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골 정기공연, 김삿갓, 문화시평 |
2003 시평 : 모두골 정기공연, 김삿갓, 문화시평, 강원일보 4월 14일자 놀이패 <모두골> 공연 “김삿갓”을 보고 원주의 놀이패 <모두골>이 오랜만에 한 판을 벌렸다. 광주에서, 서울에서, 강화도에서, 청주에서, 춘천에서 산하의 땅을 춤과 소리로 어루러 돌아다니다가 정말 오랜만에 원주에 돌아와 마당극 한 판을 놀았다. 마당극은 마당극인데 아쉽게도 치악 예술관이라는 무대에서 놀았으니 그 감흥이 제대로 전달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우리의 깊은 한恨과 멋드러진 풍자가 모두골의 소리와 몸짓 안에 녹아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대규모 자본으로 만들어진 미국식의 뮤지컬 국내 공연이 흥행을 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소리와 몸짓이 사람들의 놀이 감각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의 소리를 담은 소박한 놀이패들의 설 땅이 좁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70년대 민중들의 애환을 민속극 장르로 보여준 탈춤의 부활과 80년대 독재정권의 서슬을 풍자로 담아낸 마당극의 용기는 이제 <한두레>나 <모두골>과 같은 몇몇 놀이패에 의해서만 겨우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모 방송사에서 주관하는 마당극 형식과 대학생 그룹에서 하는 문화선전대가 그 시늉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는 너무 지나친 상업주의 문화산업으로 빠졌으며, 다른 하나는 유희의 전문성에서 많이 뒤쳐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모두골>의 이번 공연은 비록 규모가 작은 지역행사이지만 매우 뜻깊은 기획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제 <모두골> 역시 문화의 시대적 변화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번 놀이 중에서 가수 <싸이>의 ‘챔피언’ 가락에 맞추어 황소 한 마리가 춤을 출 때 갑자기 열광하는 여고생 관객들의 마음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그 속뜻이 같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놀이 문화에서 나타나는 전통과 현대의 갈등을 이제는 민중 놀이패들도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미 70년대부터 격론되어 왔었다. 가야금과 기타가, 탈춤과 재즈댄스가, 그리고 판소리와 성악이 함께 연회되는 그런 퓨젼 장르의 연희방식이 그 해결의 전부는 아니다. 이제는 전통이 현대를 재창조해낼 수 있어야 한다. 거창하게 말하지 말고 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해보자. 이번 놀이 중에 나오는 춤사위의 기본은 봉산탈춤이나 양주별산대 혹은 오광대 춤사위에서 벗어나 있지를 못했다. 기존의 어떤 춤사위나 소리 하나 하나를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춤의 기본인 어깨춤과 소리의 기본인 내침과 들이침의 흥이 들어가 있다면 어떤 춤사위나 소리라도 전통에서 결코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은 얼마나 관객의 흥을 돋구어 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 특히 마당극 형식의 놀이에서는 더욱 중요한 생명과도 같은 과제이다. 흥을 돋우는 요인은 볼거리의 제공이며, 다른 하나는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극화된 메시지이다. 이번 공연과 같은 소규모 연희는 볼거리라는 측면에서 원래부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화려한 공연무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음식상 음식을 관객에게 던지는 퍼포먼스나 관객석에서부터 등장하는 구성방식만으로는 이제 관객의 볼거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이왕 무대 위로 올라간 마당극일 바에야 영상 배경화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면 큰 돈 들이지 않고도 볼거리를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극화된 메시지 전달은 최대한 자연스러워야 하며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오히려 이번 공연기획은 이 점에서 훌륭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연희자의 수가 배역의 수를 따르지 못하여, 메시지 전달의 감동이 좀 줄었을 뿐이다. 지방 사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지방에는 볼 만한 문화가 없다고 한다. 이런 불평을 지역의 극단이나 배우에게만 할 것이 아니라 관련 지방공무원들의 지역문화에 대한 의식의 부재를 강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 역시 문화 공연장을 꽉 채우는 관객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화의 고집을 버리지 않는 굳굳한 <모두골>의 열정에 힘찬 격려를 보낸다. 최종덕(상지대 교수, 철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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