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독일 근현대 철학의 수용
한철연 심포지움 5월31일

<원전의 번역과 이해>

논평 : 독일 근현대 철학의 수용



이번 학술대회 주제의 한 개념 축인 ‘근대’의 의미와 이 논문에서 발하는 ‘근대’의 의미는 사뭇 다른 것 같다. 보통 학술적 논쟁에서 나타나는 ‘근대’ 개념은 모더니티-포스트모더니티의 장르에서 말해지기도 하고 혹은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비롯된 탈식민지론의 장르에서 말해지기도 한다. 원래 전자나 후자나 유럽에서는 같은 장르의 논쟁적 지평에서 논의되고 있지만 한국은 식민지 역사를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그 두 논의가 나뉘어져 논의되고 있다. 이 대회 전체 주제에서 논의하는 근대는 아마 후자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근대를 말하든지 관계없이 이 논문에서 말하는 ‘근대’의 의미는 이번 학술대회 전체 주제의 한 개념 축인 ‘근대’의 개념과 딱 맞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당연할지 모르겠다. 시대 구분상의 근대와 문명사적 의미의 근대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풍부한 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독일 근현대 철학 연구사를 훌륭하게 정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명사적 해석이 결여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해석의 내용이란 본 연구사의 흐름이 우리의 근대성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물론 필자는 논문 뒷부분에서 일본어 중역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그 문제를 약간 다루었다. 나는 학부 시절 철학개론 교재 한 권을 사서 나름대로 읽어보았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좀 커서 다시 보니 그 책은 95% 이상이 일본의 철학개론 책을 베낀 것이었다. 그 당시는 근대의 개념이 무엇인지 잘 몰랐었으나, 어쨌든 우리의 근대는 아직 멀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조금은 원색적인 표현이지만 베낀 것을 숨기고 창작된 연구결과라고 할 경우 우리는 근대 문턱도 갈 수 없지만, 원전을 밝히면 그나마 근대로 가는 진보의 한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을 읽어가면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 맑스 철학 연구성과가 꽤나 되는데, 이 연구성과가 우리 자신의 고민을 담고 있었던 성과물인지 아니면 일본의 고민을 담고 있었던 성과물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다른 철학 주제인 경우, 이 문제를 굳이 따질 필요가 별로 없다. 그러나 1945년 이전에 연구된 맑스 철학은 그것이 사회적 실천철학이라는 막중한 과제를 지녔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근대화의 주체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질문에 직결된다. 예를 들어 신흥 6호(1932)에는 조선에서 외국 번안 연극이 올려진 것에 대하여 퇴폐적인 부르주아 연극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혁명적인 프로레타리아 연극을 수행한 일본 사례들을 칭찬 내지는 흠모하고 있다. 다른 맑스 연구성과물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철학사 연구를 분석하다보면, 정치경치학에서, 경제사학에서 혹은 80년대 사구체 논쟁에서 논의되었던 논쟁들이 다시 재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늦었지만 이 분야에서도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과제가 아마 이 학술대회 주제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유럽 사상을 소개하면서 칸트와 원효를 비교하는 일과 같은 비교학 관점의 발생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본다. 문제는 오히려 그러한 비교학의 입장은 아주 소수였다는 점이다. 우리의 유럽학 소개는 철저히 전통과 단절된 채 발흥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나의 시각이 혹시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준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추후에 철저한 논쟁을 거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조사한 연구물 목록 자료에 등재된 작품들이 현존하는지를 알고 싶다. 그리고 개인이 소장한 자료에 대한 추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노력까지 필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개인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 주제의 중요성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다시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이차 년도 과제에 대한 필자의 언급이 있었지만 정말 큰 기대를 하고 싶다.
한철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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