S2의 상호관계는 전적으로 우연에 속한다. 그러나 우연을 물리학의 탐구영역에 집어넣을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만약 소립자가 그러한 어떤 변수를 갖고 있다면, 물리학자는 그러한 모든 변수들을 파악하는 소립자 기술방식을 찾아내야만 한다” 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양자론은 불완전한 이론이며, 개별입자의 운동 역학을 통해 보완되어야만 한다.

숨겨진 변수의 개념에 의존된 아인슈타인 시의 실재론적 견해는, 데스파냐(d'Espagnat)의 해석에 의하면, 양자론의 파동함수는 실재의 전체가 아니라 단지 실재의 한 국면이라는 점을 가정한다. 따라서 임의의 물리적 대상의 상태는 파동함수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변수들에 의해서 표현된다. 예를들어 한 원자의 결집에너지와 같은 물리량은 파동함수안의 변수를 통한 방식으로는 그 값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숨겨진 변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완전화하기 위해 숨겨진 변수의 개념을 도입했다고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EPR 논문의 결론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있다: “따라서 파동함수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완전한 기술방식을 제공하지 못함을 보여 주었지만, 한편 그러한 완전한 기술방식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의 질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이론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때의 숨겨진 변수 이론을 양자론의 표준해석처럼 불만족하게 보았다. 왜냐하면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보옴(David Bohm)에 의해 처음으로 정식화된 숨겨진 변수 이론은 국소성의 원리를 위반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숨겨진 변수는 국소성의 원리와 조화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그것은 서로떨어진 체계들 사이의 상호작용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보았다.

숨겨진 변수의 문제는 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더욱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숨겨진 변수의 이론은 원리적으로 개별체계의 상태를 정확하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나, 실제로는 측정될 수 없다. 따라서 아직은 실험적으로 검증되어 질 수 없는 숨겨진 변수를 인정한다해도 더나은 예측을 주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존재의미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지금으로서는 숨겨진 변수의 존재여부에 대한 질문에 물리적 실험영역에서 답변될 수 없다해도,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는 물리학자들은 항상 숨겨진 변수의 존재를 물리학의 영역에 끌여들일려는 시도를 한다.

<어느 것이 옳은가>

앞서 확인한대로 물리적 대상의 실재에 대한 보어의 견해는 아인슈타인의 물리적 실재론과 분명하게 대비된다. 아인슈타인의 실재론에 따르면 실재는 다른 실체들과의 어떤 관계와도 독립적인 속성들을 갖는 그런 실체(Substanz)이다. 반면 보어에 있어서 실재는 실체들 사이의 관계이며, 측정은 그 관계의 한가지 특수한 경우이다. 아인슈타인에게서는 “독립적인 존재하는 상태들의 발견이 문제이며”, 보어에게서는 “전에는 전혀 없었던 실재의 구성이 문제된다.” 관찰된 것 만이 확실하게 존재한다. 측정과정에 있어서 양자적 대상의 상태와 측정장치의 거시물리적 상태 사이의 상관성을 해명하는 일이 문제가 된다.

그러면 어느 것이 타당한가의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실험물리학은 계속 이문제를 다루어 왔으며, 70년대와 80년대 초반에 이르는 13차례 정도의 판정실험들은 한두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국소성의 양자역학적 기술방식이 옳은 것으로 판정하였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 진영의 숨겨진 변수를 통한 결정론이 붕괴된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은 꾸준히 새로운 결정론을 모색한다. 그 새로운 결정론이란 외형적으로 다 드러난 현상들 속에서 인과관계를 찾는 그런 기존의 기계론적인 패러다임은 포기하지만 현상 뒤에서 혹은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질서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어느 것이 옳은가의 문제라기 보다는 어느 것이 옳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나가는 듯하다. 강한 당위론이라기 보다는 전통적 합리성에의 관습이 쉽게 버려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결정론이 유지되는 자연과학의 몇가지 발전을 간단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인지과학에서의 실례>

최근 인지과학에서 논의되는 것은 결국은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논의가 인간과 같은 두뇌를 만들자는 원초적인 단계는 이미 지났다. 예를 들어 인간의 두뇌작용을 기계론적 물리주의로 환원시키려는 노력이 허사임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인지과학의 논의를 대략 나누어 보면 전통적 기호조작적 인지이론(symbol-manipulation theory)과 연결주의적 이론(connectionist theory)이다. 간단히 설명해서 전자는 완화된 환원주의의 노선을 모색하고 있으며 후자 연결주의는 옴살론(holism)의 성격을 지닌다.

최소한 기존의 환원주의를 거부한다. 그러나 결국 이 연결주의도 고도의 결정론이다. 고도의 결정론이란 겉보기에는 결정론처럼 안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결정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결정론을 숨겨진 변수이론의 대가인 벨린판티(F.J.Belinfante)는 비밀결정론(crypto-determinism)이라고 부른다. 연결주의는 이러한 비밀결정론을 찾아가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비밀결정론은 존재론적으로는 결정론적 질서구조의 존재를 인정하되 인식론적으로는 쉽게 찾아질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연결주의적 시도는 당장 결과를 볼 수 없지만 가능한 긍정적 결과를 확신한다.

<열역학 제2법칙>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가장 중요한 세계법칙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쏘아진 화살처럼 시간의 진행방향과 맞물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갈 수 없다. 동시에 이 점은 상대성이론의 가장 중요한 가정이다. 양자역학의 측정행위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즉 측정행위의 비가역적 성질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자역학에 대해서 반사실적인 소수의 견해를 확대해석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과학운동이다.

EPR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엔트로피 감소의 법칙을 이용하면 S2의 현상이 잘 설명될 수 있다. 예를들어 원인과 결과의 시간성이 뒤바뀌는 반인과적 설명방식이라든가 초광속 전달매체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면 EPR현상은 쉽게 풀린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방식은 SF소설에서나 나옴직한 이야기이다. 양자역학은 철저하게 열역학 제2법칙을 따른다. 단지 비국소적 현상에 대한 설명의 어려움이 남지만, 이 현상도 최근에는 상대론을 수용하면서 어느정도 긍정적인 변화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근거논의는 이 글에서 빼놓았다.

<유기체론>

기계론적 혹은 환원주의적 결정론이 큰 벽에 부딪치면서 유기체이론이 그 대안으로 등장되는 것이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상적 조류이다. 유기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자기 갱신을 꾸준히 하는 자체조직성(Selbstorganisation)이다. 유기체의 자체조직성을 마치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파기하는 카르노(carnot)의 열기관처럼 자신의 분비물만 바로 그것만을 먹고 사는 유기체로 이해하면 안된다. 한 계의 엔트로피의 변화량dS는 체계내적 엔트로피 양dS|i와 외부환경과 교환되는 엔트로피의 양dS|e의 합이다.

dS = dS|i + dS|e 카르노의 기관은 외부로부터 오는 교환엔트로피가 차단된 것이다. 신과학의 세계관은 고립적 대상 혹은 고립체계를 부정하고 세계내적 연결성을 강조하면서도 엔트로피 계산에서는 체계내적 엔트로피의 값만을 보는 자기모순적 경우가 많다. 그 좋은 예가 최근의 신과학운동의 대표주자격인 가이아 이론이다.

한 유기체의 중요한 특성인 autopoiesis개념을 갖고 기계론을 비판하는 관점은 환원시킬 수 없는, 부분들의 산술적 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체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한 체계의 고립성을 표명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autopoiesis의 개념은 다른 체계와의 내적 에너지 교환의 고리를 놓치면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이 둘은 상보적이다.

<비선형적 결정론>

카오스이론이 등장되면서 (최종덕,“혼동되어서는 안되는 혼돈이론” 시대와 철학 93년여름호 참조) 겉보기의 무질서 체계가 다시 질서체계로 전이될 수 있는 비선형체계가 부상되었다. 결정론적 구조를 찾아가는 성공적인 시도였다. 비선형수학은 뉴턴역학의 고전 결정론을 다루는 헤밀턴방정식으로 표용될 수 없는 새로운 영역이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결정론적 카오스현상 모두는 비선형적이지만, 그 역으로 비선형성의 행태 모두가 결정론적 카오스현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선형적 행태 중에서 결정론적 카오스현상이 아니라 단순한 혼돈현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서구 과학정신은 끊임없이 결정론으로 향하려는 그리고 세계를 결정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문학에서 본 문제들

1. 서구의 이성은 환원주의와 인과율을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현상차원에 머물지 않는 고도의 환원성을 지향한다. 이 점은 과학의 기본적인 인식론이다. 과학적 실재론혹은 비판적 실재론은 질서가 실재한다는 믿음을 갖으나 그 실재성을 검증하는 일이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우회적임을 강조한다. 실재의 파악이 고전의 단순기계론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서구이성의 우회적 길은 서구에 있어서는 필연적일 수 있으나 서구와 다른 철학적 지평에 선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즉 환원주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본 것이고 결정론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주로 말해진다. 그러나 같은 뿌리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환원주의의 위기가 곧 환원주의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더 좋은 환원주의를 지향한다. 서구이성의 위기로 인해 그의 환원주의를 포기하고 동양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며, 우리의 인문학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발제자의 생각이다.

2.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문화와 사회의 문제까지 건드려야하기때문에 구체적인 입장은 보류할 수밖에 없다.

3. 범인문학의 주요주제인 계몽주의 정신은 철저하게 분석수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몽주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카리스마화된 계몽주의였다고 본다. 원리적 계몽주의는 학문 방법론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4. 학문의 가능성 : 제학문 간의 고립성은 피해야 한다고 본다. 관계론적 자연관의 기본테제를 통해서 학문의 연결망이라는 함의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의도적으로 분리된 동서양의 학도 만나야 하며 종합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지향점을 위해 즉 종합을 위해서는 먼저 차별성이 자리잡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위 신과학이나 그와 유사한 풍토의 무차별적 종합은 우리의 바람직한 인문학을 위해서 지양되어야 한다고 본다.

최 종 덕


이 글은 handout으로 마련된 것이므로 완전한 구성이 아님을 밝힙니다.
추후 게재가능한 글로 만들 것입니다.


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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