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유, 다른 시작” |
1998 서평 : “다른 사유, 다른 시작”, 녹색평론 41(1998,7-8월호) 다른 사유, 다른 시작 - 어떤 책을 읽고 만난 두 사람의 대화 누현: 저도 군대를 갔다 왔지만, 요즘 병무비리를 보니 참으로 한심한 것 같아요. 세무서 직원 비리니 변호사 비리에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 것이 없으니 정말 큰 일 났어요. 그 정도만 아니지요. 경찰서, 허가관련 공무원에다, 조직폭력이나 상업화된 섹스 산업에서부터 정치인이나 기업인까지 지금의 경제환란의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작태까지 정말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요. 추유: 저는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니라고 봐요. 사실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일인데도 모른 척하고 아니면 일부러 알고 싶어하지 않다가 매스컴에서 가시화 되면 그때서야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냐는 식으로 흠칫 놀라면서 난리를 피우는 것 아닌가요. 그런 일만이 아니지요. 과거 오욕의 역사를 하나도 지우지 않고 그저 남을 짓밟고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죽임의 논리가 우리의 하늘과 땅을 덮어 왔는데 우리가 제대로 세상을 볼 수 있었겠어요? 그러니 온통 잘못된 일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증거가 없어서, 다 그러니까, 해오던 일이므로, 뭐 그리 잘났다고’ 하면서 너좋고 나좋고 해서 다 그냥 그렇게 넘어가고 말지요. 누현: 그런데 오늘은 환경 이야기를 하려고 만났는데 그 이야기를 해야지요. 경제문제, 사회문제가 심각하니 환경문제는 도외시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각종의 매스컴 보도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좀더 사람들의 생각이 진짜로 바꿔져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추유: 지금 말했지만 ‘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나도 그러는데 뭘 야단이야’하는 생각이 환경문제에 정말 심각한 점이예요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있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환경위기가 아니라, 오늘의 환경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위기라고 보아요. 누현: 얼마전에 어느 교수님과 술좌석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요즘은 살기도 힘든데 왜 그렇게 환경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지나친 점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추유: 저도 알아요. 많은 지식인들 조차 최근 왜 이리도 말끝마다 ‘환경환경’ 하냐고 짜증을 내더군요. 그런데 잘 보면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인 지를 쉽게 알 수가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과거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환경과 노동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많았어요. 그러나 그러한 상충된 모습들은 사실 기업주의 농간에 의한 결과라고 보지요. 이제 환경은 구호가 아니라 삶의 현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노동현장과 거리가 먼 기업주와 많은 지식인들도 그 노동자의 틈을 타서 환경에 대한 고급스런 비판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전인수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어쨌든 우리의 환경운동은 그것이 구호라 할지라도 아주 초기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더욱 세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보지요. 초기에 드러나는 작은 물결이 좀 많다 하여도 상대적으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갖고 지나치게 비판하는 것은 안주하는 지식인의 타성이라고 볼 뿐이에요. 누현: 그러면 운동 차원이 아니라 인문사회학자들의 현학적인 환경논의는 어떻다고 보지요?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환경문제와 사회문제를 자꾸 분리해서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요. 조금 다른 예를 들어, 사회 곳곳에서 이름 모를 성인병이 횡행하여도 기껏 그 이유를 스트레스에나 돌리고 있고, 진정 그 원인이 환경파괴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지요. 과거 기업환경과 정치환경의 썩은내가 오늘의 경제위기를 낳았고, 사회환경과 교육환경의 구린내가 오늘의 청소년 문제를 자초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눈감고만 있으니, 환경위기니 문명위기니 인간위기라는 말은 너무 고상해서 귀에도 들어올 턱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추유: 맞는 말이예요.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오늘의 경제위기가 과거 경쟁논리를 조장한 물질주의의 직접적인 폐해라는 점입니다. 이는 곧 사회위기를 낳은 장본인이며, 오늘의 심각한 환경위기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지요. 물질만능주의는 이미 매스컴화된 개념이라서 그렇게 알고는 있어도 실제로 그로부터 극복하려는 행위의 실천이 매우 미약하지요. 인식이 실천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강한 동기가 있어야 하고 동기의식이 몸에 배려면 역사적인 배경을 치열하게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아요.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배경이 동기화되려면 그 역사의식은 나의 역사로 전환되어야 하고, 그러자니 역사는 남의 역사라 하더라도 나의 역사로 용해되어야만 한다고 보아요. 그래서 오늘의 환경위기는 곧 사회위기요 문명위기라는 생각이 몸에 배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누현: 이제 어려워지기 시작했군요. 그래도 이 자리는 요즘 제가 읽은 두 권의 환경관련 책에서 어려운 부분들을 물어보려고 만든 자리인 만큼 몇 가지를 이아기해야 될 것 같아요. 우선 이진우 교수님이 쓰신 <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녹색 사유라는 말이 매우 상징성이 있어 보여요. 그리고 또 한권의 책은 <녹색 한국의 구상>이라는 제목인데 같은 녹색의 개념이 우리들의 상상력의 기운을 던져주는 것 같아요. 그린피스나 녹색당 혹은 녹색연합 등으로 이미 녹색의 이미지가 환경과 생태의 상징적 지표로서 심어지기는 했어도 그 책에서 말하는 녹색의 의미는 단순한 상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체계적인 개념정리를 시도한 것 같아서 그 뜻을 질문드리고 싶군요. 추유: 예, 저도 그 두권을 읽었어요.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제 번역이 아닌 우리의 저자가 우리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뻤어요. 물론 이러한 철학적인 작품이 우리가 안고 있는 당장의 물질적 환경위기를 해결해내는 직효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환경에 대한 철학적 글쓰기는 그것이 비록 당장의 실천지표를 가져다 주지 못해도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그 사상적 논쟁이 밑에 깔린 정신의 역사를 담아내야 한다고 보지요 최근 이러한 이러한 노력이 담겨진 두 권의 책이 나왔는데 지금 방금 말한 이진우 교수가 쓴 [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와 환경잡지인 <환경과 생명>에서 발표되었던 글을 새롭게 역은 [녹색 한국의 구상]이라는 책이지요. 이 두권의 책은 녹색의 상상력을 미래 사회의 에코토피아의 가능성과 연결시켜 보려는 시도라고 여겨지는군요 누현: 마음이 급해서 그러니 우선 녹색 사유의 주머니를 열어 주세요. 추유: 이진우 교수는 그의 책에서 녹색 사유의 당위성을 강조하였지요. 이교수가 말하는 녹색 사유는 인간과 자연의 생태학적 유대성을 추구하고, 기술적 사유를 거부하여 자연의 유기적 연대를 추구하며, 지구의 유한성을 ‘몸’으로 인식할 것을 요청하는 사유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녹색 사유는 궁극적으로 에코토피아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썼지요. 이러한 논지를 전개하기 위하여 이교수는 주로 요나스, 하바마스와 하이데거 그리고 북친의 쉽지 않은 철학적 논점을 비교적 쉽게 다루었어요. 누현: 그래도 그 논점이 어려운데 먼저 기술의 문제를 많이 다룬 것 같아요 요나스의 인용 중에서 기억이 강한 부분이 있는데 “오늘의 사고는 죽음의 존재론적 지배를 받는다”라고 했어요. 거기서 존재라는 말이 너무 철학적이지 않을까요? 추유: 존재라는 말은 철학에서도 제일 어려운 말 중의 하나지요. 그러나 쉽게 생각해서 산업화가 첨예화된 요즘의 기술시대에서 인간의 존재가 분명히 위협받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를 이해하면 되지요. 그런데 “기술행위는 곧 존재론적 무관심”이라는 더 어려운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기술의 문제는 인류학적인 문명사와 연관된 개념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기술은 원시시대에서는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기술을 통해서 수렵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밭을 갈게 되었고 생산성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요. 문제는 기술의 영역이 문자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면서 시원적인 기술의 역사를 상실하고 전도된 이성의 역사로 접어들게 된 것이지요. 확실히 이성의 역사는 호모 사피언스로서 인류 역사의 최대의 승리였지만 이 승리는 너무 과도하여 지나친 자만심에 빠진 이성의 역사로 빠지게 된 것이지요. 누현: 아, 그래서 요나스가 “과도한 승리는 승리자 자신을 위협한다”라는 말을 쓴 것이군요. 그러면 그 승리를 포기하거나 과거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인가요? 추유: 그런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는군요. 하이데거는 그런 지나친 승리의 역사 때문에 “우리가 본래 거주하는 곳으로 우선 되돌아 갈 것”을 제안하지요. 그러나 본래 거주하는 곳이란 원시시대로 돌아가거나 오늘의 문명사회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되지요. 그 지나친 이성의 승리는 서구 사상사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 기계론적 자연관, 인간중심주의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 감초들은 오늘의 문명위기, 생태위기 혹은 인간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받게 되었지요. 그 감초들은 현재의 놀랄만한 과학의 성과를 가져다준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지만, 분명히 인간을 기계화시켜가고 있으며, 소위 인간소외의 현상을 낳았지요. 그래서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작정 데카르트와 기계론이 나쁜 것이니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원형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말이지요. 그래서 우리 토론의 주제를 <다른 사유, 다른 시작>이라고 이교수가 말한 것을 인용했지요. 누현: 결국 존재란 이성의 존재를 거부하며 삶의 존재를 찾자는 말이군요. 그렇지만 이런 주장에 대하여 하바마스는 강하게 반대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이교수의 책에서 느꼈어요 하바마스는 자연의 생태학을 단순한 심미주의일 뿐이라고 하면서 자연을 객관적으로 이성의 틀로서 가두어 놓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그러지요? 그는 삶의 존재를 너무 간단하게 비이성적인 것으로 처리한 것이 아니가요? 더욱이 책 말미에서 북친의 주장을 보면 현재의 생태운동은 사회적 구원과는 관계없는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서 강한 비판을 던지고 있는데 자칫 생태운동의 위축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요? 그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 것 같아요. 추유: 예, 환경운동가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감성적인 동기유발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감성이 이성을 누르고 선민의식의 주장과 구호만이 혹은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되기 때문에 북친의 주장은 어느 정도 이해해야 된다고 보지요.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80년대 학생운동하던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노동문제와 연관하여 환경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현상이 있으며 혹은 넓은 의미의 생태운동에 참여하더라도 기공쪽으로 많이 빠져 신비주의의 일선에 있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이런 점에서 북친의 경고는 타당하다고 보지요. 누현: 북친이 쓴 말을 인용해 볼까요. “생태적인 접두사가 붙은 것들의 일시적인 유행이 뿜어내는 악취가 도처에서 진동한다.” 참으로 가시돋힌 말이군요. 그리고 생태위기의 극복방안 중의 하나로서 동양적인 자연철학을 도입하는 것조차 신비주의로 몰고 있어요. 추유: 그가 동양철학을 모르고 하는 말이지요, 동양의 자연철학은 신비주의라기 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현실 사회철학이라고 보면 되지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유가에 대해서는 그것도 약간만 인정하지만 불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그런 평가를 거부하지요. 그러나 도가 역시 현실에 대한 수용방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며, 불가조차도 현실에 대한 열려진 언명이라고 보아요. 단지 현실 논리와 유토피아 논리를 서양처럼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의 틀로서 본 것이지요. 그래서 불가의 유토피아는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서구의 유토피아 논리가 진짜 신비주의 논리라고 보는 것이 저의 주장이예요. 하여간 동양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생태주의가 문제인데, 저는 북친이 생태주의조차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누현: 북친은 생태주의를 비판해도 여전히 생태주의자는 확실하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그를 사회생태주의자라고 하지 않은가요. 북친은 생태학적 인본주의를 말했고, 자연과 인간의 변증법적 조화를 강조하지 않던가요? 그리고 그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될 것은 감각적인 1차자연을 넘고, 기술에 의한 2차자연도 넘어서서 생태사회인 자유자연이라고 말한 것을 보아서 충분히 생태주의에 대한 이해가 있다고 보는데요. 추유: 맞아요. 그러나 잘 보세요. 북친은 하바마스의 변증법 포기를 강하게 비판하지요. 그러나 그가 생각한 변증법이란 이론변증법 같아요. 저는 생태변증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보아요 그래야만 진정 녹색 사유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누현: 갑자기 생태변증법은 무슨 말이지요. 추유: 진자 추를 보세요. 추가 한 쪽위로 올라가 위치에너지가 최대일 때 밑으로 떨어지지요. 그러면 이 떨어지는 추는 중앙에 서는 것이 아니라 반대 쪽 위로 올라가지요. 그래서 다시 떨어지면 또 중앙에 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다시 올라 가지요. 이렇게 계속 진자운동을 하듯이 생태계나 자연의 모습도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성의 권력이 독주하면 그 반작용이 생겨서 이성을 정신차리게 하는 것은 좋으나 이것이 지나쳐 반이성 혹은 신비주의 더나가 주술성으로까지 나가게 되는 것이 사회의 자연성이지요. 결국 생태적으로 볼 때 문명사회든지 자연이든지 양 요소가 두 날개로 해서 움직여 지지요. 이 두 날개를 같이 조화시키지 않으면 날 수 없듯이 우리의 인류사도 같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가 말하려는 생태변증법이예요. 누현: 마치 이영희 선생께서 말한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말과 비슷하군요. 추유: 네, 그래요. 이성과 신비는 항상 함께 하는 것이 자연이나 문명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그 신비를 항상 바깥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지요. 신비는 따로 저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 자체가 신비함을 이미 갖고 있음을 모르는 것이지요. 저는 이 차이가 바로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차이라고 보지요 또 에코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가름선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생태문제에서도 그 신비함을 밖이 아닌 안에서 찾는 노력을 한다면 사회생태학은 자연 체득할 수 있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하바마스나 북친이 비판하는 신비적 요소라고 본 생태주의나 사회생태주의나 차이가 없어지지요. 신비를 안에서 찾는다는 일은 하다못해 배고픔을 신체적으로 꼬록꼬록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인류의 가장 중요한 신비함이라는 것이지요. 혹은 서로 사랑하고 남의 불쌍한 일 혹은 계곡이 골프장 건설로 깍여 나가는 일을 아퍼하는 것처럼 더 이상 신비한 것이 없지요. 보세요. 만약 눈깜짝거리는 작용이 없다면 인류의 반 이상이 50년도 못가서 장님이 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어요 그 얼마나 신비한 일이예요? 누현: 알겠어요. 결국 점집에 가거나 괴이한 몬도가네 보신주의는 결국 신비를 밖에서 헤메 찾는 가짜 신비주의군요. 이제 다른 책 <녹색 한국의 구상>을 잠깐 다루어야 될 것 같아요. 이 책은 녹색이라는 상징적 수식어를 사유와 생태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현상에 적용한 점이 아주 인상적이예요. 과연 녹색 사유가 실천운동에 끼칠 수 있는 현실논리를 무시하면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기 때문에 경제, 지방자치, 통일문제, 실천운동 등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좋은 시도라고 보여지지요. 추유: 저도 마찬가지 생각이지요. 특히 ‘녹색 통일’의 4부는 저에게 아주 많은 반성을 하게 해 주었어요. 저는 녹색 사유가 지역운동으로 되어야 비로소 실천의 장이 열린다고 보는 것이 평소 생각이예요.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통일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녹색 사유는 결국 사치스런 박물관의 전시용 사유로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지요. 그리고 황태연 교수의 환경 제국주의를 잘 읽어 보세요. 제국주의라고 말만하면 내용도 안보고 또 빨갱이 소리냐고 겁부터 먹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사실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서구의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을 같이 보아야 할 것 같아요. 황교수 글의 내용은 정확한 통계에 의한 것이니 한 번 보시고 생각을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이것이 바로 실천의 <다른 사유, 다른 시작>이기도 하지요. 누현: 예 다시 한번 잘 읽어 보겠어요.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두권의 책에 대하여 비판적인 것은 말하지 않은 것 같아요. 좀 비판적인 이야기도 해 보시죠. 추유: 이교수의 책에서 녹색 사유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가는 형식이 덜한 것 같아요. 그리고 녹색 한국의 책은 너무 나열형이라서 일관된 구상이 덜하여, 구상이 실천성있는 구상이 되려면 생태적으로 연대하는 구상이였으면 했어요. 그러나 전체적인 의도와 문제제기는 우리가 본받아야 된다고 보아요. 특히 이교수의 왕성한 논지전개에 대하여 부러울 뿐이예요. 어쨌든 치열한 논쟁과 비판은 좀 작은 주제를 갖고 여유있는 공간에서 했으면 해요. 누현: 예, 그래요. 저도 그런 자리가 다시 만들어졌으면 해요 그래서 녹색 사유가 녹색 운동으로 이어져 녹색 한국으로 나아가 녹색 지구가 더 오래 버텼으면 해요. 추유: 버티다니요? 누현: 나중에 이야기하고 오늘은 그만 그치지요. 안녕히 계세요. 글쓴이 최 종 덕 1998년 6월 24일 |
녹색평론 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