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1999  논문 :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현대사상 3권3호(1999년9월),168-182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1.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나는 이 글의 시작을 최근에 출판된 󰡔한의학의 비판과 해설󰡕(1998)이라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하려 한다. 이 책은 매스컴의 관심을 끈 책이 아니지만,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의학의 비판과 해설󰡕은 1930년대 이루어진 양의사와 한의사 사이의 한의학에 대한 논쟁을 재수록한 책이다. 1934년 일간지와 잡지에 연속해서 실려진 이 원고들은 한의학이 과연 부흥될 수 있는가, 한의학이 보편과학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시 신의학에서 한의학의 위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일관된 주제를 갖고서 6인의 양한방 관련자들이 벌인 논쟁이다. 이 논쟁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논쟁이 오늘날 학계에서 벌어지는 논쟁 이상으로 훨씬 논리적이며, 논지중심적이라는 점이다. 치열하고 의미심장하며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주장들이었지만 요즘의 논쟁풍토에서 나타나는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도 없으며, 논제를 빙자한 자기 자랑도 없으며, 문필 권력도 없으며 논점탈피의 오류를 범하는 일도 없다. 상대방의 의학을 혹시라도 감정에 치우쳐 헐뜯는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자신의 논점을 정확하게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그 방식이 바로 오늘을 공부하는 우리 시대의 지식인에게 부끄러움을 주고 있다.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한 사람은 하늘이 두쪽 나도 1700미터가 옳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너는 틀렸고 1300미터가 맞는 것이라고 싸움을 하고 있다. 논쟁이 불붙어 끝내는 논리적 일관성이나 사실적 검증 여부를 이미 떠나 있는 상태여서 그들 사이에 화합은 아예 포기된 상태이다. 그래서 조정을 좀 해볼까하고 그 논쟁을 간섭을 해보니, 참으로 한심한 싸움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은 설악산 높이가 1700미터라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사람은 치악산 높이가 1300미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부를 하는 일은 내가 왜 이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 질문이 없는 공부는 구체적 삶과 그 울타리가 되는 세계의 문제를 건드릴 수 없다. 그리고 올바른 질문이야말로 문제풀이의 반을 지나온 셈이다. 질문이 없는 공부도 뭇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싸움거리를 제공하고 시대적 유행을 잠시 일으킬 수 있지만, 공허한 영점에 되돌아올 뿐이며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퇴행적 역사에 힘을 실어줄 뿐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이러한 퇴행적 공부가 얼마나 많은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을 지경이다. 어떤 이는 나의 이러한 퇴행적 공부 기준에 대하여 비난을 하기도 한다. 공부에 대하여 누가 감히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한 비난은 ‘누가 저 여인에게 진정 돌을 던질수 있느냐?’라는 유사문법을 지니고 있어서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하지만, 이 시대의 문제와 고민을 회피하는 방도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글쓰기 담론과 관련하여 공부의 주체가 된다고 하는 소위 지식인의 구실에 대한 자성이 일고 있다. 가치의 중립성을 표방하면서 역사를 상실한 공부법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이다. 그 지향점은 물질에 지배당한 정신의 해방을 찾는 데 있다. 오염된 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오염의 역사를 발판삼아 지식의 패권을 쥐고 있는 지식인에 대한 화살이다. 그러나 막상 지식인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지식의 상술이 능해졌으며 후배 지식인은 선배 지식인의 상술에 한 술 더 뜨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인은 역사의식을 회피하는 기술자로, 지식제국주의의 우체부로, 품위유지의 상징으로, 나만이 할 수 있다는 독단주의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

공부하는 바른 길의 제일 조건은 공부하는 이유와 공부한 내용으로서의 지식이 반드시 남과 더불어 공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공유로부터 실천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을 공유하고 싶지 않은 마음은 그것이 가짜거나 베낀 지식이어서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을 때, 아니면 윗선에게 전시효과만을 노린 보고서로 그칠 경우이다. 지식이 공유되기 위하여 공부의 길 속에 역사의식이 녹아나야 한다. 거창한 역사가 아니라 내가 왜 이 지식을 섭취해야 하는가하는 자기 물음이 바로 역사의식이다. 인문학자나 사회학자는 물론이거니와 과학기술자나 직장의 중견인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의 아픔을 실천으로 풀고자 하는 모든 이가 바로 바르게 공부해야 하는 지식인이다. 그러나 요즘은 지식이 정보의 개념으로 그리고 경제의 가치기준으로 바뀌어가면서 지식의 역사적 문맥을 묻는 질문이 안타깝게도 소실되고 있다.

인문학에서뿐만이 아니라 자연과학-공학에서의 역사성 없는 공부도 마찬가지 일 수 있다. 분자유전학과 정보산업의 비약적인 성과가 사회적으로 문제되면서 생명윤리와 정보윤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과학자가 소유하는 지식은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잘못된 환상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그 과학적 성과가 인류의 미래사회에 진정으로 실용적일 수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프랑스에서 탁월한 과학적 업적을 보이고 있는 바렐은 원래 칠레 태생의 분자생물학자이다. 그는 과학자이지만 분명한 철학적 세계관을 갖고서 칠레 민주화 운동의 사상적 후원자로서 큰 몫을 다하고 있다. 과학적 지식을 객관적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객관적 지식이란 지식 수용의 방법론적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사회와 역사를 도외시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지식의 가치중립성을 강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논문 편수 채우기 식의 논문쓰기와 연구비 나눠먹기 그리고 논문결론을 정해 놓고 실험결과를 유도하는 식의 지식유용이 아직도 남아 있는 우리 지식사회를 여전히 보고 있다. 결국 지식의 가치중립성 명제는 그 자체로 지식이 될 수 없는 자기모순이며 진공 속의 지식일 뿐이다. 진공 속의 공부가 아니라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를 찾는 길이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2. 공부를 왜 하는가

21 세기를 코 앞에 둔 시점에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지식사회의 양태를 예측하는 다양한 담론들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담론들이 20세기와 21세기, 혹은 밀레니엄의 시간적 경계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혹 놓치고 있는 듯 하다. 시간적인 흐름에서 밀레니엄이 오거나 21세기가 온다하여도 인간이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창출하지 못할 때, 밀레니엄의 새시대는 일종의 환상이며, 시류적 무임승차를 엿보는 허구의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일고 있는 21세기 증후군의 증상들 즉 정보화, 후기 산업사회, 세계화, 경쟁력 제고, 개혁의 기치, 신지식인, 개방화 나아가서는 ‘두뇌한국21’ 프로젝트 등의 언어유희는 지식과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도태시킬 우려가 있다. 그러한 언어의 깃발이 과거와 현재의 현실과 조건을 잊은 채 처부수자 돌진형으로 될 때, 깃발의 위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래서 밀레니엄이나 21세기 담론은 철저하게 과거의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장미빛 미래학이 되어서는 안된다.

미래에 대한 해답찾기가 아니라 해답을 찾아가는 질문의 과정에서 더욱 풍부한 해답이 얻어 질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과정에 대한 인식이 바로 역사의식이며 문명사관이 된다. 거꾸로 역사의식과 문명사관을 정립하는 것이 공부의 길이다. 다시 말해서 지식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문제가 여러 각도에서 반성적으로 제기되면서 내가 왜 공부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이러한 질문은 결국 공부하는 방향과 방법에 대한 반성을 시작하는 일이다. 나는 다른 지면에서 한국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공부하는 길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왜곡된 학문의 문제와 군사정권 이후 이데올로기가 권력의 도구로 전락된 현상과 그로부터 발생되는 지식의 편협성과 지식사회의 권력구조화를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온 반론으로서 공부하는 길을 말하면서 왜 그렇게 지역적인 것을 따지냐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시험공부를 강요받으면서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강요받은 것은 집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 공부를 하여 ‘페호선생’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전한시대의 손경 이야기나 삼진시대의 형설지공의 말을 남긴 차윤의 이야기였을 뿐,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최근 대학의 고시시험장화라는 말을 들으면서 더하면 더했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편학문과 특수학문의 구분은 많은 경우 지식권력과 연관된 의도된 구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식사회의 권위구조 혹은 서구지식의 시녀현상, 훈고학과 순수논리적 태도를 통한 학문의 중립성이라는 허울, 편의주의적 상아탑의 가면, 나아가 경제논리에만 맞추어서 지식평가를 왜곡하는 현상 등이 보편학문으로 가장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고 있다. 공부를 왜 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반성의 태도를 지닌다면 보편학문과 특수학문의 구분은 범주오류일 뿐이다. 시대가 안고 있는 사유의 지평선을 고민하는 공부가 바로 보편학문으로 이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행히도 요즘들어 이러한 질문이 이곳저곳에서 던져 지고 있다. 미비하지만 90년대 들어와 포스트모더니티 논쟁 혹은 동아시아 담론 등의 긍정적이고 창출성있는 인문학의 작은 성과가 그 예이다. 지식인의 위기의식과 그에 따른 반성작업, 그리고 실천적 대안찾기에 분주했던 때라고 보여진다. 전통과 근대, 근대와 탈근대, 종속과 탈식민, 정체성 찾기와 민족주의의 해석론, 과학비판과 큰 기세를 얻고 일어나는 다양한 문화담론들, 문명의 위기와 관련된 환경과 생명사상의 논의들, 우리 글쓰기와 오늘 속의 고전읽기, 그리고 정보사회론까지를 다양성있게 그 반성과 비판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이 다양한 논의 속에서 우리는 자아찾기의 과제가 공분모로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낳고 다시 낳아지는 사유의 지평선에서 위와 같은 자아찾기의 과제는 몇 가지 공통된 문제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이성과 전통을 이제는 다른 시각에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며, 다른 측면에서는 이론과 실천 혹은 설명explanation과 이해understanding의 혼돈과 질곡을 부셔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성과 관련된 비판적 담론의 철학적 핵심을 보기로 하자.

3. 이성비판으로서의 실례

이성비판 중에서 과학비판의 소리를 들어보자. 현대 문명위기와 관련하여 서구과학에 대한 비판은 산업화에 대한 비판, 근대화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서구이성에 대한 비판이 함께 섞여있다. 이와 관련하여 논의를 가장 많이 탄 비판의 시각 중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을 구체적으로 다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세계관으로서 주객분리에 대한 것, 혹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에서는 기계론적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형이상학에서는 결정론적 구조관에 대한 것이며, 방법론에서는 분석주의와 환원주의 혹은 연역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에 따른 인간소외의 문제, 혹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생긴 환경파괴의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첫째 서구이성의 인식의 한계성에 대한 비판이다. 서구이성의 구조적 틀은 근대 이전에 이미 고대 그리스 철학의 현상계와 존재계의 이분법적 세계관과 기독교의 세계 디자이너(신) 개념에서 만들어졌다. 현상계는 존재계를 모방만 할 수 있지, 그와 동일한 지위를 결코 갖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의 창조물인 인간은 신의 의지를 전부 알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의 인식한계는 여기서 생긴다. 불완전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인식능력을 쓴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의 역할은 우리가 보퉁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서구이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 혼자만의 지식을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은 전달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언어라는 전달매체의 효율성이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인간인식의 한계를 겸허하게 이미 수용했으며 그 한계를 신과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공중언어로서 조금씩 넓혀가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이러한 반성없이 서구의 인식론의 한계만을 부각시켜 말하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서구의 인식의 한계를 노출시키면서 그 대안으로 주역의 자연관이나 노장자를 말하거나 화엄경의 일체사상만을 자꾸 반복하면 자칫 뜬 구름잡는 이야기로 전락될 수 있다.

둘째 서구 기계론이나 결정론에 대한 비판이다. 기계론이나 결정론이 정당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대안이 반성없는 생기론이나 정령론으로 잘못 빠지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나 뉴턴의 기계론은 서구 문명비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감초로 끼는 비판대상이었다. 그들의 이원론이나 기계론은 확실히 산업혁명의 사유기반이었으며, 그로부터 야기된 인간위기의 요인은 문명사적으로 심각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기계론이나 결정론은 과학에서 인과율로 나타난다. 인과율은 물리화학적 사건이나 사태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대한 이차기술 체계의 도구이다. 즉 자연 자체가 인과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진술과 자연을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진술은 다르다. 서구의 인과적 과학체계가 형이상학적 결정론과 세계관의 측면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후자의 진술을 전자의 진술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더우기 문제는 기계론과 결정론과 같은 개념이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제로 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더 크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되는 현상이라든지, 영주와 농노 혹은 자본주와 노동자 사이의 빈부 격차에서 오는 새로운 계급화 현상이 결정론적인 신분분리로서 대치되는 사회적 과정을 거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결정론에 대한 반감이 크게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반감은 60년대 이후 뉴턴역학의 세계관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추세는 곧장 반대급부적인 주술적 생기론이나 산업사회 속에서 현대화된 정령론(animism)이 부활되었다. 생기론이나 정령론은 기계론의 병리적 현상들을 지적해내기는 했지만 그것에 지나쳐 사회최면제적 역할을 수반하였다. 그것은 기계적 비율(ratio)로서 상징되는 이성주의에 반하여, 그 이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도피하는 안식처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반기계론적 추세는 과학 단독의 문제영역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사회학적 분석이 함께 따라야 한다.

세째 분석주의와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최근 과학일반의 조류는 과거 물리학주의가 과학을 지배했던 것과 달리 생물학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데카르트적인 생물학이 아니라 생물학이 물리학 방법론과 다른 생물학 고유영역을 확보하려는 입장이다. 분명히 기존의 분석주의와 환원주의 방법론으로는 생명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그래서 기존 방법론의 한계가 지적되고, 단순히 지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도높은 용도폐기론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강한 비난은 전일론(holism)의 주장으로 이어지면서 전일론에 대한 평가가 아전인수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서구과학에서 말하는 전일론적 사유(holistic view)의 실체를 알아야만 한다. 그들의 전일론은 분석주의 혹은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고에너지 물리학이나 생명과학으로의 과학적 발전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인식론적 (고전적) 환원주의가 갖는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존재의 양상을 올바르게 기술하기 위하여 기존의 방법론이 아닌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으며, 그 새로운 도구가 마치 일반인들에게는 환원주의 파괴의 방법론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해수준에서 전일론을 받아들인다면 과학과 형이상학은 방법론에서 조차 구분이 안된다. 과학과 형이상학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서로 만나고 있고 또 만나야 하지만 일선 과학자의 입장에서 과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언어 매체를 통한 서술주의 과학(descriptive science)이다. 간단히 말해서 첨단의 유전공학 연구의 성과기준은 여전히 환원적 연구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위의 세가지 문제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야기할 내용은 그렇게 잘못 이해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문제이다.

첫째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면 사회적 접근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말하는 외눈박이 시야이다. 특히 문명위기와 관련하여 과학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회와의 연계성이 논의되어야 한다.

둘째 과학의 현실과 과학의 희망을 분명하게 나누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의 유토피아가 현실의 과학을 지배해서는 현재의 인간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서구이성의 유토피아적 사유는 근대 과학혁명의 사상적 정초이기도 하지만, 이것이 사회적으로는 지금 조금만 참으면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전락되는 경우를 많이 보고 있다. 그 ‘지금’을 항상 지금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과거 전제주의의 전략이였으며 오늘날도 상업자본주의 밑에 깔린 생각들이다. 실제로 현재도 많은 천민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개도국의 발전모델과 연관되고 있다.

세째 앞에서 말한 주술화된 생기론이나 현대화된 정령론이다. 나는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인간 소외문제와 직접 연관된다. 왜냐하면 둘 다 고도화된 산업화에 따른 필연적 산업사회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신흥 부흥종교, 밀교적 신비주의 집단, 기공에 대한 급속한 관심확대, 서구에서 동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동양에서 동양에 대한 허무한 자부심, 개인주의와 탈정치화가 가져 온 개인 서정주의의 확산 등이 바로 그 모순의 단편들이다.

넷째 자유주의의 왜곡된 현상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자유는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자아를 실현하거나 결핍된 자아를 채우려는 지향적 과정이다. 모든 원인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존재causa sui 만이 완전한 자유이다. 서구이성은 이러한 완전한 자유의 존재와 자유를 향해 항해하는 불완전한 존재를 구분하는데서 그 구실을 다한다. 그러한 구분의 완전한 격리를 부각하면서, 자유의 추구를 영성적 요소에다 갖다 붙이면 종교 특히 서구 기독교가 되며, 이성적 요소에다 갖다 붙이면 과학의 탄생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핍의 자아를 충족시키려는 노력이 물질적인 측면일 경우 서구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탄생이 분명하게 설명되어진다. 결핍된 자아의 물질적 충족은 반드시 남의 물질적 탈취를 가져오기 때문에 자유주의의 왜곡된 현상이 노골화되어 진다.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왜곡된 자유주의가 주인으로 행사하며, 나아가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경제개념이 일상의 모든 삶의 지표로서 인간왕국의 자리를 차지하며 버티고 앉아 있다는 점이다.

4. 실천문제로서의 실례

이제는 공부와 실천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내가 하고 있는 철학공부를 예로 들어 이야기하려고 한다. 전에도 그러했지만 요즘 부쩍 대학의 철학과 문턱에서는 파리만 날리고 있다. 철학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현대 산업사회에 들어와서 점점 왜소하게만 보여진다. 첨단과학의 발전이 정교화된 자본주의와 만나면서 우리의 삶의 양상은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변모하는 물적 조건들을 철학이 따라 잡기에는 너무 빠르다고 말한다. 기존 철학의 틀은 이제 더 이상 이렇게 다원화된 산업사회를 포용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철학의 새로운 틀거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당위성은 철학공부의 너무 중요한 과제거리로 되었고, 이전 이데올로기의 시대보다 더 실천철학의 할 일들이 많아진 셈이다.

철학이 반드시 사회가 요구하는 실천강령을 제시해야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천을 염두에 두지 않은 철학공부는 논쟁을 위해서 아니면 박제된 철학일 뿐이다. 철학에서의 실천적 지표란 반성과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얼마전에 이와 관련하여 조선 시대 과거시험 답안을 모은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선조35년 별시문과別試文科 시험문제로서 공부의 방법을 묻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급제한 조희일趙希逸은 자신의 답안에서 공부의 길을 다음과 적었다. “진실로 능히 먼저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서(致知) 학문을 하는 밑받침과 도에 나가는 기반으로 삼고, 자신의 속마음을 단정히 하며(存養), 행실을 살피고 마음을 반성한다(省察) 이미 아는 것을 바탕 삼아 더욱 깊이 학문을 연마하고, 현재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충분하다고 자만하여 학문정진을 그치질 말며, 옳은 일이라 여기면 반드시 힘을 모아 실천해야 한다.(力行)” 결국 이 글을 잘 읽으면 진정한 실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치지와 존양, 그리고 성찰의 과정을 먼저 거쳐야 함을 느낄 수있다.

그런데 실천의 공부법이 어디까지를 말하는지 나는 모호하고 애매함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요즘 환경철학에 관한 책을 내려고 준비하고 있다. 환경철학이야말로 실천문제가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나온 환경철학 책을 읽다보면 너무 어려워서 환경에 관심을 둔 많은 이들이 책 읽기를 포기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독자들이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을 써보려고 했다. 그러나 책을 쓰는 순간 나의 행위는 실천이 아니라 다시 이론의 바다에 빠지고 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책을 내면서 밀림의 나무들이 베어져 나가는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다른 주제의 책이라면 모르는 척 할 터인데, 환경에 관한 책이라서 뻔뻔하게 그럴 수도 없다. 내가 학위논문을 썼던 주제는 양자역학의 철학이라서 실천의 문제와는 더 동떨어진 듯 하다. 그렇다면 실천하는 공부의 길이 사회문제를 다루는 공부에만 국한된다고 보지는 않는다. 실천하는 공부의 길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추구하는 과정이다. 한형조 교수는 여러 차례 그의 원고 중에서 동양철학이든지 환경철학이든지, 양자역학의 철학이든지 관계없이 사회적 요청에 귀기울이는 것이 실천의 과제라고 말하고 있다. 좀더 자세히는 관념의 유희나 지적 사치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부가 그것과 연관된 학문체계 안에서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일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최근에 나온 다른 한 권의 책에 주목하고 있다.

그 책은 잡지 형식으로 나온 󰡔오늘의 동양사상󰡕(1998)이라는 책이다. 이 책 안에는 전년도 동양철학의 연구성과와 발표논문 등을 학술자료와 정보를 싣고 있었다. 그 분량은 전체 385쪽 중에서 106쪽이나 된다. 나의 전공은 동양철학이 아니기 때문에 왈가불가 할 수 없지만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모아서 정기적으로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일을 그 책에서 시작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기존 논문의 같은 주제를 다시 발표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동양학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동양철학의 여러 논문들을 읽고 있지만 역사적 문맥을 찾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성현의 좋은 이야기들을 비판없이 그대로 설명하고 번역의 충실도에만 그치고 있음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성현의 좋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동양학에 대한 논문이 많이 나오고는 있으나 선현들 앞에 줄서기하는 연구주제에 멈추고 있을 뿐이다. 논문을 쓰는 필자가 오늘의 문제와 연관시키는 역사의식이 결여된 공부는 그것이 아무리 좋은 수양론에 대한 공부라 하더라도 그저 또 한편의 논문쓰기 작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동양철학의 출발은 실천의 과제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실천의 과제가 어떤 때는 실용주의로 어떤 때는 정권유지의 이데올로기 옹호로 혹은 사랑의 차별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의 역사적 소명의식이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서구의 근대화 물결 속에서 대항 이데올로기의 구실보다는 소극적인 학문이론으로 침잠되어 온 것이 우리 역사의 불운이었다. 실천을 여전히 말하지만 실천에 대하여 말하는 메타실천 이론으로 전도된 것이 문제이다. 그러다 보니 유림과 문중의 견고한 성곽에서 튀쳐나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모양이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소장학자를 중심으로 근대성과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는 동양철학 연구자들이 많이 나오면서, 군자의 논리를 무조건 따라하는 철학에서부터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실천의 철학으로 번져 나갔다.

동양철학의 옥조금과인 군자의 이야기들은 너무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군자의 수양법을 보통 사람들이 다하기에는 너무 길이 멀게 느껴진다. 그 길을 다한다해도 군자의 논리는 혼자서 수양을 완성시켜 혼자서 모든 치국평천하를 다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런 방식은 현대에서 대중적 실천론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성현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 사이에서 오는 차이를 인지하지 못할 경우 실천에 대한 아무리 좋은 글과 책이 있다하여도 또 하나의 이론일 뿐이다.

5. 새로운 수양론

논어 옹야雍也 편에 배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학문을 한다는 것은 不遷怒 不貳過라고 하였다. 공부를 많이 하면 노여움을 겉에 드러내지 않으며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옹야 편뿐만이 아니라 유가 전체의 학에 대한 맥락에서 볼 때, 공부가 무엇인가를 설명한다기 보다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갖추게 되는 결과론적 성품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를 거꾸로 달리 해석한다면 보통 사람이라도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면 공부를 많이 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공부와 수양을 동일시하는 태도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문은 지식이 극도의 세분화를 이루면서, 공부와 수양은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버렸다.

수양론의 극치는 대학에서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에 있다고 본다. 치국평천하를 하려면 그보다 앞서서 반드시 수신제가해야된다는 수직적 논리이다. 이런 방식의 수양론은 통치논리가 우선함을 내포한다. 결국 개인 수양이 덜 되거나 집안조차도 다스리지 못하면 나랏일이 엉망이 되거나 독재가 횡행해도 절대 나서면 안된다는 뜻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이렇게 수직적 방식의 통치를 위한 수양론은 자기가 사는 환경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는 사회최면제의 구실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이런 논리는 과거 독재정권에서 대항세력 잡아넣기 전술로서 자주 사용해 왔으며, 지금까지도 정치권이나 학계에서조차도 즐겨 써먹는 형편이다. 그래서 그 논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신을 다하기 위하여 正心과 誠意를 해야 하며, 나아가 格物과 致知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는 말 속에서 비판적 공부법을 발굴해 내야 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통치를 위한 수양론이라면, 격물치지성의정심은 수양을 위한 공부론이 될 것이다. 격물치지의 대상이 과거에는 인간과 사회였다면 오늘에는 인간과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심리와 자연 그리고 형식논리까지를 포함하게 되었다. 서구화된 학문의 범위는 결국 동양고전에 없었던 심리에 대한 심리과학과 자연에 대한 자연과학 그리고 논리에 대한 수학이라는 학문으로 넓혀지면서, 학문이 전문화되고 세분화 되었다. 그러나 학문분야의 서구화된 확장과 함께 학문의 수양론이 폐기되고 학문의 권력화와 공부를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소실되어 가고 소위 가치중립성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객관성의 아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인문과학이 자연과학의 옷을 입고 그 권위를 자랑하고 있으며, 사회과학 조차도 실천의 이론화가 이론의 실천화보다 앞서 있다. 비판을 넘어선 미래의 대안이라는 명목아래 과거의 것을 비판없이 다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논리가 득세하는 것을 막는 것이 바로 공부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판력을 상실한 몰역사의 공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군자의 논리인 과거의 수양론이 아니라 비판론이 함께하는 새로운 수양론을 공부하는 길의 지시등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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