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신비의 두 날개
2003  발제 : “이성과 신비의 두 날개” 한국환경철학회 봄 발표회(2003년 2월 20일)

이성과 신비의 두 날개



<1> 인간이란? 우주 안에서 혹은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안에서 인간의 지위가 다른 존재에는 없는 고유성과 우월성을 지닌 것인지 아니면, 다른 존재와 연속적인 위치에 있는 것인가의 문제는 오랜 동안의 고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다. 동물의 땅과 신의 하늘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는 인간은 이제 그 스스로 이성과 욕망의 두 톱니바퀴 속에 엇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호모사피언스로 이어지는 진화의 역사 속에서 송곳니를 드러낸 원시 욕망은 침잠한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이성이 반드시 인류의 상식적인 행복으로 이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성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욕망의 역사는 끊임없이 인간의 자기 합리화를 재촉하였다. 이제 인간은 동물과 결별하고 신의 왕국을 모방한 제단祭壇 위에서 모두의 자연을 제물로 받쳤다. 그 이후 욕망을 숨겨 놓은 이성은 욕망으로 하여금 규범의 얼개를 뒤집어씌움으로써 원시 욕망은 동물에게만 있어야 한다는 그런 저주의 욕망이 되어 버렸다. 결국 인간에게서 그런 이성과 욕망은 곧 선악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이성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지나온 3000년 동안 이미 제물로 바쳐진 자연을 다시 되찾기에는 그 힘이 좀 벅찬 듯 하다. 특히 제국주의와 산업혁명 이후 따라 붙은 기계화, 산업화, 문명 위기, 인간 중심주의, 공동체 파괴, 소유의 권력, 자연과의 결별 등 갖가지 위협적인 구호가 지난 50년의 현대사에서 꽤나 넓게 회자되었으나 여전히 양의 껍질을 뒤집어 쓴 이성의 역사는 도도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결국 삶의 터전은 그 위기를 심각하게 맞게 되니, 이제서야 환경의 깃발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동물보호 운동이나 자연보호 운동이었지만 이제는 사회 개혁을 통한 환경문제 접근법이 많아졌다. 사회학자나 철학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환경위기의 역사적 혹은 사상적 배경과 원인분석을 이론적으로 시도하였고, 과학자들은 역사와 관계없이 기술의 개량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위기의 타개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그리 나쁠 것이야 없지만, 인간의 지위에 걸맞는 시늉만 내고 그친다면 문제 해결의 길은 당연히 막막해 질 것이다. 시늉이 아니라 심원의 인간적 고민이 그 안에 깔려 있어야만 인간의 노력은 허구의 질타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 심원의 인간적 고민의 첫째는 “나는 과연 누구이며 나의 욕망은 어디까지 뻗칠 것인가”라는 자신에 대한 질문이며, 둘째는 “나와 너의 관계, 나와 사회의 관계가 함께 하는 공동체를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이기적 생존을 우선할 것인가”에 대한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다.

어쩌면 이성과 욕망이 겉보기에 충돌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공존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공존의 관계라면 지금까지 공부한 서양철학을 다시 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전환했다는 서양철학사 입문에서부터 윤리학과 예술의 스펙트럼에까지 파이어아벤트의 도움을 받아 지나온 언어의 역사를 교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역사의 관성이 너무나 강하여 그렇게 쉽게 교정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현실의 역사는 너무나 시급한 발등의 불을 태우고 있어서 어떤 변화가 필요하기는 하다. 환경문제와 연관하여 이성과 욕망 혹은 이성과 신비가 어떻게 꼬여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실천철학의 제일과제라고 생각한다. 서로 얽혀 있는 이성과 신비의 두 날개를 풀어야만 겨우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문명비판? 신석기 시대 동굴벽화의 시기는 꽤나 길만큼 길어서 이성의 시대가 올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종교적 주술의 역사가 지나쳤는지 계몽의 시대는 중세를 뒤집고 나왔다. 이성의 철학이 할만큼 했는지 로맨티시즘이 왔나보다. 선진백가의 논쟁은 후한대 들어 신비주의 사상으로 바통이 이어지고, 인물성동이론의 합리주의 논쟁이 너무 길었는지 조선말 혹세무민의 주술이 횡행한 것 같다. 서구 합리주의의 자존심이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꾸겨지면서 포스트모더니티가 회자되었고, 60년대 문명비판 운동 중의 소수는 히피운동을 초과하여 신흥종교 세력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뉴턴 고전과학의 기계론과 결정론에 너무 식상한 나머지 신과학운동이라는 것이 생겼나 보다. 그런데 이런 신과학운동이나 문명 비판운동은 소외의 바다에 빠진 많은 현대인에게 힘과 희망을 어느 정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60년대 당시 미국의 생태학적인 흐름의 출발은 당연히 유럽의 문명비판론과 무관하지 않다. 서구 실증주의 꽃을 피운 유럽의 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와 통일과학의 힘이 지나치더니, 그 지나침을 스스로 반성하고 그 후에는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도 함께 제기되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중심으로 이성 절대주의와 서구중심적 문명론에 대한 강한 비판이 나왔다. 68 운동 이후, 서구 좌파운동과 문명비판론자들은 극단적인 좌파 행동주의자들과 생태주의자 그리고 신사회 운동주의자로 변모되어 갔다. 그들 중에서 일부 환경론자들은 녹색당을 규합하여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면서, 드디어 80년 대 들어 연방 국회 진입에 성공하였다. 프랑스에서도 60년대 말부터 “신학문”이라는 소수의 대중철학 선도자들이 나왔고, 포스트모더니티의 고향으로서 손색없는 이성 해체의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자체에서의 포스트모더니티 흐름은 운동이 아니었으며 프랑스 전통의 사상적 결집체일 뿐이었다. 오히려 프랑스 안에서는 포스모더니즘의 대중적 선동성과 유행성이 두드러진 적이 없었다. 어쨌든 유럽에서 문명비판론 혹은 이성비판론은 철저하게 이성적인 기준을 잃지 않고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20세기 후반은 신비주의 산업이 현대인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서서히 이성에서 주술로 옮겨가는 단초를 만들어 주었다.

오늘의 문명위기와 관련한 비판의 소리들을 잘 들어보면 서구 과학비판이나 산업화에 대한 비판, 근대화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서구이성에 대한 비판이 함께 뒤섞여있다. 그 비판의 무대에 올라오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데카르트처럼 약방의 감초 마냥 끼는 세계관으로서 주객분리에 대한 것, 혹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과학에서는 기계론적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형이상학에서는 결정론적 존재론에 대한 것이며, 방법론에서는 분석주의와 환원주의 혹은 연역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산업혁명 이후 산업화에 따른 인간소외의 문제, 혹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에 따른 자본축적의 과정에서 생긴 환경파괴의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이 뒤섞인 채 시나리오의 드라마는 매우 복잡해졌다.

그리고 무대 위에 올려진 시나리오가 관객의 입맛에 맞춰 너무 선정적으로 된 것이 더 문제이다. 지나친 선정성이란 문명의 현실과 문명의 희망이 혼재되어 있다는 내부적 요인에 기인한다. 문명의 유토피아가 현실의 문명을 지배하고 있다면 현재의 인간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서구의 유토피아론은 근대 서구사상사의 정초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역사 속에서 지금 조금만 참으면 밝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사탕발림으로 전락된 경우가 허다했다. 그 ‘지금’을 ‘항상 지금’으로 끌고 나가는 것이 과거 전제주의의 전략이었으며, 오늘날도 상업자본주의 밑에 깔린 생각들이다. 실제로 현재도 많은 천민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서는 개도국의 발전모델과 연관되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내부적으로 주술화된 생기론이나 현대화된 정령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한 것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인간 소외문제와 직접 연관된다. 왜냐하면 둘 다 고도화된 산업화에 따른 필연적 산업사회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신흥 부흥종교, 밀교적 신비주의 집단, 기공에 대한 급속한 관심확대, 서구에서 동양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동양 안에서 동양에 대한 허무한 자부심, 사회의식에 침투한 신자유주의로부터 촉발된 개인주의와 탈정치화 등의 개인 서정주의의 확산이 바로 그 모순의 단편들이다.

고도의 산업화에 대한 분석을 단지 서구 합리성 혹은 이성주의의 물질적 소산물로서만 보면 안 된다. 그렇다고 하면 산업사회의 탈정치성을 말하는 후기 산업사회라는 표현 혹은 효율과 극단적 합리성의 사회를 표명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가장 비합리적 요소인 주술성이나 신비주의가 자취를 감춰야 했다. 그러나 실제 사회현상에서는 주술성과 신비주의가 뒤끓고 있다. 오히려 후기 산업사회 혹은 정보화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은 최첨단의 과학과 최고의 비합리성인 신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신비주의 자체가 나쁜 것이기보다는 결국 상업주의의 하수인으로 전락되어 가는 신비주의 산업이 문제인 것이다. 신비주의 산업 일반은 겉으로 대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지만 결국 사회마취제적 기능에 봉사하고 만다. 신비주의 산업에서 말하는 공동체는 삶의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 이익집단의 목적달성을 위한 구호일 뿐이다. 개인의 보신주의로 전락된 생명주의 등이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얼마나 갉아먹고 있는지를 잘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텔레비젼 오락방송 프로그램의 40% 정도나 차지하는 건강프로그램이나 귀신, 영혼, 윤회 등과 같은 이상현상에 대한 호기심 차원의 프로그램 제작/방영은 만연된 개인보신주의와 사회적 주술주의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사회건강을 회피한 채 개인건강이나 신비주의 산업을 말하고만 있다면 끝없는 질병의 악순환만 거듭된다. 개인 생명주의는 자기 개인만을 위한 보신주의일 뿐이다. 그것이 설령 종교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정신적 위안일 뿐이다. 또한 그 현상은 한 개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업자본주의의 논리를 합리화시켜 주는 극우적인 도구로 전락될 것이다.

이렇게 국내에서는 이성비판 혹은 문명비판이 아니라, 우는 아이도 잠재웠던 군사독재와 무조건 ‘잘 살아보자’ 라는 경쟁논리에 지독하게 찌들어진 사람들의 마음에서 벗어나려는 돌파구로서 기이한 신비주의 산업이 끝없이 양산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신흥종교의 부흥, 보약이라면 지렁이도 잡아먹는 개인보신주의의 극치, 광신적 종말주의자들의 극성, 기에 대한 막연한 기대심리, 명상의 산업화, 카페 수보다도 더 많은 압구정동의 점집화(점치는 집), 등에서부터 최근의 로토 열풍과 직결하는 기이한 신비주의 현상을 더 이상 눈뜨고 보기 어렵게 됐다. 사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문제만은 아니며 자본화된 물질문명사회의 수순적 현상이지만, 국내 상황은 지나친 극단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치고 허망한 그런 마음을 달래 줄 사회수면제이며 이성마취제의 기이한 문화가 조성 돼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3> 신비주의? 이러한 국내의 전반적인 마취문화의 흐름은 다른 모습이기는 하지만 환경-생태 운동계에서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80년대 한살림 운동에서 발빠르게 신과학운동을 나름대로 소화했으며, 이는 생태중심주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최초의 현상일 수 있다. 이미 80년대부터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김지하 시인의 생명론을 통하여 사회참여운동에서부터 우주론적 수양론으로 전환하는 변화가 예고되었다. 초기의 생명주의 논의가 현실부정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후 변모된 생명론은 공동체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여전히 생명공동체를 지향하는 많은 시민단체 안에서 크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기계론적 사유에서 노정된 일방향적이고 중심주의적인 수직관계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서로를 모시는 마음을 지니는 수평적 관계로의 변화이다. 이런 변화는 우리 사회가 체현해야 할 실질적인 공동체운동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그랬듯이 정도를 지나쳤다는 데 있다. 인간성 회복을 위한 사회 프로그램들이 오히려 인간을 좀 먹는 신비주의 프로그램으로 도용 당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의 신비주의 프로그램은 산업사회에서 형성된 기계와 기술의 권력 중심에 의해 소외되어 가는 삶과 자연의 피폐를 막아 보려는 태도에서 출발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신비주의 프로그램이 보여준 문명적 대안들은 분명히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이유는 이론적이고 학술적인 관점에서만 문명비판과 이성비판을 해온 이론가들과 달리, 불안 속에서 대안을 희구하던 많은 현대인에게 행동과 실천의 강령과 정신적 희망이라는 책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신비주의 운동을 전체로 싸잡아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일보다는, 산업화된 신비주의의 심각해진 문제들을 실천적 비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좀 더 구체적인 현상을 말해보자.

지금 이 자리가 지식인들이 모인 환경철학회이지만 사실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조차 환경 문제는 그 동안 배부른 이야기로 치부되어 왔었다. 혹은 말로만 환경을 구호로 내세웠을 뿐, 그들의 지식구조에서 환경은 배제되어 있었다. 환경문제를 사회비판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공해문제연구소 시절부터 어쩌면 지금까지도 환경과 노동은 서로 상충되었으며, 사회개혁의 구조에서 환경은 언제나 제외되어 있었다. 그러나 과거 노동과 사회 운동의 현장을 뛰어 다녔던 대표적인 일선의 전사들이었던 김지하, 임수경, 박노해 등이 이제는 우주를 통찰하는 은둔의 철학자로 변모하였다. 이 사실은 북친이 내뱉은 심층 생태주의에 대한 혹독한 비판적 문맥과 상징적으로 맞닿아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80년대 학생운동하던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말한 노동문제와 연관하여 환경운동을 비하하거나, 혹은 넓은 의미의 생태운동에 참여하더라도 기공 등의 신비주의로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기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이용될 경우 바로 그런 점에서 북친의 경고는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생태적인 접두사가 붙은 것들의 일시적인 유행이 뿜어내는 악취가 도처에서 진동한다.” 라는 참으로 가시 돋친 북친의 비난이 듣기 거북하지만 아주 무시할 수도 없게 되었다.

현실적인 사회의 문제에서부터 인간 내면의 성찰로 그들의 관심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환경운동가에게는 점점 더 실천 행동의 나침바늘이 하나씩 상실되어 가는 것과 같은 반작용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환경문제에서만큼은 내면적 성찰이 중요하지만 그것에 그쳐서는 안되고, 더불어 실천행동의 약진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내면적 성찰이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발등에 떨어진 시급한 불은 그 불이 당겨진 원인을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장은 발등의 불을 우선 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철학적 명분과 당위성이 원천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는 내면적 성찰의 도도한 흐름 때문에 실천의 행동 장르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 정서적인 현실이다. 더 강하게 말한다면 내적 성찰로의 변모가 자기 개인만의 정서적 위안으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는 인간은 자연과의 관계를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삶의 양식이 크게 변화한다. 흔히 말하듯 자연을 단순히 물질의 창고로만 보아왔던 자본주의 맹아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 삶의 터전을 잿빛의 언덕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러한 잿빛 언덕에서 녹색의 빛을 찾아 나서는 일은 더 이상 이론적 사치나 자기위안의 임상적 사유에 그쳐서는 안되며, 너무나 당위적인 인류학적 소명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내면의 세계를 성찰하는 것은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렇듯 나는 신비주의 경향의 생태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내면적 성찰이 불필요하고 사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내면적 성찰을 핑계삼아 현실을 도외시하는 일을 문제삼을 뿐이다. 우리 현실사회 안에 신비주의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하면서, 그런 신비주의 실태를 인정해야만 비로소 생태주의 운동이 현실적으로 넓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런 갈등과 이중성을 나는 생태변증법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4> 생태변증법? 생태변증법에 대한 이론적 설명보다는 메타포를 이용한 설명을 해본다. 생태변증법이란 진자추의 메타포를 통해서 잘 설명된다. 줄에 매달린 진자추가 위치에너지가 최대일 때 밑으로 다시 떨어진다. 운동에너지는 다시 위치에너지로 변환하여 떨어지는 추는 중앙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반대 쪽 위로 올라간다. 그래서 다시 떨어지면 또 중앙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다시 올라간다. 이렇게 계속 진자운동을 하듯이 생태계나 자연의 운동, 그리고 사회적 현상들도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의 권력이 독주하면 그 반작용이 생겨서 이성을 정신차리게 하는 것은 좋으나 이것이 지나쳐 몰이성 혹은 신비주의, 더나가 주술성으로까지 나가게 되는 것이 사회의 관성이다. 결국 생태적으로 볼 때 문명사회든지 자연이든지 양 요소가 두 날개로 해서 움직인다고 여겨진다. 얽혀 있는 두 날개를 잘 풀어야만 날 수 있듯이, 인류의 문명사도 같다고 본다. 문명의 역사는 이성과 신비의 두 날개로 날고 있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생태변증법이다. 사실 이 표현은 이영희 선생이 말한 ‘좌우의 날개로 난다’라는 데에서 그 뜻과 말을 차용한 것이다. 어쨌든 이성과 신비는 항상 함께 한다는 점에서 자연이나 문명이나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 신비를 항상 바깥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신비는 따로 저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삶 자체가 신비함을 이미 갖고 있음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생태문제에서도 그 신비함을 밖이 아닌 안에서 찾는 노력을 한다면 사회생태학은 우주론적 수양론과 연관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하버마스나 북친이 비판하는 신비적 요소라고 본 심층생태주의나 사회생태주의는 그 차이가 중화될 수 있다. 신비를 안에서 찾는다는 일은 하다못해 배고픔을 신체적으로 ‘꼬록 꼬록’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인류의 가장 중요한 신비함이다. 그래서 점집에 가거나 괴이한 몬도가네 보신주의는 결국 신비를 밖에서 헤매 찾는 가짜 신비주의의 허상임을 직시해야 한다.

다시 말을 앞으로 당겨서 현실운동을 보자. 얼마 전에 새만금 살리기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김지하 시인과 김종철 교수 사이의 정면 대립이 있었다. 자아운동과 현실운동 사이의 강한 충돌이었다. 심층 생태주의와 사회 생태주의의 충돌로 여겨졌다. 그런데 사회적 접근의 환경운동 혹은 좁은 의미에서 사회생태주의는 뭔가를 부수자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문제이다. 단지 현실과 관행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행동의 사유원천의 의미로 사회생태주의를 받아들여야 할뿐이다. 예를 들어 민주화를 이미 이루어냈다고 하는 환상 속에서 실천의 사유원천이 점점 상실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우리의 현실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당분간은 사회생태주의가 근본생태주의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약진력이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사회생태주의와 근본생태주의는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스펙트럼 상에서 편재된 차이라고 간주한다. 문제는 한 생태주의자에게서 그것이 서로 혼재되어 생태주의적 사유가 철저히 개인화 되어진 신비주의로 전도되는 경우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는 영성생태론의 의미를 매우 중시하고 있지만, 영성생태론이 신비주의의 물결에 너무 쉽게 혼재될 우려가 큰 것이 우리 현실이기 때문에 영성/심층 생태론의 지배력은 곧 현실적 운동의 감각을 상실하고 마는 위험을 그 안에 품고 있을 수 있다. 우주와 생명을 논의하는 영성생태론과 근본생태론이 현실사회를 논의하는 사회생태론과 결별할 때, 허무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회생태론이 영성 혹은 근본생태론을 무시할 경우, 정치를 위한 정치 혹은 맹목적 운동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놓치면 안 된다. 결국은 둘이 만나야 한다. 예를 들어 추상적 생명 논의는 물론 중요하지만, 생명의 구호를 빙자하여 현실에 눈감고 있으면 시급한 문제 풀이가 아득해진다는 말이다. 이 문제는 생태/환경/생명에 관련한 운동조직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추상적인 철학을 그들의 운동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현실의 차원에서 동력 전환이 안 된다면, 멋있는 철학도 별 쓸모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환경철학이 여느 이론철학과 다른 결정적이 차이인 듯 하다. <끝>
한국환경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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