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학운동의 평가와 전망
1998 논문 : 신과학운동의 평가와 전망, 과학사상 27호(1998년 겨울), 219-236쪽, 1998-11-25

1998년11월2일 제출, <과학사상> 겨울호 원고 최종덕(상지대, 자연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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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학운동의 평가와 전망


1. 신과학운동은 운동으로 그칠 것인가?

우리는 일상언어 속에서 과학적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현대에 끼친 자연과학의 막대한 영향력때문에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통한 문화환경이 또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었다. 과학의 실제 내용과 관계없이 과학이라는 외형범주가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사회적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고 이렇게 도그마로 변신된 개념이 내용을 지배해버리는 풍조가 만연된 듯하다. 새로운 과학의 신화가 탄생된 것이다. 과학의 개념이 기득권 세력구조에 의해 도구화되고 수단화되어 가는 상황을 지식인 조차도 간과해버리는 신화화된 과학이 탄생되었다. 우리는 주위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기준이 너무나도 아전인수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과학의 신화화는 분명히 누구에게는 이득이 되고 있으며 누구에게는 불이익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과학이 과학 외적인 요소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그냥 넘겨 버릴 일인지 다시금 반성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학적 세계관은 정신이념적 세계관 혹은 문화사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어서, 과학이 당시의 철학적 정신의 잉태물이라든가 아니면 철학이 과학의 시녀라는 일방향적 관계로 보는 시각은 반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과학과 사회 혹은 역사를 하나의 문화사회학적 총체 아래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70년대 들어서 관심이 크게 고조된 신과학운동(New Science Movement)은 과학발전의 변화와 더불어 사회적 변화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1985년 쓰쿠바대학에서의 신과학 국제심포지움 이후, 신과학운동이라는 이름이 보편화 되었다. 신과학운동은 기존의 자연관과 인식의 범주를 수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신과학의 새로운 해석방식은 첨단의 과학세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문명전환의 메시지를 던져 주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과학을 접근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한편 사회적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과학 외적 요인과 결합하여 부정적 요소를 낳기도 했다. 이 글은 지난 30년의 역사를 갖는 신과학운동이 우리의 인식의 변화를 어떻게 가져다 주었으며, 사회적 영향은 무엇이고, 어떻게 미래의 삷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를 검토한다.

신과학운동은 기존 고전과학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시작되었다. 고전과학의 세계관이란 결정론적인 존재론의 범주와 환원주의적인 인식론의 범주, 그리고 분석주의라는 방법론의 범주, 기계주의라는 구성론의 범주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신과학운동은 결정론, 환원주의, 분석주의와 기계주의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담고 있다. 나아가 신과학운동은 고전과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적 대안운동으로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신과학운동이 새로운 세계관의 범주로 정착되고자 할 때, 그 역시 고전과학이 갖고 있었던 이성의 권위주의와 인식의 독단주의의 주관자로 변모될 우려가 있다. 신과학운동은 완성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과학의 문제와 병리 현상들을 꼬집어 주고, 과학자 스스로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 고전과학의 담당자가 일선 과학자 이듯이 신과학운동의 담당자도 일선과학자이어야 한다. 신과학운동의 주체는 과학을 평가하고 비평하는 해설자가 아니라 일선의 현장과학자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최근 신과학운동의 흐름은 신과학을 하는 일선과학자보다 훈수만 두는 신과학 평론가가 더 많은 것 같다. 소설가보다 소설평론가가 더 많은 격이다. 이렇게 된다면 진정한 신과학은 없으며, 최근의 과학을 나름대로 설명하려는 신세대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신과학운동은 그것이 운동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운동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신과학의 탄생과 성장은 자연을 인식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패러다임의 전환은 운동을 통해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2. 고전과학에서 신과학으로

갈릴레오에게서 처음 쓰여진 르네상스의 신과학 개념은 근대과학혁명을 이뤄낸 기폭제의 구실을 했다. 당시의 신과학은 세계관의 전회와 시회변혁의 기틀이 되기도 했다. 갈릴레오의 신과학은 권위의 과학에서 자유의 과학으로 가는 길이며, 하늘을 위한 과학에서 인간을 위한 과학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이후 근대 과학혁명의 완성을 이룬 뉴턴역학이 등장되면서 당시의 신과학은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정착되었다.

뉴턴역학의 존재론적 배경은 절대 공간과 절대 시간을 설정하고 있다. 뉴턴역학의 수학체계는 미분방정식을 통해 완전히 기술되어 지는 결정론적 과정을 기술한다. 따라서 이러한 역학체계의 특성은 그 초기조건만 정확히 주어진다면 미래의 모든 사건의 양상을 완전하게 결정할 수있다는데 있다. 이러한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체계는 다음의 몇가지 가정위에서 성립되었다. 첫째 관찰 대상은 그것을 관찰하는 관찰자와는 독립되어 영향을 입지 않는다. 둘째 이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시계이다. 따라서 제작자는 원칙적으로 그 시계를 분해할 수도 있고 다시 조립할 수도 있다. 셋째 뉴턴 역학은 시간 방향에 있어서 대칭성을 갖는다. 과거를 알 수있듯이 미래를 과거와 같이 예측할 수있기 때문에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은 등질적이다. 네째, 뉴턴 역학은 질점(質點) 역학이다. 즉 뉴턴적 대상기술은 한 대상이 그 대상이 되기위한 두가지 필요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대상의 위치와 운동량이다. 이는 고전역학의 환산질량(reduced mass) 개념의 기본정의이다.(최종덕, 부분의 합은 전체인가, 소나무,1995, 106쪽)


이러한 기계론적 결정론과 환원주의가 바로 “과학적”이라는 수식어의 핵심 내용이 된다. 그러한 고전과학의 입장은 경험적 대상을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과학의 대상은 인간의 현재 인식능력안으로 들어오는 것만을 인정한다. 검증되는 것은 과학이고 검증되지 않는 것은 비과학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검증의 의미 혹은 검증의 영역은 매우 제한된 범위였다. 다시 말해서 검증될 수 있는 것만을 검증가능한 영역으로 제한시켰다는 말이다. 과학과 비과학의 갈등을 해소시키고자 했던 서구이성의 작업은 칸트에서 20세기 신실증주의와 포퍼(Karl Popper)에서 휼륭하게 수행되어 왔지만, 그대신 과학의 영역을 너무 좁게 만들어 놓았다. 과학탐구의 가능 영역에 대한 이러한 불만은 인간 이성의 근원적 한계에 대한 자기불만으로 이어지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자연 탐구방식이 19세기 말부터 조금씩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최초의 작업은 뉴턴 당시의 괴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괴테의 자연학은 뉴턴의 그늘에 가려 과학자와 시인을 구분 못한 사람으로 전락되었고, 본격적으로는 19세기 말 열역학에서 이루어 졌다. 열의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은 이미 중세때부터 이루어 왔지만 그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 논쟁의 핵심은 실체주의와 신비주의 사이의 대립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열역학은 기존 비과학의 영역을 과학의 영역으로 전환시킨 획기적인 사유의 진보로서 평가되고 있다. 열역학은 과학의 범주 안에서도 가시적인 인과론을 포기하면서 통계적인 인과율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전환은 볼츠만과 마흐(Ernst Mach) 사이의 실재론과 현상주의의 논쟁을 낳았고 이 논쟁은 20세기 물리학의 가장 큰 논쟁 중의 하나인 양자역학의 EPR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면서 가장 큰 변화는 자연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조금씩 수정되고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양자론은 기존의 고전과학이 지녔던 권위에 눌리지 않는 최초의 시도이다. 양자론은 미시세게에 대한 측정과정에서 개별입자의 운동상태가 고전과학의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기하였다. 양자론은 미시적 세계를 다루고 있으며, 그 미시적 과정의 기본 성격인 확률의 파동함수로서 양자현상을 기술한다. 이 점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이해를 토대에서부터 바꾸어 놓은 것이다. 양자론에 있어서 물리적 실재에 대한 변화된 이해방식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태도에까지 이르렀다.

닐즈 보어(Niels Bohr)를 따르는 양자역학의 표준해석에 의하면, 미래의 완전한 예측을 위하여 현재상태를 기술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현재의 모든 이론적 방법과 실험적 도구를 동원한다해도 양자계의 미래 상태를 예측할 수가 없다. 그들에 의하면 물리적 실재의 내적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이어서, 동일한 시간에 실재에 대한 수많은 측면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으며 단지 관찰자가 측정을 원하는 측면 만을 선택해야 한다. 양자론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의 핵심은 측정 과정에서 나타나는 파동함수의 붕괴(Kollaps)이다. 이러한 측정문제와 연관하여 야머(Max Jammer)는 보어의 입장을 관계성(Relationalität)과 전체성(Ganzheit)의 두가지로 요약하였다. 우선 보어의 관계성의 개념에 대해 말한다. 보어는 양자현상이 독립적 실재로 부터 나온 것이 아님을 확신하였다. 양자역학적 결과는 측정장치와 대상의 상호관계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측정장치와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그 장치와 양자 대상은 비가역적 방식으로 하나의 특수한 상태로 진입된다. 그 과정에 있어서 측정 결과는 측정자와의 대화하는 결과치이다. 이 상항은 보어에 의해 코펜하겐 해석의 핵심 개념인 상보성 개념에 의해 서술되었다. 그의 상보성 개념은 “물리적 실재에 대한 우리의 사유방식을 전격적으로 전회시킨 자연철학의 새로운 길” 이라고까지 말하였다.

양자역학이 새로이 요청하는 자연관은 세계를 전체적 통일성으로 본다. 그 세계관은 서구 사상을 2500여년 이상 지배해온 플라톤적 세계관과는 언뜻 다른 양상을 갖는 듯하다. 이원론적 세계관 혹은 요소환원주의적 기계론이 더이상 성립될 수 없는 자연관을 양자역학이 최소한 현상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양자역학이 신과학운동의 최초 지표가 되고 있다. 양자역학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는 결정론과, 분석주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의 사상적 결정체인 고전과학을 붕괴시킬 수 있는 비결정론, 반분석주의, 비환원주의와 반기계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양자역학은 신과학운동의 논거로서 약방의 감초마냥 항상 끼어 들게 되었다. 특히 양자론이 미시세계뿐만이 아니라 우주계를 설명하려는 이론적 도구로 발전하면서 신과학운동의 확실한 논증영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양자역학의 등장과 함께 기계론적 결정론과 환원주의가 큰 벽에 부딪치면서 유기체론이 그 대안으로 등장되었다. 프리고진 이후 생물학주의는 기존의 물리주의와 달리 비평형 상태에 대한 해석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생명현상의 활성화와 자기촉매 작용등을 통해서 나타나는 비선형적 에너지 교환과정에 대한 프리고진의 해명은 기존의 고전과학적인 사유를 완전히 되집어 놓는 자연관의 혁명과도 같았다. 이는 전통의 물리적 역학과정으로서 설명될 수 없는 유기체의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여겨졌다. 유기체의 특성은 자기 갱신을 꾸준히 하는 자기조직성(Selbstorganisation)이다. 한 유기체의 중요한 특성인 자기조직 개념을 갖고 기계론을 비판하는 관점은 부분들의 산술적 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전체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구조와 기능 그리고 동요(fluctuation)의 관계는 기존의 실체주의에서 본 것과 전혀 다른 진화적 자기조직의 3중 대응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의 개방계로서 음의 엔트로피를 보여주는 유기체의 소산구조(dissioation structure)는 비평형구조이면서도 질서적 안정구조를 갖는 새로운 과학의 탄생을 직접 예고 하는 것이다.

과학은 열려 있어야 한다. 검증 혹은 증명가능성의 폭을 기존의 기준에 맟추어 스스로를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지금 참으로 검증가능했던 사실도 추후에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다. 과학은 그 점을 두려워하는 폐쇄된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알고있는 뉴턴의 고전과학만이 언제나 정상의 패러다임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전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 즉 현대과학의 자연관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 정립된 고전적인 의미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결정론을 통해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과학은 그 정당성을 확보받을 수 있다.

3. 신과학운동의 흐름

60년대 들어서면서 판이한 철학적 세계관을 고집하던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종합되는 과학탐구가 이루어 지면서 미세계와 거대 우주계를 같이 설명하려는 색역학 계통의 잠정이론들이 물밀 듯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60년대 기상학에서부터 탄생된 카오스이론은 한때 일반인들의 과학신화를 충분히 만족시켜 줄 정도로 유행하였다. 시스템이론은 이제 사회과학에서도 응용이론으로서 수용되었고, 복잡계이론은 증권가에서도 논의될 정도로 알려 졌다. 일본에서의 기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신과학운동의 큰 힘이 되었고, 중국에서의 시스템이론 연구는 중국전통사상과 현대과학을 접목시키는 결정적인 다리가 되어 왔다. 계통론이라고 번역된 중국에서의 시스템이론 연구는 이제 중국학자들 사이에서 마치 그들 전통의 철학이라고 아는 사람들까지 생길 정도로 확산되었다. 문혁의 열기가 가시고 개방정책의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마르크시즘의 대안으로까지 논의된 계통론은 더 발전하여 80년대에는 구삼론과 신삼론의 등장을 이루었다. 구삼론은 시스템이론, 정보이론, 사이버네틱스이며, 신삼론은 카타스토로피이론, 소산구조론(dissipation structure), 공조론(synergetics)을 말한다.(김관도(김수중 옮김), 중국문화의 시스템론적 해석, 천지, 1994, 5쪽)
이 이론들의 공통점은 기존의 환원주의를 거부하면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피드백의 관계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은 이러한 이론적 작업들을 실제로 가시적 연구성과로 내기 위한 국가적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국가기관인 ‘신체과학연구소’에서는 기 현상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아주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 지고 있다. 흑룡강 대학 총장이 이 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연구원의 수가 200명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중의원을 중심으로 침술에 의한 과학적 마취효과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형편이다.

미국에서의 60년대 문명비판 운동은 그 가지로서 히피운동과 신종교운동으로 연계되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건전한 차원에서 반전평화운동과 생태운동은 그 이론적 논거를 기다리다가 74년 카프라의 등장으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 왔다. 카프라에 대한 평가는 이미 많은 자리에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더 이상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카프라의 이론적 제안은 소외의 바다에 빠진 많은 현대인에게 힘과 희망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The Tao of Physics 이후의 카프라의 저서는

( 1982년: The Turning Point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범양사,1985)
1988년: Uncommon Wisdom (탁월한 지혜, 범양사, 1989))

신과학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과 환경-생태운동, 평화운동에서 미래학에 이르기까지 문명비판론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인류사회의 대안적 삶에 대한 구체적인 미래의 등불을 제시하였다.

그 대안의 내용들은 주로 인간소외의 문제를 야기한 서구 일변도의 힘이 논리를 중화시킬 수 있는 제3의 사유를 흡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과 동양사상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며, 합리성과 분석주의 지나친 남성성의 역사구조에 직관적이고 생태적인 여성성의 요소를 들여와야 한다는 점, 그리고 성장위주의 직선적 사회에서 비선형의 회귀적 사회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카프라 논지의 전체적인 틀은 그 지향점에서 사유의 병열적인 중층구조이고 구조에 있어서 음양론이며, 내용구성의 방법에서는 대비적 종합론이다. 이러한 사유의 틀은 분명히 서구 전통의 사유방식과 어긋난다. 카프라의 독특한 점은 내용에서 뿐만이 아니라 논지의 체제에서도 기존의 서구적인 틀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생태학적인 흐름은 실상 유럽의 문명비판론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 실증주의 꽃을 피운 유럽의 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와 통일과학의 힘이 지나쳐 스스로 반성하면서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도 함께 제기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이성 절대주의와 서구중심적 문명론에 대한 강한 비판이 나왔다. 68 운동 이후, 서구 좌파운동과 문명비판론자들은 극단적인 좌파 행동주의자들과 생태주의자 그리고 신사회운동주의자로 변모되어 갔다. 그들 중에서 생태주의자들은 녹색당을 규합하여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면서, 드디어 90년대 들어 중앙 국회진입에 성공하였다. 프랑스에서도 60년대 말부터 “신학문”이라는 소수의 대중철학 선도자들이 나왔고, 포스트모더니티의 고향으로서 손색없는 이성붕괴의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자체에서의 포스트모더니티 흐름은 운동이 아니었으며 프랑스 전통의 사상적 결집체일 뿐이어서 오히려 프랑스 안에서는 그 대중적 선동성과 유행성이 두르러진 적이 없었다. 어쨌든 유럽에서의 문명비판론 혹은 이성비판론은 미국과 달리, 매우 철저하게 이성적인 기준을 잃지 않고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흐름과 연관하여 유럽에서의 신과학운동은 몇몇 종교운동 단체에서 일어 났을 뿐, 그 대중성에서 매우 취약했다.

반면 한국에서의 신과학 흐름은 카프라의 책이 범양사에서 출판되면서 빠르게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학술적인 측면에서 신과학 접근을 시도하는 범양사 출판부와 함께 정신세계사의 출판경향은 신체건강에서 수맥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부대사업을 같이 함으로써 매우 많은 독자층과 관심있는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급속한 성장속도로 커지게 되었다. 이 두 출판사는 단순한 출판사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어떤 정신적 흐름을 주도하려거나 의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염두에 둔 목적성 문화사업에 해당된다고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정신과학연구소의 비약적인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항상 사이비라는 비난과 홀대를 받아온 신과학운동 단체이지만, 신과학 기술을 이용한 대체 에너지 개발에 힘써운 결과( 1998년 여름 1998년 7월 23일)
한국표준과학연구원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공대학장, 과기처 국장 등이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석하였음.
국회가상정보가치위원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공동 주최로 ‘신과학 기술개발을 위한 정책 토론회’를 열어 제도권 과학기술계와 정식의 만남을 가졌다. 이 토론회에서는 지금까지 제도권에서 금기시 되어 온 뇌파를 이용한 텔레파시 통신술과 기를 이용한 기상조절, 피라미드 구조를 사용한 에너지 개발 등 마술같은 과학 이야기를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의학이나 심신수련에 국한되었던 기 현상을 과학적인 기술개발에 이용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늘어 났다.

90년대 들어와 일본의 신과학 도서들이 번역되면서 그 속도는 더해갔다. <뇌내혁명>이라는 책은 일본에서와 같이 한국에서도 굉장한 판매가 이루어 졌으며, 카오스이론에 이어 복잡성이론에 대한 번역서는 경영진단의 논리적 근거로서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한의학에 대한 열기가 커가면서 신과학을 이용한 진단과 치료법이 늘기도 했다. 불교계의 일선과학자들의 모임인 심성과학연구회는 신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을 거부하지만 일정 정도 신과학의 흐름을 합리적으로 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신과학을 가장 강하게 거부했던 사회과학계에서도 신과학적인 사회분석론이 나오는 특이현상이 생겼다.

이러한 한국의 전반적인 신과학 흐름은 환경-생태운동계에서도 나타났다. 80년대 한 살림운동에서 신과학의 소화는 생태중심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보며, 80년대 말 김지하 시인의 생명론은 신과학과 직접 관련이 없지만 내용적으로 큰 상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시인의 생명론이 현실부정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엄청난 파장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현재 김시인의 생명론과 신과학운동의 흐름은 환경단체안에서 크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에서 신과학운동의 흐름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대체로 그 경향성에서 볼 때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한다.

1) 고전과학적 세계관의 병리적 문제를 지적하며 새로운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학술적으로 수용하려고 하며, 그 학술적 논거는 비평형 역학계를 수립하고 있는 최근의 정통과학계를 지향한다.
2) 취향에 맞는 외국의 비전공자의 신과학 도서를 수용하면서, 의도된 신과학 경향을 전달하여 편향성을 띄우고 있다.
3) 기 현상이나 풍수, 동양의학, 서구 신비주의 현상을 너무 쉽게 수용하는 경향이 있다.
4) 앞서 이야기했듯이 신과학을 이용한 과학기술개발에 전력을 하기도 한다.
5) 신과학을 종교적 신앙으로 수용하기도 한다. 종교의 결집력이 약해지는 산업사회에서 현대과학기술사회에 맞는 새로운 결집력을 요구하면서 신과학을 수단화하는 경향이 있다.
6) 현대 기술문명사회에서 소외되어가는 인간성 회복 프로그램으로서 신과학적 메시지를 강하게 부각시키기도 한다.
7) 생태운동의 근거로서 신과학을 연구하고 발표하기도 한다.
8) 최근의 경향이지만 신과학 기술개발을 이용하여 일반인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경향도 있다.

한국의 신과학운동 경향과 관련하여 60년대 구 소련과 북한의 신과학기술 연구 동향을 본다. 구 소련은 일찍 텔레파시와 순간이동에 대한 연구가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 진 적이 있다. 북한에서 60년대 양의사인 김봉한에 의해 동양전승의학을 실증적이고 과학적으로 완벽하게 재현한 ‘봉한설’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위권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두 연구경향은 지금 어디에서도 회자되지 않고 있다. 북한의 김봉한은 이후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나 숙청되었고, 현재 일본의 한 두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례는 특히 한국의 기술개발을 지향하는 신과학운동에 있어서 귀감이 될 것으로 본다. 신과학을 이용한 기술개발이 뛰어난 결과와 효과치를 갖고 있다해도 그것이 지속성과 보편성 그리고 항상성이 없으면 결코 과학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한국에서의 신과학운동은 미국 출판계와 일본 출판계의 영향을 전적으로 받고 있다. 미국의 신과학 관련 도서출판의 경향은 주로 양자역학과 관련하여 세계관의 전환을 시도하는 것이 있으며, 우주 총합론이나 생명과학의 유기체 철학을 강조하는 분야가 있다. 반면 신비주의 성향이 강한 동양과의 접목을 시도한 책들이 많이 나오며 스즈기 불교를 넘어서 명상을 산업화한 인도 신비주의 경향의 흐름이 강하게 나오고 있다. 나아가 UFO와 생명의 우주기원론에서부터 내세와 영혼의 문제를 사이비 과학으로 도배하는 경향도 많다. 이러한 출판 경향을 보려면 인터넷 상에서 으로 들어가 주제별로 “new physics” 혹은 “occult sciences”를 찾아보면 500권 이상의 신과학 관련 도서목록이 나오므로 이를 참조하면 된다. 문제는 미국의 동양관련 신과학 도서의 정보가 동양인이라고 자부하는 한국인의 도서정보보다 더 쉬운 경로로 우리 독자들에게 접근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서구인의 입맛에 맞게 수정되고 재편된 동양학을 우리가 반성없이 수용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풍수에 관한 대중서가 그렇게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작년에 우리말로 번역된 “Interior Design With FENG SHUI” (Arkana,1987)라는 책보다 실질적인 정보량에서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책에 기술된 풍수론이 정형화되면서 풍수의 진정한 뜻이 왜곡된 상태로 한국인에게 쉽게 접근되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카프라의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동양학에 대하여 너무나 친절하고 쉽게 써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의 동양학자에게서 나는 그렇게 친절한 동양학 안내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동양철학을 조금 배우고 보니, 카프라의 동양사상 이해는 철저히 서구 중심적인 이해관계에서 쓰여 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까지 카프라는 서구의 문명대안론자로서 휼륭하다고 인정하지만, 동양인에게는 잘못된 이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비판되어야 할 것은 비판되어야 한다. 신과학의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고전적 과학의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카프라에 대한 나의 편협된 생각에도 불구하고 카프라가 보여준 문명적 대안들은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 이유는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관점에서만 과학비판과 이성비판을 해온 학자와 달리, 불안 속에서 대안을 희구하던 많은 세계인에게 행동과 실천의 강령과 정신적 희망의 책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신과학운동을 전체로 싸잡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일보다는, 신과학운동의 본령인 기성 과학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 대하여 그 처음의 문제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 신과학운동의 철학적 배경과 요청된 역사의식

오늘의 문명위기와 관련하여 서구 과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다. 그런데 실제로 서구 과학비판은 산업화에 대한 비판, 근대화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서구이성에 대한 비판이 함께 섞여있다. 인간위기 혹은 문명위기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이야기된 비판의 시각 중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을 구체적으로 다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세계관으로서 주객분리에 대한 것, 혹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에서는 기계론적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형이상학에서는 결정론적 구조관에 대한 것이며, 방법론에서는 분석주의와 환원주의 혹은 연역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에 따른 인간소외의 문제, 혹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생긴 환경파괴의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서로 분리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논지 전개를 위하여 위의 문제들에 대하여 나누어서 그 사상적 지평선을 열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서구과학이 지니는 인식영역의 한계성에 대한 비판이다. 서구과학의 구조적 틀은 현상과 존재계의 이분법적인 고대 그리스 철학의 사유구조와 기독교의 세계 디자이너(신) 개념 위에서 세워졌다. 현상계는 존재계를 모방만 할 수 있지, 그와 결코 동일한 지위를 갖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의 창조물인 인간은 신의 의지를 전부 알 수 없다. 인간의 인식한계는 여기서 생긴다. 불완전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인식능력을 쓴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의 역할은 우리가 보퉁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서구과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 혼자만의 지식을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은 전달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언어라는 전달매체의 효율성이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인간인식의 한계를 겸허하게 이미 수용했으며 그 한계를 신과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공중언어로서 조금씩 넓혀가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이러한 반성없이 서구 과학적 인식론의 한계만을 부각시켜 말하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서구과학의 인식의 한계를 표피적으로 주장하면서, 그 대안으로 주역의 자연관이나 노장자를 말하거나 화엄경의 일체사상만을 자꾸 반복하면 자칫 뜬 구름잡는 이야기로 전락될 수 있다.

둘째 서구 기계론이나 결정론에 대한 비판이다. 기계론이나 결정론에 대한 용어적 함정에 빠져, 그것에 대한 대안이 반성없는 생기론이나 정령론으로 잘못 나갈 수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나 뉴턴의 기계론은 현대의 믄명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약방의 감초로 끼는 비판대상이었다. 서구의 이원론이나 기계론은 확실히 산업혁명의 기초사유였으며, 그로부터 야기된 인간소외의 요인은 문명사적으로 심각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기계론이나 결정론은 과학에서 인과율로 나타난다. 인과율은 물리화학적 사건이나 사태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대한 2차기술 체계의 도구이다. 즉 자연 자체가 인과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진술과 자연을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진술은 다르다. 서구의 인과적 과학체계가 형이상학적 결정론과 세계관의 측면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후자의 진술을 전자의 진술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더우기 문제는 기계론과 결정론과 같은 개념이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제로 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더 크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되는 현상이라든지, 영주와 농노 혹은 자본주와 노동자 사이의 빈부 격차에서 오는 새로운 계급화 현상이 결정론적인 신분분리로서 대치되는 사회적 과정을 거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결정론에 대한 불만이 크게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은 60년대 이후 뉴턴역학의 세계관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추세는 곧장 반대급부적인 주술적 생기론이나 현대적 정령론(animism)으로 부활되었다. 생기론이나 정령론은 기계론의 병리적 현상들을 지적해내기는 했지만 그것에 지나쳐 사회 최면제적 역할을 수반하였다. 그것은 비율(ratio)로서 상징되는 기계의 이성주의에 반하여, 그 이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도피하는 안식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반기계론적 추세는 과학 단독의 문제영역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사회학적 분석이 함께 따라야 한다.

세째 분석주의와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최근 과학일반의 조류는 과거 물리학주의가 과학을 지배했던 것과 달리 생물학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데카르트적인 생물학이 아니라, 생물학이 물리학 방법론과 다른 생물학 고유영역을 확보하려는 입장이다. 분명히 기존의 분석주의와 환원주의 방법론으로는 생명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그래서 기존 방법론의 한계가 지적되고, 단순히 지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도높은 용도폐기론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강한 비난은 전일론(holism)의 주장으로 이어지면서 전일론에 대한 평가가 아전인수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과학에서 말하는 전일론의 실체를 알아야만 한다. 그들의 전일론은 분석주의 혹은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고에너지 물리학이나 생명과학으로의 과학적 발전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인식론적 (고전적) 환원주의가 갖는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존재의 양상을 올바르게 기술하기 위하여 기존의 방법론이 아닌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으며, 그 새로운 도구가 마치 일반인들에게는 환원주의 파괴의 방법론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해수준에서 전일론을 받아들인다면 과학과 형이상학은 방법론에서 조차 구분이 안된다. 과학과 형이상학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서로 만나고 있고 또 만나야 하지만 일선 과학자의 입장에서 과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언어 매체를 통한 기술학(descriptive science)이다. 간단히 말해서 첨단의 유전공학 연구의 성과기준은 여전히 환원적 연구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위의 세가지 문제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야기할 내용은 그렇게 잘못 이해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문제이다.

첫째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면 사회적 접근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말하는 외눈박이 시야이다. 특히 문명위기와 관련하여 과학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회와의 연계성이 논의되어야 한다. 인간학은 실천의 문제와 동떨어져서는 결국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의 현실과 과학의 희망을 분명하게 나누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의 유토피아가 현실의 과학을 지배해서는 현재의 인간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서구의 유토피아론은 근대 과학혁명의 사상적 정초이기도 하지만,이것이 사회적으로는 지금 조금만 참으면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전락될 위험성이 짙다. 그 ‘지금’을 항상 지금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과거 전제주의의 전략이었으며 오늘날도 상업자본주의 밑에 깔린 생각들이다. 실제로 현재도 많은 천민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개도국의 발전모델과 연관되고 있다.

세째 앞에서 말한 주술화된 생기론이나 현대화된 정령론이다. 나는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인간 소외문제와 직접 연관된다. 왜냐하면 둘 다 고도화된 산업화에 따른 필연적 산업사회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신흥 부흥종교, 밀교적 신비주의 집단, 기공에 대한 급속한 관심확대, 서구에서 동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동양에서 동양에 대한 허무한 자부심, 개인주의와 탈정치화가 가져 온 개인 서정주의의 확산 등이 바로 그 모순의 단편들이다.

고도의 산업화에 대한 분석을 단지 서구 합리성 혹은 이성주의의 물질적 소산물로서만 보면 안된다. 그렇다고 하면 산업사회의 탈정치성을 말하는 후기 산업사회라는 표현 혹은 효율과 극단적 합리성의 사회를 표현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가장 비합리적 요소인 주술성이나 신비주의가 자취를 감춰야 했다. 그러나 실제 사회현상에서는 주술성과 신비주의가 뒤끓고 있다. 오히려 후기 산업사회 혹은 정보화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최첨단의 과학과 최고의 비합리성인 신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신비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결국 상업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되가는 신비주의 산업이 문제인 것이다. 신비주의 산업 일반은 겉으로 대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지만 결국 사회마취제적 기능에 봉사하고 만다. 신비주의 산업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삶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 이익집단의 목적달성을 위한 구호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개인의 보신주의로 전락된 생명주의 등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얼마나 깍아먹고 있는지를 잘 볼 필요가 있다. 개인 생명주의는 결국 자기 개인만을 위한 보신주의일 뿐이다. 그것이 설령 종교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정신적 위안일 뿐이다. 또한 그 현상은 한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업자본주의의 논리를 합리화시켜 주는 도구로 전락될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가능성 등을 경계하고 배제할 수 있다면 신과학은 분명히 현대인에게 문명적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본다. 더 쉽게 말해보자. 오늘날 신과학운동이 과학운동만의 일이 아니며, 문명대안운동으로 까지 나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과학운동은 자신의 사회적 여파에 눈감고 있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신과학에 대한 이해는 단순히 기의 작용과 그 물리과학적 해명 정도로 그칠 일이 아니라, 서구 과학정신의 기초와 동서간의 정신적 갈등, 나아가 신과학을 수용하는 우리의 역사구조 등을 유기적으로 파악하려는 앎의 자세가 요청된다. 신과학을 단순히 과거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아니면 신비하고 신기한 현상쯤으로 생각하고 덤벼든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과학운동이 될 수 없으며, 희망을 찾아 나서는 우리 삶을 위하여 현실적인 아무런 효용가치도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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