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실에서 본 생태론 이야기 |
2002 기고문 : 우리 현실에서 본 생태론 이야기 - 누현과 추유의 대화, 과학사상 41호 여름호(2002-05-25) 117-132 (2002년5월15일 제출) 우리 현실에서 본 생태론 이야기 - 누현과 추유의 대화누현: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하지요. 그러나 이런 당연한 희망은 문명의 역사를 거치면서 인류학적인 난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하나는 누구나 다 잘 살고 싶어하는 것과 모두 다 함께 잘 산다는 것이 충돌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만 잘 사는 일과 함께 잘 사는 일이 서로 조화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루어낸 문명 자체에다 책임을 지울 수도 있지만,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책임을 지울 수도 있지요. 그런데 무엇이 더 책임지어질 문제인지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 것 같아요. 추유: 처음부터 너무 거창한 이야기이군요. 좀 현실적인 문제로 좁혀 이야기를 구체화시키는 것이 좋을 듯 한데요. 몇 년 전에 원주에서 생명문화축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두 해만 하고 도중하차했는데 이어서 인천/강화 지역에서는 요즘도 계속 하는 것 같아요. 그 당시 원주에서는 생명축제를 왜 해야하는가에 대한 아주 원론적인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어요. 광주에서는 인간이 인간에 의해 무참히 생명이 짓밟혀진 실정인데, 그런 문제도 하나 해결하지 못하고 폼나는 생태주의 생명 논의만 해서 무엇하냐는 반론이었지요. 이런 원색적인 반론에 대하여 생명축제를 찬성했던 저 자신은 나름대로의 재반론을 전개했지만, 근본적인 갈등은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갔지요. 누현: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이해합니다. 과거 군부독재나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들 혹은 신자유주의의 제국주의적 시장독점 등의 현실 문제들 사이에는 공통된 점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것은 삶의 평등이 깨지고 경쟁과 불평등의 사회구조만이 남았다는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모순구조는 궁극적으로 인간의 과대한 욕망과 이기주의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결국은 현대사회의 모순을 풀기 위하여 인간의 욕망과 이기성의 본질을 인정하고 다음에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공존과 조화의 인간의 본연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과제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요. 추유: 맞는 말이에요. 그리고 옳은 말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옳다고 해서 다 현실성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우선 옳다는 말이 실천적으로 옳은지 아니면 이론적으로만 옳은 지를 분명히 따져 보아야 해요. 도덕적으로 당위성을 갖는다고 해서 모두 사회적으로 현실성이 있다는 말은 아니지요. 도덕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현실성이란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으므로 근본적인 본질을 되찾으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생각을 갖는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본질과 현상의 이분법적 사유를 갖고 있지요. 그들의 생각은 본질 따로 현상 따로, 즉 본질과 현상은 속과 겉의 이분법적 구조라고 보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생각은 현실의 현상을 표피적인 껍질이라고 보면서, 본질의 이론이 언젠가는 현상을 치유할 것이라는 희망뿐인 희망을 내세울 뿐이죠. 누현: 사람이 잘 산다는 삶의 행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스러움과 평등한 삶이 깨지게 된 이유들을 설명하는 학자들의 많은 이론들이 있어 왔지만, 인간 사회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각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려들을 모아 한말로 하면 문명위기나 인간소외 혹은 환경위기나 생태위기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그 위기들은 잘 살펴보면, 각기 따로따로가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는 전형적인 인간위기라는 것이지요. 사례를 들어 말해 볼까요. 몇 년 전 온산공단 작은 한 시골 마을에 티타늄 공장이 들어 설 때였습니다. 티타늄 공장은 진폐증의 산업재해 유발 위험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의 반발이 있었지요. 그런데 한 편으로는 시행주의 유혹에 넘어간 다른 주민들의 공장 유치 움직임이 생기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지요. 나중에는 반대를 하는 환경단체와 공장 유치를 주장하는 주민들이 급조한 새로운 유령 환경단체 사이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신문보도에 난 싸움의 내막을 모르는 일반 국민들은 그 논란을 환경단체 간의 이전투구나 주민들의 이기적인 님비 현상으로 오해하는 일이 있었지요. 또 하나의 사례를 말하지요. 늪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생태보전지구로 지정되느냐의 시점에서 주민들이 저수지의 갈대밭을 몰래 불지른 사건이 세 차례나 있었습니다. 보전지구 고시에 따른 주민들의 사유재산 피해에 대한 물적 보상을 하지 않은 정부의 잘못이 첫째이지만 주민들의 인위적인 방화 사건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인간위기의 한 측면이라는 점을 말하려고 이런 사례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욕망에 대한 근원적인 파악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추유: 맞습니다. 저는 누현의 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기 담론을 말하는 이유는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지 위기를 진단하는 일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과도한 욕망을 진단한다고 해서 욕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욕망을 인정하고 욕망이 전개 될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개선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봅니다. 위기극복을 위하여 무엇이 더 가까운 일인지는 저도 딱 분질러 말하기 어렵습니다.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실천적인 과제를 적시하고 현실 속에서 해결을 시도하는 노력 자체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그 위기가 과연 극복될 수 있는가 라는 자조적인 질문을 내던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결과에 대한 낙관과 비관을 떠나서 현실적인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결과가 아니라 지금 무엇인가를 하는 과정이 바로 위기 극복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누현: 오해하지 마세요. 가만히 앉아서 희망의 그 날을 기다리자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행동의 실천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왜 이런 행동을 해야하는가 라는 자기질문이 반드시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동은 자극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환경위기의 진상은 환경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위기의 한 양상이므로, 우리의 실천과 그에 따른 행동은 인간위기라는 총체적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행동의 실천을 위해서는 인간위기의 배경과 행동의 근거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단 시간에 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고 우회적인 방식이라는 말이지요. 추유: 다시 추상적으로 되는군요. 제가 실례를 들어 보기로 하지요. 그런데 입에 자주 오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망설이게 되는군요. 임수경씨와 박노해씨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하나는 그 두 사람 다 치열한 현실비판과 실천 행동을 과거에 보여주었습니다. 둘째는 그 두 사람 모두 출소 후에 과거의 행동양식과 전혀 다른 삶의 근원적인 문제로 회귀했다는 점입니다. 은유적인 표현을 빌자면 그들은 일선의 전사에서 우주적 철학자로 변모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인 사회의 문제에서부터 인간 내면의 성찰로 그들의 관심이 전회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고, 또한 무엇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단지 점점 더 실천 행동의 나침바늘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현: 상당히 과격한 말이 나오려는 준비태세인 것 같은데요. 추유: 그게 아니에요. 환경문제에서만큼은 내면적 성찰과 더불어 그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실천행동의 약진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면적 성찰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경위기는 발등에 떨어진 시급한 불이어서, 불이 당겨진 원인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철학적 명분과 당위성이 원천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는 내면적 성찰의 도도한 흐름 때문에 실천의 행동 장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정서적인 현실이라고 봅니다. 더 강하게 말한다면 내적 성찰의 변모가 자기 개인의 정서적 위안으로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는 것이지요. 누현: 저도 어느 정도 그 말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이 당겨진 원인에 눈감고 있다면 항상 위험에 노출되기는 마찬가지이지요. 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하여 내면의 성찰을 강조했지만, 자신의 정서적 위안에 그치자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개인이 자연을 바라보는 자연관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는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삶의 양식이 크게 변화할 것입니다. 자연을 단순히 물질의 창고로만 보아왔던 자본주의 맹아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 삶의 터전을 잿빛의 언덕으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잿빛 언덕에 푸른빛을 찾아 나서는 일은 더 이상 이론적 사치나 자기위안의 임상적 사유에 그쳐서는 안되며, 너무나 당위적인 인류학적 소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코 내면의 세계로 빠지는 것이 저의 입장이 아님을 밝히고자 합니다. 추유: 몇 년 전에 환경문제에 대한 토론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보기로 하지요. 그 토론회에서 저는 농약 중독 사망자수의 통계를 인용하여 농약 피해의 심각성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반론을 내게 제기했었습니다. 당시 농약 통계에 의하면 사망자 수가 한 해 평균 190명에서 200명 정도였는데, 그 사망자의 내용을 살펴보면 실상은 농약을 뿌리다가 직접 중독에 의한 사망자 수이기보다는 영농 빚에 허덕이다가 혹은 부인이 도시로 떠나버리거나 혹은 40대 중반이 되도록 노총각 신세 한탄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사람들의 숫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통계의 내용이 바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환경위기의 본질이라고 답변했습니다. 환경위기는 환경만의 위기가 아니라 곧 총체적인 사회위기의 한 단편인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적 문제를 풀려고 하는 의지가 앞서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누현: 그런 생각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경제문제, 정치문제, 사회문제가 하도 심각하니 환경문제는 도외시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각종의 매스컴 보도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좀더 사람들의 내면적인 생각이 진짜로 바꿔져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요. 추유: “다 그러는데,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환경문제에서 정말 심각한 점이에요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있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와 정치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오늘의 환경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위기라고 보아요. 누현: 얼마 전에 어느 교수님과 술좌석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요즘 살기도 힘든데 왜 그렇게 환경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지나친 점이 있다고 말하더군요. 추유: 저도 알아요. 많은 지식인들조차 “왜 이리도 말끝마다 환경환경” 하냐고 짜증을 내더군요. 그런데 잘 보면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이기적인 지를 쉽게 알 수가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과거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환경과 노동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많았어요. 그러나 그러한 상충된 모습들은 사실 기업주의 농간에 의한 결과라고 보지요. 이제 환경은 구호가 아니라 삶의 현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야만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노동현장과 거리가 먼 기업주와 많은 지식인들도 그 틈을 타서 환경에 대한 명분 채우기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아전인수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환경논의를 사치스런 명분 얻어내기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요. 어쨌든 우리의 환경운동은 그것이 구호라 할지라도 아주 초기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앞으로 더욱 세게 밀고 나가야 한다고 봅니다. 누현: 그러면 운동 차원이 아니라 인문사회학자들의 현학적인 환경논의는 어떻다고 보지요?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자연의 환경문제와 인간의 인성 문제를 자꾸 분리해서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요. 조금 다른 예를 들어, 사회 곳곳에서 이름 모를 성인병이 횡행하여도 기껏 그 이유를 스트레스에나 돌리고 있고, 진정 그 원인이 환경파괴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려 들지 않아요. 과거 기업환경과 정치환경의 썩은 구린내가 오늘의 경제위기를 낳았고, 사회환경과 교육환경의 구린내가 오늘의 청소년 문제를 자초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눈감고만 있으니, 환경위기니 문명위기니 인간위기라는 말은 너무 고상해서 귀에도 들어올 턱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추유: 맞는 말이에요. 그러나 더 분명한 것은 오늘의 경제위기가 과거 경쟁논리를 조장한 물질주의의 직접적인 폐해라는 점입니다. 이는 곧 사회위기를 낳은 장본인이며, 오늘의 심각한 환경위기와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지요. 물질만능주의는 이미 매스컴화된 개념이라서 그렇게 알고는 있어도 실제로 그로부터 극복하려는 행위의 실천이 매우 미약하지요. 인식이 실천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강한 동기가 있어야 하고 동기의식이 몸에 배려면 역사적인 배경을 치열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아요. 다시 말해서 역사적인 배경이 동기화되려면 그 역사의식은 나의 역사로 전환되어야 하고, 그러자니 역사는 남의 역사라 하더라도 나의 역사로 용해되어야만 한다고 보아요. 그래서 오늘의 환경위기는 곧 사회위기요 문명위기라는 생각이 몸에 배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누현: 환경위기가 문명위기라는 인식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태학적 자연관이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인간과 자연의 생태학적 유대성을 추구하고, 인위적인 기술의 사유를 거부하여 자연의 유기적 연대를 추구하며, 지구의 유한성을 ‘몸’으로 인식할 것을 요청하는 사유가 곧 생태학적 자연관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을 자원창고로 보는 관점 그리고 생태학적으로 자연을 본다라고 해도 머리로만 인식하는 일은 반생명의 텍스트만을 양산하게 될 것이 너무 뻔한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나스의 말이 기억나는데, “오늘의 사고는 죽음의 존재론적 지배를 받는다”라는 말이지요. 추유: 저도 대충 이해는 가는데, 그래도 존재라는 말이 너무 철학적인 것 같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인공지능 로봇이 만들어지고 유전공학 과학기술에 의한 생명복제가 가능해진다면 편리성의 측면에서 발전한다고 해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설 자리가 점점 왜소화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 듯 한데요. 어쨌든 첨예화된 요즘의 기술시대에서 인간의 존재가 분명히 위협받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를 이해하면 될까요? 누현: 예, 그렇습니다. 인간이 배제된 기술행위는 곧 존재론적 무관심이지요. 그러면 인간 문명은 살림의 역사가 아니라 죽임의 역사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고 봅니다. 과학기술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인간다운 인간성이 어떻게 조화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저는 부정적입니다. 기술의 문제는 인류학적인 문명사와 연관된 개념이라고 봅니다. 왜냐면 기술은 원시시대에서는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것이기 때문이지요. 기술을 통해서 수렵생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밭을 갈게 되었고 생산성을 높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요. 문제는 기술의 영역이 문자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면서 시원적인 기술의 역사를 상실하고 전도된 이성의 역사로 접어들게 된 것이지요. 인간에 의한 기술이 아니라 기계에 의한 기술로 전도되었다는 말입니다. 확실히 이성의 역사는 호모 사피언스로서 인류 역사의 최대의 승리였지만 이 승리는 너무 과도하여 지나친 자만심에 빠진 이성의 역사로 빠지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요나스는 “과도한 승리는 승리자 자신을 위협한다”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역사의 흐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추유: 그러면 그 승리를 포기하거나 과거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인가요? 누현: 그런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는군요. 하이데거는 그런 지나친 승리의 역사 때문에 “우리가 본래 거주하는 곳으로 우선 되돌아 갈 것”을 제안하지요. 그러나 본래 거주하는 곳이란 원시시대로 돌아가거나 오늘의 문명사회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되지요. 그 지나친 이성의 승리는 서구 사상사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되는 데카르트의 이원론, 기계론적 자연관, 인간중심주의 등으로 나타났으며, 이 감초들은 오늘의 문명위기, 생태위기 혹은 인간위기의 주범으로 지목 받게 되었지요. 그 감초들은 현재의 놀랄만한 과학의 성과를 가져다준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지만, 분명히 인간을 기계화시켜가고 있으며, 소위 인간소외의 현상을 낳았지요. 그래서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무작정 데카르트와 기계론이 나쁜 것이니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의 원형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말이지요. 추유: 결국 존재란 이성의 존재를 거부하며 삶의 존재를 찾자는 말이군요. 그렇지만 이런 주장에 대하여 하버마스는 강하게 반대한다는 말을 학자들에게서 가끔 들은 것 같습니다. 자연의 생태학을 모델로 한 생태주의 철학의 과도한 주장들이 심미주의에 빠지는 현상을 자주 본 것 같아서 하버마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소박한 생태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북친의 책을 읽었는데, 내적 성찰에 비중을 둔 사람들이 그 책을 한번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북친의 입장에 의하면 현재의 생태운동은 사회적 구원과는 관계없는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 하여 강한 비판을 던지고 있는데 저에게는 수긍이 가는 말이 많아요. 누현: 하버마스와 북친의 주장에 대하여 추유께서는 동조를 많이 하는 것 같군요. 그러나 하버마스는 자연을 객관적으로만 파악하고, 이성의 틀 안에 가두어버리는 전통적인 서구 기술사회의 맥락에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삶과 자연을 너무 간단하게 이성적인 것으로만 처리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북친의 입장은 신비주의의 그늘에 빠져버린 생태주의에 대한 경고 정도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북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자칫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인문학적 생태운동가의 위축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요? 추유: 생태와 환경을 아우르는 생명 운동가에게 필요한 것은 분명히 감성적인 동기유발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감성이 이성을 누르고 나아가 내적 성찰을 통하여 나만이 깨달았다는 선민의식이 신비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현실은 누현께서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북친이 쓴 말을 다시 인용해 볼까요. “생태적인 접두사가 붙은 것들의 일시적인 유행이 뿜어내는 악취가 도처에서 진동한다.” 참으로 가시 돋친 말이지요. 그리고 생태위기의 극복방안 중의 하나로서 동양적인 자연관을 도입하는 것조차 신비주의로 몰고 있어요. 이런 입장은 너무 강한 듯 느껴지지만, 실제로 최근 들어 동양학의 열기가 강세를 띠면서 서양은 논리, 동양은 수양 혹은 서양은 이성 동양은 신비라는 이분법의 구도가 횡행한 것 같아요. 이 점은 보편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수주의에 눈이 멀 수 있는 민족주의로 편향되는 사회적 흐름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누현: 북친이나 북친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동양철학을 모르고 하는 말일 수 있어요. 동양의 자연철학 혹은 수양론은 신비주의이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현실 사회철학이라고 보아야 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유가에 대해서는 그것도 약간만 인정하지만 불가와 도가에 대해서는 그런 평가를 거부하지요. 그러나 도가 역시 현실에 대한 수용방식의 차이일 뿐이라고 보며, 불가조차도 현실에 대한 열려진 언명이라고 보아요. 결국 동양사상은 현실 논리와 유토피아 논리를 서양처럼 분리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의 틀로서 본 것이지요. 그래서 불가의 유토피아는 “저기에” there is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오히려 서구의 유토피아 논리가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진짜 신비주의 논리라고 보는 것이 저의 생각이에요. 하여간 동양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생태주의가 문제인데, 저는 북친이 사회생태주의와 근본생태주의를 구분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생태주의 운동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추유: 저는 북친의 입장을 모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니까 북친의 이야기는 그만 하지요. 저는 신비주의 경향의 생태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현실사회 안에 신비주의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어쩔 수 없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어요. 그래서 생태주의를 이야기할 때는 그런 신비주의 실태를 인정해야만 비로소 생태주의 운동이 현실적으로 넓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사회적 신비주의는 사회적 최면제와 같아서 집단 마취현상에 빠질 수 있어요, 우리 사회가 바로 그런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누현: 추유께서 우리 사회 안에 신비주의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비주의 경향의 생태주의를 무작정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반생명의 도도한 문명위기를 치료하는 비판의식과 조화롭게 꾸려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생태변증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보아요 그래야만 진정 생명의 터전이 우리 삶 속에서 정착된다고 봅니다. 추유: 갑자기 생태변증법은 무슨 말이지요. 누현: 진자 추를 보세요. 추가 한 쪽 위로 올라가 위치에너지가 최대일 때 밑으로 떨어지지요. 그러면 이 떨어지는 추는 가운데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 쪽 위로 올라가지요. 그래서 다시 떨어지면 또 가운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다시 올라가지요. 이렇게 계속 물리적 진자운동을 하듯이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의 양태가 상호 진자운동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성의 권력이 독주하면 그 반작용이 생겨서 이성을 정신차리게 하는 것은 좋으나 이것이 지나쳐서 반이성 혹은 신비주의 더나가 주술성으로까지 나가게 되는 것이 사회의 모습인 것 같군요. 결국 생태적으로 볼 때 문명사회든지 자연이든지 이성과 주술의 양 요소가 두 날개로 해서 움직여지지요. 이 두 날개를 같이 조화시키지 않으면 날 수 없듯이 우리의 인류사도 같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가 말하려는 생태변증법이에요. 추유: 마치 이영희 선생께서 말한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말과 비슷하군요. 누현: 네, 그래요. 이성과 신비는 항상 함께 하는 것이 자연이나 문명이나 마찬가지라고 보지요. 문제는 사람들이 그 신비를 엉뚱한 바깥에서만 찾고 있다는 점이지요. 신비는 따로 저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과 몸 자체가 신비함을 이미 갖고 있음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어요. 저는 이 차이가 바로 동양과 서양의 중요한 차이라고 봅니다. 또 에코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가름선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생태 문제에서도 그 신비함을 밖이 아닌 안에서 찾는 노력을 한다면 사회생태학은 자연적으로 체득할 수 있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근본생태주의나 사회생태주의나 그 차이가 없어지지요. 예를 들어 사람이 배고픔을 배속에서 꼬르륵 몸으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인류의 가장 중요한 신비함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신비한 것을 자꾸 밖에서만 찾으려들지요. 서로를 사랑할 수 있고, 남의 불쌍한 일을 더불어 아파하고, 혹은 깊은 계곡이 골프장 건설로 망가져 가는 일을 아파하는 것처럼 더 이상 신비한 것이 없지요. 보세요. 만약 눈 깜짝거리는 자율신경계의 신체작용이 없다면 인류의 반 이상이 50년도 못가서 장님이 될 것이라는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어요. 이보다 더 신비한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추유: 알겠어요. 결국 무당집이나 점집에 가거나 괴이한 몬도가네 식의 보신주의는 결국 신비를 밖에서 헤매고 찾는 가짜 신비주의군요. 사람들을 혹세무민하는 그런 집단적 사회마취가 아니라면 저도 신비주의의 문명적 의미를 충분히 수긍하고 있어요. 이제는 화제를 돌려서 다른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지요. 생태주의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우선 생태주의에 대한 구분과 기본적인 설명을 해주시죠. 누현: 제가 아는 대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일단 생태주의 논의는 주로 세 가지로 구분되는 것 같아요. 근본생태주의, 영성생태주의, 사회생태주의가 그것이지요. 그리고 급진생태주의도 있지만 이는 사회생태주의 한 부분으로 보면 될 것 같구요. 여기서 영성생태주의과 근본생태주의는 그들 사이의 상호상승적 연계성을 강조하면서 서로 만나는 공분모의 특징이 많지요. 사회생태주의는 생태론의 기본원칙과 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접목하려는 역사주의적 태도를 분명히 지니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급진생태주의는 실천적 대안들로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대중운동의 범위를 제시하고 있어요. 추유: 설명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관심은 생태주의 이론이 현실 환경위기를 극복하려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인문사회학적인 생태주의 논의는 원래 생물학의 한 분야인 자연 생태학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생명계 생태학의 원조인 유진 오덤 Eugine P. Odum 의 교과서를 읽어보았지만 그 내용을 사회문제에 직접 적용하는 일은 상당한 은유적 사고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생물학의 진화론을 사회현상에 적용시킨 사회진화론의 타당성 여부는 엄청난 정도로 많은 논쟁이 이루어져 왔지만, 생태주의 논의는 그것이 사회생태주의이든지 아니면 근본생태주의이든지 관계없이 그런 치열한 논쟁 없이 슬그머니 자연생태학의 은유를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누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그러나 근본생태주의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일체 혹은 그 둘 사이의 등가성을 전제하는 것이므로 자연생태학의 구조를 근본생태주의에 충분히 은유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회생태주의인 경우에는 그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닌 듯 하네요. 추유: 사회생태주의 중에서 급진생태주의는 분명히 사회개선의 차원에서 출발하였고 따라서 사회주의 이론이 배경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급진생태주의 역시 생태론적인 사유가 기본이 됩니다. 급진생태주의가 맑스의 사회철학 부문에서 생태주의 사상을 많이 추려낸 것을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맑스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생태론은 맑스의 『자본』에서 강조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가져온 생태적 혹은 환경적 부작용에 주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농업은 결국 공동체적 농업보다 훨씬 더 많은 토양의 낭비와 착취라는 점을 적시하고 있지요. 그래서 대자본에 의한 대규모 농업은 농민과 토양의 활력을 쇠약하게 만들며, 자연적 생명법칙에 의거한 사회적 교환의 긴밀성을 파괴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생태주의의 기본이지요. 농약과 비료 생산이라는 근대 산업화와 더불어 자본주의적 농업은 일단의 진보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로부터 소농 노동력은 피폐해졌고 인류의 생존과 토양생명의 지속성은 보장받기 어렵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지요. 또한 맑스에게서 일반적인 산업화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생태위기를 낳는다고 경고한 점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예를 들어 화학산업의 폐기물을 예방하거나 재활용하는 생태문제에 대하여 맑스가 기울인 고민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누현: 추유의 주장은 생태주의를 지나치게 사회문제로 국한하여 말하려는 인상이 있네요. 그러나 현대 문명인이 변화되어야 할 근원적인 자연관의 문제를 소홀히 한 채, 우리 문명 사회의 근본적인 위기감이 해소될 지는 의문이 됩니다. 그리고 사회운동 차원에서 환경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을 수긍한다해도 현실적으로 보면, 사회운동과 환경운동 혹은 노동운동과 생명운동이 서로 조화가 안되고 있다는 점이에요. 이 들의 만남과 대화에 대하여 사람들이 너무 인색한 것 같습니다. 특히 한국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해요. 과거 학생운동을 한 사람이나 지금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는 아니더라도 환경운동에 대하여 여전히 불신과 곡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주변에서 볼 때, 그 인색함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추유: 사회생태주의와 근본생태주의는 설명을 하기 위한 범주로만 구분이 되어 있지 실제로는 융합되어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리고 사회적 접근의 환경운동 혹은 좁은 의미에서 사회생태주의는 뭔가를 부수자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단지 현실과 관행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의 사유원천의 의미로 사회생태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민주화를 이미 이루어냈다고 하는 환상 속에서 실천의 사유원천이 점점 상실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우리의 현실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사회생태주의가 근본생태주의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약진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누현: 사회생태주의와 근본생태주의를 그렇게 대립적인 관계로 설정해야 하나요? 근본생태론, 영성생태론 그리고 사회생태론이 한국상황에서는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이 현실일텐데요. 추유: 저도 동의합니다. 영성생태주의, 근본생태주의 그리고 사회생태주의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하나의 스펙트럼 안에서 일어나는 편차의 차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한 생태주의자에게서 그것이 서로 혼재되어 생태주의적 사유가 철저히 개인화 되어진 신비주의로 전도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한다는 저의 일관된 생각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영성생태론의 의미를 매우 중시하고 있지만, 영성생태론과 사회생태론이 혼재될 경우, 그것은 대중적 운동의 감각을 곧 상실하고 마는 위험이 도사려 있다는 것이지요. 우주와 생명을 논의하는 영성생태론과 근본생태론이 현실사회를 논의하는 사회생태론과 결별할 때, 허무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현: 예, 맞아요. 마찬가지로 사회생태론이 영성 혹은 근본생태론을 무시할 경우, 정치를 위한 정치 혹은 맹목적 운동이 될 수 있음을 놓치면 안되지요. 결국은 둘이 만나야 되겠지요. 추유: 그러나 그 차이를 무시하고 혼재될 경우 구체적인 만남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생태론 논의에서 페미니즘 즉 생태여성론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페미니즘을 생태여성론이 아니라 여성생태주의라고 번역해야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때 여성을 자연과 등식화시키는 본질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을 역할론의 틀 안으로 구속시킬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류학적 권력의 중심에 있던 남성성의 문명적 폭거를 상쇄하고 중화시킬 수 있는 여성성을 여성만이 가져야 된다는 왜곡된 해석으로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태여성주의 논의는 오히려 여성의 적극적 사회참여를 통한 구체적 행동주체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제 이야기의 핵심은 인간의 문명사에서 구축된 권력 구조를 분산시키고, 중심과 주변의 이분논리를 현실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철학적 생명 논의는 물론 중요하지만, 생명의 구호를 빙자하여 현실에 눈감고 있으면 시급한 문제 풀이가 아득해진다는 말입니다. 누현: 충분히 이해합니다. 철학적 자연관과 현실적 운동론이 함께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는 말로 결론을 내리기로 하지요. 추유: 예 좋아요. 그러나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아무 이야기도 안 한 것과 같아요. 문제는 그런 이론적 결론이 아니라, 생태/환경/생명에 관련한 운동조직이나 일하는 사람들이 추상적인 철학을 운동의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의 차원에서 동력 전환이 안 된다면, 멋있는 철학도 별 쓸모가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현: 여전히 강한 입장이시군요. 저 역시 현실로의 동력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단지 추유와 저와의 차이는 문제 풀이로 가는 속도의 차이인 것 같아요. 분명한 것은 추유와 제가 그 속도 차이에서 누가 옳고 그르다는 손을 올려 줄 판정관 앞에 설 필요는 없다는 점이지요.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한 차이를 갖는 사람들이 질시와 우열의 관계가 아닌 공존과 연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추유: 예, 맞아요. 제가 좀 과격하게 말했다면 양해해 주세요. 단지 현실 속에 드러난 공공적 위기현상을 받아들이는 반응의 차이이지, 근원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철학과 현실의 치열한 만남은 중요한 것 같아요. 제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누현: 저 역시 고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로 다 끝날 수는 없으니 꼭 다시 만나 이야기를 더 나누기로 하지요. -원고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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