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와 과학
2002 특강 : 풍수와 과학, 연세대학교 대학원 주최 강연회, 2002년 5월 22일

풍수와 과학



<1> 풍수

⃟ 풍수지리
*땅과 물 그리고 바람에 영성과 인격성이 있다는 문화전통
*지모신(地母神)의 신앙
*땅과 물을 포함한 모든 자연 현상을 생태학적 시각에서 인식하면서 생겨난 문화 현상
*인간과 자연이 서로 영향 속에서 인간의 길흉화복이 결정된다고 믿는 자연 인식 체계

⃟ 풍수지리의 두 가지 인식 태도 : 검증주의의 과학적 방법론 - 종교주술적 방식

⃟ 풍수지리 역사
1. 터를 가려서 집을 짓고 주거지를 마련하거나 주검의 묻을 자리를 양지 바른 자리에 택하는 오랜 생활 양식
2. 신라 말에 도선국사에 의해서 비로소 시작
3. 음택 풍수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조선조
박제가, 󰡔북학의(北學議)󰡕 : 전라도에 풍수가 우심하여 열 집 중 아홉은 지관 노릇을 했다함.
무라야마(村山智順), 󰡔조선의 풍수󰡕 : 조선조 말기 전국적으로 지관이 약 5천 명 정도

⃟ 주술적 신앙이 아닌 현대 산업사회의 생태/생명위기를 극복하는 대안문화로서의 가능성 타진
- 전문적이고 딱딱한 이론 체계에 집착할 필요 없이 다수 민중들이 공감하는 생활 속의 자연인식 태도로 전환
- 한국인의 자연관을 포착하는 문화적 인식으로서 자리매김
⃟ 간룡법(看龍法)과 형국론
⃟ 지하의 수맥을 찾는 다우징(dawsing), 기공, 오링테스트 등의 문제
⃟ 가이아 이론과 풍수
⃟ 풍수는 땅의 논리에 의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논리에 의해 존재하는 것
⃟ 천명론과 천인상교승론(天人相交勝論)
⃟ 풍수신앙은 자연의 생기를 믿지만 환경결정론이나 자연중심주의에 빠져 있지 않고 인간적 도리를 중요시하는 한편, 자연과 인간의 생태학적 상호관계를 역동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문화 체계이이다. 이러한 인식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 하는 생태학적 유기체로서 자연학문의 체계 안에 맴도는 것이 아니라, 자연도 인간처럼 사유하고 인간의 삶과 생각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며 그에 따른 보상과 징벌을 내린다는 점에서 인격적이고 가치 지향적인 인문학문의 체계로까지 확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풍수설은 자연학문으로서 지리학과 달리 인문학문다운 자연관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인간답게 사는 삶의 가치가 땅의 선택이나 지리의 이치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임재해 교수 인용)

<2> 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

우리는 일상언어 속에서 과학적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현대에 끼친 자연과학의 막대한 영향력때문에 과학적이라는 수식어를 통한 문화환경이 또 하나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었다. 과학의 실제 내용과 관계없이 과학이라는 외형범주가 자본주의 사회의 발달과 함께 카리스마를 갖게 되었고 이렇게 도그마로 변신된 개념이 내용을 지배해버리는 풍조가 만연된 듯하다. 새로운 과학의 신화가 탄생된 것이다. 과학의 개념이 기득권 세력구조에 의해 도구화되고 수단화되어 가는 상황을 지식인 조차도 간과해버리는 상황을 신화화된 과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구분기준이 너무나도 아전인수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과학의 신화화는 분명히 누구엔가는 이득이 되고 있으며 누구에게는 불이익이 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과학이 과학 외적인 요소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라고 그냥 넘겨 버리고 말일인지 다시금 반성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열려 있어야 한다. 검증 혹은 증명가능성의 폭을 기존의 의도된 기준에 맟추어 스스로를 제한시켜서는 안된다. 지금 참으로 검증가능했던 사실도 추후에 거짓으로 판명될 수 있다. 과학은 그 점을 두려워하는 폐쇄된 것이여서는 안된다. 우리가 알고있는 뉴턴의 고전과학은 폐쇄성의 세계관을 제공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과학의 패러다임이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뉴턴역학은 더이상 물리학의 주역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전 패러다임 속에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 즉 현대과학의 자연관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데카르트와 뉴턴에 의해 정립된 고전적인 의미의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결정론을 통해서 과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마땅히 비판되어야 한다.

<3> 관계의 세계관

현대 물리학은 고전 물리학의 대상인 화석화되어 고립된 대상을 다루는 학적 체계에서 많은 부분 벗어나 있다. 현대 자연과학의 대상은 요소들의 계량적 합으로서의 닫혀진 전체가 아니라 자기 창조적인 열려진 전체이다. 열려진 전체 속에서 개체들의 현상은 끝없는 무질서로 보여질 수 있지만 그들 안에는 내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 내재적 질서의 경험적 발견이 곧 숨겨진 변수이며, 이로부터 자연의 인과성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과율은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없으며, 항상 자연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고전과학은 주어진 데이타를 갖고 전체를 예측하는 전형적인 귀납론을 갖고 세계를 이해한다. 앞서 말한 기계론적 결정론과 요소환원주의와 직접 연관되는 귀납주의를 배겨으로 한 고전과학의 한계는 당장 인간이 아니라 가장 작은 단위의 바이러스 유기체에서도 드러난다. 현대과학은 유전자문제에 대하여 종전의 내용없는 자부심을 이미 버린 상태이다. 결국 과학의 새로운 기준은 계량적 실증성에서 이미 벗어난 상태임을 말하려 한 것이다.
고전과학에서는 전체로서의 실재는 경직된 “실체”로서 이해되며, 양자론에서는 전체의 실재는 하나의 “관계”이다. 다시말해서 전자는 관계를 실체를 통해 해명하려 했으며, 후자는 실체의 개념을 시스템 전체의 관계망(Netzwerk) 속에서 해명하려 했다. 고립계를 추론하는 “실체”들의 과학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자연에 대한 진정한 접근을 할 수 없다. 현실 현대과학은 이미 “관계”들의 과학으로 전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과학의 “과학적”이라는 기준이 카리스마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도 함께 입다물고 있을 필요는 없다.

<4> 자연을 이해하는 시각의 변화

근대 자연과학은 데카르트와 뉴턴의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사유방식 위에서 발전되어 왔다고 말한다. 이러한 결정론적 사유방식 밑에는 우리의 자연속에 엄연한 질서의 구조가 숨겨졌다는 생각이 깊게 깔려 있다. 이 질서의 구조의 숨겨진 정도가 너무 강하여 인간이성으로는 끝내 그 질서를 찾을 수 없다는 입장을 철학적으로 불가지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불가지론은 과학을 발전시킨 내적 동력이 되었다. 불가지론은 실재론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재의 존재성은 과학적 탐구를 가능하게 만든 존재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과학은 전체 질서의 실재를 파악할 수 없었으며 단지 전 질서계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겨우 탐지해내는 역량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근대과학의 자존심은 불가지론의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 과학이 찾아낸 아주 작은 부분의 질서를 전체 질서계로 생각하면서 찾아내지 못한 나머지 숨겨진 질서계는 무질서 혹은 우연의 세계로 전락시켜 버렸다. 기존의 과학이 갖고 있는 질서의 기준은 우선 현상의 규칙성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의 대상은 규칙적인 것을 필연성으로 보고, 불규칙적인 것을 우연성으로 보아, 우연성의 세계를 과학의 탐구대상에서 배제해 버렸다. 그러나 질서의 기준이 눈에 보이는 현상적 규칙성으로 잡는 일이 얼마나 과학의 범위를 좁게 하는 지를 알게 되면서부터 18세기부터 현상적으로는 우연적인 것도 내재적으로는 필연적인 것이 있음을 인지하면서 과학의 범위는 폭발적으로 넓게 되었다.
자연과학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의미의 구체적 내용은 자연과학이 인식론적인 방법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까지를 언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존재론도 이성인식에 의한 기존의 실체론에 구속된 존재론이 아니라 내적 관계론을 포용하는 새로운 의미의 존재론을 말한다. 이러한 뜻에서 철학적 자연탐구는 기성의과학철학뿐만이 아니라 소위 자연철학이라는 패러다임이 요구되었다.

<5> 카오스이론의 철학적 이해

현대과학에서 이러한 문제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 것이 바로 카오스 이론이다. 카오스 이론의 궁극적인 의도는 결정론적 카오스를 말하고자 하는 데 있으며, 즉 겉보기에 무질서한 현상들도 알고보면 숨겨진 결정론적 질서계의 부분양태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데 있었다. 원인과 결과의 일대일 대응이 안되는 현상을 우리는 우연 혹은 통계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서도 최소한 원리적으로는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점을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많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찾는 것은 자연과학의 최대의 임무이다. 즉 대상체계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하게 분석할 수만 있다면 결정론의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단지 부족한 정보 혹은 부분의 체계 속에서 볼 때 그 결정론적 체계가 마치 우연 혹은 확률적 운동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연적 행태를 바로 결정론적 카오스라고 부른다.
우리는 비규칙성을 무질서로 그리고 결정론을 질서로 보는 관성때문에 질서와 무질서를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본다. 그러나 결정론적 카오스이론은 결국 이 두 개념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든다. 우리들은 결정론적 카오스이론이 가져다준 세계상을 통해 새롭고 아주다르게 자연을 이해할 수도 있다. 보통 우연과 필연은 조화될 수 없는 대립물로서 간주되었으나 카오스이론에서는 그렇지 않다. 카오스가 결정론적 구조를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과 혼돈적인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모순적이라는 것이 카오스이론의 기본명제이다.
카오스이론은 예측가능한 예측불가능성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을 결정론적 혼돈이라고 말한다. 혼돈은 다시 질서의 원천이 되었다. 혼돈은 잠재적 질서로 우연은 필연성의 원천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현상계의 다양성 속에서 보편적 법칙성을 찾으려는 카오스이론의 과제는 처음부터 결정론을 말할 수 있게 하는 질서구조의 존재를 인정하고 들어간다.
카오스조건은 물리학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식론의 문제이다. 우리가 아는 것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가?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안다고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철학적 물음은 철학 2500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계속 물어져 왔다. 과학에서는 묻지 못했던 이러한 물음들을 이제는 하나씩 카오스라는 이름의 과학에서도 다루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존재에 대하여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아래 거리낌없이 물어왔다. 반면에 과학은 기껏해야 인식의 문제만을 다루어 왔다. 카오스이론이 존재를 직접 묻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인식의 테두리를 붕괴시키고 나온 것임에는 틀림없다. 카오스이론을 통해 과학과 철학이 하나의 문제를 다루게 되는 공동의 장이 마련될 수도 있다.

<5> 복잡계 이해

한 때 카오스 이론의 선풍이 불더니 요즘에는 복잡계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과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커진 것은 매우 고무적이지만, 지적 호기심에 그치는 일시적인 유행의 단막극으로 그쳐서는 안될 것이다. 카오스와 복잡계에 대한 일반 교양 과학도서의 잇달은 출간은 우리들에게 과학과 현실의 매개를 이어주는 새로운 논거장치로서 사회적 불만의 출구 구실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본다. 이는 70년대 중반 이후 카프라의 책이 신과학운동의 바람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사회적 맥락에 서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실 사회와 과학이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사회적 결핍 상태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아전인수 격으로 과학을 현실 속으로 유입시켜서는 안된다. 현대사회의 구도가 정량화되고 규격화됨에 따라서 비규격과 비정량의 세계를 찾아보려는 인간의 탈출구로서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과학에 대한 기대는 반드시 신기한 무엇을 밖에서 찾으려는 기대로 전이되기 때문이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이미 우리 몸에 간직되어 있다.

예를 들어 가장 자연스러운 눈의 자율적인 깜박거림이나 배고픔의 경고현상이 없었다면, 혹은 특정 병원균을 인식하는 항체의 자동인식기능이 없었다면 인류는 벌써 멸망했을 지도 모른다. 현대과학이 무소불위의 힘을 갖고 있다해도 이러한 인체의 신비를 아직까지는 밝혀 낼 수 없다. 가장 자연스럽지만 정말 신비한 이러한 현상들은 인체에서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연현상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보아야 한다. 우리가 신비하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요즘들어 자주 논의하는 복잡계(Complex system)의 현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과거 전통 물리학은 이러한 복잡계를 과학탐구의 영역에서 배제하였다. 그래서 바람과 구름 그리고 물이 흘러가는 모습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 안에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유체역학이 발전하고 더군다나 1960년대 부터 카오스이론이 등장한 이후 복잡성의 과학은 일반인 사이에서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복잡성의 모형은 다음의 네 가지 요인을 함의한다. 첫째 복잡현상 과정은 서서히 연속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누적되다가 갑자기 나타난다. 둘째 복잡계는 아주 많은 수의 자유도를 지닌다. 셋째 복잡계는 고전물리학이 다루는 닫힌계가 아니라 생명계가 열린계이듯이 그런 열린계이다. 넷째 좀 어려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비선형계이다. 그리고 환원주의 혹은 분석적 방법론으로 접근할 수 없고 옴살적(holistic)이다.

<6> 과학비판
오늘의 문명위기와 관련하여 서구 과학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다. 그런데 실제로 서구 과학비판은 산업화에 대한 비판, 근대화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서구이성에 대한 비판이 함께 섞여있다. 인간위기 혹은 문명위기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이야기된 비판의 시각 중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사항을 구체적으로 다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세계관으로서 주객분리에 대한 것, 혹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에서는 기계론적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형이상학에서는 결정론적 구조관에 대한 것이며, 방법론에서는 분석주의와 환원주의 혹은 연역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에 따른 인간소외의 문제, 혹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생긴 환경파괴의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들이 서로 분리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나 논지 전개를 위하여 위의 문제들에 대하여 나누어서 그 사상적 지평선을 열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서구과학이 지니는 인식영역의 한계성에 대한 비판이다. 서구과학의 구조적 틀은 현상과 존재계의 이분법적인 고대 그리스 철학의 사유구조와 기독교의 세계 디자이너(신) 개념 위에서 세워졌다. 현상계는 존재계를 모방만 할 수 있지, 그와 결코 동일한 지위를 갖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의 창조물인 인간은 신의 의지를 전부 알 수 없다. 인간의 인식한계는 여기서 생긴다. 불완전한 인간은 생존을 위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인식능력을 쓴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의 역할은 우리가 보퉁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서구과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 혼자만의 지식을 지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식은 전달가능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언어라는 전달매체의 효율성이 매우 중요했다. 그들은 인간인식의 한계를 겸허하게 이미 수용했으며 그 한계를 신과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공유할 수 있는 공중언어로서 조금씩 넓혀가는 작업이 우선이었다. 이러한 반성없이 서구 과학적 인식론의 한계만을 부각시켜 말하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서구과학의 인식의 한계를 표피적으로 주장하면서, 그 대안으로 주역의 자연관이나 노장자를 말하거나 화엄경의 일체사상만을 자꾸 반복하면 자칫 뜬 구름잡는 이야기로 전락될 수 있다.

둘째 서구 기계론이나 결정론에 대한 비판이다. 기계론이나 결정론에 대한 용어적 함정에 빠져, 그것에 대한 대안이 반성없는 생기론이나 정령론으로 잘못 나갈 수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이나 뉴턴의 기계론은 현대의 믄명위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약방의 감초로 끼는 비판대상이었다. 서구의 이원론이나 기계론은 확실히 산업혁명의 기초사유였으며, 그로부터 야기된 인간소외의 요인은 문명사적으로 심각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기계론이나 결정론은 과학에서 인과율로 나타난다. 인과율은 물리화학적 사건이나 사태를 설명하는 것으로서 자연에 대한 2차기술 체계의 도구이다. 즉 자연 자체가 인과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진술과 자연을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진술은 다르다. 서구의 인과적 과학체계가 형이상학적 결정론과 세계관의 측면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후자의 진술을 전자의 진술로 혼동해서는 안된다. 더우기 문제는 기계론과 결정론과 같은 개념이 일반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제로 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더 크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되는 현상이라든지, 영주와 농노 혹은 자본주와 노동자 사이의 빈부 격차에서 오는 새로운 계급화 현상이 결정론적인 신분분리로서 대치되는 사회적 과정을 거치면서 일반인들 사이에서 결정론에 대한 불만이 크게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은 60년대 이후 뉴턴역학의 세계관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추세는 곧장 반대급부적인 주술적 생기론이나 현대적 정령론(animism)으로 부활되었다. 생기론이나 정령론은 기계론의 병리적 현상들을 지적해내기는 했지만 그것에 지나쳐 사회 최면제적 역할을 수반하였다. 그것은 비율(ratio)로서 상징되는 기계의 이성주의에 반하여, 그 이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도피하는 안식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반기계론적 추세는 과학 단독의 문제영역으로만 보아서는 안되며, 사회학적 분석이 함께 따라야 한다.

세째 분석주의와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최근 과학일반의 조류는 과거 물리학주의가 과학을 지배했던 것과 달리 생물학주의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데카르트적인 생물학이 아니라, 생물학이 물리학 방법론과 다른 생물학 고유영역을 확보하려는 입장이다. 분명히 기존의 분석주의와 환원주의 방법론으로는 생명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그래서 기존 방법론의 한계가 지적되고, 단순히 지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강도높은 용도폐기론에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강한 비난은 전일론(holism)의 주장으로 이어지면서 전일론에 대한 평가가 아전인수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과학에서 말하는 전일론의 실체를 알아야만 한다. 그들의 전일론은 분석주의 혹은 환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고에너지 물리학이나 생명과학으로의 과학적 발전이 급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인식론적 (고전적) 환원주의가 갖는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존재의 양상을 올바르게 기술하기 위하여 기존의 방법론이 아닌 새로운 도구가 필요했으며, 그 새로운 도구가 마치 일반인들에게는 환원주의 파괴의 방법론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해수준에서 전일론을 받아들인다면 과학과 형이상학은 방법론에서 조차 구분이 안된다. 과학과 형이상학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서로 만나고 있고 또 만나야 하지만 일선 과학자의 입장에서 과학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여전히 인간언어 매체를 통한 기술학(descriptive science)이다. 간단히 말해서 첨단의 유전공학 연구의 성과기준은 여전히 환원적 연구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위의 세가지 문제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이야기할 내용은 그렇게 잘못 이해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의 문제이다.

첫째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면 사회적 접근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과학의 가치중립성을 말하는 외눈박이 시야이다. 특히 문명위기와 관련하여 과학을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사회와의 연계성이 논의되어야 한다. 인간학은 실천의 문제와 동떨어져서는 결국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의 현실과 과학의 희망을 분명하게 나누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의 유토피아가 현실의 과학을 지배해서는 현재의 인간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서구의 유토피아론은 근대 과학혁명의 사상적 정초이기도 하지만,이것이 사회적으로는 지금 조금만 참으면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전락될 위험성이 짙다. 그 ‘지금’을 항상 지금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과거 전제주의의 전략이었으며 오늘날도 상업자본주의 밑에 깔린 생각들이다. 실제로 현재도 많은 천민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개도국의 발전모델과 연관되고 있다.

세째 앞에서 말한 주술화된 생기론이나 현대화된 정령론이다. 나는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인간 소외문제와 직접 연관된다. 왜냐하면 둘 다 고도화된 산업화에 따른 필연적 산업사회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신흥 부흥종교, 밀교적 신비주의 집단, 기공에 대한 급속한 관심확대, 서구에서 동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동양에서 동양에 대한 허무한 자부심, 개인주의와 탈정치화가 가져 온 개인 서정주의의 확산 등이 바로 그 모순의 단편들이다.

고도의 산업화에 대한 분석을 단지 서구 합리성 혹은 이성주의의 물질적 소산물로서만 보면 안된다. 그렇다고 하면 산업사회의 탈정치성을 말하는 후기 산업사회라는 표현 혹은 효율과 극단적 합리성의 사회를 표현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가장 비합리적 요소인 주술성이나 신비주의가 자취를 감춰야 했다. 그러나 실제 사회현상에서는 주술성과 신비주의가 뒤끓고 있다. 오히려 후기 산업사회 혹은 정보화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최첨단의 과학과 최고의 비합리성인 신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신비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라기 보다는 결국 상업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되가는 신비주의 산업이 문제인 것이다. 신비주의 산업 일반은 겉으로 대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지만 결국 사회마취제적 기능에 봉사하고 만다. 신비주의 산업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삶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 이익집단의 목적달성을 위한 구호일 뿐이다. 예를 들어 개인의 보신주의로 전락된 생명주의 등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얼마나 깍아먹고 있는지를 잘 볼 필요가 있다. 개인 생명주의는 결국 자기 개인만을 위한 보신주의일 뿐이다. 그것이 설령 종교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정신적 위안일 뿐이다. 또한 그 현상은 한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업자본주의의 논리를 합리화시켜 주는 도구로 전락될 것이다.

<7> 기공, 음양, 풍수, 한의학 등의 장르와 “과학적” 이라는 기준 사이의 갈등
연세대학교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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