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학적 상상력과 동아시아 인문학의 과제
상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국제학술 심포지엄

2000년 10월 12일

인문학의 과제와 전망


생태학적 상상력과 동아시아 인문학의 과제


An Ecological Imagination and Human Studies in East Asia


1. An intercultural consolidation

The discourse on the East-asian identity has been the center of attention in a field of the social and human studies in a recent time. The focus of the discourse pertains to the phenomena of discord or harmony between the east and west. Confrontationists such as S. Huntington and E. Said emphasize crash of two civilizations, while the harmonists such as H. Mueller stresses togetherness(zusammenleben) of the two. These discourses had their own historical and social meanings. These discourses may be inclined to the dividing logic in the struggle or the subordination without sufficient philosophical understanding. Therefore, it is very important to illuminate the problems of identity from the view of natural philosophy.

요즘들어 동아시아 정체성 담론이 인문사회과학의 주제로 등장되고 있다. 이 담론의 핵심은 동서간의 갈등과 조화의 가능성들을 다루고 있다. 헌팅턴이나 사이드 같은 대립론자들은 동서간 문명의 충돌에서 올 수 있는 위험성을 강조한다. 반면에 뮐러같은 조화론자들은 문명의 공존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담론들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들의 방향은 그 철학적인 이해의 배경이 결핍되었을 때 자칫 투쟁이냐 아니면 종속이냐는 이분법적인 논리에 치우칠 수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It may be very dangerous attempt to make a sharp distinction between the West and East to find one's identity, and to acknowledge this danger is the aim of this paper. Finding one's identity is a mirroring task, and it is important to explore their peculiarity and originality. A relative peculiarity of Eastern thinking can be found from an ecological view of nature. This essay is based on the East-asian ecological thoughts. Eastern philosophy could play more fundamental role in a multi-cultural society in the future. It is very likely that the traditional East-asian philosophy may become a fashionable alternative to the conventional Euro-american attitudes and values. But comparative studies examining only external similarities between the western and oriental thoughts may lead to a misunderstanding. It would not be wise to conduct a comparative studies on the similarities without having philosophical reflection. The postulation of the rational discrimination between the West and East should not be aimed at separation, but for an inter-cultural communication and consolidation.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하기 위하여 동서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는 것이 이 글의 전제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확보는 대자적인 반성작업이므로, 각기의 고유성을 검토하는 일이 중요하다. 먼저 동양사상의 상대적 고유성은 생태학적 자연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은 동양의 생태학적 사유에 초점을 둔다. 동양철학은 다원문화의 미래세계에서 좀더 근원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전통의 동양철학이 서구의 관점과 가치관에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풍조가 그럴 듯 한 점도 있다. 그러나 동서간의 외형적 유사성을 통해서 형식적인 비교연구 작업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철학적 반성없이 그럴듯한 유사성을 통해서 외적 연결을 시도하지 않는다. 동서간의 합리적인 구획의 필요성은 동서를 갈라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문화적인 대화와 연대를 위해서이다.

2. Scientific view of nature

Through the comparison on the views of nature, we could construct a frame of thinking to discriminate the differences between the Western and traditional East-asian thoughts. The Western concept of Nature is represented in atomism as particulate, material, inert, quantitative, and mechanical paradigm. The Western concept of nature became institutionalized in an early stage of modern science and pragmatically translated into an engineering agenda. However, the so called cultural crisis may, in large part, be diagnosed as a symptom of the atomic-mechanistic image of nature inherited from Greeks, classical science, and modern technology.

자연관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서구사상과 동양 전통사상의 차이를 구획하기 위한 사유의 틀을 구성할 수 있다. 서구의 자연개념은 분절적, 물질적, 관성적, 정량적, 기계적인 패러다임의 원자론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근대과학의 교조이며 실용적인 측면에서 산업혁명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말하는 문명위기 또한 그 많은 부분에서 고대 그리스의 원자-기계론적 이미지의 유산과 고전과학 그리고 근대기술의 징후로서 진단되고 있다.

Newton mechanics was not just a theory of physics. It was an all-embracing philosophy of the natural world. During the eighteenth century of European scientific enlightenment, what had once been an integral part of natural philosophy evolved into the natural sciences. This is why Democlito's atomism from the ancient time was easily absorbed into the Newton's theory. Atomistic thought just expresses the idea that a quantitative method through the mathematical tools is a criterion of the western modernity. The standing rule of quantitative measurement was a philosophical seed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the twentieth century scientific technology and industrial capital gave us not only material fertility, but also subsidiary ill effects of alienation. The explosive development of twentieth century technology may be a cause of an alienation and isolation. The alienation of homo sapiens in our modern civilization is at the bottom of the cultural crisis which committed the environmental crisis. That is to say, our crisis is due to the discord between human rationality and human alienation. This discord is revealed in the scientific view of nature. So we must seek to find another view of nature in order to shift from 'discord' toward 'harmony'.

뉴턴역학은 단순히 물리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자연계의 인식을 모두 포괄한 하나의 철학이었다. 특히 18세기 서구의 과학적 계몽주의 시기는 자연철학의 많은 부분들이 자연과학으로 전이되는 시기였다. 초기 자연철학자인 데모클리투스의 원자론이 뉴턴의 입자론으로 쉽게 수용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수학적 도구를 통한 정량적 방법론이 서구 근대성의 기준이라는 생각을 보여준 것도 바로 원자론적 사유이다. 이러한 정량적 관측의 표준규칙은 산업혁명의 철학적 시앗이 되었다. 20 세기 과학기술과 산업자본은 우리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인간소외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20 세기 산업의 폭발적인 발전은 소외와 고립의 원인이었다. 현대문명이 낳은 인류의 인간소외는 환경위기를 수반한 문명위기의 바탕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의 위기는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소외 사이에서 온 부조화에 근거한다. 이러한 부조화는 과학적 자연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부조화에서 조화로 나가는 또 다른 자연관을 모색해야 한다.

3. Continuum paradigm

Among the views on nature, including the rational system of external and material atomism, we can choose the organistic process thinking about the nature. The process thinking invites a return to the kind of philosophical reflection, which could be a therapy for the human alienation. The relatedness-oriented process thinking may be worthwhile for the humanity. There is a radical difference between the processed world concept and substantial atomism. That is to say, the flow of the organistic process thinking is destructing the philosophical dualism on which the traditional substantialism is built upon; its mind-body and man-nature formulations. From the point of relational process paradigm, the nature is not, as represented in the classical science, an aggregate of substantial independent entities. The relational view of nature is holistic. And organistic feature is the integral part of the man to nature relationship.

물질적 원자론의 이성체계에 대항하는 자연관 중에서 우리는 유기체적인 과정적 사유를 선택할 수 있다. 과정적 사유는 인간소외를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적 반성을 유도한다. 특히 관계지향적인 과정적 사유는 인간의 가치를 확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과정적 세계관과 실체론적 원자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유기체적인 과정적 사유의 흐름이 심신론이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같은 전통의 실체론이 근거하는 철학적 이원론을 해체하고 있다. 관계의 과정 패러다임에서 볼 때, 자연은 고전과학에서 나타나듯 고립적인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론적 자연관은 결국 전일적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은 유기체적인 연대성을 갖는다.

Living organisms are preeminent examples of the kind of continuum system that can not be understood by atomistic materialism. Similarly, the relational net of our nature is a kind of continuum system. While a rational order is comparable to the discontinuum system as like collection of atoms, the dynamics of nature can not be captured easily by a rational medium. Unfortunately we are ignorant on how to define a continuum system in details.

살아있는 유기체는 원자론적 유물론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연속성의 체계를 보이는 뚜렷한 실례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연의 관계론적 그물망 또한 연속성의 체계이다. 이성적 질서계는 원자들의 단순한 집합체와 같은 불연속성의 체계인 반면에, 자연의 역동성은 이성적 매개를 통해서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연속성의 체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무지하다.

We need to turn the thinking process, moving from an object centered substantial view toward a continuum view of nature to congregate between the West and East. In the meeting of East and West, F.S.C. Northrop has pointed out that Eastern thought is much more devoted to continuum view of reality, while the Western thought is much more centered on theoretic constructs, such as an atomistic object.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human in the West has developed within the Western object-centered atomistic view of reality. To understand a human is not to explain analytically. It is therefore needed to be moved from an analytical discontinuum paradigm of the science to a differentiated continuum paradigm which is much closer to the Eastern philosophy.

우리는 동서의 종합을 추구하기 위하여 분절된 대상중심적 사유에서 연속성의 자연관으로의 사유의 전환을 요청한다. 동서의 만남에 있어서 노드롭 같은 철학자는 서양사상이 원자론적 객체와 같은 이론적 구성체에 집중하는 한편, 동양사상은 연속성의 실재론을 구축하는데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대상지향적인 원자론적 실재론 내에서 발전하였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곧 인간을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일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과학의 불연속성의 패러다임에서 동양철학에 친화적인 연속성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청된다.

The organistic process thinking exhibits three basic motifs: continuity, wholeness, and dynamism. To say that the nature is in a state of continuum and that all of its components are internally connected, means that its organistic unity is integrated holistically at each level with hierarchy. The contiguous flow of nature is characterized by the dynamic change of vital force. The continuum of nature is itself complex, and a wholeness of nature is the optimum functioning of the hierarchial supra-system containing all the subsidiary systems.

유기체적이고 과정적인 사유의 주요 주제는 연속성, 전일성, 그리고 역동성이다. 자연이 연속적이고 그 구성요소들이 내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그 유기체적 단위체가 각 계층에서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자연의 연속적인 흐름은 변화하는 생동력으로 특징지워진다. 자연의 연속성은 그 자체로 복잡성을 띠고 있으며, 자연의 전일성이란 모든 하위계층들을 중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전체계의 최적의 기능성 말한다.

While the physical world may be recognized as a closed system, the nature is an open system. Open system, as opposed to closed, is that which ceaselessly interacts with their environment. In the open network there is no external motivation as like god or world-engine. Nature means causa sui in Chinese word. There are only internal relations.

물리세계가 닫혀 있는 반면, 자연은 열린 계이다. 닫혀 있는 것과 달리 열린 계는 끊임없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한다. 열려진 그물망에서는 신이나 세계의 외부동력과 같은 외적 추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自然)은 그 한자어의 의미대로 본다면 “스스로 그러한” 뜻이다. 자연 안에는 외적 동력은 없고 내적 관계만이 있다.

Another character of the internal relation is that there is no difference in quality between the objects and its internal relation. A relation is internal to a term when in its absence the term would be different; it is external when its addition or withdrawal would make no difference to the term.
All of the parts of the entire nature belong to one organistic whole, and they all interact as participants in one spontaneously self-generating life process. In the self-generating processes, all things and processes in the world are related in processes which proceed toward a balance and a harmony. So ‘what a thing is’ means ‘how the flow of self-generating force is concentrated’.

내적 관계성의 또 다른 특징은 대상과 그 내적 관계 사이의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전체 자연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은 전체의 자기발생적인 과정속에서 하나의 참여자로서 상호작용을 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과정은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과정으로서 관계 맺고 있다. 그래서 한 사물이 무엇인가를 것은 ‘자기발생적인 힘이 어떻게 모이는가’ 하는 의미와 같다.

Western atomistic realism has an implication that all relations were held to be external. Western rational property can not evoke the imagination of these internal relation. The very radical difference between external relation and internal relation is not easy to explain. Because of this difference, it can be said that internal relation unfortunately cannot be submissive to the terminology of western science.

서구 원자론적 실재론은 모든 관계가 외적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서구의 이성적 속성은 내적 관계 상상력을 자아낼 수 없다.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의 근원적인 차이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 차이 때문에 불행하게도 내적 관계를 서구과학의 용어로서 설명할 수 없다.

For example, the traditional medical definition of the Korean word kan as 'liver' may be misleading in the context of modern anatomy; the name of organ 'liver' is used in Korean medicine to refer to functional systems of which the liver is not merely the physical substrata. This situation is the same in the concept of life. The medical criteria of death is mainly the cessation of the heart-beat or breathing. But in traditional Korean medicine death means that chi (life energy), chung (organic essence) or shin (spirit) is choked or dispersed (not exhausted). Such problems as medical terminology are applicable to all disciplines of Human Studies in Korea.

예를 들어 영어의 ‘liver'를 뜻하는 ’간‘이라는 한의학적 정의는 현대 해부학의 문맥과 많은 차이가 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간은 단순히 신체상의 위치를 점하는 간과 다르며, 간과 그 부속적 기능을 하는 어떤 기능적 체계를 지칭한다. 생명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의 의학적 기준은 심장의 정지 혹은 숨의 멈춤이다. 그러나 전통 한의학에서는 죽음을 기氣, 정精, 신神의 막힘이나 분산으로 이해한다. 의학 용어에서와 같은 그러한 문제들은 사실 인문학 전반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4. Task of our human studies

We have to ask the question how the western philosophers can dialectically engage eastern thoughts, and vice versa, in order to find shared goals and evaluative standards. The possible answer to this question may be the task of human studies in the East, especially in Korea. A common understanding of the philosophical enterprise may or may not be attainable. However, to organize eastern human studies by means of western philosophical categories and to evaluate it by western criteria of evidence, argument and proof is idle as it is parochial. Likewise, it would be absurd to explain modern scientific thinking with the eastern philosophy, despite the dissatisfaction with a western mechanical worldview.

우리는 동서의 공분모나 공통의 가치기준을 찾기 위하여 서구철학이 동양사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들, 그리고 거꾸로 동양이 서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은 동양 특히 한국에서의 인문학의 주요과제일 수 있다. 철학적 기획의 공통된 이해는 획득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철학의 범주안에서만 즉 서구의 논증과 주장의 기준을 통해서만 동양의 인문학을 구성하고 판단하는 일은 편협한 것 이상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구 기계론적 세계관이 낳은 부정적 요인 이 있다하여도, 현대과학적 사유를 동양사상을 가지고 장식하는 것 역시 터무니없는 일이다.

We can not deny that the western science and the science-based industrial technology have made our life easier, more comfortable and, in some ways, more satisfying. This satisfaction is however gradually turning out to be a dissatisfaction, especially by those who have begun to realize the threat of environmental crisis posed by the increasing demands of the technological world. However we must recognize that the so called human crisis of today is not a western phenomenon alone.

서구과학과 산업기술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만족감은 서서히 불만족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특히 기술사회의 확산으로 인한 환경위기의 위협을 인식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불만족의 정도는 커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러한 인간위기는 단지 서구사회의 현상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Nobody can be sure whether the East-asian thought is an alternative to the modern civilization. Nevertheless, man has to make an attempt to find a new philosophical therapy. Nowadays the difference between the East and West is not a geographical difference alone. We should not lay the human crisis on the Western civilization alone, but also on the industrialized Asian climate. The alternative is not a revolutionary solution but just concentration of a small cultural improvement. Therefore there is no such thing as perfect alternative. We can not judge by predominance-comparision between the West and East. We can only reconcile both cultures. This is a task of our human studies.

동양사상이 현대문명의 대안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철학적 치료제를 찾아야만 한다. 오늘날 동서간의 차이는 단순히 지리적인 차이가 아니다. 오늘의 인간위기는 서구문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화된 동양사회에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대안은 혁명적인 해답이 아니라, 작은 문화적 진보의 누적이다. 그래서 획기적인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서간의 우위비교에 의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되며, 두 문화를 조율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 인문학의 과제이다.



Baird Callicott/Roger T. Ames(ed.), Nature, SUNY, 1989
Harold H. Oliver, A Relational Metaphysic, Nijhoff, 1981
Jongduck Choi, Die Ontologische Interpretation in der Quantenmechnik, Giessen, 1993
H.Jonas, Das Prinzip Verantwortung.- Versuch einer Ethik fuer die Technologische Zivilisation,
Frankfurt, 1979




토론

논자는 이 글에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동서간의 갈등과 조화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동서간의 외형적인 유사성을 통하여 형식적으로 연결지우려는 작업 이전에 서로간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철학적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서로간의 자연관을 비교하는 것이 그 철학적 반성의 유효한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자에 의하면 서구의 자연 개념은 분절적 물질적 관성적 정량적 기계적인 패러다임의 원자론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자연관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인간소외나 환경위기 등과 같은 문명의 위기도 아울러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러운 자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는데, 유기체적인 과정적 상호 관계적 사유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간과 liver가 갖는 의미의 차이, 즉 유기체적인 내적 관계성을 예로 들어, 그 가능성에 대하여 심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자는 결론에서 그 대안의 수용에 대하여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해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작은 문화적인 진보의 누적에 의하여 동서 두 문화를 조율할 수 있을 뿐이라 하고, 그것을 바로 인문학의 당면 과제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론에서 본인은 대안으로 제시된 유기체적인 자연관의 필요성이,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하는 신념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현대 물질문명의 부작용을 치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질문드리겠습니다.
논자께서 제일 먼저 이 글의 전제로 제기하신 동서에 대한 지나친 구분의 위험성에 저촉되는 감도 있습니다만, 결론에서 제시하고 계신 획기적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고, 작은 문화적 진보의 누적, 그럼으로써 두 문화를 조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계신 서양의 기계적 패러다임의 단절성과 유기적 내재 관계를 중시하는 자연관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답변하여 주시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두 자연관 사이의 공통 분모에 대한 설명이 이 글에서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style="width:100%; height:500px;"> 2000 발표 : "A Ecological Imagination and Human Studies", 상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창립 국제학술심포지엄, 2000-10-12

An Ecological Imagination and Human Studies in East-Asia
Jongduck Choi (Sangji Univ.,Philosophy, )

생태학적 상상력과 동아시아 인문학의 과제




1. An intercultural consolidation

The discourse on the East-asian identity has been the center of attention in a field of the social and human studies in a recent time. The focus of the discourse pertains to the phenomena of discord or harmony between the east and west. Confrontationists such as S. Huntington and E. Said emphasize crash of two civilizations, while the harmonists such as H. Mueller stresses togetherness(zusammenleben) of the two. These discourses had their own historical and social meanings. These discourses may be inclined to the dividing logic in the struggle or the subordination without sufficient philosophical understanding. Therefore, it is very important to illuminate the problems of identity from the view of natural philosophy.

요즘들어 동아시아 정체성 담론이 인문사회과학의 주제로 등장되고 있다. 이 담론의 핵심은 동서간의 갈등과 조화의 가능성들을 다루고 있다. 헌팅턴이나 사이드 같은 대립론자들은 동서간 문명의 충돌에서 올 수 있는 위험성을 강조한다. 반면에 뮐러같은 조화론자들은 문명의 공존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가지 담론들은 나름대로의 역사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들의 방향은 그 철학적인 이해의 배경이 결핍되었을 때 자칫 투쟁이냐 아니면 종속이냐는 이분법적인 논리에 치우칠 수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자연철학의 관점에서 조명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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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may be very dangerous attempt to make a sharp distinction between the West and East to find one's identity, and to acknowledge this danger is the aim of this paper. Finding one's identity is a mirroring task, and it is important to explore their peculiarity and originality. A relative peculiarity of Eastern thinking can be found from an ecological view of nature. This essay is based on the East-asian ecological thoughts. Eastern philosophy could play more fundamental role in a multi-cultural society in the future. It is very likely that the traditional East-asian philosophy may become a fashionable alternative to the conventional Euro-american attitudes and values. But comparative studies examining only external similarities between the western and oriental thoughts may lead to a misunderstanding. It would not be wise to conduct a comparative studies on the similarities without having philosophical reflection. The postulation of the rational discrimination between the West and East should not be aimed at separation, but for an inter-cultural communication and consolidation.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하기 위하여 동서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위험성을 인식하는 것이 이 글의 전제이다. 그러나 정체성의 확보는 대자적인 반성작업이므로, 각기의 고유성을 검토하는 일이 중요하다. 먼저 동양사상의 상대적 고유성은 생태학적 자연관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글은 동양의 생태학적 사유에 초점을 둔다. 동양철학은 다원문화의 미래세계에서 좀더 근원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전통의 동양철학이 서구의 관점과 가치관에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풍조가 그럴 듯 한 점도 있다. 그러나 동서간의 외형적 유사성을 통해서 형식적인 비교연구 작업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나는 철학적 반성없이 그럴듯한 유사성을 통해서 외적 연결을 시도하지 않는다. 동서간의 합리적인 구획의 필요성은 동서를 갈라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문화적인 대화와 연대를 위해서이다.

2. Scientific view of nature

Through the comparison on the views of nature, we could construct a frame of thinking to discriminate the differences between the Western and traditional East-asian thoughts. The Western concept of Nature is represented in atomism as particulate, material, inert, quantitative, and mechanical paradigm. The Western concept of nature became institutionalized in an early stage of modern science and pragmatically translated into an engineering agenda. However, the so called cultural crisis may, in large part, be diagnosed as a symptom of the atomic-mechanistic image of nature inherited from Greeks, classical science, and modern technology.

자연관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서구사상과 동양 전통사상의 차이를 구획하기 위한 사유의 틀을 구성할 수 있다. 서구의 자연개념은 분절적, 물질적, 관성적, 정량적, 기계적인 패러다임의 원자론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자연은 이론적인 측면에서 근대과학의 교조이며 실용적인 측면에서 산업혁명의 씨앗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말하는 문명위기 또한 그 많은 부분에서 고대 그리스의 원자-기계론적 이미지의 유산과 고전과학 그리고 근대기술의 징후로서 진단되고 있다.

Newton mechanics was not just a theory of physics. It was an all-embracing philosophy of the natural world. During the eighteenth century of European scientific enlightenment, what had once been an integral part of natural philosophy evolved into the natural sciences. This is why Democlito's atomism from the ancient time was easily absorbed into the Newton's theory. Atomistic thought just expresses the idea that a quantitative method through the mathematical tools is a criterion of the western modernity. The standing rule of quantitative measurement was a philosophical seed of the Industrial Revolution. In the twentieth century scientific technology and industrial capital gave us not only material fertility, but also subsidiary ill effects of alienation. The explosive development of twentieth century technology may be a cause of an alienation and isolation. The alienation of homo sapiens in our modern civilization is at the bottom of the cultural crisis which committed the environmental crisis. That is to say, our crisis is due to the discord between human rationality and human alienation. This discord is revealed in the scientific view of nature. So we must seek to find another view of nature in order to shift from 'discord' toward 'harmony'.

뉴턴역학은 단순히 물리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자연계의 인식을 모두 포괄한 하나의 철학이었다. 특히 18세기 서구의 과학적 계몽주의 시기는 자연철학의 많은 부분들이 자연과학으로 전이되는 시기였다. 초기 자연철학자인 데모클리투스의 원자론이 뉴턴의 입자론으로 쉽게 수용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수학적 도구를 통한 정량적 방법론이 서구 근대성의 기준이라는 생각을 보여준 것도 바로 원자론적 사유이다. 이러한 정량적 관측의 표준규칙은 산업혁명의 철학적 시앗이 되었다. 20 세기 과학기술과 산업자본은 우리들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을 주기도 했지만, 그러나 인간소외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20 세기 산업의 폭발적인 발전은 소외와 고립의 원인이었다. 현대문명이 낳은 인류의 인간소외는 환경위기를 수반한 문명위기의 바탕에 깔려 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우리의 위기는 인간의 이성과 인간의 소외 사이에서 온 부조화에 근거한다. 이러한 부조화는 과학적 자연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우리는 부조화에서 조화로 나가는 또 다른 자연관을 모색해야 한다.

3. Continuum paradigm

Among the views on nature, including the rational system of external and material atomism, we can choose the organistic process thinking about the nature. The process thinking invites a return to the kind of philosophical reflection, which could be a therapy for the human alienation. The relatedness-oriented process thinking may be worthwhile for the humanity. There is a radical difference between the processed world concept and substantial atomism. That is to say, the flow of the organistic process thinking is destructing the philosophical dualism on which the traditional substantialism is built upon; its mind-body and man-nature formulations. From the point of relational process paradigm, the nature is not, as represented in the classical science, an aggregate of substantial independent entities. The relational view of nature is holistic. And organistic feature is the integral part of the man to nature relationship.

물질적 원자론의 이성체계에 대항하는 자연관 중에서 우리는 유기체적인 과정적 사유를 선택할 수 있다. 과정적 사유는 인간소외를 치유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적 반성을 유도한다. 특히 관계지향적인 과정적 사유는 인간의 가치를 확립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과정적 세계관과 실체론적 원자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유기체적인 과정적 사유의 흐름이 심신론이나 인간과 자연의 관계같은 전통의 실체론이 근거하는 철학적 이원론을 해체하고 있다. 관계의 과정 패러다임에서 볼 때, 자연은 고전과학에서 나타나듯 고립적인 실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이러한 관계론적 자연관은 결국 전일적이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성은 유기체적인 연대성을 갖는다.

Living organisms are preeminent examples of the kind of continuum system that can not be understood by atomistic materialism. Similarly, the relational net of our nature is a kind of continuum system. While a rational order is comparable to the discontinuum system as like collection of atoms, the dynamics of nature can not be captured easily by a rational medium. Unfortunately we are ignorant on how to define a continuum system in details.

살아있는 유기체는 원자론적 유물론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연속성의 체계를 보이는 뚜렷한 실례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연의 관계론적 그물망 또한 연속성의 체계이다. 이성적 질서계는 원자들의 단순한 집합체와 같은 불연속성의 체계인 반면에, 자연의 역동성은 이성적 매개를 통해서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러한 연속성의 체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무지하다.

We need to turn the thinking process, moving from an object centered substantial view toward a continuum view of nature to congregate between the West and East. In the meeting of East and West, F.S.C. Northrop has pointed out that Eastern thought is much more devoted to continuum view of reality, while the Western thought is much more centered on theoretic constructs, such as an atomistic object. Traditional understanding of human in the West has developed within the Western object-centered atomistic view of reality. To understand a human is not to explain analytically. It is therefore needed to be moved from an analytical discontinuum paradigm of the science to a differentiated continuum paradigm which is much closer to the Eastern philosophy.

우리는 동서의 종합을 추구하기 위하여 분절된 대상중심적 사유에서 연속성의 자연관으로의 사유의 전환을 요청한다. 동서의 만남에 있어서 노드롭 같은 철학자는 서양사상이 원자론적 객체와 같은 이론적 구성체에 집중하는 한편, 동양사상은 연속성의 실재론을 구축하는데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구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는 대상지향적인 원자론적 실재론 내에서 발전하였다.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곧 인간을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일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과학의 불연속성의 패러다임에서 동양철학에 친화적인 연속성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요청된다.

The organistic process thinking exhibits three basic motifs: continuity, wholeness, and dynamism. To say that the nature is in a state of continuum and that all of its components are internally connected, means that its organistic unity is integrated holistically at each level with hierarchy. The contiguous flow of nature is characterized by the dynamic change of vital force. The continuum of nature is itself complex, and a wholeness of nature is the optimum functioning of the hierarchial supra-system containing all the subsidiary systems.

유기체적이고 과정적인 사유의 주요 주제는 연속성, 전일성, 그리고 역동성이다. 자연이 연속적이고 그 구성요소들이 내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그 유기체적 단위체가 각 계층에서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자연의 연속적인 흐름은 변화하는 생동력으로 특징지워진다. 자연의 연속성은 그 자체로 복잡성을 띠고 있으며, 자연의 전일성이란 모든 하위계층들을 중층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전체계의 최적의 기능성 말한다.

While the physical world may be recognized as a closed system, the nature is an open system. Open system, as opposed to closed, is that which ceaselessly interacts with their environment. In the open network there is no external motivation as like god or world-engine. Nature means causa sui in Chinese word. There are only internal relations.

물리세계가 닫혀 있는 반면, 자연은 열린 계이다. 닫혀 있는 것과 달리 열린 계는 끊임없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한다. 열려진 그물망에서는 신이나 세계의 외부동력과 같은 외적 추동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自然)은 그 한자어의 의미대로 본다면 “스스로 그러한” 뜻이다. 자연 안에는 외적 동력은 없고 내적 관계만이 있다.

Another character of the internal relation is that there is no difference in quality between the objects and its internal relation. A relation is internal to a term when in its absence the term would be different; it is external when its addition or withdrawal would make no difference to the term.
All of the parts of the entire nature belong to one organistic whole, and they all interact as participants in one spontaneously self-generating life process. In the self-generating processes, all things and processes in the world are related in processes which proceed toward a balance and a harmony. So ‘what a thing is’ means ‘how the flow of self-generating force is concentrated’.

내적 관계성의 또 다른 특징은 대상과 그 내적 관계 사이의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전체 자연의 모든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에 속한다. 그리고 그들은 전체의 자기발생적인 과정속에서 하나의 참여자로서 상호작용을 한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과 과정은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과정으로서 관계 맺고 있다. 그래서 한 사물이 무엇인가를 것은 ‘자기발생적인 힘이 어떻게 모이는가’ 하는 의미와 같다.

Western atomistic realism has an implication that all relations were held to be external. Western rational property can not evoke the imagination of these internal relation. The very radical difference between external relation and internal relation is not easy to explain. Because of this difference, it can be said that internal relation unfortunately cannot be submissive to the terminology of western science.

서구 원자론적 실재론은 모든 관계가 외적이라는 것을 함의한다. 서구의 이성적 속성은 내적 관계 상상력을 자아낼 수 없다.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의 근원적인 차이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이 차이 때문에 불행하게도 내적 관계를 서구과학의 용어로서 설명할 수 없다.

For example, the traditional medical definition of the Korean word kan as 'liver' may be misleading in the context of modern anatomy; the name of organ 'liver' is used in Korean medicine to refer to functional systems of which the liver is not merely the physical substrata. This situation is the same in the concept of life. The medical criteria of death is mainly the cessation of the heart-beat or breathing. But in traditional Korean medicine death means that chi (life energy), chung (organic essence) or shin (spirit) is choked or dispersed (not exhausted). Such problems as medical terminology are applicable to all disciplines of Human Studies in Korea.

예를 들어 영어의 ‘liver'를 뜻하는 ’간‘이라는 한의학적 정의는 현대 해부학의 문맥과 많은 차이가 있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간은 단순히 신체상의 위치를 점하는 간과 다르며, 간과 그 부속적 기능을 하는 어떤 기능적 체계를 지칭한다. 생명의 개념도 마찬가지이다. 죽음의 의학적 기준은 심장의 정지 혹은 숨의 멈춤이다. 그러나 전통 한의학에서는 죽음을 기氣, 정精, 신神의 막힘이나 분산으로 이해한다. 의학 용어에서와 같은 그러한 문제들은 사실 인문학 전반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문제이다.

4. Task of our human studies

We have to ask the question how the western philosophers can dialectically engage eastern thoughts, and vice versa, in order to find shared goals and evaluative standards. The possible answer to this question may be the task of human studies in the East, especially in Korea. A common understanding of the philosophical enterprise may or may not be attainable. However, to organize eastern human studies by means of western philosophical categories and to evaluate it by western criteria of evidence, argument and proof is idle as it is parochial. Likewise, it would be absurd to explain modern scientific thinking with the eastern philosophy, despite the dissatisfaction with a western mechanical worldview.

우리는 동서의 공분모나 공통의 가치기준을 찾기 위하여 서구철학이 동양사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들, 그리고 거꾸로 동양이 서구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질문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가능한 답변은 동양 특히 한국에서의 인문학의 주요과제일 수 있다. 철학적 기획의 공통된 이해는 획득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서구철학의 범주안에서만 즉 서구의 논증과 주장의 기준을 통해서만 동양의 인문학을 구성하고 판단하는 일은 편협한 것 이상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서구 기계론적 세계관이 낳은 부정적 요인 이 있다하여도, 현대과학적 사유를 동양사상을 가지고 장식하는 것 역시 터무니없는 일이다.

We can not deny that the western science and the science-based industrial technology have made our life easier, more comfortable and, in some ways, more satisfying. This satisfaction is however gradually turning out to be a dissatisfaction, especially by those who have begun to realize the threat of environmental crisis posed by the increasing demands of the technological world. However we must recognize that the so called human crisis of today is not a western phenomenon alone.

서구과학과 산업기술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고 여유롭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만족감은 서서히 불만족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특히 기술사회의 확산으로 인한 환경위기의 위협을 인식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의하여 그 불만족의 정도는 커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러한 인간위기는 단지 서구사회의 현상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Nobody can be sure whether the East-asian thought is an alternative to the modern civilization. Nevertheless, man has to make an attempt to find a new philosophical therapy. Nowadays the difference between the East and West is not a geographical difference alone. We should not lay the human crisis on the Western civilization alone, but also on the industrialized Asian climate. The alternative is not a revolutionary solution but just concentration of a small cultural improvement. Therefore there is no such thing as perfect alternative. We can not judge by predominance-comparision between the West and East. We can only reconcile both cultures. This is a task of our human studies.

동양사상이 현대문명의 대안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새로운 철학적 치료제를 찾아야만 한다. 오늘날 동서간의 차이는 단순히 지리적인 차이가 아니다. 오늘의 인간위기는 서구문명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화된 동양사회에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대안은 혁명적인 해답이 아니라, 작은 문화적 진보의 누적이다. 그래서 획기적인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동서간의 우위비교에 의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되며, 두 문화를 조율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 인문학의 과제이다.



Baird Callicott/Roger T. Ames(ed.), Nature, SUNY, 1989
Harold H. Oliver, A Relational Metaphysic, Nijhoff, 1981
Jongduck Choi, Die Ontologische Interpretation in der Quantenmechnik, Giessen, 1993
H.Jonas, Das Prinzip Verantwortung.- Versuch einer Ethik fuer die Technologische Zivilisation,
Frankfurt, 1979




토론

논자는 이 글에서, 최근 진행되고 있는 동서간의 갈등과 조화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동서간의 외형적인 유사성을 통하여 형식적으로 연결지우려는 작업 이전에 서로간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철학적 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서로간의 자연관을 비교하는 것이 그 철학적 반성의 유효한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논자에 의하면 서구의 자연 개념은 분절적 물질적 관성적 정량적 기계적인 패러다임의 원자론으로 표현되는데, 이러한 자연관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왔지만, 인간소외나 환경위기 등과 같은 문명의 위기도 아울러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새러운 자연관의 필요성이 대두되는데, 유기체적인 과정적 상호 관계적 사유가 그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간과 liver가 갖는 의미의 차이, 즉 유기체적인 내적 관계성을 예로 들어, 그 가능성에 대하여 심도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논자는 결론에서 그 대안의 수용에 대하여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해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작은 문화적인 진보의 누적에 의하여 동서 두 문화를 조율할 수 있을 뿐이라 하고, 그것을 바로 인문학의 당면 과제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론에서 본인은 대안으로 제시된 유기체적인 자연관의 필요성이,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라고 하는 신념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현대 물질문명의 부작용을 치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는데, 질문드리겠습니다.
논자께서 제일 먼저 이 글의 전제로 제기하신 동서에 대한 지나친 구분의 위험성에 저촉되는 감도 있습니다만, 결론에서 제시하고 계신 획기적 대안이란 존재하지 않고, 작은 문화적 진보의 누적, 그럼으로써 두 문화를 조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본문에서 강조하고 계신 서양의 기계적 패러다임의 단절성과 유기적 내재 관계를 중시하는 자연관을 동시에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하여 답변하여 주시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두 자연관 사이의 공통 분모에 대한 설명이 이 글에서 너무 부족하다고 느끼는데, 이에 대한 보충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상지대 인문과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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