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나누고- 내 삶속에 '상생'이 녹아있는지,, |
현대불교신문 (2002년2월27일) 더불어 나누고 - 이 세계가 100 명의 마을이라면내가 고등학교를 나왔고 작년에 결혼하여 부모 덕에 그나마 따듯한 보일러가 들어오는 방 둘 짜리 전세를 살며, 그 방안에 전화와 냉장고 그리고 텔레비전에다 컴퓨터까지 갖추었다면, 이미 나는 최소한 물질적으로 전 세계 인구의 상층부 8% 안에 들어 있는 대단히 행복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나보다 못한 사람이 100명중에서 92명이나 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나는 항상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한다. 그런 나는 상층부 0.1% 안에 들어가도 여전히 만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소유의 정도가 곧 행복의 척도가 되어버린 나는 끊임없이 무한한 소유를 욕구하지만, 그 꿈이 사실을 알고 보면 바로 불행의 척도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최근 일본과 미국 인터넷 상에서 62억 인구의 지구가 “100명이 사는 마을이라면 나는 어떤 사람?” 일까라는 메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고 있다. 아주 평범한 삶 속에서도 작은 행복을 깨달은 사람이 많은 소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보내는 인터넷메일인 셈이다. 백명 중의 한 명만이 컴퓨터를 갖고 있다고 하는데, 인터넷을 통한 행복 찾기도 지구인의 1%의 사람만이 누리는 독점적 행복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62억을 100명으로 축소함으로써 나의 삶의 현재 위상을 단순하게 살펴 볼 수 있고, 따라서 이 소박한 메시지는 자신이 자신에 대해 내린 부정적 평가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사소하지만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주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선택된 사람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일이다. 내가 이렇게 선택된 사람이라면 나는 나보다 가진 것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것을 나누어 줘야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렇지 못하다. 왜 그럴까? 변명이지만 지금의 혹독한 경쟁사회는 그나마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왜소하게 만들고, 더나가 나를 삶의 문맹자로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노골적인 약육강식을 드러내는 요즘 사회를 보면 서로 함께 같이 잘사는 일은 곧 경쟁력 약화가 된다는 괴이한 무한경쟁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다. 노동자 구조조정이 그렇고, 고교평준화 폐지론이 그렇고, 법학/의학 국가고시 합격자수의 소수 제한을 강하게 유지하려는 기득권자들의 논리가 그렇고, 파벌경쟁을 정당화하는 고질적인 우리의 학벌 체제가 그렇고, 미국 대통령 부시가 휘두르고 있는 세계경찰 권력이 그렇고, 더군다나 땅을 새로 산 사촌 때문에 생긴 내 마음 속의 배앓이가 그러하다. 이러한 경쟁사회 속에서 남들을 이긴 자는 추앙과 각광을 받는다. 그러나 그 소수자가 이뤄낸 승리의 탑을 받혀주는 대다수의 약자들은 배앓이 할 밥거리도 없는 정신적 공허로 빠져드는 것이 우리 역사의 진짜 불행이다. 나도 이런 경쟁사회에 대한 정신적 치료제로서 화엄경이나 금강경의 좋은 이야기를 반질반질하게 말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 속에 나오는 인드라망이나 상생의 이야기를 정말 나의 삶 속에 실천적으로 녹아들게 했는지에 대하여 나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기도 한다. 나눔을 가지고, 더불어 살며, 베풀고, 서로 고리 지으며, 나만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 대신에 남을 위하는 기도를 한다면 경전의 이야기들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진정한 행복을 실천하는 지름길이 될 것 같다.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지만 실천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행복임을 우리는 석가불의 삶 속에서 배운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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