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계와 다세계의 창출성
2000 발표 : 가상세계와 다세계의 창출성, 고려대장경연구소 2000년도 학술발표회 2000-06-09

가상세계와 다세계의 정보 창출성



0. 바위 이야기

지구가 태어난 이후 마그마의 열기가 식어가면서 어느 화강암 바위 하나가 생겼다. 그 바위는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 바위의 존재의미가 있었다. 어느 거인이 그 바위를 빼갈 수 있었다면 그 산은 무너질 그런 바위의 모습이었다. 그 바위는 흙을 만들었고 그 흙에 뿌리를 내린 나무 한 그루의 잎새들은 바람소리를 만들었다. 바람과 함께 온 빗방울은 나무의 열매를 낳았고 그 열매의 작은 씨앗 하나가 바위틈에 내려앉아 세월과 함께 바위 속을 후비며 또 한 나무를 키워갔다. 그 나무는 커가고 그 나무뿌리는 드디어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가르고 쪼개어 작은 바위 덩어리를 만들었다.

그 바위 근처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부족 사람들은 그 바위 등어리에 밑에 토굴을 내어 살면서 바위표면에 그 사람들의 사냥감과 부족의 규율을 그들의 상징언어로 새겨놓아, 기억의 하드디스크로 만들었다. 그리고 쪼개진 더 작은 돌로는 돌도끼를 만들어, 스스로 도구사용의 인간(Home Faber) 임을 뽐내었다. 그 마을 족장이 죽자,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즉은 이를 돌기둥 사이에 흙으로 파묻고 그 흙더미 위에 큰 바위를 옮겨 놓으니 후세 사람들이 그 돌을 고인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몇 천년이 지났는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의 욕망이 부딪치면서 싸움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들간의 벽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무도 돌보지 않던 고인돌을 사람들이 자랑하던 이성이라고 하는 설계도면에 따라 적당한 기하학적 모델에 맞추어 돌을 재단하고 벽돌의 성곽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더 처절한 싸움이 벌어졌으며 이 마을 사람들은 끝까지 항거하면서 마지막으로 성곽돌을 부수어 자른 돌을 만들어 투석전을 끝으로 남아 있던 모든 사람들은 성곽의 붕괴와 함께 역사 건너편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 자리에 돌이 여전히 있었다. 그 돌의 역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이는 그 돌을 모아 집을 짓기도 하고, 어떤 이는 논두렁을 쌓기도 했다. 최근에는 어느 현대 조각가가 그 돌을 가지고 예술 조각품을 만들었다. 또 어떤 화장품 재료업자는 그 돌을 잘게 부수고 정제하여 화장품 재료로 사용하였다. 또 다른 이는 화강암 침대를 만들어 건강산업의 벤쳐기업으로 장사하다가 돌침대 열기가 식으면서 망한 사람도 있다고 뉴스에서 듣기도 했다.

1. 정보의 전환가능성

정보는 그 바위에 부여되었던 뜻과 같다. 그래서 그 바위는 같은 바위였지만 그 바위에 부여했던 뜻은 역사의 흐름과 함께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을 격게 되었듯이, 한 의미체가 지닌 정보는 단일한 정보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체의 환경 적응력에 따라 다의적으로 변환하였다. 다의적인 정보 변환은 바위의 역사에서 보듯 시간적인 추이에 따른 다의성이 있지만 공간적이 차이에 따른 변환도 가능하다. 나아가 관점의 차이에 따른 정보의 변환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림>
switching_model

이 그림은 동일한 대상이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서 나온 것처럼 보이는 굴뚝의 의미체로 되기도 하며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터널의 의미체로 될 수도 있다. 즉 동일한 대상이지만 관점에 따라 다른 정보 의미체가 가능하다는 은유적 실례이다. 동일한 대상이 굴뚝과 터널이라는 두 개의 정보 의미체로 상호전환될 수 있다는 점은 그들 사이의 현실성 우위를 상대비교 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다시 말해서 굴뚝과 터널 중에서 어느 것은 그르고 어느 것은 옳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즉 굴뚝과 터널은 그것이 서로 전환가능하다는 차원에서 두 가지 정보 의미체는 상호 가상적이다. 지각심리학적 측면에서 굴뚝과 터널의 전환가능성은 가상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가상성은 객관적 대상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각하는 지각 주체의 지각구조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각심리학의 잠재적 가상성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보의 전환가능성이 지각주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체를 구성하는 단위 구성체에 있는 정보의 전환가능성이 바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다. 의미체의 비물질 정보 구성을 가능케 하는 것은 현대과학기술의 산물인 전산기기의 기본셈본인 디지털 방식의 구성력이다. 디지털 방식의 정보 구성력은 전기신호의 디지털 단위들이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정보세계의 의미개체들이 생성된다. 그래서 세계에 존재가능한 모든 의미개체들은 디지털 원소 단위로 환원가능하다. 이러한 환원가능성을 정보 환원주의라고 부르자.

정보 환원주의는 기존의 원자론적인 물질 환원주의와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다. 기존의 원자론적 환원주의는 원리적인 측면에서 환원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의 대상들을 어떤 단위 원자로 환원가능하다고 하여도, 그 단위원자로 분해하여 다시 원래의 대상으로 조립하여 동일한 기능을 갖게 할 수는 없었다. 분해와 조립과정에서 이론적으로는 환원적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는 비환원적이다. 현재 지구인의 과학기술 수준에서 볼 때, 유전공학 부문에서 조금씩 분해 과정의 환원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정도이며 그나마 조립과정에서는 기술적인 환원가능성의 길은 여전히 멀다. 쉽게 말해서 유전자 지도를 밝혀내는 분해의 과정이 이루어졌다하여도 그렇게 풀린 유전자 암호들을 갖고서 원래의 생리학적 기능을 갖는 유기체의 장기 혹은 유기체 전체를 다시 조립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기에는 여전히 요원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술적인 현실을 두고 기술적 비가역성이라고 한다. 반면에 디지털 방식에 의한 정보 환원주의는 분해와 조립 과정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현재의 과학기술 수준에서 보아도 가역적이다.

2. 정보의 가역성

정보의 분해와 조립과정이 가역적이라는 말은 다음의 의미를 함의한다.
1) 정보 환원주의 : 전기신호와 같은 분해된 단위는 모든 정보 의미체에 공통적이며, 환원가능하다.
2) 노이즈 배제주의 : 전기신호 0과 1 사이의 존재가능한 중간 미세정보들은 0과 1 의 디지털 단위로 편입된다. 따라서 중간 미세정보 때문에 발생하는 노이즈의 문제, 그리고 전달의 어려움의 문제 등이 해소된다.
3) 정보 교체가능성 : 서로 다른 정보 의미체 사이의 의미교환이 가능하며, 의미체 구성자는 그 의미를 구성자의 의도에 따라 편집 조립할 수 있다.
4) 다세계론(多世界論) : 현실계와 가상계가 공통적인 디지털 단위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에 그 두 세계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 그리고 가상세계의 가능수는 무한할 수 있다.

정보 원자론은 이미 누구에게나 수긍이 가는 현대 과학기술의 현실이다. 이진법 전기신호로 모든 정보가 분해될 수 있다는 것이 21세기 과학의 최대변수일 것이라는 예측을 누구나 할 수 있다. 정보 의미체에 대한 분해와 조립의 기술적 가역성은 기존의 정보전달 과정에서 생기는 노이즈 발생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이즈 발생의 문제를 해결한 디지털 정보전달의 역사적 범례는 이미 17세기 라이프니츠에게서 이루어졌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노이즈 해결의 단초를 준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은 서양사상사의 최대 과제인 “계량가능한 모든 것을 계량하라” 그리고 “계량가능하지 않은 것은 계량가능한 것으로 바꾸어라”라고 하는 두 가지 명령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철학적 그리고 수학적 배경이다. 첫째의 명령은 이미 근대의 출발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자연세계에는 원래 계량가능한 것보다 계량불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둘째의 명령을 수행하기에는 혁명적인 사유의 전환이 요청되었다. 다시 말해서 자연 안에는 원이나 사각형처럼 계량가능한 기학하적 모델은 희귀하며 정형의 틀이 없는 그래서 계량할 수 없는 모습이 대부분이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법은 이러한 계량불가능의 자연적 대상을 계량화하기 위하여 대상을 무한분할하여 가상적인 미소의 사각형을 만들고, 계량화된 그러한 미소의 사각형의 계산값을 합하여 전체의 자연대상체를 계량하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미적분의 방법은 세계를 계량화하여 정보전달의 방식을 용이하게 한 사유의 결정적인 전환이었다. 이러한 계량화의 도구인 미적분법의 덕택으로 이후 서양 근대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다. 미적분법은 계량화로 설명하는 자연관을 확립시켰지만, 그 대신 원래 연속적인 자연의 모습을 불연속의 기하학적 모델로 환원시킴으로써 불연속의 미소 단위의 사각형과 사각형 사이의 연속적인 미소 자연을 배제하여 버리는 부작용을 초래하였다. 불연속의 기본 단위체들 틈에 끼어 있던 미소자연이 없어짐으로써 정보전달 과정에서 생기는 노이즈를 해소하기는 했지만 원래의 자연의 모습은 아닌 수학적 가상계가 탄생되었다. 문제는 그러한 수학적 가상계가 자연의 현실계를 대체하고 말았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의 디지털 전환은 전기신호 0과 1 사이의 존재가능한 중간 미세정보들을 0과 1 의 디지털 단위로 편입시킴으로써, 중간 미세정보 때문에 발생하는 정보 전달과정의 노이즈의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기는 했지만 원래의 자연정보와의 차이의 간격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디지털 휴대전화를 사용하면서 미세한 차이의 가상성을 향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작은 미세한 차이는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가상계의 미래를 그 안에 품고 있다.

3. 가상세계의 조건

디지털 논리에 의한 정보의 전환가능성은 서로 다른 정보 의미체가 상호 교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의미체 구성자는 그 의미를 구성자의 의도에 따라 편집 조립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의 정보 매체였던 문자와 언어, 그림과 소리, 영상과 음악 등이 하나의 정보 매체로 용융된다. 나아가 매체들이 상호 편집되어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 새로운 세계는 세계 스스로 자기 일관성(체계 정합성)을 보존하며 그리고 지각주체의 지각능력에 일대 일 대응하는 지각 대응성을 갖는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소위 가상세계라고 부르고 있다. 지각 대응성은 현실의 대상들과 일대 일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대상들을 지각하고 반응하는 인간의 지각 구조에 대응하는 것을 일러 말한다. 가상세계는 그 체계 정합성만을 갖는다고 성립되는 것이 아니며, 가상세계 안의 지각주체의 행동-심리 반응과 현실세계 안의 지각주체의 행동-심리 반응이 서로 같아야 한다는 조건이 만족되어야 한다. 이를 지각 대응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조건 즉 체계 정합성과 지각 대응성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만 있다면 가상세계의 가능수는 무한에 가깝게 된다.

가상세계 안에서 지각 대응성이 만족된다는 것은 현실계와 가상계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경계는 분명하지만 그 경계를 지각하는 분별력이 불분명하다는 뜻일 것이다. 예를 들어 가상세계1과 가상세계2의 경계는 그 경계 안에 들어와 있는 세계 내 지각자에게는 전혀 식별 불가능하게 된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안에 들어와 있는 지각자는 다른 모나드의 정보들을 비교할 수 있는 정보전달의 창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서로 비교 불가능하고 따라서 경계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하나의 독립된 정보체이며 그 정보는 전체의 정보를 압축해서 지니고 있다. 모나드 안의 압축된 정보는 자기완성적이어서 다른 정보단위체에 영향을 받거나 주는 일이 없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은 등질적이다. 이러한 모나드의 등질성은 모나드의 개체화의 논리가 모나드 안에 그 스스로 갖고 있다고 말한다. 당연히 정보 의미체의 정합성과 대응성의 조건을 갖춘 가상세계는 그 세계의 존재이유가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체 구성자의 의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상세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상세계의 존재이유가 그 안에 들어 있다고 믿을 것이다. 이런 경우 가상세계1과 가상세계2 사이의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정보 가상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현실성 비교문제이다. 무엇이 과연 현실인가 하는 문제이다.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에 대한 최후 근거로서 분명하고 확실한(clear and distinct) 거점에까지 끝까지 가보는 반성적 자아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가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얻기 위한 여정일 뿐 그 차이 자체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특히 디지털 구성에 의한 정보 가상세계는 현실세계 안에서 반성을 하는 정도와 마찬가지로 가상세계 안에서도 반성의 작업을 할 수 있다. 물론 자아에 대한 반성력을 지각심리학의 문제로 환원가능하다는 조건이 주어질 때 그러하다. 쉽게 말해서 자아에 대한 반성조차도 가상에 의해서 조작될 경우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의 기준은 가상과 현실을 나누는 궁극적인 기준이 되기 어렵다. 가상과 현실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히려 그 가상세계를 구성한 디지털의 내적 특성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디지털 방식의 구성체인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사이의 차이는 디지털 특성과 아날로그 특성의 차이를 비교함으로써 드러날 수 있다. 디지털 의미 구성체는 불연속의 분해단위의 정보 조합이다. 반면에 아날로그 의미체는 연속적인 어떤 하나이다. 예를 들어 물이라고 하는 정보의 전달과정을 보자. 내 물병의 물을 다른 사람의 물병으로 옮기려고 할 때, 물잔을 갖고 한 잔, 두 잔, 세 잔으로 세어서 물을 옮기면 물의 손실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 방식의 물 전달 효과이다. 이러한 전달 과정에서 물의 노이즈는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에 나의 물병을 들고 물잔 없이 다른 사람의 물병으로 직접 부으려고 한다면 옆으로 새고 흘리는 물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물 전달의 노이즈라고 한다. 그리고 이점을 은유하여 아날로그 방식의 물 전달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물잔으로 세어서 옮겨진 물은 전달의 효과는 클지 몰라도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의 물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물잔수에 맞춰진 강요된 물의 양을 상대방이 전달받아야 한다. 그러나 물병 채 옮겨지는 물은 비록 물을 흘릴 수는 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양만큼 부어서 물잔 수와 다음 물잔 수 사이의 적절한 양에서 옮기기를 그칠 수 있다. 결과는 디지털 방식의 물 옮기기는 정확한 양이 문제인 반면 상대방 사람의 의도와 어긋날 수 있으며, 아날로그 방식의 물 옮기기는 물은 흘릴 수 있지만 그 사람이 원하는 양을 줄 수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이러한 수사적 비유는 결국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차이에 대한 수사적 비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가상세계는 가상계를 설계한 구성자의 의도가 가상계에 들어온 사람들의 의도보다 앞서 있다. 이를 철학에서는 목적론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가상세계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더 지배적이며 현실세계는 구성자보다는 피구성원의 목적없는 의지가 더 중시될 수 있다. 물론 가상세계 안에서도 양방향 대화 방식으로 피구성원의 의지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세계 안의 피구성원의 의지는 실제의 의지가 아니라 주어진 것 중에서 고르는, 즉 의지로 위장된 ‘선택’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신이 조화한 라니프니츠의 개체 모나드 안에 들어 있는 명제 형태의 미세정보의 수는 무한하지만 그 개체 모나드의 주체가 무한의 명제 중에서 유한한 것으로 선택하는(선택되어지는) 것과 유사하다. 전달기능을 하는 모나드 간의 정보교환의 창이 없기 때문에 개체 모나드는 정보의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없다. 정보는 서로간의 일정한 약속아래에서 전달될 수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모나드를 말하는 이유는 신과 인간 사이의 전달체계 방식의 독특성 때문이다.: 인간은 신이 준 압축된 정보를 전부 써먹을 수 없다. 즉 모나드 안에는 모나드를 그 모나드이게끔하는 정보 이외의 잉여정보가 너무 많이 들어 있다. 그래서 잉여정보 안에서 선택을 하야만 한다. 이것을 갖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지만 하여간 인간은 주어진 정보를 의미화할 수 있다. 여기서 의미화한다는 것은 주어진 정보량 중에서 양적으로 선택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어진 정보를 질적으로 꿰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종의 분류할 수 있다는 권리를 말한다. 세계는 하나이지만 분류하는 작용이 이루어지면서 그 하나의 세계가 작은 정보단위체에 그대로 반영된다.
결국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차이는 디지털 요소와 아날로그 요소가 어디에 더 편중되어 있는가의 차이이며, 그 차이는 목적론과 비목적론의 차이로서 현현될 수 있다.

4. 가상세계와 다세계론

목적의 세계는 목적 구성자의 의도가 전제되어 있으므로 구성자 의도의 다양성에 따라 가상세게의 가능수는 무한이 될 수 있다. 이를 다세계론(多世界論) 이라고 했다. 내가 정의하는 다세계론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세계들은 서로 등질적이다. (2) 다른 세계에 속하는 피구성원 사이의 대화가 불가능하다. (3) 가상성과 현실성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차이를 피구성원은 식별할 수 없다. (4) 우리가 현실세계라고 하는 지금의 이 세계 안에서 분해와 조립의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 차이를 더 식별하기 어렵게 된다. (5) 중심 논리를 부정한다. 즉 우주에서 지금 그리고 여기만이 현실이고 중심이라는 중심주의의 부정과 우주 안에 존재하는 그 어느 세계도 중심일 수 없다는 주제를 다세계론은 말한다.

다세계론은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차이를 연속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질서는 무질서의 연속 스펙트럼 가운데 하나의 점에 해당할 뿐이다. 그래서 질서는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무질서 중에서 선택되어진 하나이다. 여기서 질서는 내적 정합성과 지각 대응성의 조건만 갖추어지면 성립되는 한 양상일 뿐 유일하고 고정된 실체는 아니다. 여기서 다세계를 세계이게끔 하는 근거가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현실계가 무한한 가능수의 가상계를 만들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볼 때 무한 가능수의 가상세계의 근거는 현실세계가 된다. 즉 이런 다세계에서는 가상계의 존재구성이 현실계에 속하는 구성자의 의도에 의해 종속된다는 점이 강조된다. 이를 차등적 다세계론이라고 하자. 이럴 경우 가상세계의 질서와 현실세계의 질서는 그 질적인 차이를 가지며, 그들 질서 사이의 위계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위계적 세계관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성장한다고 해도 역시 과학의 옷으로 갈아입은 서구 기독교 세계관의 재현일 뿐이다.

차등적 다세계론에 근거한 실용기술 중의 하나가 바로 시뮬레이션 시험장비이다. 완벽한 시뮬레이션 장비 역시 지각 대응성과 체계 정합성의 두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은 물론 현실계의 구성자의 의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자전거 타기 연습용 시뮬레이션을 현실계의 어떤 기술자가 만들었다고 치자. 자전거 타기 시뮬레이션은 자전거를 배우는 모든 현실의 과정과 피시행자의 감각적 혹은 생리적 어려움까지 제공하고 있다. 평형잡기에서 앞으로 나가기, 폭 60cm의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는 고난도 훈련까지 마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훈련을 마친 이 사람은 큰 운동장에 구불구불한 길을 그어놓은 코스에서 훌륭하게 코스주행을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현실의 논두렁 길을 자전거로 달리게 한다면, 시뮬레이션으로 할 수 없었던 공포심 때문에 그는 아예 포기하거나 아니면 논두렁 밖으로 자전거와 함께 처박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다세계의 체계 정합성이 이루어져도 현재 과학기술로는 완전한 지각 대응성을 여전히 해결할 수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차등적 다세계론은 종교의 광신주의에서도 나타난다. 광신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다세계 중의 한 가상세계에서 살고 있다. 광신주의의 세계 역시 그들의 고유한 체계 정합성과 지각 대응성을 갖추고 있다. 그들의 체계 정합성은 그들이 믿는 신을 재구성함으로써, 신의 유일성과 보편성이 붕괴된다. 그리고 그들의 지각 대응성의 측면에서 볼 때, 믿음이라는 행동심리학적 반응은 자기 안에 구속된 폐쇄회로의 순환반응으로 그치고 만다. 몇 년 전에 내한공연 온 뉴키즈온더블럭 그룹이나 조성모에 대한 여중생들의 열광은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일시적인 사춘기의 통과제의로 그칠 수 있으나, 광신주의의 열광은 그러한 가상계의 붕괴뿐만이 아니라 그 가상계를 만든 현실계까지 붕괴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차등적 다세계의 현상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독재정부의 우민화 정책, 유토피아론의 사회적 악용 등에서부터 매스컴의 상업주의, 온라인 상호주의(on-line communications)를 빙자한 게임산업의 광역화된 탈인간화 현상 등이 그것이다. 차등적 다세계론은 정보의 공유화를 표방하면서 정보의 창조성을 갉아 먹고 있다. 차등적 다세계에 편입된 피구성원들은 정보의 일방향적 주입에 피해자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들은 주어진 정보를 모으려고만 한다. 그래서 정보를 많이 모은 사람이 많은 정보의 산출성을 갖는 것으로 오도되고 있다. 그렇게 모은 정보는 오로지 주어진 정보를 한 장소에 모으는 수집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모은 정보로부터 우리는 정보의 창조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보는 많이 모으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정보를 나의 정보로 만들기 위하여 주어진 정보를 버리는 일이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정보를 꿰어 내는 작업의 시작이다. 꿰어 내기 위하여 큰 흐름과 맞지 않는 것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버리지 못하고 모으기만 한다면 창의성의 세계는 사라지고 권력의 세계만이 남게 된다. 특히 예술은 정보를 버려야만 새로운 것이 창조되는, 그렇게 버리고 비워두는 삶의 행위이다. 물론 과학이나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버리기 위하여 기존의 세계에 대한 기득권을 내놓아야 하며, 기득권을 수호하려면 결코 버릴 수 없다. 버리기 위하여 기득권을 갖고 있는 세계가 유일한 것이라고 보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차등적이 아닌 동등적인 세계의 다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5. 동등적 다세계론으로

유일하다고 생각된 현실계 역시 수많은 가능한 가상계의 하나일 수 있다. 이 경우 세계의 존재근거는 없으며 세계의 존재는 원래 그러한 것이며 스스로 그러한 것이 된다. 이러한 세계를 동등적 다세계론이라고 하자. 동등적 다세계론에서 현실과 가상은 내가 참여하고 간섭하는 세계가 바로 현실세계가 되고 내가 아직 참여하지 않고 내가 간섭하지 않은 잠재적 세계는 그대로 가상세계로 남아있게 된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보는 세계관을 동등적 다세계론의 하나라고 하고 싶다. 동등적 세계에서는 나의 참여와 나의 간섭이 곧 현실성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서구철학의 인식론 측면에서 본다면 주관적 인식론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우려를 안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나는 서구철학이 말하는 주관적 자아가 아니라, 이미 너와 섭동 되어져 있기 때문에 너와 분리될 수 없는 그런 나이다. 그래서 동등적 세계 안에서 피구성원이 세계를 보는 입장이 주관적일 수 있다는 우려는 하나의 기우일 뿐이다.

동등적 다세계론의 입장에서 볼 때 하루살이의 일생은 물리적인 시간의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일생과 동등하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엄청난 크기의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 외계 생명체는 인간이 개미를 보듯이 인간을 개미처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장자 재물론의 핵심이기도 한다.)

하루살이의 일생을 인간의 시간인 하루로 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생과 같은 지속의 시간대로 즉 등질적인 방식으로 펼쳐 놓는 일이 바로 정보의 창출성이다. 그래서 동등적 다세계에서는 정보가 타인에게 의사전달을 하려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창출하려는 뜻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렇게 정보의 창출성은 새로운 의미체를 만드는 작업이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그런 창출성이다.

플라톤은 의미와 형식을 완전히 분리한 최초의 철학자였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의미와 형식은 형상과 질료의 개념으로 바뀌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 질료를 질료이게끔 하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형상이 바로 초기 정보의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즉 주어진 감각자료만을 갖고 정보라고 할 수 없다. 그 대상이 갖고 있는 이름을 찾거나 아니면 대상에다 이름을 붙이고, 다시 그 이름에다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정보의 지위를 갖게 된다.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크게 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존재론적 의미이다. 존재론적 의미는 질료보다 개념 형성에 국한된다. 이러한 의미부여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형이상학적 정보교환을 위해 어울릴지 모르나, (가상 현실을 포함한) 현실적 대상을 설명하기에 적합치 않다. 다른 하나는 분류학적 의미부여이다. 이때 의미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 속에서 찾아진다. 흩어져 있는 잡종의 현실대상을 비슷한 모양대로 아니면 비슷한 쓰임새대로 분리해서 모아 놓는다. 그렇게 모여진 것에다 다른 것과 구분하기 위하여 특성화된 이름을 붙이는 데 그것이 바로 의미이다. 이런 뜻에서 의미의 출발은 종-강-목의 특화이다. 이러한 의미부여 방식의 두 갈래를 대표할 수 있는 철학자로서 각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 수 있다.


디지털이 관여할 수 있는 최상의 세계모형은 차등적 다세계라고 앞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가 지향하는 삶의 최고모형은 될 수 없다. 반면에 동등적 다세계론은 디지털의 과학을 너머서 있기는 하지만,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과학과 함께 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과학의 가장 중요한 연역사유의 도구인 이상화(idealization)는 현실의 삶의 문제와 함께 나가야 그 새로운 의미체를 창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의 세계에서 가상계와 현실계를 구획하는 요소를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특성 차이로 은유했듯이, 동등적 다세계에서는 불연속의 0과 1로 규정되는 세계가 아니라, 0과 1 사이에 존재하는 잠재된 무한의 창조가능성의 공간을 새로운 장르로 창출시키는 삶의 작업이 이루어 질 수 있다. 디지털의 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지향을 아날로그의 세계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과학은 예술과 종교 그리고 철학과의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다.

동등적 다세계 안에서 정보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정보는 정보 그 자체보다 만들려는 의도와 만들어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의도와 과정은 어느 누구를 지칭한 특정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는 특정 주체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분유分有되어 있을 뿐이다. 동등적 다세계 안에서 가상성과 현실성의 차이는 앞서 말했듯이 나의 참여과 간섭이다. 참여와 간섭 없는 세계의 모든 것은 가상성이며, 내가 참여하고 간섭할 때 비로소 세계는 가상의 붕괴와 함께 가상에서 현실로 전환된다. 참여와 간섭이라는 기준은 참여와 간섭된 세계와 미참여와 비간섭의 세계로 이분법적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다. 무한히 많은 미참여와 비간섭의 세계 중에서 내가 참여하고 간섭하면서 하나의 현실계가 채택될 뿐이다. 그래서 동등적 다세계는 불연속의 이원논리가 아닌 연속의 다중논리 혹은 다원논리의 세계이다. 참여와 간섭은 종교에 있어서 믿음의 실천이며 과학에 있어서 실험정신과 관찰작용의 실현이며 철학에 있어서 반성과 비판이며 예술에 있어서 삶과 자연의 재생산성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종교, 과학, 철학, 예술의 참여와 간섭에 공통되는 것은 추상적인 이론의 구성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실현이라는 점이다.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서 이 점은 단순히 요청되어지는 당위성이 아니라 너무 당연한 사실성이다. 정보사회로 접어들면서 비대면 인간관계가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생명종의 하나인 인간은 대면관계에 대한 영원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채팅을 하다가 갑자기 튀쳐 나가 번개팅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끝>
고려대장경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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